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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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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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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1
글자수 :
749,279

작성
22.05.1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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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2쪽

음력 사월 열 엿새 (2)

DUMMY

척오조 지유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얻게 되었지만, 견태고는 정작 이방과를 다음 날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이방과는 세자를 모시고 동문 숭인문 근처의 안정방 어배동에 있는 이성계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듣기로 이성계는 아직 낙마한 뒤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고 하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낙상하여 부러져 죽었을 것이네. 영걸인 삼군도총제사 정도 되시니 무사하신 게지.”

이상겸은 아침 일찍부터 창령방 근처의 견태고가 묵고 있는 초가에 와서 장천보가 전해준 말을 견태고에게 말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장천보는 가별초 출신의 옛 전우들이 창령방과 어배동, 추동(이방원의 잠저)에 있는지라 속 정보를 알아내기 쉬운 듯 하였고, 지유에게 보고하는 것은 행수인 이상겸에게 맡긴 모양이었다.

이상겸은 아직 술이 덜 깼는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을 연신 눌러대며 초가집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빗물이나 안 새는지 모르겠구먼. 견지유는 이런 집에 왜 거처를 잡으신게요?”

견태고가 말하려는 찰나 슬쩍 다른 방문이 열리며 주인 아낙이 슬쩍 나오려다 두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다시 안으로 불쑥 모습을 감추었다. 이상겸은 눈을 껌벅이더니 견태고를 보며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튀겼다.

“이제야 왜 지유께서 여기 자리를 잡으셨는지 이 미숙한 놈이 알 것 같수다. 거 은근히 여자 보는 눈이 높으시오. 개경 온지 언제라고 저런 여인을 알아보신겐가?”

정작 견태고를 등떠밀다시피 하여 지유 자리를 맡긴 이상겸이었지만 자기 기분 좋을 때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여우보다 능청스러웠다. 하지만 견태고는 덤덤하니 화낸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조용히 묵을 자리를 동료에게 추천받았네.”

“정말이오?”

“아이가 있는 집일세.”

그때, 다시 옷매무시를 다듬은 여인이 방문을 조용히 열고 나오더니만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뭔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가 짚신을 신고는 후다닥 밖으로 뒤어나갔다. 이상겸은 조용히 초가의 정경을 보더니만 머리를 긁었다.

“······괜찮구려.”

“판밀직사사께 보고를 못 드리면 우리끼리라도 조사를 해야겠구먼.”

“그렇겠지. 판밀직사사야 지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겠나. 화령백의 신변을 보위하는 것이 제일일텐데. 만인지상 일인지하가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해보시게.”

이상겸은 다시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만인지상 무인지하가 될 지도 모르지만.”

견태고가 슬쩍 이상겸을 노려보자 이상겸은 되려 눈을 크게 뜨며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왜, 견지유. 내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잖소. 솔직히 아는 사람이야 다 알지. 지금 왕보다야 판밀직사사와 삼군도총제사의 권력이 더 큰 거 아닌가. 언제까지 추세가 이렇게 갈 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씨 가문이 고려의 왕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이상겸은 호기롭게 이리 말하면서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사방을 슬쩍 둘러보았다. 견태고는 떠 놓은 물에 낯을 씻었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선선한 바람이 줄기 시작하는 것이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았다.

비는 넉 달 간 내리지 않았다. 텁텁하고 끈적한 기운이 사내를 감쌌다. 사내는 빗속에 서 있으면 이 답답함이 내려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하는 중이었다.

“사실 나도 한바탕 이 세상 뒤집혔으면 하기도 하오.”

견태고가 고개를 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낯으로 바라본 이상겸의 눈은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견지유. 그대는 지금 이 세상이 맘에 드는가. 하삼도에서 평생을 왜구와 싸우면서 느꼈을 것 아닌가. 나도 북관에서 전란과 가뭄에 찌들었단 말이지. 더 나빠질 게 있소?”

이상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바뀌었다.

“차라리 당금의 영웅이 세상의 권세를 틀어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게 낫지 않은가? 상승장군 이성계, 그리고 그 휘하의 강병들이 고려를 구했으니 그가 일으키는 세상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으리?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조준, 남재, 남은 같은 천하의 재사도 있지 않은가. 삼봉같은 괴짜도 들어가는 판국이면 이미 판세는 끝났다고 보는데?”

견태고가 그릇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씨의 천하.”

“왜, 이씨의 녹을 먹으면서 그것은 싫은가?”

견태고는 말없이 이상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부엌에서 여인이 불쑥 나오더니만 그릇 한 벌을 목반에 받쳐들고 나왔다. 치마를 낭창한 허리에 감은 여인은 솜씨 좋게 두 사내 사이로 목반을 놓고는 옆에 시립했다.

“꿀물이니 한 그릇씩 드셔요. 어제 같이 자리를 하신 거 맞으시나요?”

견태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수건을 옆에 걸어두고는 다시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겸은 멍하니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더니만 꿀물을 마셨다. 견태고도 수건으로 낯을 닦고 말없이 그릇을 입에 가져갔다. 조용한 적막이 마당을 감쌌다.

이상겸은 자기 손에 잡힌 꿀물 그릇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히죽 웃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괜찮구먼. 아니, 좋네. 좋아.”

견태고의 입이 열렸다.

“장천보에게 홍일국과 강예구를 딸려서 웅천에 보내게.”

“응?”

“일전에 선절부위 김모백과 통정랑 이학천이 살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어. 그 일이 난천과 관계있는 지를 먼저 알아보세.”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뭔가 관련이 있으니 판밀직사사 영감이 그 둘의 죽음을 내 앞에서 말했겠지.”

