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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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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6,357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1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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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 중복된 어제 (2)

DUMMY

“그래서 꼭 이겨야돼.”


재량의 말에는 살의가 넘쳐났다. 너네 우리 못이기니까 시간낭비하지 말고 검정고시나 공부하라는 말을 하며 호석이 코웃음치지만 않았더라면 그 매사에 별 생각없는 재량이 팔 걷어부치고 나서서 무대구성을 짜보겠답시고 득의양양하게 에이포용지까지 펼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막상 그 에이포용지에다가 무대를 그리기 시작한 건 한수였지만.


“장르가 발라드도 아니고 그냥 우뚝 서 있기만 해서는 모양이 안 살거야. 호진이 너 춤좀 추냐?”


유진이 대신 대답했다.


“전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펜을 다시 놀린다.


“그래서 그냥 동선만 중간 중간에 바꿀 거야. 유진이 니가 뒤에서 음량조절할 때마다 시점이 바뀔거고, 딱 세명이니까 좋네. 첫파트가 나니까 내가 과거, 호진이 니가 중간중간 나오니까 니가 현재, 재량이가 아웃트로도 맡았으니까 미래인 걸로 해서 짜자.”

“와. 그럴 듯 한데?”


재량이 감탄하며 덧붙인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고 그게?”

“아 좀 한 번에 잘 들을 순 없나...”


호진이 인상을 쓰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길쭉한 팔까지 뻗어가며 설명한다. 스케치 위에 그려져있는 동그라미위로 이름이 적혀있다.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서 있을 때, 음악이 시작되고, 그 뒤 각 파트마다 내리쬘 핀조명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이 전환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그리고 재량의 마지막파트가 이어질 때즈음 세 사람이 일렬로 선다. 시점의 동일화.


“Yesterday... 하면서 여기서 동작을 멈추는거야. 과거 미래가 사라지고 현재만 보이는 거지.”


한수는 호진의 이해력에 감탄한다. 동선을 설명해주긴 했지만 그런 부차적인 설명은 해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확장시켜 이해하다니. 영어는 못해도 이 쪽으로는 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호진을 빤히 쳐다보다 순간 호진과 눈이 마주친다. 호진의 눈이 사나워진다.


“왜요. 뭐 틀림?”

“...아니다.”


재능이 있니 어쩌니 칭찬을 기꺼이 해주기에는 상대가 시월의 꽃송이처럼 예민하니 한수는 그냥 접어둔다. 곧 에이포용지에 가득 그려진 동선들이 좁은 서클방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뻣뻣한 움직임들이 긴장이 풀리니 자연스러워진다. 그걸 쳐다보면서 저래가지고 되겠나 하며 바나나우유나 쪽쪽 빨아먹고있던 유진이 자세를 바로하고 유심있게 부원들이 동선과 노래를 동시에 제대로 소화해내는 걸 감상했을 때 즈음에는 완성이 되어있었다. 무대ver yesterday가.




“별로.”


쫓아와서 꼬치꼬치 케묻는 호석이 귀찮았다. 냉랭하게 대답하고 예의 학교 뒷골목으로 향하는 태희의 다리가 학처럼 길다.


“야 내가 뭐 어려운 질문하냐? 그냥 강재량이 뭐하는 놈인지 묻는 거잖아?!”


먼저 도발한 건 자신이었어도, 그러는 너희야말로 시간낭비니까 집에 가서 엄마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패드립을 치는 강재량이 호석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흠을 잡아내서 놀려주고자 벌써 저 멀리 떨어진 태희를 성큼성큼 쫓아가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노래 잘하는 놈이야? 공부 잘하는 놈이야? 싸움 잘해? 대체 뭐하는 놈인데?! 이어지는 질문들에 태희는 한가지 대답만 한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별로라고.”

“근데 왜 그 새끼가 대회를 나온다는 거-”

“노래. 공부. 싸움?”

“어?”

“전부 별로야.”


좁은 골목에 주저앉아있는 듯 하던 윤수가 태희와 호석을 발견하고 느릿느릿하게 일어선다. 태희가 멍하니 말을 잇는다.


“랩은 좀. 하지.”


어젯밤 내린 빗물로 아직도 축축히 젖어있는 담벼락에다 피우던 담배를 짓이겨 끈 윤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젖힌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윤수가 들고 있는 휴대용 스피커를 받아들고 재생버튼을 누른 태희가 결좋은 긴 머리를 질끈 묶는다. 옆에서 랩이라는 말에 발끈한 호석이 묻건 말건. 내가 잘해 걔가 잘해?! 왱알왱알대는 소리가 곧 재생된 음악소리에 묻힌다. 몇초간 이어진 인트로 후에 시작된다. 태희의 나른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멜로디랩. 스피커와 연결된 윤수의 아이폰 액정 위로 파일명이 반짝거린다. Yesterday (DJ.youjean)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다고? 이 정도면 거의 프로급 아니니?”

“양수지야. 요즘 프로라는 이름 아무나 달아.”

“어?”

“자기가 만든거 돈받고 팔 수 있으면 프로지.”

“그래?”

“근데 진짜로 대중이 다 아는 노래는 돈이랑 관계가 없어. 너 스크류바광고노래같은거 돈주고 사냐? 이상하게 꼬였네~ 베베 스크류바~ 그치. 그냥 머릿 속에 떠오르고 불러지잖아. 그런 게 진짜 좋은 노래야.”


여전히 뭔 개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히며 쳐다보는 양수지를 슬쩍 확인하고 쪼개던 오훈이 신호를 보고 차를 멈춰세운다.


“그게 가능해지면 음원 하나를 사고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수 자체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겨나거든. 몸값이 올라가는 거지. 그런 게 진짜야, 진짜배기 가수.”


