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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철 님의 서재입니다.

정의구현에 환장했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무협

도철
작품등록일 :
2021.02.22 16:47
최근연재일 :
2021.05.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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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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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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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화

DUMMY

#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내려온 꽃잎 하나가 정후의 콧등에 내리 앉았다. 붉게 물든 꽃잎. 매화일 것이라 짐작되는 꽃잎의 잔향이 그녀의 코를 간질였다. 달콤한 향기에 취해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너의 강함. 아, 이건 단순히 무공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야. 정신적인 강함, 의지 같은 거랄까. 그리고 도화곡. 이 두 가지가 궁금해.

그 나이에 너같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아. 그리고 그런 너를 키워준 도화곡이라는 곳 역시 연옥과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그녀는 수민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두 가지 물음을 던졌다.


자칫하면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는 물음이었지만 수민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표정으로 질문에 답을 했다.


”우선 네 생각처럼 나의 정신은 강하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나의 의지는 그저 수없이 부서지고 다시 세우는 것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니까.

도화곡이 궁금하다고 했지? 도화곡은 인세에 남은 마지막 별천지 같은 곳이지. 그곳은 사계절 내내 시간이 멈춰있어.“


”나는 사실 육 년 전 그날 죽었어야 하는 몸이었어. 스승님은 그런 나를 가엽게 여기시고 돌봐주신 분이고.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한 내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분이야.“


스승님을 제외하고 난생 처음으로 수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응어리졌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에 수민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건 처음이지만 덕분에 답답한 가슴이 한결 나아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한반도의 마지막 선인(仙人)이자 하늘 끝(天涯)에 맞닿은 유일한 무인이시지.

그런 그분이 등선을 앞두고 남은 마지막 미련이 바로 ‘나’ 이고. 도화곡은 그분이 인위적으로 만드신 세계야.


네가 칭찬한 그 의지 역시 동경하는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비롯되었지.

단지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더 닮고자 한 아이의 몸부림이었을 지도 몰라. 물론 지금의 내겐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지만.“

수민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슬픔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비록 너의 그 꿈이 빌린 것에서 시작했을지라도 나는 그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날 네가 지킨 그 아이는 너의 선택과 각오가 어우러져 지켜낸 생명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아도 돼.

꿈의 시작은 빌려온 것일지라도 네가 행한 것들에는 너의 의지가 깃들어 있어. 그렇다면 그 꿈은 더 이상 빌려온 것이 아니야, 너의 것인 것이지. 당당해질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동경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누구를 구하려 하는 사람은 없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처럼 깊게 파고들어 외로운 수민의 영혼을 위로한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자신을 희생한다는 행위는 결코 동경 따위의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달이 깊게 내려앉은 밤. 서로가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정후는 수민을, 수민은 정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수민이 오늘따라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수민은 유리 같은 마음씨의 소유자였고, 홀로 상처를 감추는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


잠시 화제를 돌릴 겸 그녀는 수민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가 동경하는 스승을 떠나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가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속죄. 자세한 건 서로 조금 더 알아가게 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얘기해줄게. 이건 나의 존재 의의와도 관련된 것이라서 이해해 주었으면 해.“

하지만 아직은 이 얘기를 꺼내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판단한 것인지 수민은 깔끔하게 대화의 선을 그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도 그녀는 이해한다며 수민의 등을 토닥거릴 따름.


”다만, 내가 이번 일을 통해 느낀 것은 나는 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거지. 정의의 집행자를 자처하면서 너무 꼴사나운 모습만을 보였어. 김형··· 그놈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강함을 보인 것도 있지만.“

타는 목마름을 미뤄두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오늘따라 유난히 위축되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 손을 감싸 안으며 그녀는 따스하게 말했다.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수민의 손에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고, 수민의 손이 녹아내리듯 메마른 마음이 촉촉이 적셔졌다.


”네가 나를 도와주었듯, 나도 도와줄게.“


그녀의 그 한마디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며 나의 평정을 깨뜨렸다.

세상에 나온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내 심장이 뜨겁게 불타오른 적은 처음이었다.


일순간 세상이 멈춘듯한 착각과 함께 나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랬다.

‘부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행복이란 마치 비 오는 날의 솜사탕과 같아서 닿으려는 순간 녹아내린다.

지금의 이 작은 행복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행복할 수 있기를.


