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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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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9,279

작성
22.05.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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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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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12쪽

음력 사월 열 이레(1)

DUMMY

진종일 으르렁대는 하늘은 천지를 어둡게만 할 뿐 빗방울을 쏟아내지 않고 있었다. 흐린 하늘은 애꿎은 날씨만 서늘하게 하고 갈 곳 없는 바람만 도성에 풀어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웃옷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길을 오갔다. 견태고는 방문을 조금 열어 둔 채로 안에서 칼을 닦으며 골똘히 일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고도리살에 맞아 죽은 두 명의 무관은 서정영과 정백중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고관대작의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지만 고도리살에 동시에 맞아죽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희한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두 무관의 죽음은 이방과가 직접 거론한 일이었다.

“죽은 김휴열과 이방과 영감 둘이 알겠지. 그 속을 알려면 이방과 영감을 다시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니겠소?”

이상겸의 말마따나 견태고는 이방과를 만나야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방과는 요즘 따로 척오조에게 보고를 받을 새도 없이 바빠보였다.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듯싶었다.

견태고가 묵고 있는 초가 앞으로 어배동 화령백의 집으로 오가는 말만 하루에 십여필이 넘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탁주를 받으러 오는 사내들의 말을 들어봐도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 없던 집에 불쑥 나타나 기거하는 견태고를 보고 경계하던 사내들도 몇 번 얼굴을 마주치자 언제 서먹하게 굴었냐는 듯 저잣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쌈지에서 꺼내 말을 하는데 하나같이 편하게 들을 내용은 아니었다.

“조만간 이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구먼.”

“이 사람아, 그게 소문이 아니라네. 이미 수많은 지관(地官)들이 개경 산어귀를 훑고 다니면서 성문을 다시 내고 궁을 복원한다는 소문이 있다네.”

“그래? 난 저 남쪽 한양 땅에 왕기(王氣)가 새로 서려서 그리 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개경은 정몽주 대감 돌아가실 때 끝난 거라고 봐야지. 야차 같은 것들!”

“이 사람아, 솔직히 이성계 장군이 왕보다 낫지 뭔 소리야?”

“그래서 역적질하냐? 정몽주 대감 때려죽였으면 그 다음은 뭐겠어?”

“어허,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인가! 허허, 거 괘념치 마십시오. 이 놈이 주정뱅이라서······”

밑바닥 민초들의 말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으랴만 사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그러나 사내들은 결국 반은 체념하고 반은 기대하는 듯한 말투를 남기고 초가를 떠나갔다.

“뭔 일이 벌어지든 지금 형편보다야 낫지 않겠소. 어서 끝나기나 했으면 소원이 없겠네.”

삼백년 왕도에 풍파가 없었던 것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 때는 무인들이 왕을 갈아치웠고 한 때는 몽골이 조정을 주물렀으니 이번에는 다시 이씨가 황도를 장악한다 해도 다 한철 지나갈 일이 될 것이었다. 개경사람들은 현실에 순응하면서 미래를 찾는 것에 익숙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평생 개경에서 산 토박이들 아무도 모르는 일을 양광 서주 사람 견태고만이 알고 있었다. 죽은 정몽주가 무엇인가 마지막 일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은 안 나가시나요?”

윗방에 앉아있던 율목이가 어느새 조르르 건너와 견태고에게 다가오다가 서슬퍼런 칼을 보더니만 흠칫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견태고는 슬쩍 칼을 물러 칼집에 넣어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좋지 않으니 집에 있어야겠구나.”

“이성계 대감 댁에 안 가셔도 되요? 오늘은 칼을 쓰지 않으시나요?”

아이의 말에 견태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야 하지만 어른이 안 계시고, 칼은 매일 뽑아 쓰는 것이 아니니라.”

“칼도 활처럼 매일 닦아야 하는 건가요?”

견태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슬쩍 방 안으로 한 발을 걸치더니 어미가 있나 없나는 확인하고는 방 안으로 조르르 들어왔다. 영민하게 생긴 아이였지만 장난기도 가득해보였다.

“칼 한번 만져봐도 되나요?”

“안된다.”

“네.”

아이의 생기넘치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 죽은 얼굴로 바뀌었다. 견태고는 그런 아이를 보고는 옷고름 사이에 매달아 두었던 장도칼을 풀러 보여주었다.

