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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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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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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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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149화...5-(ED)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60.(E)

“일단은 휴식부터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빌헬름텔은 주위를 에워싼 성기사들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루시엔도 맞장구 쳤다.

“저들에게 붙들리면 조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이들의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신성왕국에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때까지 위즈를 구금할 것이다.

자국 땅에서 마물이 돌아다니는 흉흉한 시기에, 엄청난 마력이 사용되었다.

그 결과 지각이 깨어져나가 용암까지 차올랐는데, 그런 곳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있다면 붙들 수밖에 없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

하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레미라 마법사도 용의선상에 포함되어 있다. 함께 움직인 위즈도 마찬가지.

만약 혼자 빠져버리면 레미라 마법사들만 곤란해진다. 도망치지 않고 기다려준 이들에게 지킬 의리 때문에라도 남아야 했다.

“괜찮아요. 전 잘못한 것 없어요. 떳떳하니까.”

사실 이 모든 일은 지하에 있는 포탈이 가동되는 바람에 생겨난 일. 위즈는 여기에 휩쓸린 것뿐이다.

그리고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여기 있는 자들 중에, 위즈가 어떤 귀찮은 일에 휩쓸렸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위즈는 무능력자. 레벨도 낮으며 이곳에 연고도 없다.

이 폐허 역시 처음 와보는 곳이다.

무엇보다 위즈의 신분. 크레센토 왕국에서 내어준 증명서는, 교역허가증이었지만 단순히 한두 나라에만 통용되는 게 아니었다. 크레센토 왕국과 교분이 있는 나라라면 어디라도 오갈 수 있다. 게다가 그 기한에 제한도 없다. 사실상의 프리패스. 그런 문서를 지닌 자가 범죄자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신성왕국 바하에 오기 전의 행적도 드러나 있다. 레미라 마법사들을 통해 모든 게 증명되었다.

위즈의 신분은 깨끗하다.

원리원칙을 따리는 고리타분한 집단인 성기사들이 이런 기초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구금이라 해도 거칠게 다루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위즈는 마음 편하게 협조하기로 했다.

“그건 알지만 지금 몸 상태가 최악이잖아요. 조사야 나중에라도 받을 수 있는 건데…….”

“괜찮아요. 정신력이라면 저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니까.”

“하지만……지금 이지님의 몸. 노이즈가 너무 많이 껴 있어요.”

그 말에 위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엔의 말대로다. 전파방해로 송신이 차단된 화면처럼 지지직거리며 피부색의 일부에 하얀 줄과 검은 줄이 층을 이루며 물결치고 있었다.

“이쯤이야.”

위즈는 정신을 집중했다. 강제 로그아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피로를 억제했다. 또한 앞으로 전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옵션창을 열어 통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센서를 아예 꺼버렸다. 그럼에도 노이즈는 쉬이 줄어들지 않았다. 위즈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루시엔이 노이즈 낀 팔을 매만졌다.

“긴급조치 한 거 맞아요?”

“이상하네요.”

“모든 감각센서를 껐는데도 이렇다면 문제가 있는데요? 혹시 외적인 요인이 있는 것 아닐까요?”

“게임기에는 이상 없어요. 최근에 산 것이고, 구입 전에 테스트도 했으니까요.”

“그럼 평소 잠이 부족했다거나?”

“아뇨. 그렇진 않아요. 오늘 하루 무리 했다고 이렇게 될 리는 없는데.”

잠자코 있던 빌헬름텔이 끼어들었다.

“혹시 드시는 약이 있습니까?”

“그런 건 없……아! 그러고 보니 잠이 잘 안와서 수면제를 먹었네요. 재접속하기 전이니까……3~4시간 전인 것 같네요.”

그 말을 들은 빌헬름텔과 루시엔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면제를 먹고 게임을?”

“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했을 거예요.”

두 사람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위즈는 그렇게나 잘못된 일인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다. 마약이나 술도 아니고 처방받은 수면제를 섭취한 것뿐이다.

수면제는 인간의 수면활동을 돕는 약제.

과용한 것도 아니고 딱 정량만 섭취했으며, 실제 게임을 하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즉시 강제로그 아웃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면제를 먹고 가상현실게임을 하는 게 문제가 된다면, 경고 문구에 포함되어 있을 게 아닌가.

‘하지만 없었지. 어디에도.’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뭐가 어떻게 잘못된 일인지 알지 못했으나, 분명한 건 빌헬름텔과 루시엔의 반응이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면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어찌되었건 자신과 관련된 일.

이유를 묻는 위즈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묻어 나왔다.

“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수면제도 약이긴 하지만, 크게 위험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빌헬름텔이 물었다.

“수면유도제입니까, 아니면 그냥 수면제입니까?”

“수면제죠.”

“야단났군.”

빌헬름텔이 고개를 저었고, 루시엔도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다. 위즈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게임 속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네요.”

빌헬름텔은 물론 루시엔까지 딱 잘라 아니라 한다.

“그럼 미쳐서…….”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캐릭터에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확정이 아니군요?”

“그렇지만 무시할만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몸이나 정신적인 부분에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위즈는 아무래도 좋았다. 몸만 멀쩡하다면 누나를 찾는 다른 방법들을 시도할 수도 있다.

설사 캐릭터가 잘못되어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아이린을 레미라로 데려가지 못할 테니 퀘스트 실패가 뜰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더 오션의 모든 학자계열 NPC들에게 들볶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캐릭터가 잘못 되었네 어쨌네 하는 이야기는 크게 위기감을 주지 못했다.

어차피 캐릭터야 같은 계정에서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 그렇게 생성된 캐릭터가 위즈와 동일인인지 NPC들이 알아낼 방법은 없다.

즉 캐릭터를 다시 키워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겠지만, 결국 그 수준의 애로사항이 전부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한결 편해진 얼굴로 빌헬름텔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로 접속하면서 술과 약물의 섭취는 피해야만 할 일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까?”

“더 오션 말고도 다른 게임은 해보았습니다. 모를 리 없지요.”

