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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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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6,359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09 21:30
조회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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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 구씨네 어제 (3)

DUMMY

뭐야 이거 왜이래. 욱신욱신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꾹 눌러본다.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로 훌렁 티셔츠를 벗고 그 위에 편의점 유니폼을 껴입은 재량의 표정이 심각하다. 병인가? 암인가? 부정맥인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보니 일터에 도착했다.


“Yo! 왔냐?”


까무잡잡한 피부에 훤칠한 체구인 오전알바생과 손바닥을 맞대며 교대하는데 알바생이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꺼내어 내민다. 뚜껑이 살짝 까져있다고 손님이 환불한 거란다.


“너 젤 좋아하는 거잖아. 간다.”


슈퍼맨마냥 유니폼을 벗으며 당당하게 편의점을 나가버리는 알바생의 뒷모습을 보며 재량이 박카스를 꿀꺽꿀꺽 마신다. 그러다 문득 뭔갈 깨달은 듯 음료수를 입술에서 떼어내어 겉면을 상세히 살핀다. 시선이 카페인함유량 퍼센테이지에서 멈춘다.


“아 뭐야 이거 때문이잖아.”


오늘따라 뻐근하다고 아침에 두 병이나 마셨던 기억이 그제야 났다. 당분간 박카스를 끊고 레드불로 갈아타야겠다고 멍청한 결심을 하며 재량은 상쾌해진 기분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와씨...!"


한수는 욕을 들입다 잘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귓가에 울리는 훅 멜로디에 육두문자를 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 으쓱 하며 웃는다.


“어때?”

“어떠냐고? 장난쳐?! 천재아냐 진짜.”

“하루종일 고민하던 게 안풀리다가 밥먹는데 갑자기 생각나더라.”


예의 그 헐렁헐렁한 체육복을 입고 식판에 얼굴을 묻을 기세로 밥을 퍼먹던 유진의 주위엔 바리케이드라도 처져있는 듯 아무도 앉지 않았었다. 그러다 벌떡 숟가락을 든 채 일어서서 노랫말을 중얼중얼거리다가 녹음해야된다며 정신없이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는 유진의 모습은 딱 봐선 정신병자 왕따였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명곡의 탄생이었어라. 녹음프로그램을 클릭하며 한수가 호진을 찾는다.


“가녹음 해보자. 언제 와.”

“몰라. 오겠지.”

“점심시간 끝나가는데...”

“밥을 두 번 먹나보지, 아님 세 번이나.”

“그럴 리가.”

“아님 네 번이나.”

“...”

“다섯 번.”




유진의 예상이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맞은 건 아니었다. 두 번 밥을 퍼먹은 후에 호진은 교식당까지 찾아온 아버지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호랑이새끼가 어미의 커다란 입에 물려 이동하듯이 교무실까지 억지로 끌려왔다. 어느 날 했던 팔씨름의 결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보다 호진의 힘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호진은 그래도 아버지에게 딱히 대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 모든 원흉이 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진의 눈은 아버지의 옆에서 줄곧 팔짱을 끼고 있는 짙은 화장의 여자를 슬쩍 슬쩍 곁눈질한다.


“무조건 탈퇴시키세요!”


꾸벅꾸벅 졸면서 시험문제를 타이핑하던 양수지가 어디서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버럭거림에 잠이 화다닥 깨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순간 양수지는 이유없이 한수의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그녀의 눈에는 점잖은 그 대신, 커다란 아들내미를 끌어앉힌 상대적으로 약간 작은 체구의 호진의 아버지가 보였다. 영문을 몰라하는 호진의 담임, 국사선생이 당황해서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과자를 가져다드릴까요 하며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호진의 아버지는 완고했다.


“다 필요없고 얘가 요새 한다는 그 시덥잖은 써클 탈퇴시켜요.”