#


”확실히 서울 주변은 깔끔하네, 요괴 하나 보이지 않아.“

”대도시 주변은 주기적으로 클랜들이 소탕하니까 그럴 수밖에.“

작은 오솔길을 따라 숲을 가로지르며 그녀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장소들과는 다르게 숲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요괴들을 주기적으로 소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무장지대처럼 변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 간간이 보이는 사슴과 멧돼지들을 보며 마음의 휴식을 취한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은은하게 비추는 햇빛과 처음 보는 화려한 나비, 그리고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겨울인데도 이렇게 울창한데 봄이 되면 어떨지 기대가 되는걸.“

수민은 서리가 내려앉은 나뭇잎을 한 장 뜯어내고는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그러게, 잔뜩 피어난 야생화들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오고 싶어지겠어. 그때까지 잘 살아있다면 말이야.“

풍경이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수민과 정후의 상황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역시 추격대가 있겠지?“

”서울은 대도시야. 메이저 클랜만 꼽아도 한 손으로 셀 수 없지. 김형의 말 한마디면 금방 따라붙을 거야, 그러니까 서두르자. 적어도 숲에서의 노숙은 피하고 싶거든.“

숲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일행은 황급히 숲을 뺘져 나가려 애썼다.


#


한편 서울은 김형의 명령에 따라 메이저 클랜 마스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르셨습니까.“


이들을 대표하여 가슴에 수많은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붉은 제복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일이 생겼다. 사라진 두 연놈들을 잡아오는 것. 현상금 정도로는 모자랐던 건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더군. 성공한다면 진조(眞祖)로 승격시켜주지.“

”···!!“


진조(眞祖).


단 두 글자에 내로라하는 하이랭커들의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조.


쉽게 말하자면 순혈. 다르게 표현하자면 진화라고 봐도 무방한 것. 흡혈귀의 강함의 척도는 혈중 농도이다. 얼마나 진조에 다가가느냐에 따라 그 농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원 흡혈귀.

그렇기에 진조로의 승격은 이들의 비원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우리의 대업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너희들이 아닌 클랜의 역량에 맡기도록 하지. 너희는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김형이 자리를 비우자 장내는 뜨겁게 불타올랐다. 진조가 된다는 것은 곧 김형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다들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다.

경쟁을 넘어 끈적한 살기가 서로의 목덜미를 위협하자 금발의 붉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이를 종식시켰다.


”클랜 당 최정예 사냥개 한 팀씩을 구성한다. 인원은 팀당 4인.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김형만큼은 아니지만 오히려 성정 면에서는 더욱 잔혹한 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난 좋아.“

이들 중 유일한 홍일점. 붉은 장미무늬의 치맛단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가 붉게 빛나는 눈을 번뜩이며 동의하자 다른 이들도 이에 동의하며 각자 최고의 패들을 꺼내 사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해가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인근의 마을에 도착하겠다는 일념 덕분일까, 일행은 숲을 벗어나 작은 공터에 자리 잡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어 밖에서의 노숙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무로 된 장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횃불을 든 무장 순찰조가 장벽 위를 배회하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수민이 나서서 그들을 부르려 하자, 정후가 수민을 만류하고는 자신이 앞장서서 마을의 입구로 향했다.


”서울에서의 일, 기억 안나? 일단 너처럼 위협적인 몸은 경계 대상 1순위라고.“

그녀의 말에 수민은 자신의 몸을 힘끔 보고는 흠칫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자신에겐 그저 아름다운 근육일 뿐이었다.


”계시나요?“

그녀가 정중하게 입구의 문을 두드리자 경계 중이던 순찰조가 부리나케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횃불을 들이대며 일행을 비추자 수민과 정후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는 싸울 의향이 없음을 표현했다.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데 하룻밤만 머무를 수 있는지요.“

그런 정후의 말에 그들은 잠시 쑥덕거리더니 마을에서 급하게 사람을 한 명 데려왔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손쉽게 열리는 대문. 문이 열리고 일행이 조심스럽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가 구부정한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노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래, 여행객이라고? 밖은 위험하니 어서 들어와 걱정말고, 하루 푹 쉬가 가게나. 그 정도의 도량은 있으니, 껄껄껄.“

무언가 어색해 보이는 웃음을 보이며 자신을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작은 마을인지라 별건 없지만 그래도 편히 쉬다 가시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한다면 최대한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험난한 세상 아닌가, 돕고 살아야지. 껄껄.“

초라한 작은 여관에 그들을 맡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촌장. 일행은 우선 짐을 내려놓고 씻기로 했다.


”용케 노숙은 피했네. 이 날씨에 밖에서 자는 건 혹한기와 다를 바가 없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수민이 방에 짐을 내려놓는 사이, 옆 방에서 정후는 답답했던 듯 곧장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아.“

뜨거운 김이 욕실을 가득 채우자, 그녀가 옅은 탄성을 내질렀다.


”오호, 별로 기대도 안 했는데 온수라니 운이 좋은걸?“

작은 마을에 이런 최첨단 시설이 있을 줄이야. 역시 겉모습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콧소리를 흥얼거리는 그녀였다.


”늦었지만 밥은 먹어야겠지? 식사는 방으로 올려달라고 할까?“

”음··· 그래. 항상 이렇게 운이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메뉴는 네가 시키는 것과 같은 것으로 부탁할게.“


항상 갑주를 착용하는 그녀는 오랜만에 갑주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확 풀린 모습을 보였다. 수민 또한 우연치 않게 들린 마을에서의 의외의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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