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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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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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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2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1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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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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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6. 환청메아리 (1)

DUMMY

무대에 다짜고짜 뛰어들어 호석의 멱살부터 잡으려던 재량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섰던 유진이 아니었더라면 본무대 전부터 수상은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영부영 무대를 하는 둥 마는 둥 똑같은 MR이 흐르고, 마이크를 잡고서도 여전히 호석을 죽일 듯이 노려다보는 재량과 약간 넋이 나간 한수와 험악해진 분위기 한가운데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호진의 옆으로 무대 옆쪽에서 유진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 물론 태희도, 윤수도, 심지어 호석조차 자신들과 똑같은 반주가 흐르는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표정을 무대 위에서 재량이 보았더라면 편의점에서 잠시 틀어두었던 연습용 MR을 호석이 귀신같이 듣고서 표절했을거라는, 재량에게 있어선 가장 가능성있는 가설을 그가 세울 이유는 없었을 테지만, 무대는 너무나 멀었고, 오해가 풀릴 턱이 없었던 재량은 무대가 끝나고나서도 마이크에다 대고 너 진짜 그렇게 안봤다고 으르렁댔다. 그런 그가 얌전해진건 호진이 그를 질질 끌고 무대를 내려간 후에 유진이.


“나 때문이야.”


난데없이 그렇게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5년전에 유진이 아마추어시절 무료로 배포했다는 MR은 우연히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5년후에 같은 무대 위에 두 번 재생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그것도 원제작자와 맞서는 팀이 부를 노래가 되어.


“그럼 표절은 아닌건가.”


순해진 재량이 팔짱을 끼더니 끙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선택지는 두 개. 정면돌파. 혹은 우회하기. 당연히 재량에게 답은 전자였다. 그래서 망설임이라곤 모르는 재량의 입술이,


“정면돌파하...!”


자. 고 외치는 순간.


“안돼.”


관심법이라도 쓴 것마냥 한 수 앞 서 단칼에 잘라먹은 한수의 눈빛이 냉철하다.


“그럼 우리 져.”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근데 똑같이 길다면?”

“어?”

“다른 곡이라면 비교할 수 있겠지. 근데 똑같아서는 비교가 아니라, 그 때부터는.”


재량과 한수가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시선을 움직이던 호진이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낸다. 그렇구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죠.”


한수의 시선이 호진에게로 옮는다. 호진은 말을 잇는다.


“그것도 그 비난의 대상이란 우리가 될 게 뻔하고 말예요. 순서상 우리가 뒤니까.”


제대로 정답이었다. 한수가 씩 웃으며 부른다.


“호진아.”

“네?”

“우리가 예스터데이말고 그 다음으로 연습 많이 한 곡이 뭐가 있냐.”


그 다음으로 연습 많이 한 곡? 잔뜩 인상을 쓴 호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기 시작한다.


“음... 어... 으...”

“응. 없어. 우리 몰빵했으니까.”


한수가 단언한다. 유진이 고개를 숙여버린다. 없다고 대답하려다 차마 목에 걸려 숨소리조차 못낸 호진이 한숨을 내쉰다. 슬쩍 구부린 등을 벽에 기댄 재량은 참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을 뻗어 쥐었다 편다. 눈 앞에는 관객석을 다 제압할만큼 성량이 빵빵한 마이크가 하얀 손아귀 안에 쥐어졌다 풀린다. 그 몇 분여를 위한 연습이었다. 하루에 고작 몇십분 남짓하던 그 시간이 종래에 이르러서는 밤을 새서도 모자라 꿈에서까지 랩을 했다. 써클방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파워도 다 꺼진 스피커 대신 웅웅 돌아가는 선풍기 모터가 내는 박자에 맞춰 한수가 랩을 하고 호진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환청이 들렸다. 마치. 메아리처럼. 나중에는 지나치게 리얼해진 환청 때문에 후다닥 달려나가 너네 이 새벽에 연습하러 왔냐?! 하고 문을 벌컥 열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일로 접을 순 없어. 그럴 수는.


“아 씨발 모르겠다.”


비스듬히 기울었던 상체를 바로 세우려던 재량이 멈춰버린 채로 한수를 쳐다본다. 자신이 하려던 말이 저 입에서 내뱉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강재량 너 오늘 박카스 안 마셨지.”

