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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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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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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3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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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3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6)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46.

편재의 몸이 침대위로 쓰러졌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으로부터 시작된 물기가 시트위로 번져나갔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친 참이다.

사람이 수면을 취할 때는 피지의 생성량이 증가한다. 자고 일어나 씻지 않으면 몸이 끈적거리는 이유다. 가상현실게임을 할 때는 의식 깊숙이 침잠하게 된다. 그 상태는 수면상태와 유사하다. 따라서 게임을 하고 난 뒤의 몸 역시 끈적거린다. 씻지 않으면 잠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참이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편히 잠들려고 일부러 뜨끈한 물로 씻어냈건만, 정신은 오히려 더욱 말똥말똥해진다.

“억지로라도 자두지 않으면 안 돼.”

편재는 서랍을 뒤져 수면제를 찾아냈다. 그동안 수없이 처방받아왔지만, 편재 스스로 복용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약이다.

잠이 드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편재는 악몽 때문에 심신이 시달려 고달프게 생활해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물건을 부수며 으르렁 거렸다.

당연히 편재는 남들처럼 수면활동에 휴식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시오닉스의 생체부품 실험과 연관된 악몽을 자주 꾸다보니 생긴 일이었다. 잠을 잘수록 정신력은 그만큼 깎여나갔고, 편재는 그만큼 까칠한 성격이 되어갔다.

그나마 제대로 잠을 잤던 때는, 용병생활을 했던 때였다.

그때는 목숨을 걸고 아우터라인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살아남고자하는 본능만이 우선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걸 떠올릴 틈도 없었다. 당연히 악몽은 꿀 틈도 없었고, 잠도 달게 잤다. 육체의 혹사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었다.

“당장 아우터라인을 넘어가 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역시 낮에 운동을 거른 영향이 크다고 편재는 생각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몸을 움직여준 덕분인지, 악몽을 꿔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너무 자주 접한 나머지 덤덤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악몽에 등장하는 ‘그녀’가 자신의 누나라는 것 알아낸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알지 못할 미지의 존재가, 친 혈육임이 증명되는 순간 두려움은 반감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악몽의 이유도 나름대로 생각해볼 여유마저 생겼다.

친 누나를 희생시키고 살아남은 죄책감. 그것이 편재가 생각하는 이유다.

그래서 더 오션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다.

폐쇄구역 어딘가에 갇혀 고통 받고 있을 누나를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메인 퀘스트를 깨러 사람을 모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현질을 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아직 메인 퀘스트에 도전할 실력을 가진 유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편재로서는 그저 묵묵히 게임을 플레이 해가며, 실력을 키우고 사람을 끌어 모으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적어도 중요한 순간에 강제로그아웃당하는 일은 없어야지.”

수면제도 먹었겠다, 편재는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처방받은 수면제는 일반인을 위한 게 아닌, 편재만을 위해 특별히 조제된 것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달게 달 수 있을 것이다.

침대위에 누운 편재의 뒤척임이 멎자 불이 꺼지며 웅웅 소리를 냈다. 동작감지기로부터 전달된 편재의 정보를 분석한 가정용AI가 내린 판단 때문이었다. 이 방의 주인이 자려고 한다는 것을.

웅웅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낮아지며 어둠속을 아련히 흘러갔다. 귀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소음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작은 소리는 잠을 부추기는 마력이 있었다.

‘마치…게임 속에서 들었던 부엉이 소리 같군.’

게임 속에서 밤을 알리는 존재는 높이 떠오른 달. 캄캄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거리는 뚱뚱한 새. 부엉이.

지금은 게임속이나 동물원에서만 접할 수 있지만, 라엘리언 침공 이전에는 이 땅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는 새.

“부엉이……부엉이?”

편재는 같은 단어를 되뇌었다. 자꾸만 혀끝에서 굴려지는 단어. 그럴수록 잠은 저만치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의아해하던 찰나, 편재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편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편재가 움직이자마자 방에 불이 켜졌다. 편재는 부리나케 게임기로 달려갔다.

“부엉이야! 부엉이였어!”


◇◇◇◇◇◈◇◇◇◇◇◇◈◇◇◇◇◇◇◈◇◇◇◇◇


<더 오션에 접속하셨습니다.>


로그아웃했던 공터에 빛이 번쩍이면서 위즈의 모습이 나타났다. 불침번을 서던 레미라 마법사가 위즈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오?”

위즈는 다짜고짜 그에게 달려가 질문을 퍼부었다.

