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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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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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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4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2)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52.

예전과 달리, 요즘 게임의 퀘스트는 발동되는 조건이 다양하다. A조건이 안되면, B조건으로 발동된다. B조건이 없으면 C조건으로 발동된다.

A or B or C or……이런 식으로 조건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퀘스트가 발동되지 않는 일은 절대 없다. 다만, 퀘스트의 발동이 늦춰지고, 난이도가 조정될 뿐이다.

이게 바로 A조건의 법칙.

예를 들어 성검전설이라는 게임이 있다고 치자.

마왕토벌 퀘스트의 발동을 위해, 신탁을 받는 게 A조건이라고 치면.

일찍부터 전쟁 물자를 준비하고 동료를 모으기가 수월해진다. 성검을 든 용사의 후예가 초반부터 등장하여, 마왕군을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유저진영의 피해도 줄어든다. 게다가 퀘스트의 조기 발동에 따른 보너스 때문에, 경험치나 아이템 드랍 등등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A조건인 신탁을 얻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하지만 유저들에게 A조건 충족의 난이도는 중요하지 않다.

[High Risk, High Reward]

높은 위험부담에 대응하는 짭짤한 보상이 뒤따르기에.

‘모든 게임을 통틀어 A조건이 충족되었던 건, 손에 꼽을 정도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회가 지나가버리니 아무리 빨라도 C조건 충족에 그치지.’

C조건을 통해 퀘스트를 발동시켰다고 하여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얻은 보상아이템에 붙은 옵션이 전부 MAX치라, 하루에 억대의 돈을 벌어들인 유저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C조건만 건져도 아주 감지덕지인 것이다.

유저 수 랭킹 50위인 성검전설이 이럴진대, 10위권인 더 오션은 더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더 오션이 1달여 전 해킹으로 인해 모든 데이터가 초기화되었다.

캐릭터는 물론이고, 유저들이 그동안 벌어둔 재산까지 모두 날아간 상태.

손실을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 다들 발버둥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A조건으로 발동되는 퀘스트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력적일 것인가.

‘확실히 구미는 당긴단 말이지.’

빙글뱅글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린 여자애에 불과한 NPC, 아이린의 숨겨진 진가.

‘하지만 아이린을 살리는 건 둘째 치고, 빼돌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냐.’

아이린을 죽이기 위해 동원된 인원이 상당하니, 뒤에서 몰래 돕는 건 사실상 불가능.

빙글뱅글이 직접 아이린을 찾아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놓고 티 나게 아이린을 살려두면, 게임 갱들의 보복을 받는다.

그렇다고 그냥 아이린을 죽이면, 자기 손으로 A조건을 날려먹는 셈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뭔가를 잃는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얻지도 못할 이득에 연연해봐야 좋을 게 없겠지.’

빙글뱅글은 그냥 아이린을 살리는 걸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때 커다란 사건이 연달아 터지며 더 오션 속 세력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큰 변수는 안티 바하르칼의 등장이었다.

이름부터 바하르칼을 적대하는 조직이었지만, 숫자만 많을 뿐 쉽게 통솔되지 못하는 오합지졸들이다. 다들 해킹으로 게임이 리셋되기 전, 바하르칼 용병에게 눌려 살던 유저들이었다.

“한풀이나 하려고 모인 쓰레기들이다. 적당히 눈치 봐가면서 밟아주면 되겠지.”

차기 간부후보로 내정된 게임갱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안티 바하르칼 세력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 증거로 소규모의 국지전에서 바하르칼이 밀리거나 무승부를 이루는 일들이 발생했다.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원래대로라면 게임 초반에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었다.

용병의 성장속도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매우 빠르다.

의뢰를 성공할 때마다 받는 각종 버프 때문에, 경험치 획득량이 1.5~3배나 차이 났으며. 장비 역시 바하르칼의 유능한 장인의 제품을 싼값에 구해 사용했다.