아이의 얼굴에 슬쩍 화색이 다시 돌았지만 여전히 견태고 뒤의 환도를 흘끗 쳐다보는 것이 여전히 만지고 싶은 욕심을 버리진 못한 것 같았다. 견태고가 씩 하니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작은 칼에 그치지 않고 큰 칼을 잡으려면 장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얼마나 걸리나요?”

“몇살이냐?”

“일곱입니다!”

“뜻이 있다면 십년 안 채우고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견태고는 장도칼의 손잡이를 잡아보는 율목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으로 가지라는 시늉을 하였다. 율목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도칼을 들어보였다.

아이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데 견태고는 웃으며 아이가 장도칼을 품 안에 곱게 넣는 것을 보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사내와 아이의 노는 모습은 무척이나 평안하고 한가로워보였다.

“나리 칼을 주시면 나리는 뭘 쓰시게요?”

“나는 또 하나 있느니라.”

사내는 구석 보퉁이에서 작은 장도 하나를 더 꺼내어 저고리 고름 사이에 묶었다. 율목이는 그 칼과 자기것을 비교하더니 히죽 웃어보였다.

“제 것이 더 큰데요.”

“어머니에게 들키지나 말거라.”

율목이의 얼굴에 다시 천진한 미소가 올라오더니 사내에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보였다. 같이 비밀을 지키기로 한 사내의 결의가 보였다.

견태고가 활짝 웃음을 짓는 순간 그와 동시에 사내의 눈이 열린 문을 향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손이 뒤춤에 감춰두었던 환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불명확한 형체가 싸릿문을 넘어오는 것과 동시에 헛기침이 들려왔다. 인기척을 내려는 상대방의 태도에 견태고는 잡았던 환도 손잡이를 놓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누구시오?”

“이곳이 지유 견태고가 기거하는 곳이오? 내가 맞게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구먼.”

푸른 단령에 검은 중립, 그 아래로 보이는 하얀 얼굴에 얇은 입술과 옅은 수염. 그리고 상대방의 지그시 바라보는 긴 눈초리가 견태고의 눈에 단숨에 들어왔다. 젊은 사대부는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견지유인 모양이구먼. 나는 이방원이라고 하오. 형님의 명을 받았소만.”

견태고는 방문턱에 앉아 말없이 싸리 문 앞에 종자도 없이 등장한 사내를 내려보았다. 이방원은 중립을 들고 견태고의 방을 올려 보았다. 사내의 등뒤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


율목이는 저자에 간 어머니 대신 솜씨 좋게 상을 차려왔다. 아이의 서투른 솜씨였지만 나름대로 술과 안주, 게다가 어디서 났는지 귀한 다식과까지 내왔다. 이방원은 슬쩍 아이를 보더니만 점잖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이 다식과는 어디서 나온것이냐? 네가 직접 만든 것이냐?”

“아닙니다. 어머니가 며칠 전에 군관 나으리 주신다고 시전에서 얻어오신 것이여요.”

견태고가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보는데 이방원은 다시 율목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군관 나으리에게만 주지 왜 나에게도 안주로 주느냐? 군관 나으리 몫이 적어질 것인데?”

“예전에 찾아온 다른 군관 나으리는 귀해 보이지 않았지만 나으리는 아무리 봐도 높으신 분 같으니 같이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얇게 저민 쇄은(碎銀)하나를 율목이에게 건네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가 눈치를 보며 견태고를 쳐다보는데 이방원은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불러세웠다.

“이것은 내가 괜히 네가 귀엽다 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네 어머니의 음식과 네 수고의 값이니 네가 간직할 생각을 하지 말고 어머니께 그대로 전해 드려라. 알겠느냐?”

견태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율목이는 고개를 땅바닥에 닿게 숙이고 쇄은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방원이 문을 보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벼슬아치가 어린 아이에게 공치사를 들었는데 맞는 값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지유 견태고, 밀직사 대언을 뵙습니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 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내 놓았다. 다름 아닌 정몽주가 쓴 칠언절구였다. 이방원이 종이를 펴 보며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양광 서주에서 온 지유 견태고, 만나게 되어서 반갑네.”

“굳이 이 시부 때문에 저를 따로 찾아오신 것입니까?”

이방원은 견태고를 흘끗 보더니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여럿이 알 일이 있고 주장(主將)이 알아두고 함구할 것이 있다. 이것은 여럿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이 칠언절구에 대해 아는 자가 또 있는가.”

