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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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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6,377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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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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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5. 중복된 어제 (3)

DUMMY

재량이 선보였던 장소가 기가 막히게 그들의 상황에 맞아떨어졌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와 잘 풀리려면 모로 가도 풀린다더니.”


이메일로 통보받았던, 그리고 유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팜플렛을 재차 확인했을 때에 적힌 그 행사장 주소가 강재량이 매일밤 청소하는 그 홀이었을 줄이야. 잘된 일이라고 한수는 좋아했지만 재량은 자꾸만 쟈켓을 벗어 제 얼굴을 가려댔다. 왜그러냐 묻는 유진에게 자신이 십대에다가 중졸인걸 들키면 여기서도 짤릴 거라고 재량이 소곤소곤거린다. 재수좋아봐야 시급마저 깎일거야. 이어 말하며 아까 소개받은 대기실로 서둘러 들어가버리는 재량이 우뚝 멈춰선다. 따라들어오던 호진이 재량의 뒷통수에 쿵 부딪친다.


“아 길막 좀 하지 말...”


호진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재량을 흔들어보는데 그가 영 반응이 없다. 슥 옆으로 가 표정을 확인하니 과간이다.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듯한 그런 표정. 호진이 천천히 재량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다. 대기실은 만원이다. 우후죽순처럼 다양한 연령대, 성별의 청년들이 팀대로 모여 몇몇은 의자를 일찌감치 차지해 앉아있고 몇몇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단장하고 있으며, 몇몇은 구석에 우뚝서서 음악을 줄줄이 듣고 있다. 그리고 재량의 시선은 오롯이 그 구석을 향해있었다.


“나태희.”


재량의 넋나간 목소리가 꽂히는 곳에 마주봐오는 여자의 얼굴이 우글거리는 대기실 속에서도 눈에 띌만큼 매혹적이다. 차갑게 웃어보인 나태희가 멀리서 입술을 달싹인다.


“오랜만이야.”


혼이 빠져나간 재량의 얼굴이 곧 입술을 짓이겨 물더니 대기실을 뛰쳐나간다. 저 형 왜저래? 하고 인상만 구기던 호진이 곧 뒤쫓아나선 건 유진도 한수도 대기실로 들어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나서니 복도 끝 창가쪽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는 강재량과 그 주위를 바리케이드처럼 치고 서 있는 유진과 한수의 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섰더니 이제껏 재량을 위로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유진과 한수는 지금 재량의 상태와 영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의 그 돌출무대를 리허설중에 활용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봐도 그다지 톡톡튀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드립처럼 뛰쳐나가기엔 무대구성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놔서 그럴만한 여유가 곡 중간에 존재하질 않는단다. 어차피 이런 얘기라면 낄 수가 없으니 호진은 재량을 따라 마주 쭈그려앉아서 재량이 중얼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망했어. 뒤졌어. 나는 망했어. 이젠 진짜 뒤졌어. 반복되는 말들은 요약하자면 저게 다였는데 호진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니가 왜 망해? 니가 왜 뒤져? 천천히 고개를 든 재량의 얼굴은 며칠밤낮을 샌 폐인의 낯짝처럼 거멓게 타들어갔다. 중얼거리는 입술이 그새 바싹 말랐다.


“아씨 쟬 어떻게 이겨...”

“누구길래 저게.”

“저거라고? 저거라고 임마?! 누나라고 불러 임마. 너보다 네 살이나 많거든?!”


금새 멱살을 잡아 오른 재량의 힘은 평소와 같았다. 멀쩡하구만 왜 찌질하게 굴고 앉아있냐고 핀잔을 주는 호진이 미간을 한껏 좁힌다. 여전히 심각하게 무대구성을 얘기하다 기어이 연습장까지 꺼내서 골머리를 앓는 유진과 한수 옆으로 벌떡 일어섰던 재량이 다시 연기가 가라앉듯 스르륵 주저앉으며 호진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전여친이야...”


그게 왜? 그게 뭐? 호진의 머릿 속에 강재량이란 인물은 쌩양아치인 놈이라 전여친에 일일이 연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호진이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재량의 이젠 호진에게조차 잘 들리지 않을 목소리가 그러모은 무릎 사이로 새어나온다.


“여전히 존나 예쁘고 지랄...”




여전히 존나 예쁘고 지랄이라는 태희는 노래연습이나 계속 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몇 분 전까지도 맞춰보고, 또 맞춰보고, 여전히 또 맞춰보며. 따라 입을 맞추면서도 호석은 머릿 속으로 며칠 전 들었던 태희와 재량의 짧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정작 본인인 태희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어서, 복도 끝에서 재량이 호진에게 한풀이하듯 태희와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풀어놓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오늘따라 간지러운 귀를 끊임없이 긁어댈 뿐이었다.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재량의 궁시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잘도 알아듣는다. 중학교 때 뭣도 모를 시절에 반해 한달 내내 쫓아다니다 사귀게 된 첫 여자친구이자 전 여자친구랬다. 첫사랑이었냐고 묻는 호진에게 니 놈이 사랑을 아냐고 따지며 땅을 파기 시작한 재량이 마저 잇는 말들은 평범했다. 평범하게 연애했고 순수하게 데이트했고 재량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도 그 포근한 감정은 이어졌다. 그게 끊어진 건 일찌감치 학교를 졸업했던 태희의 친구들이 향수냄새를 풍기며 재량을 끌고 술집에 갔던 날이었다. 술도 딱히 잘 못마시는 재량의 입에다 술병을 박아넣고는 깔깔대며 풀어놓는 별의 별 이야기 속에 태희의 비밀이 있었다.