“가상현실로의 접속은 곧, 기계와 동조하는 겁니다. 기계는 정해진 규격이 있어요. 따라서 이에 맞게 의식을 컨버트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과정은 암시와 최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오션의 터미널 규격이 3,794tt라면, 유저의 의식은 이 규격에 맞아야 합니다. 이때 규격과 오차는 ± 50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접속 상태나 유저의 감정기복 등등의 요소를 감안한 것이로군요.”

“네. 그런데 술이나 마약은 이 과정을 왜곡 시킵니다. 그 결과 터미널 규격과의 차이가 50 이상 벌어지게 됩니다. 수백에서 수천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접속을 시도해도 실패하게 됩니다. 설사 운 좋게 규격에 맞출 수 있어 접속에 성공하더라도, 약간의 감정 고양만으로도 수치가 크게 변동되어 강제로그아웃 당하고 맙니다. 여기까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기본 원리에 해당하니까요.”

“그런데 수면제는 터미널 규격이 아닌, 퍼스널 데이터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캐릭터 정보 그 자체에 말입니까? 그런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애초에 인체에 스며든 화학물질이 데이터에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지요. 위즈님은 게임에 접속할 때, 매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건 위조 가능한 것이잖아요. 위험하게 왜 그런 걸 쓰겠어요? 그냥 차고 있는 암릿을 사용해야지. 빌헬름텔님은 아직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사용하시나요?”

“저 역시 암릿을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르진 않을 겁니다. 왜겠습니까. 별도의 정보 입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암릿에 모든 게 담겨 있으니까.”

“개인 신상과 생체정보!"

“그렇습니다. 게임 속 캐릭터는 암릿의 데이터에 바탕을 둡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정보는 마도로스 社의 서버에 저장되어 있을 텐데요?”

“알고 계신대로 서버 이외의 곳에 저장되어 있진 않습니다. 캐릭터 정보 뿐 아니라 모든 관련 데이터가 말입니다.”

“그럼 방금 얘기는 뭔가요. 저는 해킹 같은 걸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퍼스널 데이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 않았나요.”

“그거야 수면제를 복용한 유저에 한해서입니다.”

“서버속의 데이터에 덮어쓰기(Rewrite)한다는 뜻입니까?”

“덮어쓰기(Rewrite)와 변조(variation)는 전혀 다릅니다.”

위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무플라주로 길게 늘인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찰랑거렸다. 프로그램을 만질 줄 아는 사람으로서도, 쉽게 이해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원본 데이터와 오차가 생긴 시점에서,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위즈가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자, 빌헬름텔은 둘의 차이를 설명했다.

“유저는 물론이거니와 마도로스 社에서도, 게임 정보를 마음대로 주물러대지 못합니다. 단지 게임이라 무시하기엔 너무도 많은 권리가 걸려 있지 않습니까. 게임 속의 돈이 현실의 화폐로 거래되며, 게임 속의 부동산으로 투기까지 합니다. 좋은 무기를 구하고 강한 캐릭터를 육성하는 일은, 당연히 부의 축적과 직결됩니다. 그런데 단지 게임 데이터라고 하찮게 여긴 게임 회사가 멋대로 데이터를 덮어쓸 수 있다면, 그들은 법정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라는 판결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덮어쓰기는 아닙니다. 그런 방법이 불가하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램을 짤 겁니다.”

“그건……그렇군요. 덮어씌운 게 아니라면, 프로그램상의 오류 때문에 데이터가 변조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럼 변조된 데이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대로 둘 수 없을 텐데.”

“다른 데이터는 잘 모르겠지만, 캐릭터의 경우라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빌헬름텔의 말에 따르면, 마도로스 社가 주도적으로 대처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법에 묶여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유저의 신고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지 않으면, 캐릭터의 데이터를 함부로 소거시키지 못한다. 여기서 NPC에게 처형당하는 경우는 예외로 빠진다. 게임 속의 데이터가 자산이 되는 세상에서, 게임 속에서 저지른 범죄는 당연히 그에 상당한 처벌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저의 신고를 받은 마도로스 社는, 문제가 생긴 캐릭터 A의 정보를 똑같이 모방 후 문제를 수정한다.

이후 복사 수정된 캐릭터 B가 생성되면, 유저는 문제가 생긴 캐릭터 A를 삭제한다.

삭제가 승인되면 소지한 장비와 돈, 부동산, 부여받은 퀘스트까지도 모두 캐릭터 B에게 귀속된다.

고치긴 고치는데, 복사 후 고치는데다가. 문제가 된 캐릭터는 유저의 판단 하에 삭제하도록 유도.

결국 법이 개입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빌헬름텔님은 마도로스 社에 찾아가서 말해보라는 이야기로군요?”

“보통은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수면제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의 변조는, 마도로스 社에서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아니, 알아차려도 대응하기 힘들 겁니다.”

“어떻게 게임을 만든 사람들이 모를 수가 있죠? 그리고 문제를 알고도 가만있을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나 들어보죠.”

“과거의 프로그래밍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만 잘못되어도 이상이 생기거나 심하면 전체 기능이 마비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지요.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의 기능만이 구동되지 않을 뿐, 부분 결함이 전체 기능을 좌지우지 하지 않도록 된지 오래입니다.”

현실세계에서 과거 단말기 데이터를 복원시키며 돈을 벌었기에 위즈-편재는 누구보다도 빌헬름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았다. 라엘리언 테크놀러지를 쥐어짜낸 결과, 문명의 발달은 가속화 되었다. 기계의 경우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역시 함께 발달했는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알고리즘을 차용한 코딩이 바로 그것이었다. 현대 사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바로 여기에 기초를 둔다.

수세대를 거쳐 발달해온 코딩기법은, 수없이 개량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상 결점은 없다. 그걸 알기에 위즈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라엘리언 코드의 특징대로라면, 오히려 가상현실 관련 프로그램에서 생긴 문제의 수정이 더 빠르고 수월할 텐데요. 원래 그건 가상현실을 위한 기술로 알려져 있지 않나요?”

“그건 맞습니다. 다만, 라엘리언 코드로 짠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상호보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게 문제입니다. 잘못된 부분이 생긴 즉시, 프로그램 상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생각한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가상현실에 동조된 상태에서 수면제의 약성에 의한 램(REM)수면 시 발생된 뇌파는, 그 자체로 라엘리언 코드와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근거가 있을 테지요?”