“어? 어어, 그럴 정신도 없었.”

“그래. 그 기세로 가자.”


한수가 박수를 짝 치더니 시선을 모은다. 주위를 지나가던 다른 팀들이 슬쩍 쳐다보건 말건 말을 잇는다.


“아무나 주제 좀 던져봐, 호진이 넌 지금부터 무대구상 짜고.”

“제가요?!”


호진이 당황하건 말건 유진과 한수, 재량은 머리를 맞대고 떠오르는 걸 아무거나 내뱉어보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화장실 가고싶다, 더운 여름, 나의 미래는 어디로 이어져있을까, 너희 목소리는 환청 메아리.




“갑자기 웬 정장을 가져오래.”

“나도 몰라. 교복입고 할거라더니 갑자기 왜... 이유도 못 물어보겠더라, 너무 다급하게 말해서. 미안해. 그리구 고맙다.”

“한두번이냐. 적립해뒀다 돈으로 받아먹을거야, 임마.”


부르릉 엔진소리를 내는 오훈의 차 트렁크에 까맣게 잘 빠진 수트가 세 벌 실렸다. 양수지는 아직도 거의 울것처럼 부탁을 하던 호진의 기죽은 목소리가 옆에 들려오는 듯 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질 못한다. 그걸 슬쩍 옆으로 확인한 오훈이 웃는다.


“긴장 풀어. 어디 아들 갓 군대보낸 엄마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

“애들 뭔일 있는 건 아니겠지?”

“뭔일있으면 전화를 할 수가 있었겠냐? 그럴 정신도 없지.”


하긴. 양수지가 안심하고 가디건 주머니속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에서 손가락을 뗀다. 근데 진짜 정장을 어따 쓰려고? 양수지의 사고가 이제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 오훈이야말로 이제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사이즈가 맞아야될텐데.




한 사람만 안 맞았다. 전화했던 당사자인, 구호진. 딱 달라붙은 수트핏에 요즘 유행하는 스키니핏이냐며 재량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잘어울린다며 진지한 얼굴로 더 놀리는 한수와, 그 옆에서 자기는 뭐 없냐고 해맑게 궁금해하는 유진마저 보고 나니 양수지는 본인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달려왔는지 깨닫는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런 걸 가져오래. 너네 통일성 보여야되서 교복입고 한다며?”

“아, 그럴려고 했는데요. 컨셉이 바뀌어서.”


한수가 고갯짓하며 가르킨 곳에 다 끼이는 정장을 입고 어색하게 걷고 있는 호진이 있다.


“이제 구호진 손에 달렸어요.”

“뭐가?” “뭐가요?!”


뭐가? 하고 물은 양수지보다도 더 빨리 버럭 화라도 내듯 호진이 외친다. 그래봐야 저 종종걸음으로는 양수지와 한수 사이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대체 나한테 진짜 왜그러시는데요 형 그러다 망해도 진짜 내가 책임안질거임 일단 하라고 우기니까 한다지만 나참 나한테 상금 개워내리는 소리나 하지마세요 진짜 쫑알쫑알대는 듯 빠른 속도의 말이 호진의 입에서 속삭임이 되어 흘러나온다. 휴대폰으로 들었던 호진의 힘없는 목소리다 싶어 양수지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는데, 그 옆으로 한수가 얼빠진듯이 웃는다. 구호진이 말하는 컨셉대로 무대를 해나가보자는 파격적인 한수의 제안 뒤에 호진의 반응이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한수가 중얼거린다. 저렇게도 한결같이 본인에 대해 모를 수가 있나.


“근데 훈이형은 어디갔어요? 이거 그 형 거라면서요. 같이 오신거 아니에요?”


막상 다른 게 궁금했던 재량의 질문에 양수지가 어깨를 으쓱한다.


“몰라. 갑자기 갈 데가 있다면서 사라졌어. 마칠때쯤 데리러오겠대. 와, 근데 너.”


수지가 손을 뻗어 재량의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어떻게 이렇게 맞춤처럼 딱맞냐.”


끌려간 재량은 무의식적으로 흡 숨부터 참았다. 숨이 맞닿을 거리에서 수지가 재량의 등 뒷태도 확인했다가 앞태도 확인했다가를 반복하며 감탄하고 있다. 얼굴이 금새 시뻘개진 재량이 뒷걸음질을 한 번 치며 말했다.


