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347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7.12 21:16
조회
777
추천
23
글자
39쪽

12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8) *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38.

딜런은 자신이 살아 있으며, 마법사들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는 반사적으로 자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 물고 있던 독약은 난리 통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단검을 사용하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옷만 걸치고 있을 뿐, 모든 소지품이 몽땅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특히 루시엔이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머리를 박아대는 딜런을 말렸다.

“이봐요! 기껏 살려놓았더니 죽으려하다니 제정신인가요?”

딜런은 루시엔을 노려보았다.

“나는 암살자다. 임무를 실패한데다, 적에게 사로잡힌 암살자가 택할 것은 하나다. 난 그렇게 교육받았고, 애송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루시엔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딜런을 노려보는데, 사박거리며 발소리가 났다. 암살자복장을 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헬름텔과 위즈는 긴장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38.

딜런은 자신이 살아 있으며, 마법사들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는 반사적으로 자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 물고 있던 독약은 난리 통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단검을 사용하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옷만 걸치고 있을 뿐, 소지품도 몽땅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특히 루시엔이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머리를 박아대는 딜런을 말렸다.

“이봐요! 기껏 살려놓았더니 죽으려하다니 제정신인가요?”

딜런은 루시엔을 노려보았다.

“나는 암살자다. 임무를 실패한데다, 적에게 사로잡힌 암살자가 택할 것은 하나다. 난 그렇게 교육받았고, 애송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루시엔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딜런을 노려보는데, 사박거리며 발소리가 났다. 암살자복장을 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헬름텔과 위즈는 긴장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마법사들은 매직스틱을 들어올렸다.

딜런이 소리 질렀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처하나 없이 건제한 마법사를 상대로, 엄폐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

“뭐하는 거냐! 이 멍청이들아!”

하지만 암살자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딜런은 애가 탔다.

“명령이다! 도망가란 말이다! 어서!”

암살자들이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부터,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까지 다양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들의 손이 허리춤을 건드렸다. 허리를 감싼 벨트가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에 채워진 보호대도 버려졌다. 화염병이며 단검들이 바닥을 굴렀다.

“무장해제?”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사람들은 눈만 굴렸다.

스스로 무기를 버린 암살자들이 멈추더니 무릎을 꿇었다. 딜런은 입을 크게 벌렸다.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이다.

“이, 이놈들…….”

맨 앞의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임무에 실패하고 적에게 사로잡힌 암살자가 택할 건 죽음뿐이라 했소? 교관 본인부터 지키질 않는데, 우리라고 명령을 따르겠소?”

“이놈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교관이 죽으러 떠나고,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소. 교관 말이 맞았소. 우린 죽으려고 이곳에 보내진 거였소. 아니, 죽게 방치된 거였지. 도와준다던 네크로맨서도 코빼기조차 비추질 않았고. 상성이 나쁜 걸 뻔히 알면서, 윗대가리들은 증원을 보내지 않았지.”

“그러니까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개죽음 당하지 말라고!”

“우리들은 암살자요. 죽을 땐 이름 모를 들판에 버려져 죽는 게 당연하지. 우리는 도구요. 이용당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쓰지도 않고 버림받는 건 싫소. 우린 할 만큼 했소. 하지만 바하르칼은 우릴 버렸지.”

딜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단검을 거꾸로 쥘 생각이냐?”

“먼저 의리를 저버린 건 바하르칼이오.”

이들의 대화를 듣던 위즈가 빌헬름텔에게 물었다.

“단검을 거꾸로 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뉘앙스가 배신한다, 뭐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바하르칼의 적이 하나 더 늘 것 같군요.”


◇◇◇◇◇◈◇◇◇◇◇◇◈◇◇◇◇◇◇◈◇◇◇◇◇


“그냥 돌려보내도 될는지 모르겠소.”

레미라 마법사들은 떠나가는 딜런과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염려는 당연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들과는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 저들의 동료를 여럿 죽이기까지 했다. 서로가 좋은 감정을 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주문을 퍼붓는 게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루시엔이 반대했다.

비무장인데다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데, 굳이 죽여야겠냐는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성직자가 그리 말하니, 마법사들도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사실 암살자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무장까지 스스로 해제했으니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앞서간 렌틸과 아이린과 합류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럼 당신들은 퀘스트 때문에 레미라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거로군요?”

도중에 합류한 루시엔은 자연스럽게 일행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가 성직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성향이 절대 선(善)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성직자다. 그녀는 신용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린이라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성직자가 있으면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모두의 만장일치로 루시엔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 왜 스스로를 타락했다고 한 겁니까?”

위즈의 말에 루시엔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 어깨를 보세요.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디바인 마크가 부착되어 있어야 해요.”

“전투 중에 떨어졌나보군요.”

“아뇨. 엔틸리움을 나설 때부터 이랬어요.”

