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SF

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64,644
추천수 :
2,999
글자수 :
294,793

작성
23.07.03 22:30
조회
1,499
추천
67
글자
12쪽

초롱부름 (4)

DUMMY

나의 사부님, 도룡선생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세상은 말세고, 홍콩은 무법천지라고.


그러니 세상 어딜 가도 얕보이기 싫으면 무술이라도 열심히 배워두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네 속에 용이 똬리를 틀면 놈을 죽여라.’


‘제아무리 용 난 놈도 머리가 뚫리면 죽는다.’


‘설령 죽이지 못해도 여차하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려 줘야 한다.’


그래야 너 같은 고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거라며,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사부님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내가 강해지면 되는 거니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홍콩에서 멀리 떨어진 캘리포니아까지 온 것도 사실 비슷한 맥락이었다.


만약 인류가 싹 다 죽어버리고 나면 나 같은 양아치가 잘 나가는 세상이 될 거라며 사부님이 살살 구슬렸으니까.


나는 그저 못 이기는 척, 사부님의 티켓을 받아 떠밀려 왔을 뿐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니?]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놈은 주어를 말하지 않았다.


“헛소리.”


나는 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 하나 크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눈.


그 눈 속에는 수십 개의 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눈 속의 눈. 그 눈 속에 담긴 더 많은 눈.


아득한 숫자의 눈이 일제히 나를 응시하자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간 끌지 말고 동료들한테 보내.”


그 대가리에 창을 꽂아버리기 전에.


나는 말을 삼켰고, 녀석은 말을 이었다.


[네가 보고 싶은 사람은 과거에 있잖니. 오늘 같이 온 동료가 아니라.]


숨이 턱 막혔다.


놈의 말대로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500년 전의 과거에 있었으니까.


아빠. 사부님. 같은 고아 출신 문하생들.


더럽고 추잡한 동네였지만, 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깨끗한 척, 고상한 척하는 미국보단 솔직하고 정감 가는 동네였으니까.


[나는 언젠가 꿈과 꿈을 이을 거란다. 그게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지.]


괴물은 내 눈을 마주 보며 이상을 말했다.


초롱불처럼 반짝거리는 놈의 눈동자에서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꿈이, 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단다. 나는 이를 위해 유랑 중이고.]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


나는 끊어질 것 같은 신경줄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더 참지 못하면 그대로 창을 휘두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창질.


이걸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싸움의 기본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


사부님이 제일 처음 가르친 것이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놈에 비하면 나는 개미만큼 무력했다.


[청하거라.]


놈은 자애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 밑에서 일하겠다고. 나의 수족이 되어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초롱불을 향해 청하거라. 그리하면 너에게 영원토록 지지 않을 꿈을 안겨주마.]


겹눈 속의 눈동자 사이로 꿈의 형상이 보였다.


괴물 하나 없이 번창한 홍콩의 번화가가 보였다.


엄마 아빠와 함께 풍족한 나날을 보내는 내 모습이 보였다.


살인기술로서의 무술 대신 심신수양법으로서의 무술을 가르치는 사부님.


굶주림을 모르고 자라나는 아이들.


사랑해 마지않을 나날이 눈동자 너머로 흘러온다.


“끝내주네.”


나는 놈이 보여주는 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놈은 나에 대해 모른다.


인간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듯, 놈 역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으니까.


“당신 밑에서 일하기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못 해본 일도 많고.”


돈을 흥청망청 써보고 싶다. 부자들이나 먹는 산해진미를 먹어보고 싶다. 연애도 해보고 싶고, 농사도 지어보고 싶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눈에 새기고 싶다.


“게다가 못 이겨본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까 아직은 안 돼.”


애초에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멍청이로 사는 건 괜찮아도 겁쟁이로 남는 건 질색이니까.


딱히 아빠의 유언이 아니어도, 타고난 성질 자체가 이랬다.


[황홀하구나.]


괴물은 내 눈빛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눈빛은 본 적이 없었지. 청명하게 끓어오르는 풍미가, 그냥 보내기엔 아까울 정도야.]


“걱정하지 마. 다시 돌아올 거니까.”


돌아와 주마.


반드시 돌아와, 저 빌어먹을 대가리를 창끝으로 꿰뚫어주마.