“일단 게임회사와 연락을 해서 앞서 말한 방식대로 복사된 캐릭터를 만든 뒤, 문제의 원본 캐릭터를 지워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제를 먹고 보스몹과 전투를 벌인 사람의 경우엔, 해당 개체와 시각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유저가 일방적으로 컨트롤 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퍼스널 데이터는 하위분류에 속하기 때문일 테지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죠? 캐릭터를 삭제?”

“다행이도 그 개체가 쓰러진 직후엔 원상복귀 되었다고는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캐릭터의 데이터와 이종의 데이터가 서로 얽혀 컨트롤이 안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이종의 데이터가……비파괴 오브젝트로 설정된 건물이나, 까마득히 먼 훗날에나 상대해야 할 강한 몬스터라면요?”

“……해당 캐릭터는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어쩌면 위즈님도 그렇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몸으로 전투를 벌이셨다 하니, 능력이나 스킬의 일부가 다른 것에 전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딱히 이상을 못 느끼는데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저 지금만 괜찮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모의전투 같은 걸로 점검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라, 위즈님 지금 웃고 계시는 겁니까? 역시 안면에 문제가?”

빌헬름텔이 걱정스레 말을 건넸지만, 지금 웃고 있는 건 순수한 위즈의 의지.

즐거워서가 아니라, 허탈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해서이다.

솔직히 위즈라는 캐릭터를 육성해오면서 위즈는 고민이 많았다.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대신, 모든 직업의 장점만을 흡수하여 모든 상황에 대응하고 아군에 힘을 실어주는 서포터.

단지 치료나 버프만 걸어주는 게 아닌, 수시로 ‘롤 스위칭’이 가능한 전천후 만능 캐릭터를 키운다는 건, 달리 말해 이도 저도 아닌 잡캐를 키운 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스킬을 훔쳐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만 읽어 집중력만 올리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즈는 공격능력에 많이 치중된 모습을 보인다. 사실상 공격군이지 서포터가 아니다.

‘단지 캐릭터의 정체성 문제뿐이면 그래도 괜찮지. 문제는 이 위즈라는 캐릭터가 축캐도 보통 축캐가 아니라는 점이야.’

핏스톤과 Witch를 만났으며, 크레센토를 지배하는 미노클 왕가를 우군으로 얻었다. 또한 시에니투스의 무법자들과도 빚을 지워두었으니, 적어도 한 번은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아쿠에리언과 연계된 퀘스트를 통해 적잖은 선물을 받았다. 이렇게 모인 스킬과 아이템 인맥들은 하나같이 범상한 게 아니다.

직업조차 선택하지 않았으니 빈말로도 캐릭터의 성능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성장과정은 그야말로 왕도에 왕도만 밟아 온 것과 마찬가지.

마도로스 社에서 이미 자신을 주목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시시각각 목이 조여드는 느낌이다.

‘파이오니어 빌딩이 해킹 당하는 걸 막기 위해 마도로스 社의 서버를 더미로 쓴 범죄자가 바로 나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튀는 플레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그럼에도 위즈를 키워온 한 달의 시간이 아까워 미련을 가졌지만, 빌헬름텔이 말한 것처럼 캐릭터 데이터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면. 더 이상 고집부릴 수도 없다.

그렇기에 빌헬름텔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캐릭터의 데이터 변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버리게 되는 것이니까.

워낙이 위즈라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이젠 캐릭터에 미련을 버리는 단계까지 온 상태.

위즈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긴 웃음을 지웠다.

“레미라로 가는 배안에서 시간 죽이기 딱 좋겠네요. 일단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두죠. 우리끼리 쑥덕거리는 게 못마땅한지, 성기사 아저씨들 얼굴이 굳어 있네요.”

위즈는 말을 돌렸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하는 일은, 폐허의 지하에서 벌어진 폭발에 대한 뒤처리다. 여기서 잘못 대응했다간, 신성왕국이 바하르칼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지 모른다.

바하르칼 용병단이 밉긴 했지만, 더 오션의 유저 15%가 속한 단체다.

이들도 유저인 이상 메인 퀘스트를 깨려고 할 것이고, 그것은 곧 현실에서의 폐쇄구역으로 진입로가 열리는 것과 같다. 즉, 위즈 입장에서는 똑같은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더 이상의 긴장관계는 위즈도 원치 않았다.

“조금 전 캐릭터의 얼굴이 멋대로 움직여서 웃질 않았습니까. 만약 성기사들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도망칠 수도 없게 될지 모릅니다.”

사시 그런 게 아니었지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 위즈는 간단한 몇 마디를 해주었다.

“도망쳐버리면 없던 죄도 생겨나겠지요.”

위즈는 일행들을 향해 밝게 웃어주었다.

“그러니 잠은 나중에 자도록 하죠. 조사 받는 동안엔 취조에만 응해야 할 테니 다른 일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빌헬름텔님, 제가 조사받는 동안 마도로스 社에서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 살펴봐주세요.”

“이번 일에 마도로스 社가 관여되어 있는 겁니까?”

“관여되어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이번 일에 관여할 것 같으니까요.”

“그렇겠지요. 워낙 정신없이 터진 일이었으니. 뒷수습이라도 해야겠지요.”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전적으로 ‘리퍼’때문이었지만, 떳떳이 드러낼 일은 아니라 이정도로만 해두었다.

“저는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루시엔의 물음에 위즈는 목소리를 낮췄다.

“DK관련 좌표에 대해 조사 부탁드립니다. 성직자는 원래 그런 정보에 밝겠죠?”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짓던 루시엔은 곧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쪽 관련 자료야 평소에도 수집해두고는 있었으니까 문제없겠네요.”

위즈는 일행들로부터 떨어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성기사 무리들도 마주 걸어오고 있다.

큼직한 코를 가진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방인 W. 조사에 응해주어야겠다.”

그러면서 들어 올리는 건, 흔히 포승이라 불리는 매듭지어진 밧줄.

위즈는 말없이 양 손을 들어올렸다. 도주방지를 이유로 묶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놔두면 된다.

내심 찔리는 게 있어서다.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빙글뱅글의 방패.

지금 빙글뱅글은 리퍼가 만든 공간에 들어가 있는데, 그 통로로 삼은 게 방패다.

