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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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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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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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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음력 사월 스무 닷새(1)

DUMMY

이방원은 다른 날 보다 일찍 밀직사에 등청하였다. 쌓인 밀직사의 업무도 업무려니와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가문의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이방원은 어젯밤 늦게까지 창령방의 형님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였고 오늘 아침에도 추동에서 창령방을 들렀다가 밀직사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업무가 끝나면 잠시 자리를 비운 판밀직사사 이방과 대신 재추에 들러 그 일을 보고 받기로 하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질 터였다.

“나만 바쁜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은 하였건만······”

이방원은 자신을 보자 저 멀리서 헐레벌떡 반가운 낯을 띠고 뛰다시피 달려오는 관원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다름 아닌 이조좌랑 박병무였다. 낟알이 없는 곳에 새가 머물 리 만무하였으니 저 자는 분명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일진대 이방원은 자신이 무엇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 마지 않았다.

“이조는 일이 없으신가. 어찌하여 밀직사에 매일 아침 방문하시는고?”

“어찌 밀직사에 일이 있겠습니까? 다 밀직제학 영감을 보러 온 것이지요.”

“그 사람 참. 우리가 언제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대놓고 이방원 보기를 자처하는 박병무에게 이방원이 슬쩍 퉁을 놓았지만 박병무는 그런 것으로 물러설 위인은 아닌 듯 보였다.

“교분이야 이런 식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어찌 하루 아침에 수어지교(水魚之交)가 일어나겠습니까?”

“나는 물도 고기도 되고 싶지 않으이.”

이방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늘한 눈동자를 박병무에게 보여주었지만 박병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방원의 불편함따위는 도외시한 듯한 엉뚱한 말이었다.

“이번 스무 일곱날, 재추의 대신 열 서너 분 정도가 따로 다회(茶會)를 마련하였습니다. 대중대부 오현도 대감의 사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만···. 혹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이!”

“사적인 모임이지만 공무(公務)의 성격이옵니다.”

“뭐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이 나라의 앞을 보고 있습니다. 왕씨가 이 다음에도 보위를 얻으리이까?”

말도 안 되는 대담한 발언에 오히려 이방원의 입이 닫혔다. 백주 대낮 밀직사 앞에서 이조 좌랑이라는 자가 내놓을 말은 분명 아니었건만 박병무의 눈빛은 햇살 마냥 번쩍이는 빛을 더하고 있었다.

총기 있는 자가 힘주어 내뱉는 말은 신뢰 아니면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표식인데 이방원은 그 신뢰와 자신감의 근원이 어쩌면 박병무가 보고 있는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그 뒤를 생각하옵니다. 아무쪼록 영감께서 그 자리를 빛내주시길 앙망하옵니다. 자리를 마련하는 재추 대신들의 소망입니다.”

“······왜 나를 부르시는가. 위로는 화령백이오, 그 아래로는 내 형님도 계시거늘.”

“호걸 중의 호걸께서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이방원은 말없이 박병무를 내려보았다. 이조 좌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문답의 승기(勝氣)를 잡은 것에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도(官道)는 한적하였고, 담 뒤의 공간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오시리라 믿겠습니다. 인편을 따로 준비하겠으니 아무쪼록 왕림해주옵소서.”

이방원의 고개가 멀리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직이자 박병무는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박병무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확실하게 임무만을 수행하고 떠나가는 관료의 모습이었다.

이방원은 박병무를 보면서 자신의 위상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높아져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동안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곱씹고 곱씹던 이방원은 피식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내의 입에 머문 미소에 맛이 있다면 쓸개와 같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거골장(去骨匠)이 된 모양이로세.”

사내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

“오늘 판사사 영감은 등청을 안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려.”

아직도 잠이 남아있는 듯 이상겸은 하품을 찢어지라 하면서 창령방 중문을 열고 들어오는 견태고를 맞이하였다. 큰돌이 잡혀 들어온 이후로 척오조는 연복사의 거처를 잠시 비워두고 창령방 안에서 숙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견태고 역시 사저에 들러 장비를 가져올 때 빼고는 창령방 안에서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그러신 것 같네. 뭔가 다른 일이 있으시겠지.”

“큰돌인가 적릉인가 하는 저 놈은 아예 입을 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소. 고신을 몇 번이나 당해도 입이 돌덩이네. 정작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이 변죽만 올리고 있는 것 아니오.”

“심지가 굳더구먼.”

“뭐, 내 편이 그렇다면 감탄할 일이지만 내 적이 저 모양이면 한탄만 나오는거지.”

