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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3.10.23 13:25
최근연재일 :
2024.03.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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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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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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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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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

DUMMY

김건우를 만난 뒤 며칠 후.

나는 사제로서의 기도를 충실히 마친 후 거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피죤은 들숨과 날숨을 이어가고 있던 내 배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먹을 게 없다.'


지금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조금 전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민망할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얼마 전에 장을 봤던 것 같은데, 어쩜 이렇게 빠르게 식량이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형님께서 너무 많이 드시는 겁니다. 솔직히 일주일에 장을 대체 몇 번 보시는 겁니까? 이 정도면 킹마트에서 형님한테 개근상 줘야 합니다.


하긴, 돈이 거의 90퍼센트는 식비로 나가고 있지. 이렇다 할 쇼핑도 안 하니까.

나머지 돈은 이 고급 아파트 관리비로 나가고 있으니까. 어떻게 관리비만 거의 100만원 가까이 되냐. 역시 아파트가 비싸긴 비싼가 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유비나 차량 관리비가 안 든다는 점이랄까. 아무리 경차라지만, 주유비도 만만치 않긴 하니까.


꼬르르르르륵!


.....역시, 안 되겠다.


"피죤! 일어나!"

{구구.....?}

"얼른 침 닦고 일어나라."


킹마트 가야지.


*

*

*


20대 중반의 남성, 한기영은 킹마트 근처에 위치한 낡은 빌라 주차장에 서있었다.

그는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상태였는데, 얼굴이 잔뜩 찌푸러진 것이 화가 난 모양이다.


"그지같은 새끼."


그가 살고 있는 빌라의 주차장은 말 그대로 '그지' 같았다. 보편적인 주차장과는 몹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주차할 수 있는 칸이 4개라고 쳤을 때, 나란히 한 대 씩 주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주차할 수 있었다면, 한기영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칸이 4개라는 말은, 안에 두 차량이 주차를 마친 후, 두 차량 앞에 또 다른 차량 두 대가 주차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맨 처음에 주차했던 두 차량은 앞에 있는 자동차 두 대가 빠져주지 않으면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구조인 것.


"아, 진짜."


한기영이 대출받아 겨우 구한 구형 벤츠 A클래스 앞에는 토레스가 하나 주차되어있었다.

마음같아서는 토레스 같은 똥차 따위 쳐버리고 제 갈 길을 가고 싶었지만, 수리비와 보험이 걱정되었다.


"왜 안 와, 이 새끼."

"아이고, 죄송합니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을 무렵, 토레스 차주가 나타났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토레스 차주는 한기영을 향해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이더니 차량 문을 열었다.


딱.

여기까지만 했으면 나름 원만하게 끝났을 법도 하건만.


"씨발."


한기영의 입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왜 주차를 씨발 이따구로 하는건지 난 도대체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

"......예?"


시동을 걸려던 토레스 차주가 다시 차량 밖으로 나와 한기영 앞에 섰다.

한기영은 당당했다.


"아니, 주차를 왜 이딴 식으로 합니까? 예? 제 차 앞에 갔다 대면 제가 어떻게 나갑니까?"

"여기 주차를 안 하면 어디에 하라는 거요? 여기 주차 칸이 있잖아요? 내가 차 안 빼주면 못 나가는 거는 잘 알겠는데,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애초에 이 빌라 주차장이 이렇게 생긴 걸 나보고 어쩌라고?"


맞는 말이다.

나가고 싶은데 나갈 수 없는 한기영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토레스 차주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제는 이 빌라 주차장을 이렇게 만든 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


"갓길에 주차를 하던지, 아니면 이 골목에 주차를 하던지 해야죠. 주차칸 있다고 다 주차하면 됩니까? 그럼 여기 주차칸 있으니까 버스가 와서 주차해도 합법이겠네?"

"아니 그게 뭔 억지야?!"

"존나 이 그지 같은 빌라에 그지같은 새끼들만 사네, 씨발. 낡아 빠진 집에 얹혀 사는 주제에 말이 많아."

"참나......"


치익-


토레스 차주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피우기 시작했다. 답답한 모양이다.


"지난 번에, 당신이 여자친구 데리고 쓸데없이 차끌고 요 동네 근처 몇 십 바퀴 도는 거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뭐요?"