방패를 안전한 곳에서 꺼내주는 게 리퍼에게 받은 명령.

따라서 빙글뱅글의 도주를 도운 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


“지금 제정신인가?”

분노한 자의 답에 똑같은 분노가 실렸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분노와 분노가 만났지만, 폭력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 간에 차오르는 짜증만을 확인했을 뿐.

“어째서 명령에 불복하는가?”

“명령 같지도 않은 명령에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건 여론을 수렴해 내려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같은 인간에게 존댓말을 썼나? 우리는 성기사다. 우리는 신을 섬긴다!”

성기사다운 당연한 논리에 상대는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상대 역시 성기사였기에 나오는 반응이다. 하지만 곧 반박이 이어졌다.

“누가 신을 섬기지 말라 했나. 이때는 좀 더 융통성을 발휘하라는 얘기다.”

“정치 이야긴가? 하계(下界)의 소꿉장난에 어울려 신격을 깎아내리란 말인가!”

두 성기사의 다툼은 쉽게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 모습을 지켜본 성직자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중얼거릴까.

“모루랑 모루가 부딪치니 아주 불똥이 튀네그려.”

보다 못한 이단심문관이 둘을 떼어놓았다.

“교황들에게서 내려진 명령은 하나다. W에게 예를 갖춰 대할 것. 그가 이런 일을 꾸민 자라면 그때 가서 뜻을 관철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지체되었다. 타국의 전령들도 모습을 드러내, 당당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외부인 앞에서 내홍을 보일 셈인가?”

그 말대로 각국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당당히 통행증을 들고 서있다. 그들은 밤새 이곳을 지나간 스컬그레일 일행을 지켜보았으며, 이곳의 지하에서 터져 나온 마력의 폭발까지 알고 있다.

정치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게 성기사. 그렇다고 타국에 얕잡혀 보여도 좋을 리 없다.

결국 원칙주의자 성기사는 한발 물러섰다.

“난 그대들의 논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으니 뒤로 물러나 있겠다.”

성기사들의 뻣뻣함이 불러일으킨 사태는 이렇게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그걸 바로 앞에서 지켜본 위즈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모든 건 위즈를 연행하려던 성기사가 밧줄을 들이민 것에서 시작되었다.

묶는 이유는 도주방지.

괜히 저항해봐야 일만 복잡해질 걸 잘 알기에 위즈는 협조적으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위즈는 얌전히 손을 내밀었는데, 다른 성기사가 만류하는 것이었다.

교황들의 명령대로 거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유다.

이 같은 명령이 내려진 건, 위즈가 발견한 ‘약초 재처리를 통한 약성 강화법’때문이었다.

독점했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 비법이었지만 위즈는 공개해버렸다. 그것도 발견 즉시.

약초 부족과 마족의 등장으로 흉흉한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신성왕국의 치안에 문제가 생겨 발생한 혼란은, 다른 국가로도 전파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돈을 벌어봐야 소용없다. 아직 서비스한지 1년도 되지 않은 더 오션의 세계가 곧장 전란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메인 스트림에 도전하기보다, 전투 이벤트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건 위즈가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위즈는 독점하지 않고 공개를 택했다.

명리를 초월해 이루어진 빠른 결단은 신성왕국을 찾은 병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신성왕국 내에 W라는 이방인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교황들 입장에선 마물의 침입을 막고, 약초파동을 막아낸 의인(義人)을 대우해주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바하의 정체성인 신성왕국의 이미지에 부합했으니까.

하지만 교황들은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꽉 막힌 원리원칙주의자인 성기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가 조금 전의 논쟁. 짧게 끝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가 똑똑히 지켜보았다. 특히 바로 코앞에서 들었던 위즈는 입맛이 썼다. 현실세계의 지구 역사에서도 세속화된 성직자와 원리주의 성직자의 다툼은 피를 부를 만큼 심각한 문제다. 바하의 성기사들 역시 그런 전철을 밟고 있었다. 당장은 불씨가 잠재워졌지만, 오늘의 일은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국가적 측면에서는 불발탄이 심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위즈의 탓이 아니다.

비속과 세속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종교의 운명이다.

타락과 자정을 거쳐 쇠락과 번영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생겨난 유산으로 후세에 평가 받는 역사로 화하는 것이다.

이는 재정일치의 국가라면 언젠가 터질 문제다. 하지만 그 시발점이 된 것은 결국 자신의 처우문제다.

자연히 위즈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선의로 베푼 일이 이렇게나 은근한 악의로 돌아올 줄은 진짜 몰랐으니까.

이단심문관이 준비된 막사로 위즈를 안내했다.

“이방인이여. 조사에 성실히 응한다면, 부당한 일을 겪지는 않을 거요.”


◇◇◇◇◇◈◇◇◇◇◇◇◈◇◇◇◇◇◇◈◇◇◇◇◇


옅게 깔린 안개가 바닥을 흐르고, 철벅이는 진흙바닥에서는 물 냄새가 올라오는 곳.

30미터밖에 안 되는 좁은 땅 주변은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

그곳에 모인 세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첫 번째 인물은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덩치 큰 남자였는데, 한쪽 팔이 날아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은 쇠사슬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소리 내어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위즈의 도움으로 몸을 숨긴 빙그뱅글이었다.

두 번째 인물은 거울 속에 가끔 모습을 내비치는 검은색 옷을 입은 성직자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즉, 이 사람은 이단심문이었다. 그 역시 쇠사슬에 감겨 있었지만, 빙글뱅글보다는 나았다. 쇠사슬은 그의 다리에만 감겨있었던 것이다. 그는‘잘려진 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공간단절이로군.”

잘려진 팔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으로, 첫 번째 인물-빙글뱅글의 것이었다.

마지막 인물은 늑대머리 투구를 쓰고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사내. 리퍼였다.

“붙일 수 있겠나?”

그의 물음에 이단심문관은 팔을 낭떠러지 너머로 던져버리는 동작을 취했다.

“불가능할 리 없지. 다만, 내가 이 범죄자의 팔을 붙여줘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버리진 않았군.”

이단심문관은 아직 잘려진 팔뚝을 들고 있었다.

“이유가 있다면 붙여줘야만 하니까.”

“좋아. 일단 이자는 네크로맨서가 아니다.”