이상겸은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큰돌이 갇혀 있는 창고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지런히 노복들이 창고 주위를 움직이고 처음 보는 흑색 옷의 사내들이 의장을 갖추고 여기저기 움직이는 모습이 여간 부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말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창령방의 가옥은 그 규모가 여느 장원 못지 않았고, 화령백 이성계의 무력(武力)이 머무는 곳이기도 한 지라 무인과 마필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견태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새삼스럽게 이 곳이야말로 애오라지 개경의 힘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라 여겼다.

잘은 몰라도 추동의 이방원 역시 창령방 만큼이나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터였다. 이런 시국에 이씨들에게 감히 칼을 들이대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말 그대로 죽음부터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들 있었구먼.”

거한의 쇠종 같은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오자 견태고와 이상겸은 자세를 잡고 절도있게 예를 올렸다. 다름아닌 판밀직사사 이방과의 모습이었다.

견태고는 고개를 들자 자못 놀란 표정으로 이방과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방과는 관복 대신 경번갑에 투구까지 갖춰 쓰고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척오조의 모습을 보던 이방과는 씩하니 웃음을 지어보이는데 투구 아래 짙은 수염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미소는 말 그대로 호방뇌락(豪放磊落)한 장수의 것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견태고의 물음에 이방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지휘채로 창고를 가리켰다. 분명 저 곳은 큰돌이 묶여 있는 곳일 터, 견태고와 이상겸은 그것과 이방과의 옷차림과 무슨 연관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저 큰돌, 자신을 적릉이라 칭하는 화척을 추동으로 옮길 것이니 척오조는 죄인의 우거(牛車)를 호위하도록 하게.”

“네?”

이상겸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는데 견태고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방과를 쳐다보았다. 이방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수하들을 보며 설명하였다.

“어차피 자네 둘은 들어야 할 일이지. 추동의 방원이에게 저 큰돌의 심문을 넘기기로 하였네. 아무래도 나보다는 방원이 더 고신을 잘 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아니, 문관에게 무슨 고신을 시키신단······”

이상겸이 발끈하여 입을 여는데, 이방과는 슬쩍 손짓을 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이행수는 가서 척오조들을 준비시키게. 오시(五時)즈음에 출발을 시킬 생각이니 밥들 단단히 먹고.”

“출발이 오시(五時)란 말씀입니까? 왜 하필이면 대낮에······”

이상겸은 갈수록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인데 이방과는 슬쩍 견태고를 손짓하여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견태고가 이상겸에게 눈짓을 하자 이상겸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이방과에게 예를 갖추고 척오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행수는 믿을 수 있겠는가?”

이방과의 말에 견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할 수 있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군. 그 정도로 신뢰하나?”

투구 아래 이방과의 눈이 번득였다. 견태고는 딱히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방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그건 지휘관의 영역이지. 그럼 그 문제는 자네에게 일임하지.”

“영감, 왜 추동으로 큰돌의 거처를 옮기십니까?”

“여우를 굴 밖으로 몰아내 보자는 말이지. 어젯밤에 방원이와 이야기를 해 본 결과야.”

견태고가 슬쩍 눈썹을 모으며 창고를 향해 눈동자를 돌리는데, 이방과 역시 창고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 살수의 세작이 있다면 큰돌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를 우리가 심문하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자가 모든 것을 이실직고한다고 소문을 퍼트리면 어찌 되겠는가?”

“그자를 없애려 들겠지요.”

“그것일세. 큰돌을 잡으러 오는 이를 잡겠다는 것이지. 나는 비록 갑주를 차려 입었지만 내가 직접 앞에 나서지는 않을 걸세. 순군만호부에 기별을 보내놓았어. 순군들이 대로를 순시하며 추동과 창령방 사이의 대로만을 관할할 것이야. 큰돌이 탄 우거(牛車)는 전적으로 자네들이 맡는다.”

“미끼입니까?”

견태고의 말에 이방과는 눈살을 찌푸렸다.

“임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나? 직제상 자네들도 순군만호부 사람들일세.”

“임무라는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내부에 세작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세작을 찾아 내는 것도 자네의 맡은 소임 중 하나가 될 것이네. 그리고······”

이방과는 슬쩍 옛 궁궐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누가 그 세작과 이어져 있는지를 찾아내는 일도 될 것이네.”

“그것이 가능합니까?”

견태고의 말에 이방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방원이 자네에게 윗선의 일은 자신이 알아보겠다고 했다지? 아닌 게 아니라 방원이는 오늘 그 일을 하러 등청한 것이네.”

견태고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이방과는 얄궂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북쪽을 쳐다보았다.

“오늘 재추의 대신들 앞에서 방원이 미끼를 던져 놓을 것이야.”