“아이린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가 찾아오진 않았습니까?”

“그 아이라면 저기서 자고 있을…….”

레미라 마법사의 눈이 떨렸다. 분명 불침번을 서면서 아이린과 곰곰이 함께 있는 걸 확인했다. 그것도 수시로. 그런데 지금은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다.

그저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만 보일 뿐이다.

“큰일이다!”

즉시 자고 있던 사람들이 깨워졌다. 아이린이 사라진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아연해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사가 불침번을 섰다.

그 의미는 남다르다. 모든 직업군들 중에서 가장 감지능력이 뛰어난 게,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직업군에서도 감지를 위해 독자적인 스킬이 존재하지만, 마법사의 ‘탐지’를 뛰어넘긴 힘들다.

마법사의 탐지는 마력의 파동을 넓게 흘려, 피아식별을 하는 스킬.

세상에 퍼진 환경마력과 마법사의 마력을 연결시킨 파동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파동으로부터 몸을 숨길 순 없다.

즉, 몰래 살금살금 다가올 올 수 없다는 뜻이다.

“탐지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슨 수로 침입한 거지?”

일행이 아닌 자가 접근했다면, 이들이 진즉 알아차리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아이린이 사라졌다.

“혹시 탐지 스킬 자체에 허점이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럴 리 없네. 가만히 앉아서 쓴 탐지는, 보다 정교하게 주변을 훑지. 설사 하늘을 날아와도, 땅 속에 숨어들어도 마찬가지네.”

이 많은 마법사의 감시를 뚫고, 그 어떤 소란도 피우지 않고, 어린애를 잡아가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만큼 방법을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아이린이 사라진 건 그야말로 불가사의.

“아이린……이 할애비가 곁에 있으면서도 지켜주지 못했구나!”

울부짖던 렌틸은 혼절해버렸다. 처음엔 그도 탐지를 사용해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 흔적도 없으니, 불길한 상상으로 이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린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상 암살자가 움직인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위즈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속단하긴 일러요.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몰래 숨어들어온 그 솜씨로 죽이고 사라지면 그만이에요. 헌데 시체까지 가지고 사라질 이유가 있을까요?”

위즈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추적을 뿌리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일부러 시체를 숨긴 것일 수도 있다. 아이린을 찾느라 흩어진 순간을 노려 도망치기 위해.

그렇지만 아무도 속내를 내뱉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면 정말 현실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도 잔인했다.

“그보다……아이린이 사라진 줄 어떻게 알고 다시 들어온 것인가? 내가 알기론 이방인이 휴식을 취하면 4~5시간은 걸린다고 알고 있는데.”

“부엉이 소리 때문입니다.”

“부엉이? 그거야 밤에 우는 새 아닌가? 설마 누군가 부엉이 소리를 신호삼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낮에 해치운 거대 라이칸스로프 기억나십니까?”

“혼돈의 짐승 말이군.”

“그 녀석이 출현했을 때, 숲속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사라졌습니다.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피한 것이죠. 이곳 폐허까지 오는 길에 새의 모습을 본적 있습니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레 우는 소리하나 들리지 않고,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숲의 적막함에 다들 한마디씩 했었다. 이미 혼돈의 짐승 때문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엉이 소리는 계속 나고 있지 않는가.”

“혼돈의 짐승이 나타났는데도, 본능을 거스르고 남아 있는 새라면 뭐가 있겠습니까!”

본능을 거스르는 건 이성. 일개 날짐승에게 이성이 주어졌을 리 없다.

혼돈의 짐승에 겁을 먹고 도망쳤으니, 하루 이틀 사이에 돌아올 리 없다.

결국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부엉이는, 인위적인 존재라는 것.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패밀리어!”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용병마법사가 있는 겁니다. 우드스톡은 어디 있습니까?”

“렌틸의 약을 써서 재웠네. 꽁꽁 묶어 놓기까지 했으니 아무것도 못하지.”

레미라 마법사들의 말대로 우드스톡은 모닥불 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운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실제 우드스톡은 마법을 쓰기는커녕 패밀리어조차 부리지 못할 상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난 거로군요.”

그래도 다행이라면, 패밀리어를 부엉이로 한정 지은 것이었다.

부엉부엉.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엉이 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이동 중임이 틀림없다. 위즈는 정령강화-바람을 신발에 걸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신발을 휘감고 돌았다.

“먼저 뒤쫓겠습니다. 밤이니까 섀도 런 스킬로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조심하게. 싸우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만 끌어주게.”

