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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51,317
추천수 :
2,441
글자수 :
749,279

작성
22.05.26 10:40
조회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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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12쪽

음력 사월 열 아흐레(2)

DUMMY

미시(未時)무렵,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남대가의 북쪽 끝을 타고 일단의 관인(官人)들이 서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장량항우산(張良項羽傘)을 들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길 가운데를 거침없이 걷고 있는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시전 상인들은 그들을 멀리서 보면서도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은 그런 인사를 받는둥 마는 둥 하면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관인들은 빗물 속에서도 부지런히 피혁화를 놀려 남대가 끝에 붙은 관도(官道)를 타고 승평문(昇平門)근처로 돌아가는 모양이었으니 이들의 복색이나 우산을 보더라도 품계가 낮은 위인들은 아니었다.

원래 승평문은 황성 광화문과 붙어 관도(官道)라 이름 붙여진 길을 사이에 두고 고려의 중앙관서가 모두 모여 있는 모양새인데, 승평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거대한 남대가와 장려하게 늘어선 시전의 행랑들이 나타났다.

남대가는 그대로 내려가면 개경 최고의 번화가인 십자가로 이어지는 대로였으니 결국 승평문 관도가 십자가의 출발점이라 하여도 어폐가 아니었다.

“오랜만이었네. 그동안 가뭄으로 날이 궁해 낮밥을 먹을 일이 없지 않았는가?”

“그나마 오늘 비가 오시니 어찌 감읍할 일이 아니런가. 이런 날은 한잔 술을 하늘에 올리고 백성들에게 찬 하나 안주 하나 팔아주는 것도 나름대로 관원된 이의 할 일이라오.”

“이게 다 감찰사 이 중승(中丞)이 한 턱 내는 것이렷다? 그 동안 격조하였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여섯명이 모여 호쾌하게 빗속에서 떠들고 가는 관원들은 하나같이 젊고 준수한 모양새였고, 누가 옆에 있던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개중 한 사내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슬쩍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쾌활하게 말하였다.

“그 동안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제대로 벗들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네. 그나마 이제 복잡한 일이 한 풀 꺾이고 내가 제 자리로 돌아온 듯하니 어찌 반갑지 않은가? 오늘 아니면 다 같이 술 한잔할 날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랬네.”

“이 사람, 그 동안 추동(秋洞)하고 창령방에 불려다녔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구먼?”

이 중승이라 불린 벼슬아치는 맞다 그르다 답도 없이 빙그레 웃음으로 답하였다. 오히려 좀이 쑤신 것은 옆에서 우산을 쓰고 가던 동료들이었다.

“이보시게. 진짜 판밀직사사 영감이 달가를 없앤건가?”

“추동의 이방원이가 머리라던데?”

“허면, 자내는 어배동의 화령백 존안을 뵈었는가? 중병이라는데 진짜 완쾌가 되는겐가?”

이 중승은 슬쩍 난초같이 부드럽게 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어허, 이 보시게들, 그런 말이 이런 시전 골목에서 나눌 소리인가. 아무리 장난처럼 이야기하더라도 엄연히 나라의 중대한 이야기인데.”

하지만 이 중승은 그렇게 표정을 굳히면서도 따스한 봄바람 같은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되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우리야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타고 은인자중하면 저절로 바다까지 나갈 사람들 아닌가?”

좌중에 같이 있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이 중승이 싱긋 웃어보였다.

“만에 하나 옥좌 위의 연호가 바뀐다고 할 지언정 우리가 그것을 굳이 걱정할 일이 무엇이며, 안 바뀐다고 하여 우리가 위태로워질 것이 있겠나?”

“그래도 자네는 위가 바뀌는 게 더 출세가 빠르지 않겠나?”

누군가 옆에서 중얼대자 다들 모여 있던 이들이 껄껄대며 너털웃음을 웃는데 이 중승도 결국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쳐 댔다.

“하하, 이 사람들 아주 못하는 말이 없구먼. 간언을 그런 식으로 해 보지 그랬나!”

비는 점점 퍼붓는데 벼슬아치들의 걸음은 느려지고 한담은 갈수록 내용이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시전 상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굳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가게를 정리할 뿐, 앞에서 오가며 이야기하는 젊은 관인들의 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 때 한 장한이 죽관(竹冠) 위에 기름바른 갈모를 쓰고 사의(簑衣: 도롱이)를 두른 채 시전 앞으로 비를 뚫고 나타났다.