간혹가다 진상같은 부모님이 교무실까지 찾아와서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자니 호진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유학가겠다고 목표를 정했다길래 기특하다고 뭐든 해보라고 없는 살림에 학원도 보내주고 과외도 붙여주고 했는데 막상 공부를 해야 할 학교에서 음악나부랭이를 하는 써클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걸 알았으니 회사고 뭐고 일이 손에 안잡혀서 당장 찾아온 거라고 아버지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그 옆에서 당신 진정하라고 선생님들이 무슨 잘못이냐며 상냥한 말투로 그를 어우르는 여자가 화장이 먼 거리에서도 보일만큼 두껍다. 양수지는 써내려가던 파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저장해놓은 뒤 관심을 주지 않은 척 연기하며 전신의 촉각을 호진과 그의 부모와 국사선생이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곤두세웠다.


“제가 소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국사선생은 땀까지 뻘뻘흘리며 사죄를 했다. 와중에 호진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는데.”

“뭐?!”


쩌렁쩌렁 울리는 호진부의 목소리에 멀리 떨어져있는 수지마저 흠칫 놀란다. 오히려 바로 옆에 앉은 호진은 놀라지도 않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내가 그 써클가입한 건 어떻게 알았는데.”

“니 친구가 말해줬다 임마!”

“내 친구들 누구?”


그 때 놀랍게도 가만히 있던 호진모가 호진부의 말을 막아섰다.


“아니, 호진아. 내가 얼마 전에 모임이 있어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말해주더라. 이번에 학교에 새로 생긴 써클이 있는데 거기 니가 가입했다고. 음악하는 써클이라고. 공부랑은 관계가 없다고. 그래서 내가 걱정이 되어서 너희 아버지한테 말한거야.”

“음악하는 써클이라고 누가 그래요?”


호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투로 질문했다. 그럴수록 국사선생의 표정은 흙빛이 되어갔다.


“우리 써클 영문학 공부하는 써클이에요. 신문기사에도 났을텐데.”

“그-”


여자는 말문을 잃었다.


“내가 일기장에다가 음악하는 써클이라고 표현하긴 했는데 설마 그걸 읽으셨을리는 없고. 왜냐면 누나도 갑자기 동참했다고 적었으니 평소대로라면 남매끼리 학교에서 그나마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정말 잘되었다고 응원해주셨을 테니까.”


포근하고 나른한 호진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호진부는 ‘누나’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었다. 몰랐던 눈치였다. 동시에 여자의 낯빛이 두꺼운 화장을 넘어 국사선생의 얼굴색과 비슷해져간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문을 만드는 친구들을 두셨네요, 어머니.”


세상에. 수지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린다. 명백하게 비꼬고 있는 호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귀를 긁적이며 시선을 떨구는 그에게 부친은 아무말도 못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너희 누나도 가입했냐.”


호진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잘 지내더냐.”


호진이 이번에는 네, 하고 대답하려는데 여자가 먼저,


“가요.”


하고 호진부를 잡아끈다. 잠시 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가득 찼던 교실이 금방 조용해진다. 남은 건 멍때리다가 곧 한숨을 푸욱 내쉰 호진과 맞은 편에서 식은땀을 이제야 간신히 휴지로 닦는 국사선생 뿐. 나머지는 양수지를 포함하여 다 구경꾼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 아니다.”

“저 여자가 보통 도라이가 아니라서.”


호진은 마른 침을 삼킨다. 그리곤 입을 다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짙은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않고 커다란 몸을 접었다 피며 담임에게 예를 갖추더니 교무실을 떠난다.


“쟤가 걔야?”


오지랖이 발동해 국사선생에게 다가간 체육선생이 묻는다.


“뭐가요?”