빌헬름텔이 끼어들었다.

“잘 모르지만 그런 건 신전에서 주는 걸로 아는데요? 깜빡 잊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몇 번이고 가서 디바인 마크를 받아왔는걸요.”

“그럼 어째서?”

“타락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분명 저와 있을 때는, 각력강화 버프를 걸어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 딜런이라는 암살자도 치료했지요?”

위즈와 빌헬름텔의 말대로 버프도 걸었고,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해주었다. 그건 사실이다.

루시엔은 아침에 엔틸리움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마녀라고 손가락질 받고, 성기사들의 눈총을 받은 괴로운 기억을.

“성기사가 확인해준 거예요. 성기사가 가지고 있던 디바인 마크가 부서졌거든요.”

“부서져요?”

“네. 타락한 성직자는 디바인 마크를 패용할 수 없어요. 그게 타락의 증거지요.”

“루시엔님이 말하는 타락이란 건, 디바인 파워가 사라지는 게 맞죠?”

“네.”

“디바인 파워를 가지고 사용하는 모든 스킬도 쓰지 못하게 되는 거고요?”

“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루시엔님이 스킬을 쓰는 건 제가 봤고, 죽었어야 할 딜런도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타락했다고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루시엔은 고개를 흔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젠 모르겠어요. 분명 타락을 확인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디바인 파워가 이리도 넘치는 건지.”

루시엔은 양손을 들어 디바인 파워를 불러일으켰다. 성직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느껴질 만큼 고농도의 디바인 파워가 모여 황홀하게 빛났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시련일지도…….”

모두의 시선이 그 마법사를 향했다. 루시엔이 성큼 다가섰다.

“혹시 뭔가 알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알려주세요.”

“난 마법사요. 성직자에 대해 잘 알고 있진 않소. 다만, 어렸을 때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을 뿐이오.”

“괜찮아요. 말씀해주세요.”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노래에 가깝지만 어쨌든 해보지. 험험.”

마법사의 입에서 성직자의 발자취가 흘러나왔다.


지고의 존재가 밀짚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노래한다.

불을 붙이겠노라.

불붙은 짚이 활활 타오른다. 불길은 찰나의 반짝임.

아무리 불길이 강해도, 짚이 젖으면 연기가 난다.

천장의 구멍에서는 쉴 새 없이 빗물이 떨어진다.

그래도 짚은 활활 타오른다. 너무 빨리 타서 재만 남긴다.

지팡이가 없으니 여행을 나설 수 없다.

하지만 올곧음 하나를 지팡이 삼고, 올곧음 둘로 이정표를 세우면 길에서 헤매지 않으며.

올곧음 셋으로 저울을 만들어, 다른 올곧음을 매달면 지고의 존재는 언제나 그대를 바라본다.


마법사의 입이 닫히고 정적이 남았다.

혼돈의 짐승 때문에 짐승들이 떠나간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루시엔은 마법사가 남긴 말을 곱씹어보았다. 알아듣기 힘든 비유로 점철된 경전과 달리, 명확한 뜻을 전달하는 문장들이었다.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이건…마치 성직자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것 같군요.”

“깨끗한 것일수록 더럽혀지기 쉽지. 그러고 보면 성직자는 고결한 자들만 하는 게 아니오? 어쩌면 루시엔 당신은 신에게 시험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오.”

“시험이요?”

“성직자는 이것저것 얽매이는 게 많다고 알고 있소. 특히나 beadsman은 다른 성직자보다 빡빡하다고 알려져 있지. 지켜야 할 계율도 꽤나 어려운 것뿐일 거요. 안 그렇소?”

“그 대신 beadsman은 교황만 쓸 수 있다는 기원까지 사용할 수 있어요.”

“그건 상당히 위험한 힘이기도 하오.”

“힘이 강할수록 파멸도 빨리 온다……는 것이로군요.”

마법사의 말이 그럴 듯하다. 잠시 생각하던 루시엔이 활짝 웃었다.

“요컨대, 디바인 파워가 절 거부하고 있다는 건. 제게 힘을 주신 신님께서 드디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헤헤헤. 그럼 걱정할 거 아니네요. 일단은 이렇게 디바인 파워도 사용할 수……어라?”

루시엔의 손에 가득 모여 있던 황홀한 빛이 사라졌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신님께서 화가 나신 모양이로군.”

마법사가 웃었다.

“하……됐다가 안 됐다가. 이래서는 곤란하다고요. beadsman이 다른 성직자보다 나은 게, 언제 어디서나 디바인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 마계에서도 디바인 파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말이로군요.”

“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른 성직자들이나 마찬가지 아녜요? 아니 그보다 못하구나.”

빌헬름텔이 위로했다.

“기운내시지요. 일단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실마리는 잡혔지 않습니까.”

“이제 출발 합시다.”