레벨을 끌어올리기가 쉽고 장비의 평균적인 스펙도 높으니, 다수와 다수가 뒤얽히는 난전에서 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몇 곳에서는 이해가 안 갈만큼 실적이 나빴지. 특히 공통스킬인 ‘이글아이’를 확보하며 벌인 전투가.‘

한스라는 사기꾼 NPC까지 끼어들어 스킬북의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지전이었기에, 바하르칼 용병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레미라 침공 작전에서 생겼다.

바하르칼에서는 레미라를 공격하기 전, 다양한 사전 작업을 해두었다.

각 왕국들이 배를 띄우지 못하도록 광역 기상통제마법을 깔고, 제1대륙의 해안과 가까운 시에니투스에 무혈입성하기 위해 그곳의 일부 무법자들을 구워삶았다.

이는 약초의 품귀현상을 일으키는 사전작업이기도 했다.

‘레드오션의 해킹 후, 더 오션이라는 이름으로 게임 서버가 열린 게 불과 1달 전. 하지만 전쟁준비는 이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되어 있었다. 한낱 프로그램 덩어리에 불과한 NPC가 열리지도 않은 서버 속에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지. 이것은 게임 속 시나리오가 그렇게 씌어졌고,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

거기에 더해, 대다수 게임갱들은 바하르칼 용병단에 소속되었다.

게임갱이 동원하는 자금량은 일반 유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초반부터 전쟁 준비에 끼어들자 그 기간은 무서운 속도로 단축되었다.

전쟁 시나리오는 바하르칼에 유리하도록 쓰여졌으며, 게임 갱이 밀어준 덕분에 전쟁 준비는 일찍 끝마쳤다.

질 수 없는 싸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광역 기상통제마법의 중심부가 되는 섬은 거대한 바윗돌을 얻어맞고 곰보투성이의 땅이 되어버렸다.

지형이 바뀔 정도의 포격을 날린 건, 다름 아닌 해적단-레이스.

이름 모를 군소 해적이 아니라, 어엿이 선단을 구성한 메이저 해적단이었다.

자유도시에서 일부 무법자들과 맺은 계약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시에니투스에 모인 무법자들은 전원 바하르칼에 응징을 선포했다.

양민의 주머니를 털던 산적들은, 대상을 바꿔 바하르칼 용병을 공격했다.

해적들은 바하르칼의 배를 가라앉히고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들은 통행세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항복권유도 하지 않았다.

레미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병력이 깎여나가자, 바하르칼 용병단의 상층부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연일 고성이 터져 나오는 살벌한 분위기는 정말이지 게임하기 싫어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빙글뱅글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잇페인이 누구던가.

더 오션 세계관에서 손꼽히는 악당이다.

‘300년을 산 괴물이 쉽게 당하겠어?’

하지만 거짓말처럼 잇페인은 패배했다.

루인 블래스터를 탑재한 기함, 페인킬러1호를 날려 먹었다.

레미라에서는 마법사들의 협공을 받아 패퇴했다.

수많은 분신을 이용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 붙였음에도 결과는 패배.

물론 후발대가 도착하여 점령한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잇페인은 바하르칼에 독촉했다.

후발대는 언제 오느냐며.

당시 바하르칼에서 통신담당을 맡은 유저는 울먹이며 빙글뱅글을 돌아보았었다.


◇◇◇◇◇◈◇◇◇◇◇◇◈◇◇◇◇◇◇◈◇◇◇◇◇


“어, 어떡하지?”

“어쩌긴 뭘 어째. 바른대로 불어야지.”

빙글뱅글은 다른 왕국의 군함들이 몰려와 바하르칼 앞바다가 봉쇄된 사실을 알렸다.

- 그놈들이 어떻게 알았단 말이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 단장의 명령서가 도착했습니다. 패장은……으음.”

- 무슨 소린지 알겠다. 귀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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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은 즉석에서 패전의 책임자를 지목했다.

선발대를 이끌던 잇페인.