이단심문관이 피식 웃었다. 석고가면처럼 차가운 얼굴은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일단 웃음이 머금어지자 입가엔 보기 좋은 호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웃고 있는 건 입뿐으로, 눈이며 광대……그리고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단심문관을 상대로 그런 거짓말이 통하리라 생각했나?”

“물론 믿기 힘들겠지. 그러니 다시 확인할 기회를 주겠다.”

그러면서 빙글뱅글은 손아귀에 쥐고 있던 쇠사슬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다리를 휘감은 쇠사슬이 헐거워지자, 이단심문관은 빙글뱅글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신의 권능으로 즉결처분을 내릴 생각인지 두 손 가득 신성력이 가득 머금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신성력은 곧 흩어져버렸다.

“뭐지?”

이단심문관의 눈길이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멱살 잡혀 들어올려졌음에도 빙글뱅글은 두려워하기는 커녕 싱글벙글 웃었다.

“글쎄? 난 댁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전혀 모르겠는데에~?”

“분명히 네놈은 네크로맨시를 익혔다. 내 앞에서 악령을 소환했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마왕의 하급 추종자인 다크 스토커까지 불러냈다. 마왕의 가호를 받지 않는 자가 그럴 수 없다!”

“그 말인즉슨, 지금의 난 마왕의 가호를 못 받고 있다는 뜻이로군? 그럼 잘 알겠네? 난 네크로맨서가 아냐.”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이젠 내 팔뚝이나 붙여주지 그래?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지금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당신 이단심문관이잖아. 이단심문관도 성직자니까, 이런 외상치료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 아냐.”

“네, 네 녀석…….”

“설마 네크로맨서가 아니라고 밝혀진 시점에서, 날 죄인 취급하고 치료를 거부하진 않을 테지? 성·직·자 양반?”

한동안 분을 참지 못하던 이단심문관은 다시 평소의 무표정을 회복했다.

“내가 너무 물렀던 것 같군. 좋다. 지금의 넌 네크로맨서가 아니니 일단은 치료해 주겠다. 하지만……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네이~네이~쇤네도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요.”

“…….”

이단심문관은 단숨에 빙글뱅글의 팔을 붙여주었다. 신성력을 그렇게 많이 쏟지 않았음에도, 잘려진 팔뚝은 깔끔하게 붙었다. 이단심문관을 약 올리던 빙글뱅글은 팔을 움직여보며 감탄했다.

“역시 준 고위성직자로군.”

그 말을 들은 이단심문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빙글뱅글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 꼭 그렇게 삐딱하게 들을 일은 아니고, 그냥 칭찬이다, 칭찬.”

이단심문관은 고위성직자로의 진급에서 3차례 탈락한 사람 중에 발탁된다. 따라서 빙글뱅글의 말은 칭찬보다는 모욕에 가깝게 들릴지도 모른다. 다행이 이단심문관은 빙글뱅글에게 해코지 하지 않지만, 리퍼는 서둘러 손아귀의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이제 볼일은 끝났으니 돌려보내주지.”

이단심문관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네 녀석들이 죗값을 치르게 해주겠다.”

“부디 그래주었으면 싶군.”

리퍼의 대꾸가 끝나자마자 이단심문관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훅 사라져버렸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 ‘굴락의 지옥연기(Smoke of hell)’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리퍼는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 빙글뱅글에게 다가왔다.

“어쩌면 당신 역시 썼을지도 모르지. 리퍼를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래.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리퍼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었느냐는 것이다.”

“레드 오션에서 리퍼를 선택한 자는 단 한 사람이었지. 부캐까지 모두 암살자로 채워 넣을 정도로 암살자에 애착을 가진 사람만이 리퍼를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드 오션의 리퍼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 처형당하고 말았지. 어때? 뭔가 감이 좀 잡힐 것 같나?”

“글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우리들이 하는 게임은 ‘더 오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드 오션 시절의 이야기를 해서 어쩌자는 거지?”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치고 땀을 많이 흘리는군.”

리퍼는 빙글뱅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근육질의 몸 어디에서도 섬세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지만, 빙글뱅글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는 그 손은 우악스럽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한 번 봐준 거다. 이제부터는 거짓말을 하면 그 대가를 치르지. 이단심문관도 돌려보냈으니까 치료해줄 이도 없다는 점도 잘 생각하길 바라.”

“고작 게임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에 목숨 거는 족속들인가? 내가 겁먹을 줄 알고?”

“게임 캐릭터의 팔이 잘렸을 때, 당신은 통상적인 자극 이상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나?”

빙글뱅글의 표정이 굳었다. 팔이 잘릴 당시 느낀 고통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쩌면 실제 팔이 잘릴 때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빙글뱅글 앞으로 리퍼의 늑대투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게다가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까지 만들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지.”

“우, 운영진인가! 유저를 이렇게 핍박해도 되는 거냐!”

“되고말고. 내가 운영진이라면 그만한 힘은 있지. 그리고 들키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무엇보다 당신은 게임 갱의 하수인 아닌가. 사실 관계만 밝혀도 파멸시키기엔 충분하지.”

“그렇게 되면 당신도 끝장나.”

“그걸 모르는 놈이 이런 일을 꾸몄을까. 자자, 진정하고. 현재의 일을 의논하기 전에 과거의 일을 먼저 이야기 해보자고. 먼저 암살교단 이야기부터 해볼까.”

“암살교단 떨거지였나?”

“아니. 그 당시 난 생산직 계열이었다. 암살자는 키워본 적도 없었지. 그때까지는.”

“그때?”

“아싸시노♡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미친놈은 도시 한가운데에서 PK를 했다. 자기 무덤 자기가 판 꼴이었지. 그런 놈이 리퍼였다는 게 한심할 지경이다.”

“그럼 아싸시노♡의 이름은 알고 있나?”

“이름? 유저의 실제 이름말인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샤크티. 위대한 여신의 이름이지.”

“별 해괴한 이름을 다 보겠군. 나이 먹고 중2병인가?”

빙글뱅글이 비웃거나 말거나 리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 싶어 했지. 그래서 스스로 이름 짓기를 미타. 광명을 뜻하는…….”

“아, 아미타…….”