레미라 마법사들이 말에 올랐다. 사람 수에 비해 말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적어도 네 마리의 말은 두 명씩 태워야 했다. 루시엔은 애초에 말을 데려오지 않았으므로 함께 타야 했다.

위즈는 루시엔과 함께 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가벼웠기 때문에 말도 좋아했다.

말을 달리며 루시엔이 입을 열었다.

“일행은 여기 모인 사람이 전부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위즈님께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가 궁금하신 걸까요.”

“어째서 절 이곳에 보내신 건가요? 저는 beadsman이에요. 범용성은 높지만,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은 떨어지는 성직자라고요. 땅이 무너지고 전투가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쁘죠.”

“반대로 생각하면, 생존능력이 뛰어나기에 끝까지 살아남아 아군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이 되죠.”

“하지만 저는 실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멍청하게 무너져 내리는 곳을 밟아 떨어져버렸고, 땅속에서 탈출하느라 기원까지 써버렸어요.”

루시엔은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루시엔의 뒤에 타고 있었기에 위즈는 루시엔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엔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전해졌다.

분하다. 스스로의 무능함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패배감으로 이어지는 나쁜 감정인 건 사실이지만, 이를 극복하면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위즈는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루시엔을 이곳에 먼저 보냈는지를 알려주었다.

“제가 보낸 건 beadsman이 아닙니다. 성직자지요. 성직자는 고결하기 때문에 디바인 파워의 사용을 허락받은 존재입니다. 치료를 하고, 저주를 해제하고, 버프를 걸어주는 모든 게 디바인 파워 때문에 가능 한 거 아닙니까? 그건 달리 말해 신이 함께 해준다는 겁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성직자는 무슨 일이 생기면 기댈 수 있는 존재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냥 있어만 줘도 힘이 되는 존재. 의지처.

성직자가 맡는 기본적인 포지션이다.

실제 더 오션에서는 성직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NPC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유저들의 경우에도 실제 발휘되는 능력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디까지나 체감상이지만.

루시엔도 그건 알고 있었다.

“위즈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전 타락했고…….”

루시엔 자신의 사정을 분명히 인지했다면, 그래도 위즈가 같은 선택을 했을 리 없다. 루시엔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모두의 눈에 보일 정도로 디바인 파워의 빛을 내뿜지 않았습니까? 타락한 성직자가 디바인 파워를 쓰는 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루시엔님, 이미 마도로스 社에 확인도 하셨지요?”

“어, 어떻게 그걸?”

“성직자 유저는 자존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키우는 성직자가 타락한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넘겨 짚어본 겁니다. 아무튼 마도로스 社 직원들도 음흉하군요. 그들도 루시엔님이 단순히 타락한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나 사람을 겁주고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요. 이게 시스템 상 성직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이란 이름의 퀘스트라면, 그걸 깨도록 해야겠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해주세요.”

“하지만 지금은 천덕꾸러기일 뿐이잖아요. 이렇게 문제 많은 성직자가 있으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침 저 역시 아는 성직자가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신세 좀 질게요.”

“걱정 마세요. 아무려면 메인 퀘스트보다 어렵겠습니까?”

위즈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아처인 빌헬름텔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뒤 위즈는, 다음으로 필요한 게 마법사나 성직자 같은 학자 직업군이라고 생각했다.

위즈 자신이 다양한 스킬을 익히고는 있지만, 아직은 남을 백업해주기 보다는 최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식으로 플레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위즈의 성장은 빠를지 몰라도, 무능력자의 길을 걸으며 카피캣을 얻은 의미가 없다.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위즈 개인이 가진 무력에는 한계가 뚜렷해질 것이다.

남들은 다 각성기나 필살기를 익힐 때, 직업이 없는 위즈만 그것 없이 싸워야 한다.

그전에 위즈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야 했다.

“그러자면 뒤에서 든든히 받쳐줄 사람이 필요해.”

서포트를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 서포트를 하기 위해.

“이제 슬슬 변화를 줄 때도 되었어.”

그래서 미리 핏 스톤을 통해 알아보았다. 곳곳에 흩어진 영웅의 유산들 중, 마법사나 성직자를 위한 게 있는지를.

이미 그 위치도 파악해두었고, 어느 루트를 통해 이동할지 계획도 세워놓았다.

남은 건 적당한 주인을 찾아주는 것.

마법사야 레미라를 자주 오가고 있으니, 적당한 인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성직자.

성직자는 빌헬름텔처럼 돈으로 꼬일 수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간 타락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직자들은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을 돕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위즈 한 사람에게 얽매이고자 할 리 없다.

친분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어렵다.

일단 위즈는 파티 사냥을 자주 경험해보지 못했다.

너무 이곳저곳 돌아다닌 탓도 있었지만, 다른 유저들과 함께 사냥을 하기가 껄끄러운 이유가 컸다.