토레스 차주가 뿜어낸 담배연기가 한기영의 얼굴을 덮쳤다. 한기영은 여전히 차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지 같은 이 집이 싫으면, 당신이 나가면 되겠네. 아닌가? 벤츠 끌 돈 있으면 어디든 가겠구만."

"......뭐, 뭐라고요?"


그럴 수는 없었다.

한기영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 대출을 받아 겨우 중고 구형 벤츠 A클래스를 구한 것이다. 그에게 다른 집에 갈 수 있는 여유가 있을리 없다. 사실 이 빌라 월세도 겨우 내고 있는 판국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왜 지가 잘못해놓고 나보고 집을 나가라, 마라야?!"


한기영은 오히려 더 역정을 냈다.


"에이, 됐다, 됐어. 내가 어린 놈이랑 드잡이질 해봐야 좋을 게 없지."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 이 개같은 새끼야?!"

"차 빼준다고, 이 새끼야. 그리고 시끄러우니까 그 걸레 물은 입 좀 다물어라. 여기 너만 사냐?"

"아니......!"


부웅-


한기영이 무어라 항의하려고 했으나, 토레스 차주는 이미 차에 올라탄 뒤였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차주의 모습이 보였다.


"야. 이 형이 충고 하나 해 준다. 차는 그냥 차일 뿐이야. 그 별마크? 생각보다 별 거 없다. 여자한테 미쳐서 어거지로 대출끼고 살지 말라고. 알겠냐?"


부우우웅-


토레스가 떠나갔다. 이제 한기영은 차를 끌고 나올 수 있건만, 그의 몸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개 같은 새끼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충고를 강남이나 판교 사는 형이 해줬다면 모를까. 자기랑 똑같은 빌라에 사는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설교를 한단 말인가?


"......X같은 국산차 모는 주제에 씨발놈이."


한기영에게 있어서 인간의 가치란 오직 단 하나. 바로 비싸고 좋은 차였다. 그가 인정하는 국산차는 오직 제네시스 뿐이었다. K9도 한기영 앞에서는 한낱 마티즈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그지 같은 새끼. 토레스 모는 새끼가 감히 나한테 지랄을 해?"


한기영은 자신이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벤츠 A클래스를 타고 킹마트로 이동했다.

오늘은 마트에서 파격세일을 하는 날이라 꼭 가야만 했다.


"라면을 묶음으로 세일한다 이거지."


평소에는 주유할 돈도 애매했다. 천 원, 오천 원 단위로 주유를 할 정도였으니까. 식사는 거의 라면으로 때웠을 뿐더러, 밥을 말아먹는 것은 사치였다. 김치는 꿈도 못 꿨다.


이렇게까지 돈을 아껴야 할 정도라면, 차를 굳이 끌고 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가 사는 빌라와 킹마트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대략 20분 정도였으니까. 장을 보고 짐을 들고 오는 게 힘들 수도 있겠다만, 어차피 돈이 없어서 얼마 사지도 못할 게 뻔하지 않은가. 라면이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렇지. 이게 벤츠의 품격이라는 거지."


그러나 한기영은 이미 '가오'에 지배된 상태였다. 어디를 가도 벤츠, BMW, 아우디, 포르쉐, 페라리 등의 '와!'소리가 나오는 차를 끌고 가야 대접을 받는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대접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여자를 만날 때도 무조건 '비싸고 좋은 외제차'가 있어야 연애가 가능하다고 믿을 정도다. 남자의 차를 따지는 여자도 물론 존재하지만, 생각보다 20대 초중반 여자들은 차에 관심이 없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상대의 '차'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지만.


부아아아아앙-


한기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그렇게 판단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 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본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이 남을 차로 판단하고, 재단하고, 멋대로 정의하고 급을 나누었으니까.


'한 자리 남았다.'


파격세일 때문일까. 킹마트 주차장은 꽉 차있었다. 그때 겨우 한 자리가 비었길래, 한기영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그런데.


"......어?"


다른 커다란 차들 사이에 가려져 안 보였던 황금마티즈가 이미 그 빈칸에 쏙 들어간 뒤였다.

