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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34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8.1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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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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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권 (9)

DUMMY

7월 22일


몰래 묻는 데는 성공했다. 하루 아침에 구더기가 꼬이긴 했어도 들키지 않았을 거다.

레네에겐 말 못한다. 아직은. 이런 걸 어떻게 당장 말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레네도 직접 대면하지는 않으니까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7월 23일


살점들을 만지작거리니 망나니의 영혼이 깨어나기라도 한 걸까. 뭐 이리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많은 죽은 육신들을 뒤로 하고도 나는 멀쩡한 게 당연한 정신인 건가. 조금은 미쳐버려도 좋을려만 그러고 있지 않다.

가축을 죽이는 것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하고 같은 취급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명분이란 게 있어도 살인귀는 환영받지 못하겠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살인귀로 모르게끔 하고 있다. 그러면 괜찮을 리가 없다.

얼마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정작 난 고통이란 게 없어 매우 고통스럽다.




7월 24일


블루드란 것도 있다면 사람을 살리는 기술도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 마법이 차고 넘친다면 그런 것쯤은 있을까. 네크로맨서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정당한 부활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인 사실을 후회함에도 다시 살려둬서는 안 될 놈들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난 살인을 후회하진 않는다. 과정에서 일어난 충동과 이성의 격돌은 정신에 해롭지만 과정을 지난다면 난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다.

어쩌면 난 살인귀는 아닐지 모른다. 내가 정의하는 살인귀는 아니다. 그런 놈들을 정의하는 것은 결론보다도 과정에 있다. 살인귀의 살인은 그렇다 할 명분도 없다. 쾌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저 살인을 하는 것이 본 명분 그 자체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난 살인청부업자가 맞다고 할 것인가. 그래도 선언하되, 나는 값을 받고 살인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더 살인을 저지를지도 모르겠지만, 한다면 최대한의 정당성을 갖지 않을까.

더 이상 저지르고 싶지 않은 게 맞지만 만약에, 언젠가 또 인간말종이 찾아온다면 이 무법지대에서 사이비 보안관 짓을 저질러도 되지 않을까. 주제넘는 짓이긴 하다. 암살자가 뭐라고,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을까. 사람을 죽여도 되는 권리는 어떤 세상에라도 존재해야 하는 거긴 할까.

그게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한 개인이 멋대로 이루기에는 크나큰 착오가 함정으로 존재하고 있을 듯하다. 여태껏 내가 블루드로 벌인 짓은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 이뤄진 결과물이다. 어디에도 훈계하거나 자랑이 될 수 없는 짓거리라 암살자로 남는 편이 신상에 이롭겠다.




7월 25일


시한부였지만 레네가 찾아오게 되었다. 믿고 보냈을 테지만 3일이면 충분히 있었던 시간이기에 고성에 찾아와 그 범죄자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레네가 그를 만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에 이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식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내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물어보았다. 그게 올바른 판단이고 올발라야할 상황이었다.

문득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할 작정으로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내가 진즉에 죽였다는 말을 하는 건 레네에게는 모순이 될 터였다. 청개구리 심보다. 죽이라고 할 때는 죽이지 않더니 죽이지 않으라고 하니까 죽여버리는 떼쓰기. 이렇게 반대로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살인이란 행위가 마음만 먹는다고 바로 행할 수도 있는 게 아닐 것을, 둘 중에서 그나마 살인에 적합하다며 나일 뿐이었다. 레네라도 충동이 있어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일은, 나는 블루드라는 병기가 있기 때문에 손쉬웠다. 전제부터가 남다른 것이다.

처음에는 속여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모든 경과를 내가 죽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숨겨서 다 말해주었다. 그 범죄자가 어떤 사고를 지니고 있는지 가르쳐줌으로써 레네는 차분해보여도 약간은 분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레네는 정상적이었다. 거기에 살인이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덜하게 어딘가 의적질을 할 수 있는 수단이나 타인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수단을 찾으려고 애썼다.


"죽어 마땅하다 해서 남한테 죽이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죽어 마땅해서 죽이는 것을 남한테 부탁하는 행동은 나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남의 신조를 해치면서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요컨대 남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다. 이미 존엄성을 버려버린 사람에겐 몰라도 함부로 발언하기에는 무게감이 크다.

그러나 자신의 신조를 통해서 죽여버린 사람을 향해서, 이미 저질러버린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이라면 나야 짜릿하면서도 짠했다. 이대로 달아나려는 심보 자체가 기껏 세운 신조와 정당성을 날려먹는 일이었다. 당당하면 살인귀 취급이고 속이려 든다면 살인마 취급이다. 편향적일 때야말로 내가 가장 두려워할 상황인 것을 이런 중립이면 그나마 괜찮다고 나름 객관적인 자기 위로를 했다. 결국 자기 위로에서 그친다.

유일하게 내 편은 레네였다. 서둘러 숨기려고 했던 살인과 나의 심정을 고해성사했다. 이걸로 레네가 나에게 면죄부를 써줄 게 아니기에 나는 오히려 편했다. 면죄부 따위 없는 게 낫다. 죄악과 대면하기 싫어서 억지로 만들어 낸 허상인 걸 받아들인 사람이나 만들어버린 사람이나 다 똑같은 게 면죄부다.

비록 레네는 다그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로의 소리도 안 해주어 고마웠다.


"그랬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진 않잖아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게 마냥 재앙도 아니에요. 하지만, 별로 칭찬할 사람도 없겠죠. 부탁했었던 저도요. 이렇게 된 건 모든 게 제 탓이겠죠. 하필 그 부탁만 아니었어도 시작도 안 했을 거예요. 제가 물들인 거죠. 평범한 사람을 살인을 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전 평생 살인을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가볍게 부탁했죠. 좀 더 이롭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야만적이게 바꾼 건 저예요."