그러기 위해선 오늘은 살아남아야 했다.


[네 초롱불은 선물로 남겨두마.]


괴물은 연기로 이루어진 팔을 하나 뻗어내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기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미끈거리는 촉감이 소름 돋았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내게 돌아오렴.]


그 말을 끝으로 내 몸의 주변에 연기가 일었다.


나는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내 마음속에도 용이 똬리를 틀었으니까.


나는 도룡지기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





“저기에요! 왔나 봐요!”


나는 세츠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연기와 함께 나타난 메이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괜찮아. 좀 피곤한 거 말곤.”


세츠나의 질문에 그녀는 멋쩍은 듯이 대답했다.


그 말대로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좀 늦었네. 포교라도 당했어?”


시간으로는 5분 정도 지났지만, 체감상으로는 50분은 기다린 것 같았다.


“맞아. 되게 집적거리더라. 침이라도 바를 기세더라고. 기분 나쁘게.”


메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만약 조금만 더 늦으면 우리끼리라도 다시 초롱부름으로 올라가자는 말까지 오갔을 정도였으니까.


“고생했어. 세츠나 씨도 고생했어요.”


“그냥 말 편하게 하세요. 상급자잖아요. 제가 연하고요.”


“...그렇다면야.”


그녀 역시 긴장이 풀린 듯 미소를 지었다.


우중충했던 밤을 밝히는 화사한 미소였다.


데이브레이커. 코드명 잘 지었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가?”


메이는 저 멀리 떨어진 에리두의 성벽을 가리켰다.


유랑도시의 시속이 30km였으니, 거리로 치면 적어도 30km는 넘을 것이다.


기왕이면 좀 가까운 곳에 바래다주면 좋았을 텐데. 융통성 없는 괴물 같으니.


“비서한테 픽업해달라고 해야지. 아직 당직 교대 시간은 아니니까, 누구 깨우기도 그렇잖아.”


나는 단말기를 조작해 비서 로봇을 호출했다.


차량 지원 정도를 기대했는데 아예 헬기로 데리러 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연 천조국 다운 통 큰 씀씀이에 감탄하고 있으니 옆에서 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그녀는 지평선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초롱부름을 창끝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저런 것도 이길 수 있을까?”


각오는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마음가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고, 항거할 수 없는 재앙도 분명 존재한다.


“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창대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아티펙트에는 한자로 등용문이라 적혀있었다.


“원래 용은 개천에서 나는 거라고 하잖아. 무럭무럭 커서 한 방 먹여주자고.”


역사에 기록된 이상체와 이상현상 중엔 재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었다.


공중에서 추락한 거대괴수에 의해 반파된 시애틀.


바다에서 출현한 괴물화 질병에 의해 유령도시가 된 보스턴.


콘크리트를 녹이는 열풍에 녹아내린 휴스턴.


빛을 먹는 사냥개. 소리를 죽이는 새 떼.


인류를 종말로 이끈 괴물 중에는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대화나 타협할 여지조차 없는 재앙도 있었다.


“우리는 죽으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 죽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사는 건 사람답게 살아야지.”


나는 믿고 싶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부서지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무의미한 삶은 없는 거라고.


떠나가는 초롱부름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기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두 방향에서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제야 말하는 건데. 다들 내일 혹시 모르니까 청문회 준비해.”


“응?”

“네?”


의아해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근무지 이탈한 거잖아. 세츠나는 당직자고. 우리가 나갔다 온 거,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메이는 그 말에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고, 세츠나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전에 말했잖아. 규칙을 깰 땐 규칙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어야 되고. 설득할 자신이 없으면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또 허세를 부릴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자신 있거든. 애초에 자신이 없었으면 출발을 안 했지.”




*****



“오늘 아르고 클럽의 회의를 소집한 엘리자베스 그레이엄입니다. 다들 회의 소집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직자의 이탈을 발견한 건 엘리자베스였다.


밤늦게 운동하던 중 헬기 소리를 듣게 됐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당직실로 찾아와 남겨진 쪽지를 확인한 뒤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그녀는 고생했다고 말했고, 피곤할 테니 세츠나의 당직은 자신이 대신 서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친절은 친절이고, 원칙은 원칙이니.