가지고 있는 스킬들이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이게 아처인지 암살자인지, 마법사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그걸 설명하려면, 카피캣이란 스킬의 존재가 알려질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페널티가 존재하지만, 상극이 되는 직업군의 스킬을 한 캐릭터가 모두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이슈가 될 것이다.

몰론 이건 게임 시스템 상, 원래부터 존재하던 스킬이다. 이걸 가지고 제대로 활약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막 얻은 카피캣 스킬 자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카피캣은 이름 그대로 모든 스킬을 모방해 배울 수 없다. 보조계열과 마법계열의 스킬까지 얻고 싶다면, ‘마음속의 성전’과 ‘마력을 보는 눈’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위즈는 운이 좋아, 1달 만에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남들이 보면 카피캣이 유난히 좋은 스킬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마도로스 社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안 되지.”

위즈는 게임 속 데이터를 해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 게임 밖에서는 셸터의 코어유닛인 네메시스를 통해서, 그리고 게임 속에서는 핏 스톤을 통해.

무능력자를 선택한 위즈라는 캐릭터가 그 증거다.

여기서 핏 스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퀘스트를 통해 맺은 관계이니까.

하지만 네메시스는 아니다. 그와 네메시스가 함께 벌인 일은 해킹.

범죄다.

마도로스 社에서 위즈에게 관심을 가지면, 캐릭터의 주인인 편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잘못하면 구원절에 벌어진 레드오션의 해킹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위즈는 메인퀘스트를 깨서, 현실의 폐쇄구역을 열고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 카피캣을 배운 것이다.

“결코 발목 잡혀서는 안 되지.”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

그래서 카무플라주를 이용해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게임을 했다.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람들과 따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는 게 당연하다.

위즈의 진짜 모습을 아는 건, 크레센토의 베스퍼셰일 왕가 사람들과 사략해적들.

그리고 빌헬름텔밖에 없다.

마도로스 社의 관심은 피하는 건 성공했지만, 그 대신 사람을 끌어 모으기는 실패한 것이다.

“나보다 인맥이 넓은 사람이 곁에 있어야해.”

위즈에게는 자신을 대신하여 사람을 끌어 모을 존재가 필요했다.

빌헬름텔은 그 역할을 하기엔 조금 부족했다. 인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더 오션이 서비스 된지도 1달이 지났다.

이 기간은 해킹으로 인해 게임이 리셋 되어 모든 유저들이 레벨 1부터 키운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동안 빌헬름텔의 지인들 중에서, 그에게 연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캐릭터의 이름도 변함없이 ‘빌헬름텔’로 하고, 똑같이 아처로 키우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를 두고 빌헬름텔은 다들 바빠서 그런 모양이라며 쓰게 웃었다.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고 사람 냄새나는 플레이를 했지만, 정작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위즈는 루시엔을 처음 만났을 때 탐이 났다.

성직자들은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한번 맺은 인연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서포트를 받으려는 다른 유저들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루시엔을 이용해 위즈가 필요한 사람을 구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위즈는 루시엔이 당면한 상황을 알고 기꺼웠다.

디바인 파워가 사라졌다가 다시 회복되길 반복하는 이상, 성직자다운 플레이는 힘들 것이다. 이건 루시엔에게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힘들어할 때 도움을 준다면, 루시엔은 보다 자신과 가까워질 게 분명하다.

영웅의 유산까지 사용한다면, 성직자인 루시엔은 자신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함께 움직이는 한, 기회는 많아. 일단 사람 됨됨이도 알아보자. 뭐니 뭐니 해도 성직자는 파티의 구심점이 되는 존재니까.’

마법사들은 매직스틱을 들어올렸다.

딜런이 소리 질렀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처하나 없이 건제한 마법사를 상대로, 엄폐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

“뭐하는 거냐! 이 멍청이들아!”

하지만 암살자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딜런은 애가 탔다.

“명령이다! 도망가란 말이다! 어서!”

암살자들이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부터,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까지 다양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들의 손이 허리춤을 건드렸다. 허리를 감싼 벨트가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에 채워진 보호대도 버려졌다. 화염병이며 단검들이 바닥을 굴렀다.

“무장해제?”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사람들은 눈만 굴렸다.

스스로 무기를 버린 암살자들이 멈추더니 무릎을 꿇었다. 딜런은 입을 크게 벌렸다.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이다.

“이, 이놈들…….”

맨 앞의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임무에 실패하고 적에게 사로잡힌 암살자가 택할 건 죽음뿐이라 했소? 교관 본인부터 지키질 않는데, 우리라고 명령을 따르겠소?”

“이놈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교관이 죽으러 떠나고,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소. 교관 말이 맞았소. 우린 죽으려고 이곳에 보내진 거였소. 아니, 죽게 방치된 거였지. 도와준다던 네크로맨서도 코빼기조차 비추질 않았고. 상성이 나쁜 걸 뻔히 알면서, 윗대가리들은 증원을 보내지 않았지.”