*----------*


밀직제학 이방원은 판밀직사사 이방과를 대신하며 도평의사사에 들어와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이품 이상인 밀직사사나 지사사가 들어왔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누구 하나 이방원의 참석에 대해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들어오자 재추 회의는 활기마저 띄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방원은 주변의 시선을 덤덤히 감내하며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자세로 재신들의 문답과 국정의 보고사항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재추회의는 그리 길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직 병상에 있는 문하시중 이성계의 쾌유와 왕과 세자의 전교에 대한 확인 정도가 주된 이야기였고, 그 외의 삼남의 왜구들과 북방 원(元)과 명(明)의 일진일퇴에 대한 견해들이 오가는 정도였다. 그 때였다.

“오늘은 어인 일로 판사사 대신 밀직제학께서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까? 판사사 영감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게요?”

모두의 시선이 누군가의 실없는 물음에 의해 이방원에게 모아졌다. 이방원은 겸연쩍다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근자에 개경 성내를 불안에 떨게 하였던 중승 이진헌의 살인범이 잡힌 바, 판밀직사사 영감은 그 일로 인해 등청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호라. 그 천인공노할 놈이 잡혔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주위를 바라보며 웅성거리자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어젯밤 고신 끝에 그 자가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고, 자신과 함께 이 범행을 모의한 자들을 곧 발고하겠다고 말하였다 들었습니다.”

이방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추의 노인들은 여기저기에서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잘 되었구먼.”

“다행일세. 누군지 일벌백계를 해야 하네!”

“그래, 그 자에게 범행을 사주한 자가 누구란 말이오?”

판삼사사 조준이 이방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이방원은 그대를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쩍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실은 판밀직사사께서 제게 그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오늘 오시(五時)를 기점으로 추동(秋洞)으로 범인의 신병을 인도받아 제가 범행의 전모를 기록하도록 하였으니······”

그 때였다. 갑자기 도평의사사의 문 앞으로 내관이 들어오더니 다급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좌중의 대신들을 향해 기별을 고하였다.

“문하시중 대감 드시옵니다!”

순간, 이방원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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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음력 사월 스무 나흘(3) +4 22.06.14 420 25 12쪽
31 음력 사월 스무 나흘(2) +2 22.06.14 410 23 12쪽
30 음력 사월 스무 나흘(1) +4 22.06.13 426 25 12쪽
29 음력 사월 스무 사흘(5) +4 22.06.10 417 23 13쪽
28 음력 사월 스무 사흘 (4) +2 22.06.09 432 20 12쪽
27 음력 사월 스무 사흘(3) +2 22.06.08 435 18 13쪽
26 음력 사월 스무 사흘(2) +4 22.06.07 466 19 13쪽
25 음력 사월 스무 사흘(1) +3 22.06.06 486 19 12쪽
24 음력 사월 스무 이틀 +3 22.06.03 499 24 13쪽
23 음력 사월 스무 하루(3) +5 22.06.02 485 23 13쪽
22 음력 사월 스무 하루(2) +2 22.06.01 469 22 13쪽
21 음력 사월 스무 하루(1) +1 22.05.31 497 22 13쪽
20 음력 사월 스무날(2) +2 22.05.30 485 22 13쪽
19 음력 사월 스무날(1) +3 22.05.30 495 26 13쪽
18 음력 사월 열 아흐레(3) +2 22.05.27 525 23 12쪽
17 음력 사월 열 아흐레(2) +5 22.05.26 571 30 12쪽
16 음력 사월 열 아흐레(1) +7 22.05.25 580 34 12쪽
15 음력 사월 열 이레(2) +6 22.05.24 581 28 11쪽
14 음력 사월 열 이레(1) +5 22.05.23 599 28 12쪽
13 음력 사월 열 엿새 (3) 22.05.20 615 29 13쪽
12 음력 사월 열 엿새 (2) +1 22.05.19 686 31 12쪽
11 음력 사월 열 엿새 (1) +1 22.05.19 693 29 13쪽
10 음력 사월 열 닷새 (2) +2 22.05.18 718 31 12쪽
9 음력 사월 열 닷새 (1) +5 22.05.17 775 29 14쪽
8 음력 사월 열 나흘(3) +3 22.05.16 815 34 15쪽
7 음력 사월 열 나흘(2) +1 22.05.13 789 30 13쪽
6 음력 사월 열 나흘(1) +1 22.05.13 875 33 15쪽
5 음력 사월 열 사흘(2) +2 22.05.12 961 44 14쪽
4 음력 사월 열 사흘(1) +2 22.05.12 1,096 5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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