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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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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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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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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투표 (1)

DUMMY

투표 결과는 당연하게도 만장일치였다.


죽은 사람에게 핵심 요직을 계속 맡겨두자고 주장하는 건 트롤링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늘어놓은 말은 일종의 쇼맨십이었고, 다들 이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흥을 깨진 않았다.


배신자, 탈주자, 도망자.


이런 프레임이 씌워진 이상 놈을 옹호하거나 변호해줄 사람은 없었으니까.


쓰레기에게 매정한 건 27세기가 되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해임 결정이 끝났네요. 이제 신임 회장 투표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체리는 빈 단상을 바라보며 운을 떼었다.


신나게 전임 회장 욕을 끝낸 나는 자리로 돌아왔고, 지금부터는 적당히 눈치를 봐 가면서 흐름에 편승할 생각이었다.


정치의 기본은 생존.


너무 잘난체하는 것도, 너무 밉보이는 것도 정치에선 별로 좋은 포지션이 아니다.


이는 집안 어르신들이 늘 농담처럼 조언하던 말이었고, 특별한 전략 같은 게 없으면 일단 눈치부터 보라는 게 조언의 골자였다.


언제 어느 시대든 모나지 않고 중간만 가는 게 생존의 핵심 요령인 셈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후보 선정은 지원자를 받는 걸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입후보하실 분, 혹시 있으신가요?”


체리의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초면인 사람들.


인류 멸종 직전인 위기 상황.


방주도시의 총책임자라는 직책.


모든 게 겹치자 다들 섣불리 나서는 걸 꺼리고 있었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면 권력에 욕심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독재자로 몰리기라도 하면 제 명에 못 살고 쿠데타를 당할 각오 역시 해야 했다.


그러니까.


“누가 회장이 되든, 견제 장치는 좀 만들어 놓는 걸로 합의하는 게 어떨까요?”


내 목소리가 정적을 깨자 시선이 쏠렸다. 계속 말해보라는 눈치였기에 나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입법 절차. 큰 틀의 규칙 같은 걸 정할 때는 만장일치로 정하게끔 방주 시스템에 등록하는 거죠. 아까 보니까 그런 것도 할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예산안 처리. 행정과 사법처리까지 만장일치로 하자고 하진 않았다.


그런 것까지 만장일치로 하자고 했다간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을 테니까.


만장일치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기에 오히려 빛을 발하는 제도였다.


“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의견인데, 회장 투표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장일치로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체리는 내 말에 동의한 뒤 곧바로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회장 자리가 자주 바뀌면 다들 혼란스러워할 거 같기도 하고, 저희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회장이 되신 분도 활동하기 편하실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과반수로 정한다면 불만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나중에 회장이 실수라도 한다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이래서 xx에게 뽑았어야 했는데.’

‘난 쟤 안 뽑았는데!’


6:1처럼 절대다수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4:3이 아니라 5:2만 되어도 이런 소수 인원의 공동체에선 이런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다시 입후보를 시작할까요?”


그렇게 모두의 합의 아래에 회장 선거에 대한 대략적인 규칙이 정해졌고, 체리의 말과 함께 다시 입후보 절차가 진행되었다.


잠깐의 정적과 약간의 탐색전이 있었고, 이를 깨고 제일 먼저 손을 든 건 캐시 해서웨이였다.


“나! 아무도 없으면 내가 회장 할게!”


“정말요?”


“응. 자신 있거든.”


캐시는 체리의 질문에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말아먹을 자신. 진짜, 확실하게! 방주에 있는 것들 흥청망청 쓰면서 놀 자신은 있어!”


회의실의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체리는 한숨을 쉬었고, 메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 역시 무표정으로 캐시를 바라봤고, 시선이 쏠리자 캐시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 아하하하... 농담, 농담. 다들 너무 굳어있길래 해본 말이지. 하하......”


변명을 하니까 오히려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한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방주의 물자를 탕진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난 회장감은 아닌 거 같아! 난 패스!”


저쪽이 본심이었는지 캐시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내서 속이 후련해진 모양이다.


“저도 다른 분께 양보하고 싶습니다.”


계속 조용히 있던 보리스가 말했다.