“그러니까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개죽음 당하지 말라고!”

“우리들은 암살자요. 죽을 땐 이름 모를 들판에 버려져 죽는 게 당연하지. 우리는 도구요. 이용당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쓰지도 않고 버림받는 건 싫소. 우린 할 만큼 했소. 하지만 바하르칼은 우릴 버렸지.”

딜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단검을 거꾸로 쥘 생각이냐?”

“먼저 의리를 저버린 건 바하르칼이오.”

이들의 대화를 듣던 위즈가 빌헬름텔에게 물었다.

“단검을 거꾸로 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뉘앙스가 배신한다, 뭐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바하르칼의 적이 하나 더 늘 것 같군요.”


◇◇◇◇◇◈◇◇◇◇◇◇◈◇◇◇◇◇◇◈◇◇◇◇◇


“그냥 돌려보내도 될는지 모르겠소.”

레미라 마법사들은 떠나가는 딜런과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염려는 당연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들과는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 저들의 동료를 여럿 죽이기까지 했다. 서로가 좋은 감정을 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주문을 퍼붓는 게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루시엔이 반대했다.

비무장인데다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데, 굳이 죽여야겠냐는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성직자가 그리 말하니, 마법사들도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사실 암살자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무장까지 스스로 해제했으니 더 이상 위협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앞서간 렌틸과 아이린과 합류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럼 당신들은 퀘스트 때문에 레미라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거로군요?”

도중에 합류한 루시엔은 자연스럽게 일행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가 성직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성향이 절대 선(善)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성직자다. 그녀는 신용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린이라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성직자가 있으면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모두의 만장일치로 루시엔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 왜 스스로를 타락했다고 한 겁니까?”

위즈의 말에 루시엔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 어깨를 보세요.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디바인 마크가 부착되어 있어야 해요.”

“전투 중에 떨어졌나보군요.”

“아뇨. 엔틸리움을 나설 때부터 이랬어요.”

빌헬름텔이 끼어들었다.

“잘 모르지만 그런 건 신전에서 주는 걸로 아는데요? 깜빡 잊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몇 번이고 가서 디바인 마크를 받아왔는걸요.”

“그럼 어째서?”

“타락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분명 저와 있을 때는, 각력강화 버프를 걸어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 딜런이라는 암살자도 치료했지요?”

위즈와 빌헬름텔의 말대로 버프도 걸었고,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해주었다. 그건 사실.

루시엔은 아침에 엔틸리움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마녀라고 손가락질 받고, 성기사들의 눈총을 받은 괴로운 기억을.

“성기사가 확인해준 거예요. 성기사가 가지고 있던 디바인 마크가 부서졌거든요.”

“부서져요?”

“네. 타락한 성직자는 디바인 마크를 패용할 수 없어요. 그게 타락의 증거지요.”

“루시엔님이 말하는 타락이란 건, 디바인 파워가 사라지는 게 맞죠?”

“네.”

“디바인 파워를 가지고 사용하는 모든 스킬도 쓰지 못하게 되는 거고요?”

“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루시엔님이 스킬을 쓰는 건 제가 봤고, 죽었어야 할 딜런도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타락했다고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루시엔은 고개를 흔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젠 모르겠어요. 분명 타락을 확인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디바인 파워가 이리도 넘치는 건지.”

루시엔은 양손을 들어 디바인 파워를 불러일으켰다. 성직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느껴질 만큼 고농도의 디바인 파워가 모여 황홀하게 빛났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시련일지도…….”

모두의 시선이 그 마법사를 향했다. 루시엔이 성큼 다가섰다.

“혹시 뭔가 알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알려주세요.”

“난 마법사요. 성직자에 대해 잘 알고 있진 않소. 다만, 어렸을 때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을 뿐이오.”

“괜찮아요. 말씀해주세요.”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노래에 가깝지만 어쨌든 해보지. 험험.”

마법사의 입에서 성직자의 발자취가 흘러나왔다.


지고의 존재가 밀짚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노래한다.

불을 붙이겠노라.

불붙은 짚이 활활 타오른다. 불길은 찰나의 반짝임.

아무리 불길이 강해도, 짚이 젖으면 연기가 난다.

천장의 구멍에서는 쉴 새 없이 빗물이 떨어진다.

그래도 짚은 활활 타오른다. 너무 빨리 타서 재만 남긴다.

지팡이가 없으니 여행을 나설 수 없다.

하지만 올곧음 하나를 지팡이 삼고, 올곧음 둘로 이정표를 세우면 길에서 헤매지 않으며.

올곧음 셋으로 저울을 만들어, 다른 올곧음을 매달면 지고의 존재는 언제나 그대를 바라본다.


