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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영문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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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05 10:05
최근연재일 :
2015.03.23 23:10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6,353
추천수 :
46
글자수 :
94,142

작성
15.03.07 21:12
조회
212
추천
3
글자
10쪽

2. 오디션 사기극 (1)

DUMMY

“안돼.”

“왜요?!”

“너네가 또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양수지의 인생에는 철칙이 있었다. 첫 번째,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 것. 두 번째, 남에게 이용당하지 말 것. 세 번째, 갚을수도 없으면서 남을 이용하지 말 것.


“게다가 두 명가지고 무슨 써클을 만드니. 그냥 너희들끼리 친목질해.”

“이 새끼랑요?” “얘랑요?”


으르렁거리는 재량과 안경을 슥 밀어 고쳐쓰는 한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양수지가 한숨을 내쉰다. 여기서 예스를 외치는 순간 자신은 깊이 관여한데다 제자들에게 이용당하는 호구선생이 될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또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오겠지. 생각이 표정으로 금방 드러나 결이 곱게 평평하던 미간을 지금은 마구 찡그리고 있는 양수지에게 재량은 돌직구로 물었다.


“좀 더 데려오면 만들어주실 거에요?”

“어?”

“부원이요.”


수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한수를 툭 치며 야 가자! 하고 외친 재량이 저 멀리 복도로 사라진다. 꾸벅 예의바르게 인사를 마친 한수마저 사라지고 나서야 양수지는 그래도 안해줄거라고 외쳤어야했다고 후회했다.




그래봐야 저도 모르는 벽이 생겨서 왕따도 아니면서 학교에 그 흔한 친구 하나 없었던 재량과 친구는 많아도 제 눈에 차는 실력이 있는 아이들을 골라내지 못한 한수는 그 누구도 옆에 끼지 못하고 교무실로 돌아와서 다시 양수지를 설득했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교무실 밖 복도에 주저앉아 소리없는 시위를 하는 척 하고 있는 강재량을 내려다보며 한수가 중얼거린다.


“너 되게 없어보여.”

“뭐.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날 프리스타일 대회에서 되도 않은 라임으로 디스를 해대던 강재량의 입에서는 가난과 관련된 단어가 몇 번이고 튀어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고, 눈을 굴리며 한수가 생각하다가 재량의 옆으로 저도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학교에선 재량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애들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무서워하면 무서워했지. 멍하니 학급 내의 재량의 위치를 평가내리던 한수의 옆얼굴을 흘끗 본 재량이 한마디 틱 뱉어낸다.


“넌 왜 없어보여.”


한수는 그냥 웃었다.




종이 칠 무렵 즈음에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한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에 반해 어차피 학교에 대한 미련이란 써클부가 신설되면 생길 지 몰라도 지금이야 밥알 한톨만큼조차 없는 재량은 몸을 일으키는 한수를 따라 시선을 올리기만 했을 뿐 미동도 없었다. 수업안듣냐는 한수의 물음에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내뱉은 재량은 한수가 떠나고나서 교무실에서 차례로 선생님들이 나오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본다. 천원이 꼬깃하게 접혀있다.


니가 돈없는 게 내 탓이야?! 꼬우면 존나 그 실력으로 어디서 입상이나 해쳐오던가!


경찰서에서 조차 서로 멱살을 잡아올리며 싸우던 끝에 외쳤던 한수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서 재량의 귀 옆을 빙빙 돌았다. 우연히 들은 MC신의의 랩핑이 좋아서 아침에 드물게 등교하는 날마다 듣곤 했었다. 그게 다였다. 그냥 듣는 게 좋았던 거지 뭘 해서 그걸로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재량의 눈에 비친 한수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재량의 기준 라면을 사줘서 멋진 형이 된 오훈이 수지를 태우고 사라지고나서 대뜸 야, 하고 재량을 불렀던 여름밤 한수의 그 눈빛은. 같이 돈 좀 벌래? 하고 제안한 그 의도조차. 모든 게 진짜였다. 성격도 손버릇도 나쁜 양아치새끼가 알고봤더니 평소에 좋아하던 신의인 게 당연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의의 실력까지 전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니 실력에다 나 정도면, 돈 금방 벌어. 장담할게.


그 실력있는 애가 둘러둘러하는 그 칭찬같은 말이 얼마나 설득력있게 들렸는지는, 설명해봐야 의미없을 정도였다. 설득력있는 말. 아. 재량이 손바닥을 마주친다. 묘안이 떠올랐다.




때려치고싶다고 카톡을 보냈더니 오훈에게서 나도 지금 사수한테 깨지는 중이라는 답장이 왔다. 양수지는 위로받으려다가 되려 오훈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내며 결국은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한 채로 데스크에 자세를 고쳐앉아 작은 얼굴을 길다란 손가락으로 감쌌다. 마음같아서는 써클이고 뭐고 너희들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얼마 전 한수의 부모님이 찾아와 앉았던 소파가 수지의 자리에서 너무나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하필이면 왜 한수가 동참하는 걸까. 의아해하는 순간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못보던 진한 인상의 장신의 남자아이가 화가 난 듯 머뭇거리는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들어와서 양수지의 눈 앞에 A4용지 크기의 포스터같은 걸 내밀었다.