그녀는 내일 회의가 있을 거라는 말을 우리에게 전했고, 그녀의 말대로 점심에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오늘 회의의 안건은 지난밤에 에리두를 지나간 초롱부름. 그곳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 후 복귀한 남하진, 아사히 세츠나, 메이 첸. 총원 3명의 사후보고 및 질의응답입니다. 대표로 남하진 회장님 먼저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회의를 소집한 게 엘리자베스라 다행이다.


체리 메이빌이었으면 ‘회의’가 아니라 ‘청문회’였을 거고, ‘정찰 임무’가 아니라 ‘무단이탈’이라는 말로 시작됐을 테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단상 위에 올라가 청중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들 대략적인 상황 자체는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들은 듯했다.


캐시는 아무런 상의 없이 다녀온 것에 섭섭해 보였고, 체리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보리스의 경우에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만, 그 역시 제대로 된 이유를 듣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번 일은 내 독단이고, 아무런 설명 없이 다녀온 것도 사실이었으며, 본부를 무단으로 이탈한 것 역시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처음 올린 말은 사과였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사과를 건넨 뒤 말을 이었다.


“여러분과 상의 없이 유랑도시에 다녀온 점. 기지에서 대기하기로 한 협의를 어긴 점. 당직자를 데리고 근무지를 이탈한 점. 모두 잘못된 일이고, 책망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다녀와야 할 이유는 있었다. 무사히 돌아올 자신감도 있었다. 다녀온 다음 해명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잘한 일이 있다고 해서 잘못한 일이 없던 것이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급하게 유랑도시에 다녀온 이유는, 샘플의 확보를 위해서였습니다. 다신 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죠.”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초롱부름에서 얻은 전리품을 탁자 위에 전시했다.


“초롱불. 꿈조각. 유랑도시의 토양.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카락. 이런 희귀한 소재들이 이상현상 면역 연구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연구 시설의 인공지능 역시 동의한 내용이었고요.”


세렌디피티를 기억하라.


페니실린. 아스피린. 허블 딥 필드. 위대한 발견과 발견에는 우연이 따랐다.


“우리는 이상체의 멸종 없이도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잠든 사이에 아이달 연구가 완성됐듯, 아이달의 대체재나 새로운 치료법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우리의 목표는 이상체의 멸종이 아니다.


별바라기를 대체할 능력자를 찾는 것도 아니다.


다른 방주도시의 행적을 알아내는 것 역시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수단일 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의 재건이다.


“이것이 제가 유랑도시에 다녀온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앞으로의 방향성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명분은 세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실익을 논할 차례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 미래 발굴 (4) +6 23.07.12 874 59 13쪽
23 미래 발굴 (3) +4 23.07.11 951 53 14쪽
22 미래 발굴 (2) +10 23.07.10 1,063 58 13쪽
21 미래 발굴 (1) +9 23.07.09 1,146 71 14쪽
20 찰나 (2) +11 23.07.08 1,201 77 14쪽
19 찰나 (1) +4 23.07.08 1,139 63 13쪽
18 도약 (4) +3 23.07.07 1,226 62 13쪽
17 도약 (3) +5 23.07.06 1,226 63 13쪽
16 도약 (2) +6 23.07.06 1,295 66 13쪽
15 도약 (1) +7 23.07.05 1,414 69 14쪽
14 초롱부름 (5) +6 23.07.04 1,462 74 14쪽
» 초롱부름 (4) +6 23.07.03 1,500 67 12쪽
12 초롱부름 (3) +6 23.07.02 1,515 71 13쪽
11 초롱부름 (2) +3 23.07.01 1,647 74 13쪽
10 초롱부름 (1) +6 23.06.30 1,895 78 13쪽
9 방주도시 (2) +7 23.06.29 2,149 93 13쪽
8 방주도시 (1) +4 23.06.28 2,316 110 13쪽
7 투표 (2) +5 23.06.27 2,710 111 13쪽
6 투표 (1) +8 23.06.26 2,919 125 13쪽
5 튜토리얼? (4) +6 23.06.25 3,171 134 14쪽
4 튜토리얼? (3) +4 23.06.24 3,577 139 15쪽
3 튜토리얼? (2) +6 23.06.23 3,901 144 12쪽
2 튜토리얼? (1) +6 23.06.22 5,810 150 14쪽
1 리세마라 +12 23.06.22 6,540 203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