빙글뱅글은 고개를 쳐들었다. 리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당신은 아싸시노♡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지 않나?”

“아싸시노♡가 미타였다고? 그럴 리가……그 애는 마음이 여려 가상현실 속의 전투를 견디질 못했어!”

“후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랑이란 건 말이다……때로는 기적 같은 일을 불러오지. 그 애는 전투의 압박을 견뎌냈고 그 누구보다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 바로 당신이 만든 ‘암살교단’이라는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

레드오션의 시절. 빙글뱅글은 부캐로 암살자도 키웠었다. 레벨이 엄청나게 높지는 않지만, 암살자에 대해 공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때 암살자들 간의 교류를 위해 만든 단체가 ‘암살교단’.

실제 암살자에 대한 멋진 이미지를 보고 자란 사람들이 암살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신(死神)을 위한 제물을 바치자’는 허세 같은 든 구호 때문에 많은 암살자들이 들어찼다. 평소 게임 속 상황을 묻는 미타에게 암살교단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 것도 그래서였다. 미타가 암살자를 동경하게 될 법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애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

“암살자만의 길드를 만든 다음, 당신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아싸시노♡는 너무 단기간에 성장했다. 게임 속의 상식에 대해서 배울 시간이 부족했지. 현실세계에서도 뒤틀린 다리 때문에 밖에 나가기를 꺼려한 아이였으니, 원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애가 무리해서 길드를 만들려고 했다.”

“갱의 작업장에서 도제들을 납치…….”

“그래. 그리고 그 일은 너무도 빨리 갱들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사기꾼 NPC가 동원되고, 위조문서로 길드건물이 거래되었지. 갱들이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이렇게 빨리 사실이 알려지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난 누군가 찔러버린 거라 생각한다. 그게 바로 댁이지.”

빙글뱅글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리퍼의 억센 손아귀가 빙글뱅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네놈이 그 애를 데려가면서 뭐라고 했지? 절대 울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애를 배신하고 울리더니 죽게 만들어?”

빙글뱅글은 정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임 속에서 목이 졸린다 해도 이렇게까지 숨이 막히진 않는다. 하지만 이 감각은 진짜 같다.

“크윽……윽……가냐……냐니…….”

“아니라고? 하하하. 다 알고 왔는데 이렇게까지 변명하니 증거를 보여주지.”

리퍼는 빙글뱅글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빙글뱅글은 쿨럭 거리며 진흙탕을 기었다. 리퍼에게 공격당해 시야가 붉게 변한 것은 둘째 치고, 실제 호흡이 곤란해진 탓인지 캐릭터에 노이즈가 잔뜩 꼈다. 빙글뱅글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옵션의 통각수치를 낮췄다.

“어차피 여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못 벗어나. 헛짓거리 그만하고 이 동영상이나 보시지?”

리퍼는 동영상을 하나 띄우더니 빙글뱅글 앞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시노비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분노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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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떻게 얻은 정보인데. 수많은 시도 끝에 얻어낸 히든직업을 홀랑 처먹어?

- 쉿. 아싸시노가 듣겠다. 듣자하니 그 사람은 부캐까지 어쌔신 캐릭터로만 가득 채운 모양이더라.

- 그래서? 그 열정 때문에 리퍼로 전직됐다고? 그럼 나는? 주캐 버려두고 허접 같은 암살자 부캐 돌린 나는?

-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아싸시노가 처형당하지 않는 이상, 네가 리퍼로 전직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 그것참 괜찮은 생각이네.

- 임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럴 거야? 같은 암살교단끼리?

- 좆 까라 그래. 어차피 그놈의 마초기질이 마음에 안 들었어. 기회만 되어봐. 뜨거운 맛을 보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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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여기에서 끊겼다. 빙글뱅글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나, 난 아니야…….”

“레드 오션에서 키우던 부캐 중에 시노비라는 이름의 암살자가 없다고?”

“아니! 아니야! 시노비는 내 부캐가 맞지만, 아싸시노♡가 날뛰던 날에는 접속하지 않았어!”

“그럼 본캐인 마법사로 한 일이로군?”

“그것도 아냐! 난 그날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게임에 접속할 수 없었다고!”

“병원이라고?”

“미타를 안다면 내 실제 이름도 알겠지. 그날 내가 어디 있었는지 확인해보면 알거 아냐!”

“흐음…확인이라……여기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하기엔 조금 귀찮군. 그냥 빙글뱅글이라는 캐릭터를 가두고, 현실의 당신을 파산시켜버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보아하니 많은 돈이 걸려 있는 것 같던데.”

리퍼의 말에 빙글뱅글이 벌떡 일어섰다.

“파산 따위 아무래도 좋다! 이 캐릭터를 영원히 여기 가둬도 좋다! 난 그날 접속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떳떳하다는 건 내가 안다!”

“이봐. 게임 속이라고 허세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이 육시랄 놈아! 이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 여기서 노가리 까지 말고, 그날 미타를 해코지 한 그놈을 잡아!”

여기까지 내뱉고 빙글뱅글은 헐떡거렸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에 멘탈그래프가 급격히 역전되었다.

급기야 그의 눈앞에 강제로그아웃 메시지가 떴다.


<멘탈 그래프 역전이 발생합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리퍼. 곧 돌아올 테니까 어디 가지마라!”

으르렁 거리던 빙글뱅글의 모습은 곧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별걸 다 걱정하는군.”

이 공간은 보통의 필드가 아니다. 리퍼의 허락 없이는 벗어 날 수 없는 아공간.

로그아웃 장소가 이곳이면 다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이치. 강제로그아웃 당했어도 빙글뱅글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전에 끝마칠 일이 있었다.

리퍼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동안 나눈 대화를 녹음한 파일이 딸려 나왔다.

“멘탈그래프의 급격한 변동은 죄책감 때문인가……아니면 분노 때문인가.”

중얼거리던 리퍼는 네트워크 창을 띄웠다. 빙글뱅글의 실제 이름으로 병원진료 기록을 조사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말대로 리퍼는 빙글뱅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뭐, 정말로 그가 한일인지 아닌지는 이걸로 밝혀지겠지.”

불법경로로 검색하기에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리퍼는 기다리는 동안 바깥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혼돈을 비추는 거울이여.”

