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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36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8.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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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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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2권 (11)

DUMMY

8월 11일


사전에 예방한다고 했음에도 매일을 할 짓 없이 잠복만 해서 도둑놈을 잡는다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무슨 권리가 있다고 사람들의 애물들을 일일이 검사하고 다닐 수도 없다.

그래서 레네의 집에 묵기로 한다. 대낮에 절도를 한다면 그건 절도가 아니라 강도겠다. 강도와 절도는 다르다. 절도도 강심장이 조금 필요하긴 해도 엄연히 말해서 겁쟁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인 걸 소도둑도 낮에는 안 한다. 퇴근 후에 일어난다는 전제로 확정적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다.

물론 레네가 받아들어준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흔쾌히 허락해주어서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좀 의외이긴 하다. 얼마 전만 해도 집의 위치조차 안 알려주었으면서 하루 지나자 동거를 허락해주는 게 이상하긴 하다.

완전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밑밥으로 절도 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화제를 던진 다음에 꺼낸 얘기라 근거를 통해서 납득한 거라고 본다. 대신 고성을 관리해줄 사람은 없어서 아쉽긴 하다. 반대로 고성이 털리면 어떻게 되냐, 어쩔 수 없다. 솔직히 고성은 절도의 안전지대다. 아무도 모르니까.




8월 12일


그리고 일기를 쓰는 것도 아무도 모를 터였다. 마을에서는 신경을 안 써서 그러려니 하고 봐줄 만했다.

레네의 집에서 쓰는 것은 그렇게 못 되었다. 워낙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들 특성상 보고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모양이다. 썼던 일기들은 못 가져왔지만 쓰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레네의 눈에 밟혔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도대체 뭐를 쓰는 거냐고 물어보았고, 뒤 이어서 무슨 글자냐고 물어보았다. 위세가 너무 좋아서 내가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또 하나 문제점이 있었다.

레네는 문맹이 아니었다. 경매에 출품시키니까 당연하겠지만. 따라서 이곳에서 쓰는 문자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반대로 나는 이곳의 문자를 전혀 알 방도가 없었고 안다 한들 일기는 당연히 한글로 필기하는 게 편하니까 그래왔을 거다. 레네가 보기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이형의 문자로 인식되는 게 순리였다.

아무렴 콜럼버스가 있었다고 해도 외국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든 시대의 시골 사람에게는 제일 관심사가 되었다.


"똑같은 말을 쓰는데 어떻게 쓰는 문자는 다르죠?!"


저만한 해설들을 모조리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어떤 감정인지 적은 것처럼 이해는 갔으나 설명하기란 복잡했다. 처음으로 내 진짜 출신을 밟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는 헛소리라 치부하고 아무도 듣지 않아서 쉽게 끝났건만 레네는 달랐다.


"세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 거죠?"

"그 쪽에서는 그리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제가 그렸던 이동수단은 있나요?"


간략하게 저 세 질문 말고도 뭔가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너무 많다. 그리고 호기심이 강하다. 블루드는 내팽겨쳐도 남의 문화에는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편 내가 얼마나 설 익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자꾸 질문할 때마다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할지 고민이 되는 게 태반이었다. 내가 지식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다고 하는 건 역시 못할 노릇이다.

엄연히 나는 그 시대에 살면서 내가 만들어서 사는 게 아니라 빌려서 사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단단한 지식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제대로 된 지식만 갖췄다면 여기에서 발명가로서 성공할 길이라도 있었을 텐데. 레네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난 떳떳하지 않았다.

그런 하루라서 분명히 출근도 하지 않았는데 정신적인 요인으로 피곤했다. 밀린 레포트를 쓸 때보다 고달프다. 그리고 오늘이 끝이 아니고 언제 또 물어올지 몰라서 내가 도리어 집에서 달아나고 싶다.




8월 13일


오라는 도둑은 소문도 없고 파업이라도 한 듯하다. 그러면서 이 집에서 지내는 건 참 기묘한 일이라고 자각한다.

어느 방구석 하나, 단 부엌만 빼고서 얘기해서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천지라서 가끔 밤에 보다보면 물감색에 달빛이 반사되어 으스스한 광경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래도 출근을 한 게 질문공세를 면제시켜 오늘만큼은 적당한 피로로 마무리 할 수 있어 행복하다.




8월 14일


내일도 출근이다. 살았다.




8월 15일


광복절은 의미없다. 그런데 대체 휴일이라도 되는 건가. 왜 내일이 쉬는 날인가. 단단히 생각해둬야겠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질문들을 많이 할지 두렵다.




8월 16일


컴퓨터라는 물건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란 딱히 없었다. 무언가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물건이다. 과학의 종합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구성요소에 운영 체제는 어떤 기발함을 가지고 발명되었고 발전해왔는지 전공도 들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일반 타자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컴퓨터의 기원은 도대체 뭐라고 해야하지, 이런 고민만 오늘 수십번이나 했다. 레네에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기도, 혹은 제대로 말한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상황만 여러 번이었다. 컴퓨터가 크긴 해도 다른 것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막막했다. 스마트폰이든 폴더폰이든 나에겐 컴퓨터나 다름없는 막막함이었다. 스마트폰이 컴퓨터에 맞먹어도 구조 자체는 컴퓨터의 축소판으로 보인단 말이지.

고민하는 게 이상하다.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발명하기라도 할 수 있나. 일단 소재 과학부터 발전시킨 후에 생각해봐도 좋을 텐데 석유부터 파헤치면 좋겠다. 차라리 블루드로 시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한 우물이라도 팔 테다. 그 정도면 전에 말한 대마법사 수준이긴 하다.