후발대의 발이 묶이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상 레미라 침공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귀환한 잇페인은 곧장 자택에 구금되었고, 그가 맡은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자가 몰락하자, 그를 못마땅해 하던 자들은 정치질을 했다.

허울만 좋았지 사실상의 협잡.

그 첫 작업은, 잇페인의 세력을 깎아놓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에 대한 숙청이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임무에 필요한 물품들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아, 암살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화살을 깎고, 뱀·독충을 잡아 독을 채취했다.

타깃의 습관까지 파악한 정보는, 두루뭉술한 생활패턴-(6시)기상·(8시)출근·(12시)식사……같은 내용으로 바뀌었다.

정밀한 축척의 지도는, 동네주민이 그린 약도 수준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나마도 거주지만 그려져 있었지, 작은 오솔길이나 지하수로 같은 건 파악되지도 않았다.

부실한 지원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암살임무 수행 중 사망률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통상의 3배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잇페인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암살자들이 이렇게 죽어나가자, 흉흉한 분위기가 바하르칼 용병단에 퍼져나갔다.

빙글뱅글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하지만 아이린 암살에 투입된 인원들은 아직 멀쩡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게임이 오픈된 건, 고작 한 달. 하지만 게임 속 시간으로는 3년 전부터 아이린의 암살이 계획되어 있었다. 갑자기 지원이 끊겼다고 해서, 신성왕국에 파견된 암살자들이 갑자기 죽어나가거나 그러진 않는다.’

오랫동안 준비된 암살이었기에 더더욱 실패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누군가 직접적인 조작을 가해야만 한다.

그 역할을 제의받은 게, 다름 아닌 빙글뱅글이었다.

빙글뱅글은 고민을 덜었다. 이건 바하르칼 상층부의 압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우기면, 게임 갱들도 해코지를 하진 않을 것이었다.

‘여기에 안전장치를 하나 더 해두어야겠지.’

빙글뱅글은 안면이 있던 게임 갱 유저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게임갱과 바하르칼 상층부 사이에 끼어 입장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게임 갱은 10분도 안 되어, 빙글뱅글에게 답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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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의논해보았는데……아이린의 암살은 일단 유보하는 걸로 하지.”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린애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지금은 집단속을 할 때지.”

“그렇지요.”

빙글뱅글은 자신이 한 이야기가 이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바하르칼 내부에서 파벌이 갈리는 건, 게임 갱은 물론이고 바하르칼 소속이라면 모두가 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까지 파벌의 명령을 강요하는 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건 이변이다.

바하르칼과 맺은 계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 __규정. 01) 이방인은 바하르칼 용병단의 내홍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


용병단이란 별의별 종자들이 있는 곳이기에, 툭하면 싸우고 으르렁대기 일쑤.

여기에 휘말리면 유저들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기고 우겨 집어넣은 조항인데 이걸 정면으로 어기고 있으니, 게임 갱이고 아니고를 떠나 발끈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상층부가 시키는 대로 해도 좋다. 우리에게 알린 시점에서 의리는 지킨 셈이니까.”

“그러다 정말 암살이 실패한다면…….”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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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게임갱들은 바하르칼 소속 유저들에게 알렸다.

상층부의 압력에 저항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파벌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부채질하는 이유는 뻔하다.

바하르칼 내부의 혼란을 빠르게 종식시키는 한편, 이 기회를 이용해 게임 갱들이 우위를 차지할 생각인 것이다.

‘유저들을 이용해 역으로 증거를 모을 셈이지.’

용병이란 계약을 중요시 여기는 족속.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대로라면 파벌싸움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이방인을, 도리어 파벌싸움의 도구로 끌어들였다는 게 밝혀지면 파장이 클 것이다.

기존의 세력과 협상을 하던지, 아니면 완전히 몰아내고 게임 갱이 요직에 들어앉을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게임 갱들은 세를 불린다.

‘그리고 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A조건 퀘스트를 만끽하면 되는 거야.’

굳이 리퍼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빙글뱅글은 혼자서 독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암살임무에 투입된 마법사는 빙글뱅글 뿐이 아니었다.