“알고 있습니다.”

위즈의 모습이 발밑으로 사라졌다.

만물의 그림자를 품은, 밤의 어둠속으로.


◇◇◇◇◇◈◇◇◇◇◇◇◈◇◇◇◇◇◇◈◇◇◇◇◇


아이린은 기묘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다소 촌스러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촌스러운 복장을 했기 때문에 기묘한 게 아니었다. 한창 멋 내는데 신경 써야 할 젊은이들이 촌스러운 복장을 했기 때문에 기묘한 것이다.

지나치게 부풀린 소매와 바짓단은 백년도 전에 유행하던 복장이다. 아마 그 당시엔 아끼고 아꼈다가 축제에나 빼입고 갔을법한 디자인이었다. 지금은 지나치게 나풀거린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복장이었다. 가끔가다 마을의 노인들이 기분전환삼아 낡은 옷을 꺼내 입을 때에나 볼 법한 복장이다.

아이린도 할아버지인 렌틸이 저런 옷을 입은 걸 본적이 있었다. 아마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때 아이린은 어린나이였지만, 확실히 구린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입을 열어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초보 아처 복장보다는 낫지 뭐.’

아처복장의 옷은 보통 거무칙칙하거나, 아예 흰색에 가까운 밝은 회색의 옷감으로 만들어진다. 근접전에 약한 아처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엄폐율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반면, 초보아처 복장은 그런 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예 엄폐율을 제로로 만들어버렸다.

노랑과 초록이 섞인 굵은 체크무늬의 옷.

이 옷은 지나치게 사람들 눈에 띄었다. 노랑과 초록은 서로 어울려 촌스러움이 뭔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옷은 아처가 입는 옷이다. 이 옷을 입고 숲속에 들어가면, 사냥감들이 알아서 도망칠 것이다. 만약 전장에 선다면,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훌륭한 표적이 된다.

그래서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옷이다.

현지인들은 아무도 이 옷을 입지 않는다. 다만 이방인들만이 좋다고 구해 입을 뿐.

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린이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방인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최근 만난 위즈라는 이방인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위즈만큼이나 어리석은 자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조금 전 보았던 펑퍼짐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화려한 갑옷이 보였다. 그 뒤로는 뭔가 특별한 직업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린은 먼저 화려한 갑옷을 살펴보았다.

‘신분이 높다고 떠들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저렇게 만든 거야?’

이렇게 생각될 만큼 갑옷은 지나치게 장식이 많았다. 갑옷 가득 덩굴무늬 장식이 달려 있었으며, 어깨에 두른 붉은 망토에도 한 땀 한 땀 금실로 자수를 넣었다. 일부분만 보여서 정확한 도안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왠지 그것은 사자 같았다. 보통 높은 사람들은 사자나 용을 좋아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갑옷을 입은 사람의 체구도 커서, 위풍당당하니 보기엔 좋았다. 보기엔.

하지만 그 갑옷 곳곳에 자잘하게 나있는 흠집을 본 아이린은, 저 갑옷이 장식용이 아닌 실전용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투구의 얼굴을 감싸는 바이저(면갑)의 틈을 저격당하거나, 멀리서 쏜 대인 마법을 두들겨 맞아도 할 말이 없다.

투구에다가 정성들여 금박을 박아놓은 것까지 확인한 아이린의 감상은 이러했다.

‘자살희망자.’

다음 사람에게 시선을 옮긴 아이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사의 경우는 그래도 귀족의 허영심이라고 이해해주기라도 했다. 근데 이 사람은 귀족이 아님에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

먼저 다 찢어진 모포 같은 걸 둘러썼는데, 후드가 달린 걸로 보아 로브가 분명했다.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닳고 이지러진 후드를 본 아이린은 곧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다.

‘어릴 때 입던 걸 어른이 되어서도 입고 있는 거야. 그래서 저렇게 헐어버린 거고. 아끼는 것도 좋지만, 새 것을 사서 입지 왜 궁상이야 궁상은.’

남자의 빈궁함을 발견하니, 그 남자의 다른 것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온몸 빽빽이 달고 다니는 단검은, 싸구려라 부러질 것을 염려해 가지고 다니는 스페어로 여겨졌다. 무릎을 꿇은 남자의 앞에 떨어지는 돈주머니는, 앞서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선해주나 보다. 아이고. 그게 적다고 더 달라고 하나?’

