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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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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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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5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0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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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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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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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 소네트 18 (1)

DUMMY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겨볼까?


양수지가 책장을 넘긴다. 낡은 종이 위의 잉크는 분명 영어였지만 그녀의 머릿 속에선 절로 한글이 되어 읽힌다. 길쭉하고 늘씬한 체형, 수수한 화장, 길고 얇으며 결이 좋은 생머리, 손에 들고 있는 셰익스피어 문학집. 누군가 본다면 첫눈에 반할 만큼 만인의 첫사랑을 현신화시킨 겉모습이었지만.


“으악 또야?!”


길가에 가로세워놓은 새자전거를 이리 저리 살피며 부산스레 살피는 행동새는 아까까지 우아하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냐는 듯 어딘가 우악스럽기까지 했다. 잔뜩 구긴 미간이 양수지의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인 양,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양수지는 울컥 울컥 차오르는 화를 입으로 바람을 불어 삭히며 아스팔트바닥을 구두굽으로 팍 팍 밟아댔다. 도대체 몇 번째야. 양수지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취직이 어렵고 사회가 각박해도 누구나 가슴에 로망쯤은 품고 살아가는 법이다. 예쁘게 꾸민 데스크, 벌써부터 받은 것 같은 휴가, 넥타이에 정장, 두둑해질 월급봉투. 양수지에겐 그것이 자전거로 하는 통근이었다.


“아놔 진짜 잡히면 그냥.”


답답해 뱉는 목소리가 내용과는 달리 포근했다. 부천의 한 고등학교로 발령이 나자마자 새로 장만한 하얀색 애마였다. 그 소박한 꿈은 며칠째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자전거도둑의 손길에 바싹 말라간 자전거에는 심하게 생채기가 난 곳은 없었지만 고장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자물쇠와 브레이크. 대체 계속 실패할 거면서 왜 또 다시 시도하는 거지? 이 정도 근성을 공부에 쏟아넣었으면 자전거도둑따위는 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양수지는 본인이야 부정할지언정 뼛속까지 교사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칼집이 나 있는 자물쇠를 평소엔 부드러울 하얀 얼굴을 구겨가며 푼 후에 몸을 싣어 페달을 밟는다. 문득 목께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돌린다. 어? 자전거가 미끄러진다. 아뿔싸. 유려하게 핸들을 조절해서 균형을 잡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무도 없다. 날이 선 얼굴이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양수지는 그 낯익은 얼굴의 원천을 찾는다. 날이 선 얼굴이 교실 맨 뒤 창가자리에서 턱을 괴고 양수지를 쳐다보고 있다. 귀에 이어진 검은 줄로 미루어보아 그가 제멋대로 조례시간을 음악감상시간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석을 부르던 수지가 한 이름에서 멈춰선다. 강재량. 부르니 졸다말고 예에. 하고 손을 드는 폼이 껄렁거린다. 재량의 이름 옆으로 무수히 많은 작대기가 그였다. 어째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최소출석률은 채우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니 어제 마주쳤어도 그게 제 제자인 줄을 양수지가 눈치를 못챌 만도.


“저어 새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여전히 졸린 듯한 재량의 목소리가 교탁까지 울린다. 다음 학생을 부르려던 양수지가 하마터면 출석계를 손에서 놓을 뻔 했다가 가까스로 그걸 잡아내고 뭐, 뭘? 하고 묻는다. 당황한 건 양수지뿐만이 아니다. 긴장한 다른 학생들의 시선마저 두 사람의 사이를 오간다. 쨍 소리가 날 듯 차가워보이는 재량의 얼굴이 느릿하게 입을 떼려는 그 순간에,


“저도 드릴 말씀 있는데요.”


반장이 손을 들었다.




교무실에 나란히 선 두 아이들의 태도는 두 아이들의 외모만큼이나 달랐다. 하나는 안경을 썼고 하나는 안 썼고, 하나는 바른 자세로 서 있고 하나는 짝다리를 짚었고, 하나는 진중해보이고 하나는 지루해하고 있고. 얼추 비슷해보이는 건 키 뿐이다.


“그러니까.”


양수지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운을 뗀다.


“재량이가 자전거 훔치려는 걸 한수가 봤고, 재량이 너는 아니란 거지?”