자책이었지만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사이비 경찰 집단의 말로는 블루드와의 대결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범죄자까지 블루드로 죽였어야만 했을까. 흡사 선인이라 부를 수 있는 블루드라는 멋진 기술을 가지고 무력한 사람을 향해서 가볍게 방아쇠를 당겨 살인을 저지르면 그건 모범시민도 되지 못한다.

일개 블루드를 쓸 줄 아는 전능한 척하는 일개 시민이며 그다지 진리에 대해 배운 것도 하나 없다. 대단하지도 않은 나와 레네가 남을 심판하려 했다는 건 언제 업보를 받아도 상관없을 앞으로도 두고 볼 일이다.

이 날은 둘 다 불쾌하게 헤어진 날이다.




7월 26일


이후로도 매일 그 범죄자를 묻은 곳에는 들릴 예정이다. 탄식의 이유도 있을 테고 비밀 엄수의 이유도 있을 테다. 후자가 조금 더 짙긴 하다. 하다 못해 옮길 작정도 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임시 무덤이지 진짜 기리기 위한 무덤이 아니라서 최소한 고성 주변으로는 옮겨줘야 할 터다. 그래야 두 가지를 전부 잡을 수 있을 듯하다.




7월 28일


도구 없이 옮기는 건 무리다. 최소한 수레라도 있어야 생각이 가능할 텐데, 그런 게 내 수중에 있을 리가 없다. 마을에서 고성까지 옮기는 거리가 얼마인지 잘 알고 있어 엄두도 못 낸다. 당분간은 졸이면서 저 마을에 방치하는 게 최선일 듯하다.




7월 29일


잊고 있었던 그 마을의 소식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침 이 때쯤에 또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 수금자를 죽였다는 누명은 뒤로 치워도 괜찮다. 이젠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마을 자체가 터져버린 듯하다. 한꺼번에 마을로 이사해 온 2가구가 무려 그 마을의 출신이라 하마터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 들킬 뻔해도, 왠지 시간 문제일 느낌이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래도 내가 오기 이전에 이 마을로 떠난 가구도 몇 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웃과 곧바로 친해졌다기에는 반가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내 소식도 전파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이사한 가구라는 게 나에게 블루드를 가르친 애들 중 1명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건방졌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라서 모르지만, 제대로 수금자를 죽인 범인으로 온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게나 나를 엿을 먹여놓고 나중에서라도 죄를 뒤집어쓴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러나 물어보고 싶긴 하다. 호되게 당해놓고 또 속는 셈치고, 마주하지 않고 도망치다가는 누명으로만 남겠다. 사전에 내 인식이 나빠지기 전에 해결한다는 식으로 일단 애한테만 접근해서 물어볼 수 있으면.




7월 30일


거 참 각이 안 나온다. 아무래도 그 마을의 절친과 헤어지니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한나절 잠복한 것도 아니라서 모르긴 하다. 그런데, 정말 한나절 잠복하는 게 의미있을지 모르겠다. 귀찮은 마음이 굴뚝같다.




8월 2일


나온 걸 보긴 했지만, 해봤자 집 앞이다. 애 건에 대해서는 이걸로 끝내고.

레네가 찾아와서는 블루드에 대해서 실컷 물어보았다. 물어보았다는 게 내가 애들한테처럼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레네는 블루드를 배우는 데에 약간 혐오가 있는 듯헀다. 직접 물어본 게 아니라 모르지만 이런 다재다능한 마법을 배울 용기조차 없다는 건 내 살인 전과 때문인 듯했다.

가끔씩 살인의 충동이 일어나도 수단이 없다면 실현조차 못할 테니까. 나야 칼로 겨우겨우 그어서 과다출혈로 죽이거나 급소를 찌르는 등의 기행을 안 보여도 블루드는 훨씬 유용해서 그런 게 필요없다.

물어본 것은 다름 아니라 내 한계에 대해서였다. 나는 간단히 보일 수가 있었다. 끽 해봤자 내가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는 구현하는 게 한계였다. 마을에서 벗어난 근래에는 블루드를 단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었다. 않았지만, 확실히 마을에서보다는 숙련된 느낌이긴 했다. 용량은 그대로지만 말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도축장에서 계속 몰래 블루드로 칼갈기를 대신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내 실력을 보고 난 후의 레네는 이렇게 말했다.


"그 블루드를 고성을 뒤덮을 수 있는 크기로 부풀릴 수 있다면 웬만한 마을도 무사하지 못할 테죠.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흑심을 품고 있을 경우에요."


나를 기준으로 그게 가능하겠냐는 판단은 일렀다. 마법이니까 대마법사 정도는 세상에 몇 명은 있을 거라 믿고 있는 나다. 나는 해봤자 그 세계에서는 입문자에 불과한 수준이겠다.

그렇다면 정말 알려줘서는 안 될 기밀인 거 아니겠나. 이건 어지간해서 근미래에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제한점을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이게 큰 파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레네가 우려하는대로 이뤄지지 않을까 상상해 볼만은 하다.

근데, 상상해 볼만한 거지 마냥 걱정할 수는 없겠다. 걱정해도 재능 탓이니까, 내가 감히 막을 수 있을 재앙응 아니겠다.

지금에서 내게 있는 재앙이라고는 애 한 명이다. 나는 거의 중퇴했다시피한 블루드 스터디에서 그 애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냥 성장한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나보다 훨씬 빨리 살인자가 된 녀석이 날 만나면 어떤 흑심을 품을지가 두려운 거다. 그 때가 온다면 나는 또 살인이란 선택지를 고를까. 한 번이라도 내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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