100명 가까이 되는 인원 중에, 유저가 10명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떠올린 빙글뱅글은 골치가 다 아팠다.

바하르칼 상층부나, 게임 갱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졌다.

아이린을 죽이든 살리든 중요히 않다.

그런데 아이린이 퀘스트 발동의 A조건인 사실이 밝혀지면?

‘서로 독차지 하려고 별짓을 다하겠지.’

어쩔 수 없이 빙글뱅글은 리퍼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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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했나?”

“게임 갱이고 바하르칼 윗분들이고, 눈치 볼 필요 없어졌습니다.”

“파벌 싸움에 눈코 뜰 새 없으니까?”

리퍼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 작자 어디까지 아는 거지?’

빙글뱅글은 인상을 구겼다.

그가 아는 리퍼는 실력 좋은 암살자일 뿐이었다. 퀘스트의 A조건을 알아낸 것은 우연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바하르칼의 내부 정보를 알아낼 정도면, 리퍼는 평범한 암살자가 아니다.

“정말 큰일이긴 큰일인가보군…바하르칼 용병도 아닌 당신이 알고 있을 정도면.”

빙글뱅글은 경계심을 내비쳤다.

“나도 소식통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빙글뱅글씨는 운이 좋군.”

“아이린 때문이라면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나도 다 알아보았고, 그 아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다 아니까.”

“그게 아니라, 내 손에 죽지 않아서 운이 좋다는 거지.”

마법사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런 배짱이라니 빙글뱅글은 질려버렸다. 하지만 불쾌함보다 궁금함이 먼저 떠올랐다.

“당신은 마치 마법사를 목표로 한 암살이 성공할 것처럼 말하는군요?”

“당연하지. 뭣하면 실력으로 보여줄까?”

“헛소리.”

“믿지 않는군. 좋아. 오늘 저녁, 다시 찾아오겠다.”

이날 바하르칼의 마법사들이 이유모를 죽음을 당했다. 다들 임무를 받아 대기 중이던 자들이었다.

그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빙글뱅글은, 인력 충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작성해야 했다.

유저들의 경우엔 여러 번 죽어 레벨이 깎인 자도 있었다.

그들은 레벨 요구치 미달로 인해, 자연스레 암살 지원 임무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빠져나간 인원 대부분이 신성왕국-바하로 들일 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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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이린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에는, 리퍼와 나 둘이서 야금야금 이쪽의 전력을 깎아먹은 덕이 크지.’

암살임무에 투입된 마법사들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원거리 지원만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하나 둘씩 암살당하자, 유저들은 원거리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게임 갱, 바하르칼 상층부.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방인이 아닌 NPC들조차 상층부의 명령을 듣는다며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임무에 사용할 물자조차 회수하지 않았다.

시약의 재료가 넘쳐나자 빙글뱅글은 즉시 네크로맨서 관련 퀘스트 하나를 서둘러 발동시켰다.

에고를 가지고 자율 기동되는 골렘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퀘스트 이름은 ‘저주의 인형’.

먼저 아이린의 머리카락과 소지품이 필요했다. 이것은 미리 파견된 암살자들의 손을 빌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빙글뱅글은 그것을 섞어 골렘의 코어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골렘은 아이린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대상을 해하지는 않지만, 독점하려고 별짓을 다할 터였다.

‘적당한 시기에 투입하면, 아이린에게 날아드는 화살 정도는 막아내겠지.’

그 다음으로 한 일은, 아이린의 할아버지인 렌틸에게 걸어둔 암시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미 잇페인이 걸어둔 것을, 시스템 창을 통해 내용만 살짝 바꿨다.

‘버려진 폐허는 인적이 드물어 찾기 힘들다’는 내용으로.

그렇게 되면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아이린이 올 곳이 정해진다.

빙글뱅글은 여기서 아이린을 가로챌 생각을 했다.

리퍼와는 잠깐 손만 잡았을 뿐, 함께 퀘스트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여기에 변수가 끼어들었다.