그의 부름에 맞춰 허공에 뿌연 잔상이 나타났다. 리퍼는 보다 강하게 거울의 형상을 이미지 했다. 그에 따라 뿌연 잔상은 금속성의 일렁임에서 맑은 상을 투영해내는 거울처럼 변했다.

리퍼는 거울 속의 모습을 살피며 혀를 쯧쯧 찼다.

위즈가 성기사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보였다. 피로가 가득 내려앉은 위즈의 얼굴에는 노이즈가 껴 있었다.

“이런. 순순히 성기사에게 조사를 받다니. 생각보다 무르군. 어째서 네메시스는 저런 자와 일을 벌인 거지? 게임 속에서는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후계자 신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텐데.”

곧 흥미를 잃은 리퍼는 스킬을 해제했다. 이 스킬로 엿보는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여기에 비춰지는 NPC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고 행동하기 쉬웠다.

그것은 이 스킬의 이름이 ‘혼돈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스킬에 대항해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정해진 미래를 틀어 놓는 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하지만 그런 뒤틀림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었다. 리퍼는 그것을 이해하였기에,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리퍼는 암살자 계통의 히든직업이다.

리퍼가 ‘혼돈을 비추는 거울’을 암살할 때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린을 암살하려는 바하르칼의 암살자와 용병 마법사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의 행위에 조작이 가해진 사실도 모르겠지.”

그들이 일방적으로 리퍼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우연을 가장한 실수와 방심이 겹쳐 생겨난 빈틈에 있었다.

평소보다 포션을 부족하게 산 대신, 안 하던 군것질로 몸을 둔하게 했으며.

평소라면 제때제때 수리했을 방어구를,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걸치고 나섰다.

NPC들은 이런 식으로 나태해져 빈틈을 보였고, 어김없이 단발성 공격을 막지 못하고 죽었다.

유저의 경우는 이런 조작이 불가능 했지만, 그 대신 그들이 자주 다니는 식당이나 여관에서 손을 쓸 수 있었다.

여관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NPC들을 조작하여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암습을 가하기도 했으며,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의 소문을 내서 평소 다니지 않는 길로 걸어 다니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일부러 길을 혼잡하게 하여, 약속시간에 늦도록 만드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암살은 ‘암살자가 약자이고 타깃은 강자’라는 기본전제를 깔아둔다.

기습의 묘를 살리지 못하면, 죽는 건 암살자이니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하다.

따라서 서로의 실력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강해지거나, 암살에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물색하는 것.

암살이 환경과 타이밍 같은 외부 요인에 크게 좌우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리퍼가 단순히 ‘혼돈을 비추는 거울’을 사용했기에 암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암살하기 좋은 장소와 상대가 방심할만한 타이밍을 갖췄어도, 정작 암살자가 ‘너무’ 약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리퍼’라는 히든 직업의 강함은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빠르게 치고 나오는 단발성 스킬들은 연환 공격보다는 강력한 한방으로 마무리 짓는 목적에 특화되어 있다. 회피기와 섞어 쓰면, 1:1로 싸워도 괜찮을 정도.

그렇다고는 하나 리퍼는 1:1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히든 직업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동경보다는 ‘질시’에 맞춰져 있다. 만에 하나 ‘리퍼’라는 직업의 정체가 히든인 게 알려지면, 무한척살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혼자 움직이는 암살자의 특성상 무리를 이루기도 쉽지 않았으며, 저레벨 대에서는 파티에 들어갈 일도 없다. 따라서 리퍼는 언제나 혼자였다.

다수의 유저가 질투심을 불태우며 덤벼들면 대응이 힘들었다.

늑대머리를 가공한 투구를 뒤집어 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더 강해질 때까지는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암살 임무도 바하르칼을 통해 받았다.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조사해도, 그 끝에는 바하르칼 용병이 나올 테니까. 이런 면에서는 바하르칼이 철두철미 했다. 리퍼는 자신의 레벨이 150을 넘기기 전까지는 이렇게 플레이할 생각이었다.

그랬던 리퍼가 마음을 바꿔 본래의 실력을 드러내기로 한 건, 미타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자. 빙글뱅글의 모든 정보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를 앞당긴 건 네메시스의 도움 덕분이었다.

네메시스와 처음 만난 건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한 달 전, 9월 19일. 그는 파이오니어 컴퍼니 빌딩의 지하, 가칭 셸터라 불리는 거대한 기계에 접속했었다.

그의 이름은 ‘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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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그래프 역전이 발생합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10초 남았습니다.>

<외적요소에 의한 로그아웃이므로, 해당 캐릭터에 강제적 보호가 적용됩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5초 남았습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4초 남았습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3초 남았습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2초 남았습니다.>

<강제 로그아웃까지 1초 남았습니다.>

<강제로그아웃 됩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주세요.>

<더 오션을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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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웨에엑!”

캡슐에서 뛰쳐나오자마자 편재가 간곳은 화장실이었다.

장시간 가상현실 접속을 유지하면, 신체적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가상현실 속 아바타의 체형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현실에서 느끼는 감각이 박리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거리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편재에겐 울렁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쿵!

너무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은 편재는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였다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결코 하지 않았을 실수.

이건 ‘더 오션’때문이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진 사내가, 게임 속에서는 160㎝대의 여자 몸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편재는 머리를 부여잡는 것도 잊고 변기를 와락 붙들었다.

“우웩. 우웩.”

토하고 일어서려는데 냄새 때문에 또 구역질이 밀려온다. 가상현실속의 냄새는 현실에 비해 자극이 약했지만, 지금 변기위에서 올라오는 건 진짜 강렬했다.

최소한의 역치를 인위적으로 신경에 가해 얻어지는 가짜 감각과는 비교도 안 되는 냄새.

축농증이 아닌 이상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니, 편재는 위가 뒤집어져라 토했다.

토하면서도 편재는 반성했다.

카무플라주라는 스킬에 너무 의지했다고. 적어도 아무도 안 볼 때는 원래 모습을 해주었어야 했다고.

감각의 박리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가상현실 속 아바타와 실제 몸의 차이가 거의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너무 장시간 접속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편재는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했다.