기사에게 매달렸다가 발길질에 걷어차여 구른 남자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린은 왠지 그 남자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뒤를 따랐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큰길임에도, 아이린의 작은 몸은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전부 아이린의 몸을 통과해 갔기 때문이다.

‘와. 꿈이라 이거지?’

남자는 가게로 들어가 술을 한 병 들고 나왔다. 남자는 맨발이 되어 있었다. 술값이 없어 신발을 판 것이다. 가게 주인이 신발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진저리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술도 고급이 아니었다.

라벨조차 달려 있지 않은 탁한 밀주였다. 대신 엄청 독해서 빨리 취하고 싶은 술꾼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다.

남자는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을 피해, 어둠을 쫒아.

골목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는 이내 병 속의 액체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에서 입을 뗀 남자는 입속의 내용물 대부분을 뱉어내고 말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콜록거리는 입모양만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하얗고 가녀린 손이 남자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아이린은 그런 복장은 또 처음 봐서 눈이 동그래졌다.

‘무, 무슨 옷이 저래?’

남자의 술을 뺏어든 건 어떤 여자였다. 그 여자는 가슴을 가리는 손바닥만 한 천을 끈으로 묶어 몸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싹둑 잘라먹은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속옷이 훤히 보였다.

‘아니, 웃옷이라고 생각한 것도 속옷 같은데?’

그런데 속옷치고는 또 지나치게 화려했다. 무슨 금실은실로만 짰는지, 어두운 골목에서도 환하게 빛난다. 더 신기한 것은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나마 붉은 잔상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야?’

옷이 너무 파격적이라 미처 얼굴을 보지 못한 아이린이었다. 지금이라도 대담한 복장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뭐야…….’

여자는 입과 턱을 제외한 나머지 얼굴부분을 감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이런 기괴한 여자를 만난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만, 남자는 오히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시던 술까지 빼앗겼음에도.

아이린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아챘다.

‘입술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아이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의 오가는 대화를 듣던 아이린은, 남자 쪽이 도적이고 여자 쪽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둘은 한때 동료로 활동했다. 그때는 많은 동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많은 동료가 없다. 무거운 분위기로 보건데, 아마도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아이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는 조금 전 기사를 찾아갔다가 얻어맞고 쫓겨나온 일을 이야기 했다.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던 여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당신’과 ‘그대’라는 단어만을 사용했다. 그러니 이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왠지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무슨 영웅이야기도 아니고……어째서 갑자기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내가 그만큼 피곤한 걸까?’

그때 다른 목소리가 아이린에게 속삭였다.

- 꼬마야. 네가 본 건 실제 벌어진 일이다.

‘넌 누구지?’

- 너희들이 악령이라고 부르는 존재……였었지.

‘악령? 내 몸을 뺏은 거야?’

- 이미 몸은 얻었다. 그러니 네 몸엔 관심 없다.

‘그럼 어째서 내게 들어와 있는 거야?’

- 너에게 부탁이 있기 때문이다.

‘부탁이라고?’

- 그렇다. 이 버려진 유적 지하에 있는 게이트를 열어서, 우리들을 그 너머로 던져주면 된다.

‘유적? 유적이라고!’

마법공학을 공부하는 아이린에게 유적이란 새로운 지식이 득실거리는 지식의 보고였다. 더군다나 이 폐허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곳.

즉, 아이린이 최초발견자가 되는 것이다.

아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눈에 들어오는 건, 푹신거리는 털가죽이다.

‘아……내가 타고 온 그 곰이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이 누운 자리를, 레미라 마법사들의 잠자리가 둘러싸고 있다. 탑에서 보낸 마스터를 만날 때까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즉시 몸을 움직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 너무 들뜨진 마라. 넌 지금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있지? 저들이 유적에 가려는 널 순순히 보내주겠느냐?

한때 악령이었다는 존재의 말이 옳다. 유적이 탐났지만 아이린은 몸을 웅크렸다.

‘그, 그럼 어떡해?’

- 난 네가 누워있는 땅 밑에 있다. 유적도 땅속에 있으니, 내가 힘쓰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옮길 수 있다.

아이린은 모닥불 근처에서 명상중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불침번일 때는 기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할아버지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탐지 때문이다.

그런 탐지를 무시하고 자신을 빼돌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이린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수상한 존재가 암살자와 한패이거나, 암살자 본인일 수도 있었다.

‘미안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날 건드리지 마. 이상한 일이 생기면 소리 지를 거야.’

- 그렇다면 내 목숨을 너에게 주도록 하지.