재량은 대답 대신 하품을 했다. 양수지가 고개를 꺽은 채로 재량을 위아래로 살핀다. 분명 어제 본 얼굴이 이게 맞긴 한데. 한수의 말에 따르면 재량은 양수지의 자전거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 심지어 교장선생님의 자전거까지 훔치려고 해왔고 과반수는 성공했으며 몇 번은 실패했다. 그 몇 번의 실패도 한수가 그만하라고 말리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실수란다. 선생님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강재량의 협박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수는 재량을 곁눈질했다. 재량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찬 한수가 재량의 옆에서 한 발자국 더 떨어진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한다는 건데.”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 말만 믿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양수지가 이렇다할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와중에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는 두 학생과 의자에 앉아 고민하는 양수지의 사이를 몇 명의 선생들이 지나가며 한수와 재량에게 한 마디씩 던진다. 웬일로 교무실에를 다 왔냐. 진로상담이니? 는 당연히 한수에게 향한 것. 넌 임마 학교좀 다녀라. 는 당연히 재량에게 향한 것. 가로로 길게 쭉 찢어진 재량의 눈이 더 가로로 늘어난다. 종이 칠 때까지 몇 분남지 않은 그 시점에서야 재량이 입을 연다.


“쌤. 그만하죠.”

“뭐?”

“어차피 쌤 제 말 안 믿으실 거잖아요.”

“무슨 소리야.”


정답이었다. 누가 봐도 믿음이 안 가는 사기꾼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럼 재량을 어떻게 믿나.


“그냥 제가 한 거라 치죠. 귀찮은데.”

“니가 한 거라 치는 게 아니고 니가 한거야.”


한수가 새된 목소리로 단언했다. 움찔 놀란 재량이 으르렁거리듯 뭐임마?! 소리치며 옆으로 몸을 기우는데 한수가 움츠러들지도 않은 채로 대꾸한다.


“선생님한테 깨끗하게 자백해. 잘못했다고 사죄드리면 미성년자라서 감방은 안 가니까.”

“아 뭐 이런 정신병자가...”


침착하게 지시하는 한수에게 약간 밀린 재량이 아 존나 모르겠다 하더니 갑자기 양수지를 향해 허리를 수그린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다 빼꼼 고개만 들며 제 할 말을 한다.


“그것보다 쌤, 드릴 말씀이 있”

“이 새끼 변명 들어주시면 안돼요.”

“는데요.”


그 때였다. 재량의 말을 막아서는 한수의 뒷덜미를 잡아챈 강재량이 한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낮게 목소리를 깐 것은.


“형이 지금 말을 하잖아 씨발아.”


한수의 동공은 흔들림도 없다가 조금 후에 양수지에게로 꽂혔다. 양수지는 저야말로 겁을 먹었지만 서둘러서,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만 안둬?”


벌떡 일어나 재량의 팔을 잡아 내렸다. 순순히 팔을 내린 강재량이 양수지를 쳐다본다. 키가 큰 편인데 힐까지 신어 재량과 키가 엇비슷해진 여선생이 그래봐야 얇은 뼈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재량은 딱히 양수지의 직업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지 계속해서 자신이 한 시간 전부터 부탁했던 걸,


“쌤. 드릴 말씀이.”


한 번 더 반복했지만, 사람 사는 게 항상 그렇듯 띵동땡동 무정하게 종이 쳤다.




종이 쳤더라도 그 아이들을 도로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양수지는 전봇대에 잠궈둔 자전거가 통째로 사라진 걸 발견하고서야 후회했다. 결국 자전거도둑의 근성이 승리한 셈이다.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살짝 비웃고 있을 강재량의 얼굴이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양수지는 살짝 머리를 털고 한 쪽 어깨에 매어둔 가방 속으로 기다란 팔을 쑥 집어넣어 바닥을 헤집어본다. 여기 어디 교통카드가 있으려나. 안 쓴지 수백년은 된 것 같았다. 네모낳게 각이 진 플라스틱이 손가락에 걸려서 집어들었다. 빙고. 대딩 시절 쓰던 걸 처박아둔 게 이럴 때 용이할 줄이야. 양수지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대견하긴 개뿔.


잔액이 부족합니다.