“지휘하는 쪽보단 지휘받는 쪽이 익숙하고, 지휘관보단 병사 쪽이 익숙해서입니다. 대신 다른 분이 회장이 되신다면 전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보리스는 체격도 좋고 나이도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만약 회장이나, 하다못해 군기반장이라도 맡았다면 썩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을 것 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본인의 성격이 그런 쪽으론 맞지 않은 듯했다.


“저도 다른 분께 양보하겠습니다.”


이번엔 엘리자베스였다.


“능력의 잠재력이 모자란 만큼, 군사 및 능력 개발에 더 시간을 쓰고 싶습니다. 보리스 씨와 마찬가지로, 누구든 회장이 되신다면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맹세합니다.”


잠재력이라는 말에 나는 회원증의 색깔을 떠올렸다.


골드 등급은 세츠나.

퍼플 등급은 나와 체리.

나머지 4명은 모두 블루 등급이었다.


이는 각성을 집행한 인공지능 ‘알파’가 각성할 당시의 심상을 분석해서 뽑아낸 데이터였다.


“등급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엘리자베스 씨. 각성에 대해선 아직 미지인 부분이 많으니까요.”


체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보리스는 전직 소방관, 엘리자베스는 전직 군인이라고 했지.


둘 다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타입인가.


나쁘지 않네.


권력에 욕심 있는 타입보단 백만 배쯤 나았다.


“나도 못 해.”


메이 첸이 혀를 차며 모두에게 말했다.


“난 빡대가리라서 그런 거 못 하겠더라고. 골목대장 노릇이면 잘할 자신 있는데, 보니까 그런 자리도 아닌 거 같고.”


저쪽은 솔직함이 과한 타입인 거 같았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얼굴. 제복 위에 걸친 낡은 도복. 필요 이상으로 투박한 말투.


아무래도 그녀는 방주에 오기 전에 제법 거칠게 살아온 모양이다.


저렇게 얕보이기 싫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도 일종의 방어기제겠지.


“이제 3명 남았네요.”


“그러게요.”


나는 체리의 말에 대답하며 세츠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무슨 핑계를 대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 순간 장난기가 도졌다.


나까지 그만두겠다고 하면 표정이 볼만하겠지.


저 핑크 머리를 상대로 쭈뼛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하마터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녀에게 살해당할 확률만 없었으면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헛기침을 했다.


“아마 2명일 거예요. 아까 식당에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완장 차는 쪽엔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아, 네!”


대인기피증까진 아니고, 발표 공포증 비슷한 건 있는 모양이다.


조별과제를 할 때 발표만 제발 빼달라고 애원하던 후배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이제 진짜 2명 남았네요.”


“그쪽은 안 그만둬요?”


내 말에 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하진 씨도 그래서 안 그만두신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애초에 7명뿐인 선거.


이 선거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이상적인 회장이 될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최악의 회장을 피하는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회원들이 스스로 회장 자리를 포기하는 흐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보단 적당히 묻어가려는 사람이 많은 쪽이 조직을 더 잘 굴러가게 하는 법이다.


남은 일은 둘 중 누가 회장이 되든 상대를 지지하는 것뿐.


이를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야 했다.


“그러면 일단 공약 같은 거라도 서로 얘기해 볼까요?”


“네, 좋아요.”


체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회장이 되면, 여기 있는 회원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길 생각이에요.”


“최우선이라는 건...”


“네, 필요에 따라선 방주를 버리거나, 아니면 방주를 성벽 삼아 평생 농성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디서 난민이라도 오는 게 아니면, 여기 있는 일곱 분의 의식주는 평생 보장되니까요.”


“......”


나는 체리의 지향점을 곱씹었다.


약관에 따르면 회원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 활동할 의무가 있었다.


이를테면 탐험을 통한 아이달의 수색 및 확보, 이상현상의 해결, 세계 각지의 방주도시의 안전 확인 등이 이에 속했다.


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건 현재 깨어있는 회원들의 몫이다.


우리의 판단에 따라 인류 대신 에리두를 고르고, 그리고 에리두를 버리고 우리끼리 도망치는 것 역시 충분히 고를 수 있는 선택지였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각자의 목숨이었으니까.


“따라서 저를 회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최대한 편의와 안전을 제공하는 쪽으로 도시를 관리할 생각이에요.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구미가 당기는 공약이다.