잇페인의 안배로 중급마족이 엔틸리움에서 날뛰게 된 것이었다.

빙글뱅글도 조금은 도움을 주었지만, 성공확률은 희박하다 여겼다.

신성왕국에서 마족 소환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것도 중급 마족이?

하지만 보란 듯이 소환은 성공했다.

네크로맨서인 빙글뱅글은 곤란해졌다.

‘수준 낮은 놈이나 기어 나와, 대충 성기사들에게 처맞고 끝장나길 바랐건만.’

이블고트 같은 대형마족이 소환되어버렸다.

이 나라는 바하라는 이름보다는 신성왕국으로 흔히 불려진다.

그런 곳에서 중급마족이 소환되었으니, 관계된 네크로맨서를 잡아들이려 할 것이다.

이단심문관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게다가 강화된 치안도 문제다. 잘못하면 암살자들이 모조리 붙잡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이린을 가로챌 틈을 만드는 것도 물 건너간다.

‘빌어먹을 잇페인. 구금된 상태에서도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느냐고.’

하지만 생각보다 암살자들이 유능한 건지, 그들은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려 했다. 수차례 아이린 일행을 공격했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빙글뱅글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이 폐허까지 왔다.

이 폐허의 지하 구조물을 통해 아이린을 빼돌리면 되었다.

포탈의 가동법은 다른 퀘스트를 통해 이미 확보된 상태.

하지만 딱 한 번, 빙글뱅글이 부린 변덕이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제길……골렘의 강화재료가 문제였어.”

그는 일부러 위즈와 전투를 벌이며 거대 골렘의 조각이 폐허의 땅속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빙글뱅글의 마력을 품은 조각이 넓게 퍼져 있다면, 작은 골렘이 레미라 마법사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렘은 정교한 회피 같은, 고난이도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

따라서 출력을 올려 사고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빙글뱅글은 즉석에서 망령을 불러내, 작은 골렘의 심장을 강화시켰다.

빙글뱅글은 강화가 되어 사고력이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지, 사고력이 올라간 작은 골렘이 자신을 배신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우리들을 괴롭히지 마라…….

- 괴롭히지 마라…….

- 지배하려하지 마라…….

작은 골렘에 주입된 명령은, 단 하나.

아이린을 독점하는 것.

자신이 아이린을 빼돌리는 일을 두 눈뜨고 볼 리 없다.

그렇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작은 골렘의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작은 골렘 쪽에서 은밀히 찾아와 한 가지 제의를 했다.


◇◇◇◇◇◈◇◇◇◇◇◇◈◇◇◇◇◇◇◈◇◇◇◇◇


- 너. 날 도와라.

“뭐?”

자신을 배신한 피조물 따위 당장 없애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대화 같은 걸 나눌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빙글뱅글은 공격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작은 골렘의 이름 앞에 NPC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더 오션에서 유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NPC로 분류된다.

그 뜻이 조종불가캐릭터(Non Playing Character)이지만, 기본적인 역할은 이 세계의 주민.

즉, 게임 속 배경이다.

스쳐지나가는 이웃들,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병들, 가게의 점원들 등등.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게임 속 세계관이 유지되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 모든 이를 만나볼 필요가 없다.

퀘스트를 주는 NPC만 골라 만나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친목을 도모할 때만 접촉하면 된다.

그 외에는 NPC라고 해도 머리위에 이름 외에 특별한 표시가 뜨지 않는다.

아니, 통성명을 하지 않으면 이름조차 뜨지 않는다.

그런데 작은 골렘은 머리위에 ‘크림슨 하트’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다.

‘그래, 이름이 뜨는 거야 납득이 간다. 내가 만들었지만, 통제를 벗어나 조종을 못하니까. 그러니까 NPC 상태이겠지. 하지만 이름 앞에 진짜 [NPC]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건, 퀘스트를 주는 NPC인 경우뿐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소환물이었던 게,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 건가?’