매정한 기계소리 때문에 얼굴이 시뻘개져서 다시 가방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 양수지의 뒤로 버스 앞문길이 막혔다. 얼른 길을 터주고 일단 버스 좌석에 앉아서 지갑안을 살피는데 만원짜리 뿐이다. 망했다. 다시 내려야지. 벌떡 일어섰지만 사람을 다 태운 버스가 출발해버린다. 버스기사가 양수지를 곁눈질하고 있다. 막 하교한 학생들이 버스 승객의 대부분을 이뤘다. 웅성웅성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의 변성기가 온 목소리가 마치 양수지에게는, 제 흉이라도 보는 것처럼 환청이 된다. 그래. 자전거로 통근하는 로망은 무슨. 그냥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차를 살걸. 대출을 받아서라도 산다 사고 말거야. 결심하는 양수지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른다. 버스기사에게 어떻게 애교를 피워야하나 살짝 고민하며 일어서는 양수지는 스리슬쩍 자전거도둑을 원망했다. 강재량이 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잠깐. 아닐 수가 있을까? 물증은 없어도 모든 심증의 화살표가 한 쪽을 향했다. 강재량. 걔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이걸로 한 사람 더 찍어주세요.”


뭐?

양수지의 몸이 얼어붙는다. 직업정신이고 뭐고 쌈싸먹고 제자를 원망하던 차에 그 제자가 눈 앞에서 양수지의 교통비를 대신 내주고 있다. 구석에서 쿵쿵 비트가 새어나갈 정도로 음량을 키워 노래를 듣고 있던 강재량이 시퍼렇게 안색이 변한 양수지를 멀리서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제 카드를 내민 것이다. 양수지와 눈이 마주친다. 강재량은 뭘 보냐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가 손을 들더니 훠이훠이 손가락을 굽혔다 편다. 해결됐으니 자리나 가라는 거다. 연이어 교복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저야말로 뒷좌석으로 도로 향하는 걸음이 평소처럼 껄렁하다. 땡. 하고 얼음이었던 몸이 녹은 양수지가 어색해하며 자리로 돌아간다.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양수지가 커컥대며 싱크대로 달려가 커피를 뱉는다. 퇴근하자마자 카톡메시지를 보고 수지의 자취방 초인종을 눌렀던 오훈은 십년지기 친구라는 타이틀이 무섭게 마치 제 집 안방이라도 된다는 듯 수지의 소유물일 커피머신을 능숙하게 다뤄 카페라떼 두 잔을 만들어냈지만, 그 중 한 잔의 일부는 무의미하게도 싱크대에 쏟아졌다. 원인을 제공한 오훈은 아무렇지 않게 슬쩍 웃는다.


“나도 학창시절에 여선생님 좋아했었지...”


아련하게 멀어지는 표정 앞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은 양수지가 미간을 구기며 대꾸한다.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이 미친놈아.”

“왜? 니 생각보다 고등학생애들은 얼굴 별로 안따져.”

“죽여버린다 진짜.”


한껏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오훈은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그럼 자전거 새로 살거?”

“아니. 그냥 이 기회에 운전면허나 하나 딸까봐.”

“니가?”

“아 진짜 확”


몸을 벌떡 일으켜 위협을 가하는 수지에, 오훈은 그제야 아 미안미안 하며 커피잔을 들어보였다. 근데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선생님이 되었나몰라, 하고 오훈이 덧붙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커피를 마저 다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는 기획실에서 일하는 뒤로 안그래도 부쩍 기가 죽은데다 지금 수지 때문에 한층 더 기가 죽은 오훈이 내일은 병원 회식이라는 둥 사수 꼴보기도 싫다는 둥 나름 본인의 현시창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수지가 오훈을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거실로 돌아온 그녀가 테이블 위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두 커피잔을 설거지하는 걸로 투닥거림은 끝이 났다. 쏴아 쏟아지는 물줄기에 생각마저 씻겨내려가는 듯 양수지의 엉키고 설킨 머릿 속이 차갑게 식어내린다.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미쳤나봐. 양수지가 얼른 고개를 거세게 젓는다. 심신을 안정시키고자 소파로 가서 읽던 책을 펼쳐본다.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열어둔 베란다 문에서 여름향기가 날 것만같은 바람이 산들 산들 불어왔다. 눈을 감고 만끽한다. 다시 눈꺼풀을 가벼이 들어올리고 다음 구절을 읽으려할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양수지가 모르는 번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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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3.12 08:08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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