니네 아버지 돌아가셨다며? 태희가 그 얘기 학교에서 자주 했었거든. 불에 활활 탔다며? 진짜 아팠겠다!


그럼 고아냐고 불쌍하다고 거짓눈물까지 흘리는 척 하는 태희의 친구들 사이로 태희가 등장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같은 학교나왔다는 이유로 인연을 이어갔을 뿐 친구들이라고 부를 것까지도 없었던 사이였으므로 미련없이 그 여자들의 머리채를 잡아다 패대기치고는 재량의 팔을 끌고 술집을 빠져나가는 태희의 표정은 한껏 굳어있었다. 거리로 나왔을 때쯤 팔을 뿌리친 재량이 뭐냐고 소리쳤을 때,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태희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거 얘기한 적 없는데. 왜 알아, 니가.


대답없는 태희에게 대체 니가 왜 아냐고 소리친 재량의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도둑고양이들이 후다닥 도망가는 소리만 났다. 태희는 한마디만 했다. 아 꼬우면 헤어지던가. 그걸로 재량의 첫 연애는 간단히 쫑이 났다. 제 자존심을 바닥까지 긁어 친구라는 여자아이들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더 참을 수가 없었던 건 그래도 여자친구라고 믿었던 상대가 변명도 안했다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어느덧 자신이 그 당시의 재량이라도 된 듯 동조하고 있는 호진이 인상을 쓰다가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시야를 넓힌다. 어느덧 한수와 유진도 쭈그리고 앉아서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재량을 쳐다보고 있다. 하나는 재량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하나는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복도에 울려퍼진 전자음이 리허설의 시작을· 알린다. 순서는 랜덤이랬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마지막순서로 당첨. 순서가 뒤쪽인 다른 팀들과 우르르 관객석에 앉아서 리허설무대를 관람한다. 경계하고자 하는 취지인데, 그래봐야 기죽으면 좋을 거 없다고 별 생각없이 보라고 한수가 충고한다. 그 충고가 없었더라도 기죽을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싶어 호진이 갸웃거린다. 딱 학창시절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참여한 것 같은 몇 팀이 지나고 개 중 몇몇은 그나마 쓸만했지만 그래봐야 호진의 귀에는 동요 수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제 겨우 10페이지째 해독해낸 그 원서책을 가져오는 게 좋았을 거라고 호진은 후회한다. 그러다 문득 재량의 전여친이라는 그 팀은 언제 나오나, 궁금해진다. 그 팀이 나온다면 좀 덜 심심할 것이다. 매사에 별 충격없는 재량이 우울해지는 모습을 보는 기회는 흔치 않았으므로. 지루함이 옮았는지 휴대폰으로 쿠키런이나 하던 유진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즈음에야 비로소 태희와 윤수, 호석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세 명뿐인데도 무대가 꽉차보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짧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순서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총 참가팀이 그러니까 스물다섯팀, 그리고 이 팀이 지금 스물 네 번째... 헐. 방금 접혀진 유진의 손가락 위로 착해보이는 유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하필이면 우리 팀 앞이야?


“으으...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걸 말해주기도 전에 재량은 본능적으로 느껴진 불안함으로 식은땀까지 흘렸다. 곧 재량이 가고 난 빈 자리가 반듯하게 접혔다. 유진의 눈은 검갈색 의자에 꽂혀있었지만 귀는 복도에서 재량에게 들었던 태희에 대한 평가로 가득 찼다. 나 쟤 때문에 랩 시작했거든. 무슨 여자애가 랩을 저렇게 하는 건 첨봤다니까. 너희도 보면 알거야. 마치 한 마리의.


공작새같은.


의자로부터 유진의 시선이 무대로 옮겨간다. 화려한 외모의 태희가 내뱉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무대를 휘덮는다. 화려한 건 외모뿐만이 아니다. 깃털을 한 올 한 올 단장해 하늘끝까지 뻗어 넓히는 공작새의 유혹. 반주도 뭣도 없이 시작된 인트로에서 벌써 귀가 점령당하고 만다. 아씨 쟬 어떻게 이겨. 호진이 침을 꼴딱 삼키며 재량이 궁시렁거렸던 말을 문득 떠올릴 때 쯤, 반주가 시작됐다. 태희가 손을 번쩍 든다. 윤수와 호석이 달려든다. 랩과 보컬이 한데 뒤섞인다.


“뭐...?”


얼이 빠진 한수가 말문이 막혀 옆을 쳐다본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다. 당황한 건 유진도 마찬가지다.


무대 위를 감미롭게 두드리는 피아노선율과 쇳소리마냥 위태로운 기타소리의 향연. 헷갈릴 리가 없다. 헷갈릴 수가 없었다. 몇날 며칠을 수학공식 외우듯 외워버렸던 노래였다. 이제는 비슷한 박자의 MR만 들어도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다음팀 올라오세요.]


화장실을 다녀온 재량이 더 백짓장이 된 얼굴로 자리에 앉지도, 무대에 올라가지도 않은 채 더더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앞에 선다.


“들었어?”

[다음팀 올라오세요. 영학고팀!!!]

“들었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해 보인 호진이 묻는다.


“어떻게 된거야? 왜 쟤네가 우리 노랠 부르는건데?”


태희의 팀이 부른 노래의 반주는 명백하게, 유진의 Yesterday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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