믿을 수 없지만, 그 부조리한 존재가 눈앞에서 얼쩡대고 있다. 이젠 믿지 않을 수 없다.

‘버그 같은 거라면 나중에라도 처리하면 되겠지.’

일단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빙글뱅글은 골렘-크림슨 하트에게 되물었다.

“아이린을 쫓아간 줄 알았더니, 배짱 좋게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그리고는 도와달라고?”

- 그렇다.

“당장이라도 널 박살낼 수 있다. 내가 못할 것 같나?”

- 날 만든 건 너다.

“그러니 박살내는 것도 쉽지.”

- 넌 날 부수지 못한다.

“어째서이지?”

빙글뱅글은 크림슨 하트의 화제전환을 보며 흥미를 느꼈다.

골렘의 심장에 담긴 본래의 출력을 올린 건, 골렘의 사고력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아예 새로운 AI가 부여된 것 같지 않은가?

크림슨 하트의 몸뚱이 가운데에 드러난 붉은 보석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성대처럼 진동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내게 주입된 명령은 아이린을 독점하는 것. 그것은 너의 목적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빙글뱅글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짤막한 한마디를 뱉었다.

“계획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알았으니, 시간낭비 할 이유는 없다.

설사 자신을 배신한 피조물이라 해도, A조건으로 발동되는 퀘스트만 받는다면, 기꺼이 손잡을 수 있었다.

- 이 폐허의 지하에 포탈 장치가 있다. 그걸 통해 아이린을 빼돌린다.

빙글뱅글은 적잖이 놀랐다. 발밑에 있는 포탈의 존재는 일정한 퀘스트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는 골렘이 그걸 알고 있다.

그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작동되는 물건인가?”

-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작동은 가능하다. 아이린은 마법공학을 배웠다. 그녀를 이용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

“흐음…….”

빙글뱅글은 크림슨 하트의 말에서 거짓을 감지했다.

포탈을 이용해 빼돌린다고 했는데, 만약 작동이 되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이 아닌가.

더군다나 지하라고 했으니,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포탈이 작동되는 것과 동시에 지하 구조물이 붕괴되어버릴 테니까.

네크로맨서 역시 엄연한 마법사의 한 갈래.

그런 상식도 모를 리 없었다.

‘아이린을 독점하고 싶다면서, 불확실한 수단을 쓰려한다고? 웃기는군. 포탈에 문제가 있다는 건 100%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알아낸 정보대로라면 포탈은 멀쩡해.’

같잖았지만 빙글뱅글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주었다. 어차피 이번일이 끝나면 크림슨 하트를 해치워버릴 생각이었다.

한번 틀어진 사이였다. 뭐가 좋다고 계속 붙잡고 있겠는가.

“포탈이라면 꽤나 편리하군. 그걸 어떻게 이용할 생각이지?”

- 먼저 아이린에게 접근해 포탈로 간다. 그리고…….

“잠깐. 레미라 마법사의 감시는 어떻게 뚫을 거지?”

- 조금 전 싸움에서 네가 터뜨린 골렘이 있지 않나? 그 조각엔 이질적 힘, 즉 너의 마력이 남아있다. 유적의 땅에 광범위하게 퍼진 너의 마력을 따라 이동하면, 마법사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확실히 사고력이 올랐군.”

감탄하면서도 빙글뱅글은 마음을 굳혔다.

‘이놈…빨리 없애버리는 게 좋겠군. 까딱하면 수작을 부려서 아이린을 빼 돌릴지 몰라.’

방법을 궁리하던 빙글뱅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포탈이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다면 굳이 날 찾아올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 아마도 내가 하게 될 일은 납치와 다름없을 것이다. 아이린을 보호하는 마법사들이 날 쫓겠지. 나 혼자서는 그들을 막지 못한다.

“나 보고 시간을 끌어달란 얘긴가?”

- 넌 네크로맨서다. 언데드를 풀어 놓는 건 쉬운 일이다.

“그게 다인가?”