마법사의 입이 닫히고 정적이 남았다.

혼돈의 짐승 때문에 짐승들이 떠나간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루시엔은 마법사가 남긴 말을 곱씹어보았다. 알아듣기 힘든 비유로 점철된 경전과 달리, 명확한 뜻을 전달하는 문장들이었다.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이건…마치 성직자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것 같군요.”

“깨끗한 것일수록 더럽혀지기 쉽지. 그러고 보면 성직자는 고결한 자들만 하는 게 아니오? 어쩌면 루시엔 당신은 신에게 시험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오.”

“시험이요?”

“성직자는 이것저것 얽매이는 게 많다고 알고 있소. 특히나 beadsman은 다른 성직자보다 빡빡하다고 알려져 있지. 지켜야 할 계율도 꽤나 어려운 것뿐일 거요. 안 그렇소?”

“그 대신 beadsman은 교황만 쓸 수 있다는 기원까지 사용할 수 있어요.”

“그건 상당히 위험한 힘이기도 하오.”

“힘이 강할수록 파멸도 빨리 온다……는 것이로군요.”

마법사의 말이 그럴 듯하다. 잠시 생각하던 루시엔이 활짝 웃었다.

“요컨대, 디바인 파워가 절 거부하고 있다는 건. 제게 힘을 주신 신님께서 드디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헤헤헤. 그럼 걱정할 거 아니네요. 일단은 이렇게 디바인 파워도 사용할 수……어라?”

루시엔의 손에 가득 모여 있던 황홀한 빛이 사라졌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신님께서 화가 나신 모양이로군.”

마법사가 웃었다.

“하……됐다가 안 됐다가. 이래서는 곤란하다고요. beadsman이 다른 성직자보다 나은 게, 언제 어디서나 디바인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 마계에서도 디바인 파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말이로군요.”

“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른 성직자들이나 마찬가지 아녜요? 아니 그보다 못하구나.”

빌헬름텔이 위로했다.

“기운내시지요. 일단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실마리는 잡혔지 않습니까.”

“이제 출발 합시다.”

레미라 마법사들이 말에 올랐다. 사람 수에 비해 말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적어도 네 마리의 말은 두 명씩 태워야 했다. 루시엔은 애초에 말을 데려오지 않았으므로 함께 타야 했다.

위즈는 루시엔과 함께 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가벼웠기 때문에 말도 좋아했다.

말을 달리며 루시엔이 입을 열었다.

“일행은 여기 모인 사람이 전부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위즈님께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가 궁금하신 걸까요.”

“어째서 절 이곳에 보내신 건가요? 저는 beadsman이에요. 범용성은 높지만,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은 떨어지는 성직자라고요. 땅이 무너지고 전투가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는 제 한몸 건사하기도 바쁘죠.”

“반대로 생각하면, 생존능력이 뛰어나기에 끝까지 살아남아 아군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이 되죠.”

“하지만 저는 실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멍청하게 무너져 내리는 곳을 밟아 떨어져버렸고, 땅속에서 탈출하느라 기원까지 써버렸어요.”

루시엔은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루시엔의 뒤에 타고 있었기에 위즈는 루시엔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엔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전해졌다.

분하다. 스스로의 무능함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패배감으로 이어지는 나쁜 감정인 건 사실이지만, 이를 극복하면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위즈는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루시엔을 이곳에 먼저 보냈는지를 알려주었다.

“제가 보낸 건 beadsman이 아닙니다. 성직자지요. 성직자는 고결하기 때문에 디바인 파워의 사용을 허락받은 존재입니다. 치료를 하고, 저주를 해제하고, 버프를 걸어주는 모든 게 디바인 파워 때문에 가능 한 거 아닙니까? 그건 달리 말해 신이 함께 해준다는 겁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성직자는 무슨 일이 생기면 기댈 수 있는 존재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냥 있어만 줘도 힘이 되는 존재. 의지처.

성직자가 맡는 기본적인 포지션이다.

실제 더 오션에서는 성직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NPC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유저들의 경우에도 실제 발휘되는 능력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디까지나 체감상이지만.

루시엔도 그건 알고 있었다.

“위즈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전 타락했고…….”

루시엔 자신의 사정을 분명히 인지했다면, 그래도 위즈가 같은 선택을 했을 리 없다. 루시엔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모두의 눈에 보일 정도로 디바인 파워의 빛을 내뿜지 않았습니까? 타락한 성직자가 디바인 파워를 쓰는 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루시엔님, 이미 마도로스 社에 확인도 하셨지요?”

“어, 어떻게 그걸?”

“성직자 유저는 자존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키우는 성직자가 타락한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넘겨 짚어본 겁니다. 아무튼 마도로스 社 직원들도 음흉하군요. 그들도 루시엔님이 단순히 타락한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나 사람을 겁주고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요. 이게 시스템 상 성직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이란 이름의 퀘스트라면, 그걸 깨도록 해야겠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해주세요.”