마치 설명회는 당연한 것처럼, 그러나 이 설명회 말고도 다른 사건이 존재했다. 내가 레네의 집에서 지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정체 모를 도둑놈을 잡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이 집을 찾아왔다. 현관문 고리를 두들겨서 노크도 제대로 한 방문객이었다. 나는 집주인도 공식적으로 동거하는 인물도 아니라서 사각에서 가만히 있었다. 다 듣고 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긴 했다.

방문객의 정체는 보안관이었다. 애초에 이 마을에 보안관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처음 소개는 그렇다 하고 끝까지 들어보면 이해는 되었다. 사이비 경찰 조직이 없어지고 난 후에 범죄가 풍성해질 기미를 보이자 임시로 보안관 행세를 하겠다는 의도였다.

의도 자체는 좋다. 그래도 누군가 막는 이가 있어야 막는 이를 따라주는 이도 생길 것이란 그다지 근거 모를 이론을 들고 온 것이다. 심리학 상에서 무슨 단어가 있겠거니와 나도 모르고 저들도 모르는데 그냥 감이겠다.

따로 큰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듣자면 진범을 찾았다고 한다. 허투루 짚은 게 아니고 자백까지 했으며 도둑맞은 물건들을 전부 되돌려주었다고 하기에 잘 끝난 모양이다. 안심을 시키려고 방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레네의 집에 있을 근거가 없어져서 오늘 당장 나왔다. 솔직히 도망쳤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소굴에 있다가는 휴일과 근무일이 역전될 수 있는 끔찍한 상향평준화가 되어버린다. 흡사 구금되어 기술력을 착취당하는 외계인의 삶이다. 나도 외계인은 맞긴 하다.




8월 17일


거짓말도 정도껏 쳐야지, 안 그러면 한계가 명백했다. 도축장 주인에게 했던 내 거주지에 관한 거짓말은 당연하게도 그곳에 가면 들통날 거짓말이었다. 소흘히 거짓말은 친 것도 있지만, 아예 다른 사람의 거주지였으니 말을 다했다.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다음으로 어떻게 거짓말을 쳐야할지 가물가물했다. 이미 한 번 들켜서 신뢰가 떨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앞으로도 내가 고성에 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대충 둘러댈 수 있는 말이 필요했다.

제일 만만한 건 어쩔 수 없이 레네의 집이었다. 실제로 동거 이력이 있다고 해서 마냥 만능이라고 하기에는 이용해 먹겠다는 완전 사악한 의도는 아니었다. 장주님이기에 믿는 구석이 있어 그리 말하는 거지 나쁜 의도가 있을 경우에는 레네의 집을 써먹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금방 믿지는 않았다. 장주님은 레네의 집을 알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아가씨의 집이라며 부인했다. 대충 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고 말해주었다. 벌써 떨어진 신뢰 때문인지 여전히 부인했다.

그러자 장주님은 레네에 대한 평가를 근거로 반박했다.


"그 아가씨 낯을 많이 가린다 말이지. 전에 말도 못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알고는 있나. 한동안 밖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었어. 이방인인 자네에게는 열어줬다고? 믿기가 힘든데."


마침 그렇게 나왔기에 '말도 못할 일'을 말함으로써 믿어주었다. 장주님의 말로는 접근도 못할 정도로 레네가 벽을 짓고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 의아했다.

고도의 심리적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대화 몇 번만 해서 친해진 거라서 너무 눈높이를 착각한 게 아니냐는 조언을 주었다. 장주님도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그건 있겠다. 레네는 사교적인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한두명은 넘어갈 수 있어도 마을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지 않아도 레네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을 법하다.

오히려 내가 레네의 집에서 나온 게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있을 때 그림 그리는 일이 너무 뜸했다. 레네의 잘못이긴 했다. 내게 너무 많고 오래 질문을 해서 창작의 시간을 못 만들어낸 거였다. 이런 별거가 피차 장점이라 생각한다.

다만, 장주님에게는 동거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있나. 미리 거짓말로 판을 벌여놓고 후에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다. 승낙을 해주어 다행이었다.




8월 18일


그러고 보면 어제 찾아간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질 않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기 전에 찾아온 레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절도 사건 같은 게 일어났을 경우에는 웬만해서 제 집에 있으세요. 호구조사로 범인을 특정지을 거라고 임시 관리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게 무슨 효과가 있겠냐는 소리를 하고 싶어도 민원창구가 있을까. 비효율적이지만 악법은 아니라서 법이라 취급하겠다. 암만 그래도 사이비 경찰 조직보다는 낫다. 비록 그 녀석들이 정보력이나 행동력에 있어서는 따라갈 수 없었을지언정 인간말종 짓만 뺄 수 있었으면 완벽했을 터였는데 말이다.

이번 통칭 임시 관리를 통해서 범죄를 근절시킬 수만 있다면 괜한 걱정을 치울 수도 있겠다. 사이비 경찰 조직이 없어진 후에 그 범죄자만 구속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는 당연한 추리가 있었지만 절도 사건 외에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 과정으로 흘러갔다. 그나마 나머지는 진짜로 참회한 것인가? 어쨌든 이번 임시 관리는 한 번 믿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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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권 (2) 20.08.05 6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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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1권 (55) 20.07.26 63 0 12쪽
54 1권 (54) 20.07.25 44 0 14쪽
53 1권 (53) 20.07.23 39 0 13쪽
52 1권 (52) 20.07.21 31 0 14쪽
51 1권 (51) 20.07.20 49 0 13쪽
50 1권 (50) 20.07.18 51 0 13쪽
49 1권 (49) 20.07.16 62 0 14쪽
48 1권 (48) 20.07.15 6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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