“행수 이상겸이 판밀직사사 어르신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난천 왕형재의 그간 종적을 파악하기 위해서 수하들을 이끌고 탐문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어디있는가?”

“부장 장천보가 휘하 두명을 이끌고 웅천의 관원 둘이 죽은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대기중입니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뭔가 수긍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일이 돌아다니 다행일세. 형님이 따로 별초를 만드신다 하여 애꿎은 녹봉만 날리고 무위도식하는 칼잡이들만 늘어날 줄 알았건만 내 기우였던 모양이구먼.”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사내의 말은 정중하면서도 부박하였다. 사람을 높이는 지 깔보는지 알 수 없는 화법이었다. 견태고는 고개를 숙이고 답하였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 노력할 뿐이옵니다.”

“능력없는 발분은 헛된 고생만 늘어남일세.”

견태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이방원이 펴 놓은 시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관의 능력이 이 글을 읽기에는 미흡합니다. 난천이라 칭하던 왕형재가 이 글 시구에 있는 것만 파악했을 뿐입니다.”

“흠.”

이방원이 슬쩍 눈을 크게 뜨더니 입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내와 대작하며 슬쩍 구부러졌던 이방원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순간 견태고는 이방원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나는 것인 것 싶은 착각에 빠졌다. 이방원의 눈은 기이할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다.

“지유가 궁금해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말투마저 정중하게 달라졌다. 견태고는 더욱 정중한 태도로 손을 뻗어 이방원이 보고 있는 칠언절구를 가리켰다.

“이 글이 화령백에게 협박을 하는 글이라는 이야기를 판밀직사사께 들었습니다. 대언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소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이 시와 관련 있다 믿으신다면 그 얼개를 알고 싶습니다.”

“얼개?”

“시의 얼개 말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인다면 용병(用兵)이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용병이고 요격(邀擊)이니 제가 얼개를 알 수 있다면 할 일이 생겨납니다.”

이방원의 번쩍이는 눈이 견태고를 바라보더니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죽유문괘일형(摧竹遺門掛壹熒)

난천기소지일경(爛天旣消遲日傾)

추성고응척적릉(追星孤鷹陟寂陵)

낙조십영수화령(落照十英收和寧)

이방원은 이 싯구를 견태고가 볼 수 있도록 돌려보이더니 학당선생이 학생에게 강론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나는 가장 기이하다 여겼소이다. 낙조(落照)란 망해가는 사직을 말한다 여겼을 때, 화령을 거두어 간다는 십영(十英)은 분명 꽃봉우리가 아닌 영걸(英傑), 즉 사람을 말한다 생각하였지요.”

“열 명의 영걸?”

견태고가 중얼거리자 이방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내 추측이라 여겼소. 가능성은 있지만 실체가 되지는 않았었지. 하나 형님게서 이번에 죽은 자의 별호가 난천(爛天)이라 했다는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뀐 것이오.”

“어찌 말입니까?”

이방원은 칠언절구의 위를 가리켰다.

“이 위의 세 구는 다름아닌 명부(名簿)외다. 열 명의 명부요.”

견태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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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음력 사월 스무 사흘(2) +4 22.06.07 466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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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음력 사월 스무 이틀 +3 22.06.03 499 24 13쪽
23 음력 사월 스무 하루(3) +5 22.06.02 485 23 13쪽
22 음력 사월 스무 하루(2) +2 22.06.01 469 22 13쪽
21 음력 사월 스무 하루(1) +1 22.05.31 497 22 13쪽
20 음력 사월 스무날(2) +2 22.05.30 485 22 13쪽
19 음력 사월 스무날(1) +3 22.05.30 495 26 13쪽
18 음력 사월 열 아흐레(3) +2 22.05.27 525 23 12쪽
17 음력 사월 열 아흐레(2) +5 22.05.26 571 30 12쪽
16 음력 사월 열 아흐레(1) +7 22.05.25 580 34 12쪽
15 음력 사월 열 이레(2) +6 22.05.24 581 28 11쪽
» 음력 사월 열 이레(1) +5 22.05.23 599 28 12쪽
13 음력 사월 열 엿새 (3) 22.05.20 615 29 13쪽
12 음력 사월 열 엿새 (2) +1 22.05.19 686 31 12쪽
11 음력 사월 열 엿새 (1) +1 22.05.19 693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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