사내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쏟아지는 빗속으로 들어가 왕래가 별로 없는 남대가의 큰 길을 가로질러 위로 곧장 올라가는데 뛰는 것도 아니면서 걷는 속도가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사내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는 점점 굵어져 남대가의 포석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다시 튀어오를 지경이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담소를 나누던 관인들도 우산을 받쳐들고 고개를 숙인 채 승평문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불쑥 사의를 두른 큼지막한 자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우산을 쓴 관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앞에 서 있던 관인이 사의 두른 사내에게 역정을 내었다.

“네 이놈! 뭐 하는 놈이기에 관인의 앞길을 막고 있느냐!”

“이진헌 중승 나으리되십니까?”

“뭐라고?”

눈살을 찌푸리던 관인이 뒤를 돌아보며 우산을 쓴 이에게 손짓하였다.

“이보게 이 중승! 이 치가 자네를 찾는데 아는 사람인가?”

“뭐라고?”

울쑥불쑥 뛰어나온 우산들 사이에서 청수한 얼굴이 빗물 사이로 빼꼼히 나왔다. 이진헌이라 불린사내는 갈모 아래 가려진 사내의 용모를 바라보더니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감찰사 중승 이진헌이 맞다. 너는 대체 누구냐?”

“중승 나으리! 다른 게 아니라 급한 전갈이 하나 있사옵니다!”

기묘한 말투였다. 이진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창령방이냐? 아니면 추동 이방원이 보낸 사자냐?”

“아니옵니다. 명부(冥府)이옵니다.”

“뭐?”

순간 사의가 활짝 열리며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내의 손이 번쩍 움직이더니만 이진헌의 가슴팍을 향해 움직였다. 깜짝 놀란 이진헌이 쥐고 있던 우산을 들어 사내의 손을 가로막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우산대가 박살났다.

그와 함께 이진헌은 몸을 틀어 뒤로 한발 물러섰으니 그 순간 사의 두른 사내의 다른 팔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이진헌의 옆구리와 가슴팍을 두 번 연거푸 찍고 몸을 빙그르 팽이처럼 돌려 관인의 에워쌈을 벗어났다.

갈모와 사의를 두른 사내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달려가더니 하얗게 쏟아지는 빗발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함께 걸걸하면서도 호쾌한 목소리가 남대가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관원들에게 닿았다.

“적릉(寂陵)에 피꽃이 만발하였구나!”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승 이진헌이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 서 있던 관원들이 깜짝 놀라 화급히 이진헌을 부축하였다.

“이보게 하재! 하재! 괜찮은가!”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이진헌의 등을 받쳤으나 이미 이진헌의 몸에서 나온 붉은 피는 시뻘겋게 남대가의 포석을 물들이는 중이었다. 사내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 사이로 우산을 내던진 관원들이 어미 잃은 오리새끼들처럼 우왕좌왕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지삿갓에 사의를 걸쳐 입은 이상겸이 혀를 차며 숭평문 앞의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핏물은 비에 씻겨 내려가고 없었지만 부서진 장량항우산 조각들과 찢어진 옷자락과 갈모는 주변에 흩어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상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는 곧게 뻗은 남대가조차 온전히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색적(索敵)으로 도가 튼 북방의 활잡이도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여간내기가 아니로구먼.”

한편 견태고는 문루 안에서 비를 비하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피살자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천하가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만 같았던 호협한 기상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견태고의 앞에서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들은 애오라지 유생들이었다.

“자기 이름을 적릉이라 하였네. 적릉에 피꽃이 피었다고 하였지.”

견태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관인의 증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이방과와 이방원이 이야기한 칠언절구에 입각한 사건이 분명했다. 견태고는 그 싯구를 이제 달달 외우고 있었다.

추성고응척적릉(追星孤鷹陟寂陵)

적릉이라. 견태고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재(이진헌의 자)는 감찰사 중승이기는 해도 일신의 무공이 있는 사람이었네. 궁시는 물론이고 권법도 상당했고 도법도 배운 사람이었지. 그런데 그런 이가 칼질 한 번에 그냥 죽어버리다니 말이야.”

“첫번째 공격에 우산이 부서졌다고 하셨소?”

견태고의 말에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을 가로막고 이 중승이 누구냐고 묻더군. 뭔가 어눌하니 기묘한 말투였어. 그러더니만 이내 하재에게 달려가서 도롱이 사이에서 뭘 꺼내 찔렀지. 하재가 우산으로 가로 막으니까 재차 다시 찌른 거야.”

“아니야. 왼손으로 찔렀어. 내가 봤네.”