차 안에 울리는 노랫소리는 명백하게 호진의 목소리였다. 이어지는 재량의 아웃트로. 역시 나쁘진 않은데. 가장 중요한게 빠졌어. 오훈이 다시 페달을 밟으며 생각을 멈춘다. 양수지가 속으로 와 똥폼 쩔어... 하고 중얼거리는데 그 순간 오훈이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는다. 으악씨바알!! 하고 답지 않은 욕까지 내뱉으며. 앞유리에 비친 그림자가 쓰러졌다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더니 저 멀리 횡단보도 밖으로 사라진다.


“아 씨벌 존나 깜짝이야...”


핸들에 머리를 박더니 숨을 몰아쉬는 오훈에게선 이제 가수고 뭐고 설명했던 아까 전의 냉철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덩달아 심장이 골반부근까지 쿵 떨어진 양수지가 토끼눈으로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리는 그림자를 좇는다. 왠 또라이가 한 여름에 발목까지 떨어지는 코트를 입었다.




동선을 연습하려니 아무래도 써클방은 좁았다. 그렇다고 운동장을 나가기엔 쳐다볼 아이들과 선생님이 많았다. 심지어 하루일과가 빡빡한 아이들끼리 시간을 맞춰 만나기란 정말 점심시간 잠깐, 정각이 되어가는 아예 늦은 오후가 아니고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후자에 경우는 아이들 중 몇몇은 부모님께 혼날 각오를 했어야만 가능한 선택지였으므로.


“괜찮은데?”


그 선택지를 실현시킬 각오로 모인 모두의 눈 앞에 펼쳐진 장소는 기가막히게 딱이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에, 핀조명도 켤 수 있고 기본조명으로는 관객석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홀. 강재량이 일한다는 관공서기관에서는 종종 이 홀을 시행사같은 데 빌려주곤 한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해놓고 이 곳 저 곳을 꼼꼼히 살피는 한수의 눈에 돌출무대가 들어찬다. 턱을 매만져본다. 만약 본무대에서도 저런 무대구조라면 저걸 어떻게든 활용해보는 게 좋을텐데, 생각해보지만 이번 경연곡 특성상 저걸 활용한다고 해서 멋져보일 지가 의문이다. 이리저리 고민하는 한수의 표정이 화난 것처럼 날이 서 있어서, 옆에 있던 호진이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거리를 둔다.


“너희 준비됐지?”


휴대폰을 무대 위 스피커에 연결한 유진이 잠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이야 정해져있으니 듣지도 않고 유진은 무자비하게 재생버튼을 눌러버린다. 모두의 대답은 이어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묻혀버리고 만다.




자고로 성적표란 그 단순한 숫자 몇 개로 얼마든지 한 사람에게 자괴감 혹은 성취감 둘 중 하나를 쉽게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명백한 수단 중 하나. 후자일 성취감이란 것도 반복하다보면 버릇처럼 되어 미미하게 느껴진다. 한수는 손 위에 있는 종이조각에게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일어섰다. 양수지가 그 하찮은 종이를 나눠주며 한수에게 건네줄 때만 살짝 망설였다는 걸 눈치챌 만큼의 관심도 없다. 귀에 이어진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이름없는 엠알에게로만큼의 관심도.


영어로 높은 점수를 받아봤자 암기과목을 갈았던 호진은 아래층 교실에서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우울우울열매 먹은 양 간혹 끼이잉 소리를 낼 뿐 미동도 없다. 이래서야 유학은 커녕 왠간한 대학교로도 진학을 못할 것이다.




“넌 그럼 따로 셤치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기회는 한 번 뿐이야.”

“기뻐보이냐.”

“시험 째면 좋지 뭐.”


씩 웃는 유진을 보며 혹시 일부러 실려간 건 아니겠지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 재량이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픈 거 가지고 장난칠 애는 아니지 싶다.


“성적 그 모양이면 대학 못가지 않나?”


재량은 사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진학에 관심이 많았다. 원래 할 수 없는 게 생기면 절로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 질문에 유진이 픽 웃는다.


“대학 가서 뭐해. 돈은 지금도 버는데.”

“그러냐.”

“넌 뭐 배우고 싶길래 대학 타령이야.”

“글쎄.”


딱히 배우고 싶은 건 없었지만 대학을 갈 수 있게 되면 뭐라도 배우고 싶은 게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말을 구구절절 내뱉지는 않고 재량은 화제를 바꾼다.


“알바 할 데 혹시 아냐? 너 일하는 클럽 청소라던지.”

“잉? 너 하던 건 어쩌고.”


윙윙 돌아가는 컴퓨터모터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재량이 표정을 구긴다. 그게.


“아무래도 어쩔 수 없이 짤리지 싶어서. 곧.”




카운터가 텅텅 빈 편의점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소리만 울린다. CCTV로 알바생이 두 명이나 제멋대로 결석했다는 걸 확인한 편의점 사장이 들입다 전화만 하고 있는 까닭에. 곧 전화가 끊기고 부리나케 들이닥친 사장이 휴대폰을 귀에 끼고 씩씩댄다.


“와나 학교도 안다니는 것들 거둬줬더니 이렇게 갚아?!?!? 이새끼들 대체 어디간거야?!”


카운터 레지 옆에는 악필로 마구마구 적혀있는 편지도 쪽지도 아닌 무언가의 번데기가 올려져 있다. 미안합니다 사장님 한 여덟시간만 자리 비울게요. 라고 적혀있는, 오늘 하루 쉴게요나 다름없는 내용의.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종이에는 깔끔한 직선의 화살표로 악필의 쪽지를 가리키며, 얘보다 더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고 사과하는 건지 시비를 터는 건지 알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라기보다는 글자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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