“하지만 지금은 천덕꾸러기일 뿐이잖아요. 이렇게 문제 많은 성직자가 있으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침 저 역시 아는 성직자가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신세 좀 질게요.”

“걱정 마세요. 아무려면 메인 퀘스트보다 어렵겠습니까?”

위즈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아처인 빌헬름텔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뒤 위즈는, 다음으로 필요한 게 마법사나 성직자 같은 학자 직업군이라고 생각했다.

위즈 자신이 다양한 스킬을 익히고는 있지만, 아직은 남을 백업해주기 보다는 최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식으로 플레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위즈의 성장은 빠를지 몰라도, 무능력자의 길을 걸으며 카피캣을 얻은 의미가 없다.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위즈 개인이 가진 무력에는 한계가 뚜렷해질 것이다.

남들은 다 각성기나 필살기를 익힐 때, 직업이 없는 위즈만 그것 없이 싸워야 한다.

그전에 위즈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야 했다.

“그러자면 뒤에서 든든히 받쳐줄 사람이 필요해.”

서포트를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 서포트를 하기 위해.

“이제 슬슬 변화를 줄 때도 되었어.”

그래서 미리 핏 스톤을 통해 알아보았다. 곳곳에 흩어진 영웅의 유산들 중, 마법사나 성직자를 위한 게 있는지를.

이미 그 위치도 파악해두었고, 어느 루트를 통해 이동할지 계획도 세워놓았다.

남은 건 적당한 주인을 찾아주는 것.

마법사야 레미라를 자주 오가고 있으니, 적당한 인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성직자.

성직자는 빌헬름텔처럼 돈으로 꼬일 수 없다. 그런 걸 했다간 타락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직자들은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을 돕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위즈 한 사람에게 얽매이고자 할 리 없다.

친분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어렵다.

일단 위즈는 파티 사냥을 자주 경험해보지 못했다.

너무 이곳저곳 돌아다닌 탓도 있었지만, 다른 유저들과 함께 사냥을 하기가 껄끄러운 이유가 컸다.

가지고 있는 스킬들이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이게 아처인지 암살자인지, 마법사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그걸 설명하려면, 카피캣이란 스킬의 존재가 알려질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페널티가 존재하지만, 상극이 되는 직업군의 스킬을 한 캐릭터가 모두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이슈가 될 것이다.

몰론 이건 게임 시스템 상, 원래부터 존재하던 스킬이다. 이걸 가지고 제대로 활약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막 얻은 카피캣 스킬 자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카피캣은 이름 그대로 모든 스킬을 모방해 배울 수 없다. 보조계열과 마법계열의 스킬까지 얻고 싶다면, ‘마음속의 성전’과 ‘마력을 보는 눈’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위즈는 운이 좋아, 1달 만에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남들이 보면 카피캣이 유난히 좋은 스킬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마도로스 社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안 되지.”

위즈는 게임 속 데이터를 해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 게임 밖에서는 셸터의 코어유닛인 네메시스를 통해서, 그리고 게임 속에서는 핏 스톤을 통해.

무능력자를 선택한 위즈라는 캐릭터가 그 증거다.

여기서 핏 스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퀘스트를 통해 맺은 관계이니까.

하지만 네메시스는 아니다. 그와 네메시스가 함께 벌인 일은 해킹.

범죄다.

마도로스 社에서 위즈에게 관심을 가지면, 캐릭터의 주인인 편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잘못하면 구원절에 벌어진 레드오션의 해킹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위즈는 메인퀘스트를 깨서, 현실의 폐쇄구역을 열고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 카피캣을 배운 것이다.

“결코 발목 잡혀서는 안 되지.”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

그래서 카무플라주를 이용해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게임을 했다.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그러니 사람들과 따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위즈의 진짜 모습을 아는 건, 크레센토의 베스퍼셰일 왕가 사람들과 사략해적.

그리고 빌헬름텔밖에 없다.

마도로스 社의 관심은 피하는 건 성공했지만, 그 대신 사람을 끌어 모으기는 실패한 것이다.

“나보다 인맥이 넓은 사람이 곁에 있어야해.”

위즈에게는 자신을 대신하여 사람을 끌어 모을 존재가 필요했다.

빌헬름텔은 그 역할을 하기엔 조금 부족했다. 인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해킹으로 인해 게임이 리셋되어 모든 유저들이 레벨 1부터 새로 키우게 된지 1달이 넘었다. 그동안 빌헬름텔의 지인들 중에서, 단 한사람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캐릭터의 이름도 변함없이 ‘빌헬름텔’로 하고, 똑같이 아처로 키우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를 두고 빌헬름텔은 다들 바빠서 그런 모양이라며 쓰게 웃었다.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고 사람 냄새나는 플레이를 했지만, 정작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위즈는 루시엔을 처음 만났을 때 탐이 났다.