이곳은 방주도시.


지하에 잠든 10만 명의 동면자를 위해 지어진 요양원이자 요람.


그녀의 말대로 7명 정도라면 평생 써도 넘쳐날 정도의 물자가 비축되어있을 것이다.


에너지와 자원 역시 마찬가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현상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는 게 아닌 이상, 우리의 수명이 다하더라도 도시는 여전히 제 기능을 유지할 것이다.


“잘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그녀에게 물었다.


“말씀 끝나셨으면, 저도 한마디 해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바톤을 넘겨받은 나는 호흡을 골랐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또 다른 선택지.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저는 시한부 환자였습니다. 암환자였죠.”


또다시 청중의 시선이 모였다. 이목이 끌리는 건 연설자에게 좋은 징조였다.


“방주의 각성자 시술 덕에 건강한 신체를 되찾았고, 덕분에 저는 두 번째 삶을 얻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방주를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방주가 제게 아이달을 투약하지 않았다면. 전 여전히 죽어있는 상태였겠죠. 제 인생은 사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시점에서 끝난 거였으니까요.”


짧게 끝날 뻔한 인생이었다.


풍족한 출생. 다정한 가족. 나와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 창창한 미래.


이 모든 게 시한부와 함께 끝났고, 내 마지막 3년은 송장처럼 죽어갈 뿐인 나날이었다.


“저는 방주에게 제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방주 밑에 잠든 10만 명에게 저와 마찬가지로 삶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방주의 자원을 절약할 것이고, 사치품 역시 절제할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여러분을 사지로 몰아넣을지도 모릅니다. 전부 제 자기만족 때문이죠.”


지하에 잠든 10만 명을 깨운다. 더 나아가 인류의 존속을 위해 활동한다.


거창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그 뿌리는 자기만족에서 출발한다.


“부모는 아이를 원해서 낳지만, 아이는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방주는 우리를 깨웠지만, 우리에게 방주를 위해 살아갈 의무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목숨은 여러분의 것이고,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나는 회원들의 시선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아직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저들이 나를 회장으로 고르든, 그렇지 않든.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저를 회장으로 뽑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도시의 명운이 걸린 만큼 신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진심이었다.


어중간하게 계속 표가 갈리는 것보단 체리 쪽에 몰표가 나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두 선택지 모두 일리가 있었고, 우리 일곱 명의 안전과 편의는 전자 쪽이 더 확실하게 보장되었으니까.


“좋아요. 그러면 이제... 다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 거 같으니, 간단하게 1차 투표부터 해 볼까요? 처음부터 만장일치가 나오긴 힘드니까요.”


체리가 운을 떼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단말기에서 회의에 참석한 회원들의 사진과 함께 투표 화면이 나왔다.


“기권하신 분들에겐 투표하지 말아 주세요. 투표 시간은 기본값이 5분으로 설정되어있으니, 천천히 투표하셔도 돼요.”


체리의 말에 나는 고민 없이 투표를 끝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오래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투표는 1분 안에 끝났고, 투표가 끝나자 나는 어처구니를 잃었다.


7 : 0


몰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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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미래 발굴 (1) +9 23.07.09 1,146 71 14쪽
20 찰나 (2) +11 23.07.08 1,201 77 14쪽
19 찰나 (1) +4 23.07.08 1,140 63 13쪽
18 도약 (4) +3 23.07.07 1,226 62 13쪽
17 도약 (3) +5 23.07.06 1,227 63 13쪽
16 도약 (2) +6 23.07.06 1,295 66 13쪽
15 도약 (1) +7 23.07.05 1,415 69 14쪽
14 초롱부름 (5) +6 23.07.04 1,462 74 14쪽
13 초롱부름 (4) +6 23.07.03 1,500 67 12쪽
12 초롱부름 (3) +6 23.07.02 1,516 71 13쪽
11 초롱부름 (2) +3 23.07.01 1,647 7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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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방주도시 (2) +7 23.06.29 2,149 9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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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투표 (2) +5 23.06.27 2,710 111 13쪽
» 투표 (1) +8 23.06.26 2,920 12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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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튜토리얼? (2) +6 23.06.23 3,902 144 12쪽
2 튜토리얼? (1) +6 23.06.22 5,811 15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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