“이, 이것보다 더 클거에요 내년엔.”

“어?”

“저 아직 성장기일거에요...”

“그래? 더 멋있어지는 거야, 이것보다?”


야 너 나중에 여자애들한테 인기 장난없겠다 하며 웃어버리는 양수지를 차마 더 마주보지 못하고 재량이 물 마시러 가겠다며 대기실로 가려다, 태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유턴해서 반대편 복도끝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유진의 눈에는 90년대에나 유행했던 시트콤같다. 뻔하다, 뻔해. 유진이 실실 웃는다.




남자화장실말고는 딱히 안정을 취할 만한 곳도 없었다. 설레임을 수도꼭지로부터 흐르는 물에 씻겨내리고 나니 개운해졌다. 마주친 거울에 원래대로 하얗게 돌아온 얼굴을 보던 재량이 시선을 퍼뜨린다. 점점 심해지는데 조절할 자신도 없는 탓이다. 왜 희망도 없는 짝사랑을 시작한 걸까. 그 시작에 대한 것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러다 문득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흐르는 물소리를 가만히 듣다 잠군다. 고요해진 화장실에 발소리가 하나 더 는 게 그 때였다. 찢어진 눈으로 흘겨보니 밑창이 다 닳은 운동화가 삐익 삐익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있다. 재량의 옆에 있는 세면대에 등을 대고는 삐딱한 자세로 담배를 꼬나물기 시작하는 얼굴이 슬쩍 재량을 쳐다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시비라도 걸린 것처럼 지지않을 기세로 쳐다보고 있던 재량에게 씩 웃어보인 남자가 조금 남은 담배를 세면대에 비벼끈다. 떡하니 교복을 입고 저러고 있으니 얼척이 없다. 인상을 쓰고 있는 재량의 어깨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드리는 남자의 체구는 그 분위기와는 달리 왜소했다. 그 분위기와 어울리는 건 오히려.


“힘좀빼지 그래.”


묵직한 목소리.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를 훅 불더니 껄렁껄렁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주욱 쳐다보기만 한 건, 강재량이 그에게 놀랐거나 기가 죽어서가 아니었다. 어디서 본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더니 팟 하고 터진 램프처럼 떠오르는 짧은 기억이 재량을 지배한다. 태희에게 정신이 뺏겨있느라 눈치를 못챘었지만 그 팀은 분명 세 명이었다. 태희 말고, 오전알바생 말고, 작은 체구로 재량을 노려보는 듯 비웃는 듯 했던 그 재수없는 이미지, 문윤수를. 재량은 이제야 인식한다.




호진은 기를 쓰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한수가 쓰는 에이포용지 위에 전략을 그리는 방법은 호진에겐 맞지 않았다. 호진은 그냥 생각을 거듭했다. 한수가 잘하는 것, 호진이 잘하는 것, 유진이 잘하는 것, 그리고 재량이 잘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내어 한 데 모아 제대로된 완성작품을 몇 분 안에 팔딱팔딱한 날생선처럼 건져올려야 한다.


“너무 부담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피붙이인데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에 유진이 한 마디를 꺼내자 한수가 아니라며 웃기만 한다. 유진이 올려다본 옆 쪽에서 한수의 시선은 호진에게 꽂힌 채로 뭔가 재밌는 게임을 발견한 아이마냥 설레임에 찼다.


“저건 물만난 물고기야. 갓 태어나서 아가미로 숨쉬는 법을 아직 모르는 거지.”

“그 숨쉬는 법을 왜 하필 지금 가르쳐주냐 이거야, 내 말은.”


왜 하필 이 위기상황에서. 하고 답답해하는 유진의 눈에 호진이 벽에 머리를 박고 중얼중얼대는 게 비친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가르치겠어. 지금이 물 속인데.”


팔짱을 낀 채로 그렇게 말한 한수는 웃었다. 언젠가 써클방에서 자신의 목표는 더 위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한수의 얼굴이 이유없이 떠올라 유진은 멍하니, 어쩌면 한수는 호진을 데리고 더 멀리 가고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저 꼴은 좀 불쌍하다고, 괴로워하는 동생을 동정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7.24 09:53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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