“아.”

“그리고 자네는 사람을 추려서 난천 왕형재의 살던 곳을 중심으로 그가 거래할 만한 곳들을 수소문해 보게.”

“쌀? 포목? 어떤 걸 말이오?”

“은이나 금, 포목 같은 것을 물건으로 유통할 만한 곳 말이네.”

멍한 표정으로 견태고의 말을 듣고 있던 이상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겸이 다시 꿀물을 가져가며 히죽 웃었다.

“대단하시오. 견지유는 정말 머릿속에 일 외에는 없는 모양이구먼. 그럼 지유께서는 뭘 하실 것이오?”

“달가가 남겼다던 그 싯구를 알아봐야하지 않겠는가?”

“그걸 우리가 본다고 알까? 삼봉 영감이나 판사사 영감 아우나 되어야 알아보겠지.”

“그 집안의 아우라는 건 누군가? 이방원 말인가?

견태고의 말에 이상겸이 웃는 입술에 히죽 더 깊은 주름을 넣었다.

“그래, 그 이방원. 자네도 이름은 아는구먼. 하긴 요즘에 이씨가문의 이방원을 누가 모를까.”

이방원. 견태고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익히 들어본 바였다. 이방과가 이성계의 칼을 지니고 있다면 이방원이 추동(秋洞: 이방원의 거처)의 문예(文藝)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떠돌고 있었다. 하나 그의 이름이 어찌 삼봉과 같이 나온단 말인가. 이상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비가 범이라면 판밀직사사 영감은 곰이고, 그 아우 이방원은 늑대···아니 여우라고 하지. 모든 안 좋은 꾀는 다 그 인사 머리에서 나온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말이지.”

이상겸은 꿀물을 남김없이 마시더니 입술을 쩝쩝 다셨다.

“아마 지금쯤 판밀직사사 영감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구먼.”


*------*


장상의 출입문치고 그리 크지 않은 대문은 오늘도 인산인해였다.

숭인문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어배동 작은 언덕위의 장원은 거대한 출입문 못지 않게 안이 넉넉한 구조였지만 오늘은 그 안채에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집의 바깥쪽도 붐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집의 외곽을 가득 메운 것은 갑사와 시위의 병력이었다.

비단 황실의 병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권신들의 사병(私兵)이 황실의 병력보다 많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들을 대비하기 위한 이성계의 가별초 역시 저택의 사방과 담 아래 포진되어 있었으니, 마치 작은 성을 노리고 펼치는 공성전이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담 밖은 기치창검의 서슬 퍼런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정작 담 안쪽에서는 화기애애한 상찬과 겸양이 쉴새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화령백 삼군도총제사 이성계와 태자 사이의 덕담이었다. 병문안은 마치 재추회의를 어배동으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재신들과 이름 높은 권문세가의 적자들이 모두 하나씩은 참석하여 세자와 화령백의 병문안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그 분위기가 떠들썩하니 마치 왕가의 혼례잔치나 다를 바가 없었다.

판밀직사사 이방과는 처소의 담과 주변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과 위사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내는 이런 자리가 고역중의 고역이었다.

오늘 어배동에 문안을 온 사람중에 세자를 만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모든 이들이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얼굴이었다.

누구는 그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고, 누군가는 그 정정한 얼굴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할 터였다. 이방과의 눈에 띄는 모든 고관대작들은 품 안에 약 아니면 독을 품은 사내들 같았다.

이방과는 얼른 세자가 병문안을 마치고 다시 궐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방과의 생각보다 병문안은 길어졌다.

“세자저하는 예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직후에 황주에서 화령백의 호위를 받았지. 그 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시는게야.”

이방과의 곁을 지나가던 이름 모를 공경대부가 자기 아들로 보이는 사람에게 세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이방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세자와 아버지 이성계야 그런 마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 중 그런 마음으로 화령백을 찾아온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방과는 중문을 통해 슬쩍 본채 쪽으로 통하는 안마당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답호와 중립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대부 하나가 연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자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이방과는 그 청색 답호 입은 사내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건 몰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어린 동생이 천군만마의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 청색 답호의 청년도 고개를 돌려 이방과를 바라보더니만 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을 점고하시느라 쉴 수가 없겠습니다. 형님.”

“아니다 방원아. 너야말로 고역이로다. 이리 많은 이들이 집을 에워쌀 줄 어찌 알았겠느냐? 이건 병문안이 아니라 되려 아버지가 병을 얻으실지도 모르는 일이구나.”

“걱정 마십시오. 형님. 재추의 정가(政街)에서 이런 일이야 각오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백색 장옷 위에 청색 답호를 두른 사내의 얼굴은 가늘고 예리한 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비와 형의 부리부리한 눈 대신 가늘고 긴 눈과 날카로운 입술을 지녔는데 그 끝이 붉고 낯빛은 창백하였다. 붓이 그려낸 것 같은 콧대 또한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내려와 얇은 수염 위에 지붕처럼 얹혔는데 얼핏 봤을 때 인물이 꽤 보암직하였다.

하지만 길지만 얇지 않은 눈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기묘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으니 사내는 격의 없는 표정보다는 예의를 갖춘 모양새가 더 어울려 보였다.

바로 이방과의 아우, 이방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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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음력 사월 스무날(2) +2 22.05.30 486 22 13쪽
19 음력 사월 스무날(1) +3 22.05.30 495 2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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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음력 사월 열 아흐레(2) +5 22.05.26 571 3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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