아니, 사실 애초부터 그 칸은 빈 칸이 아니었다. 큰 차들 때문에 가려진 틈을 타, 황금마티즈가 이미 주차를 하고 있었으니까. 한기영이 그저 빈 칸이라고 오해를 했을 뿐이었다.


"......씨발."


화가 난 한기영이 차에서 내렸다. 황금마티즈 앞에 대충 차를 세운 뒤였다.


"이봐요!"


황금마티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손에는 황금색 비둘기 모양의 모형을 든 채였다.


"예?"

"왜 여기다 주차합니까?"

"......뭐라고요?"


어이가 없는지, 황금마티즈 차주가 재차 물었다. 한기영은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주차하면 어쩌냐고요? 제가 먼저 발견했는데!"

"......제가 여기 주차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경차는 작으니까 아무데나 해도 되잖습니까? 다른 곳에 하세요."

"빈 곳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경차는 상관없잖아요. 아무데나 빈 곳에 하라고요."

"그러니까, 빈 곳이 없다고요."

"그럼 나는 어디에 주차를 해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아 진짜!"


콰아앙!


분노한 한기영이 황금마티즈의 앞범퍼를 발로 강하게 찼다.

순간적인 분노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잠시 후 깨닫게 된 한기영이 속으로 숨을 참았다.


'헐.'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지.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난 그냥 저 황금마티즈 차주가 개념이 없길래, 그저 참교육을 시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후회는 곧 겉잡을 수 없는 분노로 뒤바뀌었다.


황금마티즈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자신에게 화가나고.

저런 거지같은 똥차를 끌고 다니는 찌질이랑 이래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짜증이 났다.

돈이 없어서 그딴 쓰레기 같은 빌라에 사는 것도 화가 났고.

심지어 얼마 전 공 들였던 연하의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수치스러웠다.


내가 벤츠를 끄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걔는 또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벤츠 끌고 여기저기 잘 다녀줬건만 나한테 감히 헤어지자고 해? 그 거지 같은......


웅성웅성-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다.

황금마티즈 차주는 씩씩거리며 감정을 조절하려 애쓰는 한기영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친한 동생인데, 술 먹어서 이렇습니다. 술 버릇이 좀 고약해요. 양해부탁드립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형으로서 잘 단속시키겠습니다. 예예, 나이가 젊어서 그렇죠. 예. 아, 영상은 찍지 말아주세요. 네. 지워주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여러분."


황금마티즈 차주의 확실한 역할로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자리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네가 왜.... 내 형이야......?"


한기영의 두 눈은 충혈이라도 된 것인지 제법 붉었다. 여전히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 기영아."

"......!"


......잠깐만.

당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가자 한기영. 형 차에 잠깐 들어갈까? 형이랑 얘기 좀 하자. 응, 별 거 없어. 그냥 얘기 좀 하자구. 그래, 옳지. 들어갈까?"


*

*

*


한기영에게 2천만원 상당의 벌금형을 선고한 후. 나와 피죤은 장을 본 뒤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도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역시 먹은 후에는 누워야 제맛이다구구.}

"넌 좀 움직여라. 어떻게 해야 날이 갈수록 배가 나오냐?"

{쯧쯧. 이건 고급 보디(body)라서 그런거다구구. 이런 몸매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구구.}

"나중에는 얘가 비둘긴지 돼진지 구분도 안 되겠구만."

{미끈미끈하고 귀여운 아기돼지같냐구구?}

"어, 아니 걍 멧돼지."

{꾸꿁!}


피죤이 부리로 나의 정수리를 피날 정도로 찍어대던 그때였다.


"아오 좀! 그놈의 성질머리! 여보세요?"

- 유스티오.


유덱스잖아.

무슨 일이지?


"어쩐 일로 네가 전화를 다했냐? 뭔 일 생겼냐? 아 피죤! 좀 가만히 있으라고!"

- 뭔 일이 생기긴 했지.

"뭔 일인데? 피죤, 한 번만 더 그러면 부리를 테이프로 묶어버릴 거야. 알겠어?"

- 검은균열.


피죤 이 녀석을 그냥.....


......뭐라고?

뭔 균열?


- 검은균열. 그게 나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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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제주도에서 생긴 일 (2) +2 24.01.11 1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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