“왜 작년에 쟤 누나반 담임이 아까 그 여자한테 전화로 엄청 시달렸다던데. 그것도 새벽까지. 뭔 얘길 했는진 모르겠지만 암튼 그것 때문에 담임이 노이로제걸려서 쟤네 누나 티나게 괴롭혔었잖아. 담임이 그러니까 애들까지 동조해서 공공연한 왕따되고. 그러다 겨울인가? 자살소동 일어나서 병원 실려가고 그것 때문에 일년을 꿇었나... 몰라?”

“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뭐 막상 알고보니 자살하려던 게 아니라 다른 애가 괴롭히다 일이 커진 거였기는 한데 암튼 그것 때문에 담임 짤렸었잖아. 그 때 구호진 쟤 장난아니었어. 담임이랑 그 여자랑 둘 다 죽인다 어쩐다 하다가 며칠 후에는 갑자기 또 지 누나랑 대면대면하더니 아예 남처럼 행동하더라고. 암튼 조심해, 김선생. 저 가족이랑 얽혀서 좋을 게 없어.”


곧 양수지는 다시 파일을 켰지만 더 이상 진행시킬 수가 없다. 커서만 깜빡일 뿐.




양수지는 하교하는 길 내내 구호진 김유진 남매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마전 읽은 영어원서에서는 아동학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매질을 하고 힘으로 억압하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라고. 그래도 오늘 본 그의 대처나 유진의 말뽄새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이들의 멘탈엔 문제가 없고 앞으로도 문제가 생길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참 건강한 아이들이야. 결론내리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양수지는 이윽고 비탈길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빵빵 몇 번의 경적이 울렸다. 멈춰진 양수지는 눈 앞에 번쩍이는 불빛이 제 마음을 오롯이 비추기라도 한 듯, 여전히 영 찝찝한 마음의 원흉을 찾느라 생각을 잇는다. 본인이 괜찮아한다고 해서 저런 학대에 방치해둬도 되는 걸까? 교사로서 뭔가 다른 방책을 취해야 하는 걸까? 한다면 뭘?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것조차 증빙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대체 뭘 어떻게? 편의점을 들르지 말아야할 것 같다. 재량에게 혹여나 이런 얘기를 저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면 곤란하니까. 재량은 수지가 알기로 본인의 외로운 상처만으로도 감당이 어려울 터였다. 그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야! 타!”


창문을 내리고서 등장한 낯익은 얼굴에 양수지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다.


“훈아.”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양수지는 얼른 오훈의 옆좌석에 올라탄다. 너 언제 은행나무길에서 루트를 바꾼 거냐고, 매일 거기서 기다렸는데 니가 안와서 오늘은 혹시나싶어서 이리로 왔다며 사람좋게 웃는 오훈은 결국은 그 때 일은 미안했다며 사과까지 하는 걸 잊지않고 페달을 밟는다. 내가 더 미안해. 양수지의 말과 동시에 부웅 출발한다. 동시에 먹먹해진 가슴을 털어내듯 양수지는 눈을 감았다.




영 집에 가기가 내키지 않아서 야간자습이 끝나자마자 과외고 학원이고 내팽개치고 써클방으로 어그적 어그적 걸어올라온 호진의 바지런한 손가락이 마우스 위를 두드린다. 곧 스피커가 둥 둥 울린다. 이어지는 유진의 가이드 목소리. 턱을 괴고 잠자코 음악을 듣던 호진이 픽 웃는다. 와 노래 존나 못해. 중얼거리다가 커다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떨리는 듯 하던 손가락들이 곧 얼굴을 타고 흐르듯 멈춰 눈가를 꾹꾹 누른다. 후반부쯤 반복되는 멜로디에는 호진도 유진의 목소리 위로 제 음을 겹쳤다.


글쎄요 다시 되돌리고 싶은 건 아니에요

오늘은 어차피 결국 오고 말 텐데

너무 벅찬 오늘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but

내일도 어차피 오늘이 될 텐데

그냥 같이 걸어줘요 그만 생각하고 싶어 나

내일이 올 때까지 yesterday

오늘이 저물 때까지 yesterday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7.24 08:23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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