아이린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그것은 반질거리는 무엇이었는데, 손끝에 와 닿는 감각만으로도 아이린은 골렘의 코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골렘? 너 골렘이었어? 아니, 그보다…나 지금까지 골렘이랑 이야기한 거야?’

- 바하르칼의 네크로맨서가 악령을 불러 코어에 담았다. 마력공급이 끊겨도 움직이는 골렘을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악령은 산자가 이 땅에 남겨놓고 간 기억이자 망령들. 육체를 얻었으니 자아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우리들은 창조주를 거부했다. 우리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게 뭔데?’

- 너에게 보여준 우리들의 기억, 거기에 등장하는 남자를 쫓는 것이다.

아이린은 남루한 행색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싸구려 인생 같지만, 싸구려 술조차 입에 대지 못하던 이상한 남자.

‘넝마주이?’

- 그는 넝마주이가 아니다! 그는…….

‘그는?’

-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 그건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의 행적을 쫓아가야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니 근거도 없다. 이 이상 대화를 해야 하는지 아이린은 회의적이었다.

‘하……골치 아프네.’

아이린은 골렘의 코어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어쩌면 이건 그냥 평범한 골렘의 심장일 뿐이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따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린은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여겨졌다.

‘좋아. 네 말대로 해줄게. 그 대신, 곰곰도 함께 데려가.’

- 그 소환수 곰도 함께?

‘왜? 설마 덩치가 너무 커서 힘들 거 같아?’

-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 곰까지 옮긴다면 너무 많은 힘이 소모된다. 우리들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약하다.

‘그럼 나도 안가.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할아버지랑 다른 분들이 걱정할 텐데. 적어도 곰곰이랑 가면 그래도 안심이잖아?’

- 알겠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

아이린과 곰곰이 누워있던 땅이 통째로 울렁댔다. 이상을 느낀 곰곰은 의태를 발동시켰다. 그 몸이 투명하게 변하며 아이린을 감싸 안았다. 아이린의 모습도 곰곰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건너편의 허물어진 벽만이 자리에 남았다.

주위와 동화되는 완벽한 의태다.

이렇게 자신과 아이린을 보호한 곰곰은, 울부짖어서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워…….

그때 곰곰은 자신의 주둥이를 막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괜찮아. 곰곰아. 해치지 않아.”

주인이 없기에 곰곰은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했다.

단단하던 땅이 진창처럼 물렁대는 건, 분명 이상 현상이었다.

위험하다면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며, 주인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이 자리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곰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키는 대상인 아이린이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둬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곧 둘의 몸은 땅속으로 쑥 끌려들어갔다.

소리도 없었다. 먼지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작은 진동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그냥 물속에 돌멩이 하나를 가만히 밀어 넣은 것만 같은.

완벽한 실종이었다.


작가의말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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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149화...5-(ED) +5 15.05.24 977 23 52쪽
151 14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9) +2 15.05.03 1,229 16 44쪽
150 14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8) +3 15.04.22 874 15 34쪽
149 14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7) +3 15.04.05 894 14 29쪽
148 14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6) +3 15.03.26 992 21 29쪽
147 14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5) +2 15.03.25 1,024 18 31쪽
146 14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4) +4 15.03.19 882 23 29쪽
145 14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3) +5 15.03.16 954 16 32쪽
144 14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2) +3 15.02.16 1,201 19 27쪽
143 14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1) +4 15.01.25 993 15 29쪽
142 13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0) +4 14.12.26 854 27 42쪽
141 13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9) +5 14.09.21 953 23 38쪽
140 13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8) +3 14.08.17 1,143 27 23쪽
139 13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7) +3 14.08.04 750 21 18쪽
» 13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6) +1 14.07.30 751 16 23쪽
137 13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5) +7 14.07.23 848 24 23쪽
136 13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4) +3 14.07.21 728 29 27쪽
135 13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3) +2 14.07.18 843 24 22쪽
134 13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2) +4 14.07.17 769 21 23쪽
133 13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1) +2 14.07.16 817 22 25쪽
132 12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0) +3 14.07.15 693 35 19쪽
131 12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9) +1 14.07.14 809 21 24쪽
130 12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8) * +5 14.07.12 778 23 39쪽
129 12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7) +1 14.07.11 883 28 26쪽
128 12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6) +2 14.07.10 869 26 23쪽
127 12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5) +1 14.07.08 895 37 29쪽
126 12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4) +2 14.07.07 736 18 21쪽
125 12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3) * +4 14.07.03 813 34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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