신성왕국에서 계속 사용하던 아바타는 평소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아예 성별이 여자였다. 도중에 돌팔이 약제사로 활동할 때는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왜소하고 바싹 마른 체형이었다.

‘그동안은 뚱뚱한 체형이라 그나마 괜찮았는데, 실제 모습과 괴리가 큰 모습을 계속 사용하다보니 무리가 온 거야.’

최근의 다이어트가 성과를 보여 괜찮을 줄 알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으으…….”

편재는 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냄새가 몸에 배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샤워기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이 편재의 얼굴을 때렸다.

“푸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넘기며 편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비오는 날, 우산도 없이 서 있는 기분이다.

편재는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울 보는 게 께름칙하더니만. 지금은 또 괜찮네.’

사실 편재는 누나의 가죽을 뒤집어 쓴 꿈을 꾼 뒤로, 한동안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누나에 대한 미안함이나, 피해의식 같은 거라고 자위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충격적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더 오션에 매달렸다.

“누나는 폐쇄구역 어딘가에 있어.”

그 확신이 지금까지 편재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증명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폐쇄구역에 진입하려 했다.

처음엔 무인차량을 진입시켰다. 그때는 폐쇄구역의 방어가 얼마나 단단한지 몰랐다.

결과적으로 편재는 돈만 날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빌딩만한 무게추가 다시 들어올려졌을 때, 무인 차량은 납작한 철판으로 가공되어 있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것이라던 판매자의 말은 헛소리였다.

만약 무인차량으로 통과 가능했다면, CA(Colonial Army)가 진즉 폐쇄구역을 열었을 것이다.

편재는 방법을 바꿨다.

폐쇄구역의 방어 시스템은 모든 걸 감시한다. 너무 큰 것이 대놓고 들어가려 했으니 통과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스파이 봇을 이용했다.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폐쇄구역에 진입한 스파이 봇들은 연결이 끊겼다. 파괴되었는지 어쨌는지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남은 수단은 해킹. 이것은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사용한 단말기가 과부하로 회로를 홀랑 태워먹은 것이다.

콜로니의 한 층을 담당하는 시스템과 싸우는데, 개인 단말기를 사용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사자를 잡는데 이쑤시개를 들이민 꼴.

그래서 웬만한 도시 뺨치는 규모의 셸터를 보았을 때, 편재는 순수한 의미로 기뻐했다.

셸터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우수하다. 적어도 시작도 못해본 채, 리타이어 되진 않을 것 아닌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 셸터에 내장된 AI, 네메시스가 일을 주도하게 되었어도 편재는 괜찮았다.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1달이 훌쩍 지난 현 시점에서, 그동안 벌인 일들을 짚어보았다.

크레센토 왕국에서는 솜씨는 좋으나 자본이 부족한 가게들을 발전시켰으며, 인육만두를 잡아 초반 PK의 성장을 방해했다. 또한 에켈산을 덮치려던 바하르칼의 음모까지 막아, 그렇게 얻은 신뢰를 통해 Witch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초반부터 한 나라의 왕가와 좋은 관계를 맺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나 자신은 해냈다. 그 덕에 얻은 사실상의 프리패스인 교역허가서는 통행증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제로니스 섬에서는 공통스킬인 이글아이 스킬북을 무사히 보전해 필사본을 각 나라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얻은 큰 수확은 빌헬름텔과 안면을 익혔다는 것이었다. 그의 담백한 품성은 동료로서 믿음직스러웠다. 첫 동료로 맞아들인 게 빌헬름텔이란 건,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수라 봐도 좋았다.

시에니투스에서는 바하르칼과 내통한 세력을 걸러내, 무법자들이 바하르칼에 적대하도록 만들었다. 레미라 침공에 대비한 방해 세력으로 해적단 하나 정도를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자신이 벌인 일은 그 파장이 너무 컸다. 시에니투스의 모든 무법자들이 바하르칼을 견제했다. 산적이며 해적들이 그렇게 일어서자, 바하르칼은 전쟁 시작 전부터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레미라 침공을 막기 위한 항해 도중 조난당했을 때, 우연히 아쿠에리언이라는 종족을 구하게 되면서 바하르칼 용병마법사들의 섬을 파괴했다. 뒤이어 고대에 사용하던 마력포-루인 블래스터로 무장한 잇페인의 배를 가라앉히기도 했다. 세간에 알려진 일은 아니었으나,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꾼 활약임에는 틀림없다.

레미라에서는 잇페인의 분신들과 싸워 치명상을 입혔지만, 위즈라는 캐릭터의 스탯은 깡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유저들이 메인 퀘스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유저들과 바하르칼의 분쟁을 빠르게 종식시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더 오션’에서 해온 일들은 어느 것 하나 성공적이지 않은 게 없다.

편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다.

아직까지 실패했다는 증거는 나왔던가. 답은 곧바로 나왔다.

‘실패는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하나 있다.’

아이린. 레미라의 중급마법사 렌틸의 손녀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

현재 상황에서는 아이린이 다크랜드에 떨어진 것만이 확인 되었을 뿐, 위험한 상황에 처했거나 죽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아직 실패를 입에 올릴 단계는 아니다.

그저 사소한 일이……고작 게임 속에서 겪은 실수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고작 게임이라…….”

억지로 위안삼아 만들어낸 논리는 감성 앞에 남아있지 못했다.

아이린의 실종은……남겨진 렌틸의 슬픔은……비록 게임 속 NPC의 일이라고는 하나, 편재에게 있어서 그저 게임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누나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깊이 공감하고 열과 성을 다해 퀘스트에 매달렸다. 그 과정은 귀찮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이렇게나 감정이입이 잘 되는 퀘스트는 없었다.

그럼에도 최악의 결과가 나왔기에 편재는 상처 받았다.

게임 속에서 아이린을 지키지 못한 일은, 누나를 구하는 일도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전조일까?

“나……잘하고 있는 거겠지? 응?”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편재는 고개를 숙였다.


작가의말

흐유...챕터 5가 60편으로 드.디.어 끝났습니다.

다음부터는 예고한 대로,

챕터 6을 진행하기에 앞서 외전이 올라옵니다.

외전은 분량이 얼마나 되든간에 무조건, 하나의 글로 묶어서 올릴 계획입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해 올리려면 지난한 시간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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