그때까지 잠자코 앉아있던 관인이 견태고와 동료 관인을 보며 넋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양손이 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어. 하재가 막을 수가 없었어. 배를 가르고 가슴을 찔렀지.”

쌍수(雙手)라. 견태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서진 우산손잡이는 두껍지는 않아도 대나무를 통째로 쓴 것이었다.

아무리 잘 쪼개지는 대나무라고 해도 한 손으로 우산 중동을 부서지게 찔러넣고 다시 뺀다는 것은 여간한 힘과 기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양손을 다 써서 사람을 찔렀다면 보기 드문 무예를 지닌 이일 터였다.

이상겸이 터덜터덜 지삿갓을 벗고 물을 털어내더니 견태고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소용없습니다 지유. 이 빗줄기 속에서 사람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소.”

“남쪽으로 내려간 것만 확인되는가?”

“남대가를 타고 내려가면 십자가인데···십자가 내려가면 끝이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지 알 방법이 없소이다.”

견태고와 이상겸이 문루에서 몸을 일으켜 빗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승평문에서 바라보는 시전 골목은 희뿌연 비의 장막이 한 겹 씌워진 채 빗소리를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벌인가.”

모여있던 관인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견태고가 고개를 돌려 앉아있던 관인들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상겸이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친구가 내장을 쏟으며 죽는 꼴을 처음 보면 다 저리 되는거지.”

“강예구는?”

“시전 상인들을 탐문하라고 보냈지만 별 소득은 없을 겝니다. 비가 이렇게 오시는데 무슨······”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지삿갓을 쓴 채 도롱이도 두르지 않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장 장천보와 왕운, 홍일국이었다. 장천보는 이상겸과 견태고를 보고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더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장천보의 표정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그사이에 또 살인입니까?”

견태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찾는 놈들이다.”

“엄청나군요. 한 둘이 아닌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장천보가 턱에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사방을 둘러보는데, 이상겸이 그를 보며 말했다.

“처소에 있는 왕지균에게 연락 받은 겐가?”

“네. 이곳에 변고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일국과 운이를 데리고 온 겁니다. 나머지는 처소에 모여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들어왔다고?”

이상겸의 말에 슬쩍 장천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지유. 고도리살의 출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알아냈단 말이냐?”

견태고와 이상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던 장천보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유종기와 어경순도 북쪽 시장에서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습니다.”

빗줄기는 여전히 가늘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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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음력 사월 스무 나흘(2) +2 22.06.14 410 23 12쪽
30 음력 사월 스무 나흘(1) +4 22.06.13 426 25 12쪽
29 음력 사월 스무 사흘(5) +4 22.06.10 417 23 13쪽
28 음력 사월 스무 사흘 (4) +2 22.06.09 432 20 12쪽
27 음력 사월 스무 사흘(3) +2 22.06.08 435 18 13쪽
26 음력 사월 스무 사흘(2) +4 22.06.07 466 19 13쪽
25 음력 사월 스무 사흘(1) +3 22.06.06 486 19 12쪽
24 음력 사월 스무 이틀 +3 22.06.03 499 24 13쪽
23 음력 사월 스무 하루(3) +5 22.06.02 485 23 13쪽
22 음력 사월 스무 하루(2) +2 22.06.01 469 22 13쪽
21 음력 사월 스무 하루(1) +1 22.05.31 497 22 13쪽
20 음력 사월 스무날(2) +2 22.05.30 486 22 13쪽
19 음력 사월 스무날(1) +3 22.05.30 495 26 13쪽
18 음력 사월 열 아흐레(3) +2 22.05.27 525 23 12쪽
» 음력 사월 열 아흐레(2) +5 22.05.26 572 30 12쪽
16 음력 사월 열 아흐레(1) +7 22.05.25 580 34 12쪽
15 음력 사월 열 이레(2) +6 22.05.24 581 28 11쪽
14 음력 사월 열 이레(1) +5 22.05.23 599 28 12쪽
13 음력 사월 열 엿새 (3) 22.05.20 615 29 13쪽
12 음력 사월 열 엿새 (2) +1 22.05.19 687 31 12쪽
11 음력 사월 열 엿새 (1) +1 22.05.19 694 29 13쪽
10 음력 사월 열 닷새 (2) +2 22.05.18 718 31 12쪽
9 음력 사월 열 닷새 (1) +5 22.05.17 775 29 14쪽
8 음력 사월 열 나흘(3) +3 22.05.16 815 3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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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력 사월 열 사흘(2) +2 22.05.12 961 4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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