- 제일 중요한 게 남아있다.

“뭐지?”

- 포탈을 감싼 보호막 안쪽으로 날 넣어다오.

크림슨 하트의 말을 들은 빙글뱅글은 쾌재를 울렸다.

‘역시 그랬군!’

포탈의 내부에는 보통 골렘과 같은 소환물의 진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바위덩어리가 날뛰어 사람이 다치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전쟁 중에는 소환물에 의한 테러 위험도 존재했다.

당연히 언데드는 포탈을 이용하지 못했고, 골렘의 경우는 그 심장만이 반입을 허가받았다.

“네 심장을 뽑아 포탈까지 옮겨달라는 얘기로군.”

- 그렇다.

“어렵진 않다만, 심장상태에서 어떻게 아이린에게 접근할 생각이지?”

- 네크로맨서라면 지푸라기 인형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나?

빙글뱅글은 저주 의식에 쓰이는 아이템을 꺼냈다.

“이걸로 되겠나?”

- 충분하다. 오히려 작고 볼품없으니, 아이린 몰래 그녀의 가방에 들어갈 수 있다. 한 가지 더.

“뭐지?”

- 연극을 해줘야겠다. 내가 움직일 동안 아이린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흐음.”

갈수록 태산이다. 하지만 빙글뱅글은 그러마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모의는 30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모든 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마법사의 탐지를 피해 아이린과 접촉한 크림슨 하트가, 그녀를 데리고 포탈까지 움직였으며. 그것을 확인한 빙글뱅글은 지하에 언데드를 풀어놓고 천천히 뒤따라갔다.

그리고 크림슨 하트와 싸우며 심장을 뽑은 빙글뱅글은, 은근슬쩍 지푸라기 인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철저하게 개인플레이로 일관했다.

포탈에 올라탄 아이린을 확인했으니, 크림슨 하트와 연계할 이유가 없었다.

연약한 지푸라기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자잘한 화염계 주문만으로도 끝장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빙글뱅글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곰의 모습을 한 소환수가, 심장을 부수도록 방치해버렸다.

‘꼴좋구나.’

이제 포탈이 가동되면, 좌표를 해석해 당장 그곳으로 가면 된다.

물론 도중에 W의 방해가 들어와 계획이 실패할 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보조 직업으로 배운 꼭두각시술까지 사용한 끝에, 아이린을 가동 중인 포탈로 밀어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뒤이어 떠오르는 좌표를 확인한 빙글뱅글은 아연해졌다.

‘이, 이럴 리가 없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몇 번을 확인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도착예정지역 : 좌표 DK_X31237_Y03584_Z31700_T00917_F00001>


좌표 값의 앞에 붙은 두 글자, DK는 Dark Land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Dark Land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장소를 뜻한다.

마계(魔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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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4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7) +3 15.04.05 895 14 29쪽
148 14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6) +3 15.03.26 992 21 29쪽
147 14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5) +2 15.03.25 1,024 18 31쪽
146 14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4) +4 15.03.19 883 23 29쪽
145 14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3) +5 15.03.16 954 16 32쪽
» 14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2) +3 15.02.16 1,202 19 27쪽
143 14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1) +4 15.01.25 993 15 29쪽
142 13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0) +4 14.12.26 854 27 42쪽
141 13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9) +5 14.09.21 953 23 38쪽
140 13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8) +3 14.08.17 1,143 27 23쪽
139 13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7) +3 14.08.04 750 21 18쪽
138 13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6) +1 14.07.30 751 16 23쪽
137 13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5) +7 14.07.23 848 24 23쪽
136 13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4) +3 14.07.21 728 29 27쪽
135 13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3) +2 14.07.18 843 24 22쪽
134 13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2) +4 14.07.17 769 21 23쪽
133 13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1) +2 14.07.16 817 22 25쪽
132 12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0) +3 14.07.15 693 35 19쪽
131 12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9) +1 14.07.14 809 21 24쪽
130 12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8) * +5 14.07.12 778 23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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