“지원할래요.”


낮은 목소리가 변성기가 훨씬 지난 듯 안정감있다. 거기다 대고 양수지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포스터를 받아든 건 궁서체로 쓰여진 메시지가 그녀를 유혹할 만큼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영어에 뜻이 있는 당신! 영문학을 배워라! 배움의 끝에 길이 있으리라!


양수지는 순간 자신이 혹여나 90년대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파사삭 소리가 나는 저렴한 품질의 포스터 뒤로 빳빳한 A4용지가 만져져서 포스터를 제꼈더니 대문짝만하게 적힌 지원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다음으로는 삐뚤빼뚤 무지막지한 악필로 쓰인 이름 세글자가 있었다. 구호진.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심했기로서니 이건 너무 치사하다고 처음엔 반대를 하던 박한수도 결국엔 강재량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양수지가 창백해진 얼굴로 던지듯 쌓은 지원서더미는 재량의 책상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책상과 창문의 틈새에 걸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왜요. 쌤이 써클부원 더 있어야된대서 모으는 건데.”

“야 이건 사기잖아!”

“힙합은 시에요, 선생님. 시는 문학이고요. 그걸 영어로 하면 영문학이잖아요. 저희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수가 조용히 정리하자 이 막무가내의 청소년들을 어떻게 말릴 방법이 없다는 걸 양수지는 퍼뜩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묵과할 수는 없다. 지원서의 대부분은 일학년들이었다. 개 중 반은 부모가 시켜서 지원했고 반은 자발적일 것이었다. 저 영국가려면 영어 잘해야 돼서요, 하고 말하곤 미련없이 돌아서 가던 호진이 후자의 예. 그런 아이들의 순수한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 두 아이들이 본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


“선생님이 무슨 걱정하시는 지는 압니다.”


다.


혼돈의 카오스가 된 생각에서 빠져나온 양수지가 뭐? 하고 반문한다. 한수는 냉정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영어점수의 팔할은 힙합이 가르쳐준 거에요.”


양수지의 의심의 눈초리가 재량에게로 꽂히자, 재량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수가 씩 웃는다.


“마찬가지에요. 선생님, 강재량 유일하게 1등급 나오는 과목이 영어에요.”

“뭐?” “어? 그랬던가?”




세상에. 정말이었다. 나머지 과목이 평균치를 너무 깎아먹어서 눈치채지 못했었을 뿐 재량은 꾸준히 영어과목에서 독보적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날 노력해봐야 즐기는 사람 이기지 못한다더니 딱 그런 경우인 걸까? 클릭 한 번으로 엑셀파일을 꺼버린 양수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구석진 빈 음악실에서는 한창 오디션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원을 간 한수 몫까지 차지해서 의자 두 개위로 한 개는 엉덩이를 한 개는 다리를 받친 채 삐딱한 포즈로 지원자들을 하나하나 부른 재량은 깔끔하게 모두를 탈락시켰다. 영문학스터디그룹쯤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 오디션을 벌이느냐고 의아해하던 학생들이 준비한 거라곤 고작해야 초록창에 검색해서 하나쯤 외워온 고전시 정도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재량이 요구한 건 낭송이 아니라 카피랩핑이었다. 당연히 다들 재량을 또라이보듯 쳐다보며 교실을 떠났다. 정작 재량이야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재량의 입장에서 메이킹랩도 아니고 카피랩핑을 하라는 건 그냥 숨쉬어보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의 요구였다. 솔직히 그런 건 그냥 따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재량의 생각과는 달리 본인이 할 줄 안다고 아무나 다 마이크만 잡으면 박자를 타는 건 아니었다.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토도독 두드리며 한 장 남은 지원서를 무심하게 쳐다보는 재량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카피랩핑 아무거나 하나 해보라고 요구한 게 그래서, 벌써 백번은 될 것이다. 하지만.


“랩? 그런 걸 왜”


예상대로의 대답이다. 저 아이도 재수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음악실을 뛰쳐나갈까. 픽 웃은 재량이 지원서를 구겨버린다. 구호진. 세 글자가 가차없이 찌그러진다. 그 때.


“노래는 좀 하는데.”


쫑긋, 재량의 귀가 선다. 노래? 자세를 바로 고쳐앉은 재량이 지원서에서 시선을 거두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본다.


“보여줘.”

“뭐 여기서?”

“어어.”


짙은 호진의 눈썹이 세로로 기운다. 이상한 놈이라고 욕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무반주는 아무리 그래도 좀 하며 말끝을 흐린 호진은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굵고 도톰한 손가락들이 하얀색 건반을 망설임없이 두드린다. 다물렸던 입술이 다시금 벌어졌을 때에는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I'm seventeen for a moment

...


재량의 숨이 멎었다. 버릇처럼 뺨 한쪽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이 무의식적으로 떨어져나가 허공에서 멈췄다.


Seventeen there's still time for you

Time to buy time to choose

Seventeen there's never a wish better than this

When you only got one hundred years to live


조용히 울리던, 낮으면서도 어딘가 포근한 호진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 다시금 손가락이 우당탕 요란하게 피아노건반을 때렸다.


“그래서?”


빙글 매끄러운 피아노의자에서 몸을 돌린 호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합격이야 아니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7.24 06:45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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