성직자들은 보조 직업군이기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

또한 한번 맺은 인연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서포트를 받기 위해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루시엔을 이용해 위즈가 필요한 사람을 구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위즈는 루시엔이 당면한 상황을 알고 기꺼웠다.

디바인 파워가 사라졌다가 다시 회복되길 반복하는 이상, 성직자다운 플레이는 힘들 것이다. 루시엔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힘들어할 때 도움을 준다면, 루시엔은 보다 자신과 가까워질 게 분명하다.

영웅의 유산까지 사용한다면, 성직자인 루시엔은 자신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함께 움직이는 한, 기회는 많아. 일단 사람 됨됨이도 알아보자. 뭐니 뭐니 해도 성직자는 파티의 구심점이 되는 존재니까.’


작가의말

1.

연참 3일째인가요...이번엔 어찌저찌 제때에 넣었군요.



2.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한가지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다름 아닌 삽화문제인데요.


일반 게시글에 따로 빼어 넣는 기존의 방식에서,

서재의 좌측메뉴에 위치한 게시판에 따로 빼서 올리는 방식으로 바꿀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미리 비밀글을 만들어서 끼워넣기 하는 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서 말이죠.

어찌되었든, 삽화를 직접 글에 넣지 않는 건 변함없으니...

보고싶으신 분들은 볼 수 있고,

글에 몰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꺼리는 분들은, 지금까지처럼 안 보실 수 있으니까요.




2014.11.08 수정

[8,926 => 17,887]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 작성자
    Lv.99 시러스
    작성일
    14.07.12 21:33
    No. 1

    따로 빼시는 것도 괜찮은것같네요 잘보고 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엘자르
    작성일
    14.07.12 22:26
    No. 2

    글쎄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4.07.12 22:37
    No. 3

    삽화를 넣다고 공지에다가 쓰신다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내안의천사
    작성일
    14.07.14 02:47
    No. 4

    삽화를 올릴때미다 작가후기나 공지에 알려주신다면 좋운 벙법이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내안의천사
    작성일
    14.07.14 02:59
    No. 5

    흙흙 루시엔은 찌질한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루시엔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이번화에서 저의 슬픈 향수를 자극하네요. 힐러가 인맥이 생길 수 밖에 없는게 혼자 사냥하기는 힘들고 파티를 짜야하는데 처음 힐러를 시작하면 파티 짤만한 사람도 없고 결국 이리저리 사람들 한테 마구 파티신청하다가 착한사람을 만나면 드디어 사냥이 가능해지죠. 이런나날을 반복해야 어느정도 친구목록이 차고 스스로의 파티원 납치실력이 일취월장해질때 쯤에야 사냥가고 싶을 땨 사냥갈 수 있었던 슬픈 추억이죠. 저는 고렙힐러로 가는 지름길은 힐실력이 아니라 납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단언합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셸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수정한 것. +2 14.11.08 446 0 -
공지 게임 내 각종 정보 [미 구현] 13.10.02 2,314 0 -
152 149화...5-(ED) +5 15.05.24 977 23 52쪽
151 14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9) +2 15.05.03 1,228 16 44쪽
150 14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8) +3 15.04.22 874 15 34쪽
149 14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7) +3 15.04.05 894 14 29쪽
148 14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6) +3 15.03.26 992 21 29쪽
147 14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5) +2 15.03.25 1,023 18 31쪽
146 14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4) +4 15.03.19 882 23 29쪽
145 14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3) +5 15.03.16 954 16 32쪽
144 14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2) +3 15.02.16 1,201 19 27쪽
143 14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1) +4 15.01.25 993 15 29쪽
142 13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0) +4 14.12.26 853 27 42쪽
141 13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9) +5 14.09.21 953 23 38쪽
140 13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8) +3 14.08.17 1,143 27 23쪽
139 13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7) +3 14.08.04 749 21 18쪽
138 13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6) +1 14.07.30 750 16 23쪽
137 13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5) +7 14.07.23 847 24 23쪽
136 13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4) +3 14.07.21 727 29 27쪽
135 13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3) +2 14.07.18 842 24 22쪽
134 13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2) +4 14.07.17 768 21 23쪽
133 13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1) +2 14.07.16 817 22 25쪽
132 12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0) +3 14.07.15 693 35 19쪽
131 12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9) +1 14.07.14 809 21 24쪽
» 12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8) * +5 14.07.12 778 23 39쪽
129 12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7) +1 14.07.11 883 28 26쪽
128 12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6) +2 14.07.10 869 26 23쪽
127 12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5) +1 14.07.08 895 37 29쪽
126 12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4) +2 14.07.07 736 18 21쪽
125 12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3) * +4 14.07.03 813 34 3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