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43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8.03 17:17
조회
45
추천
0
글자
13쪽

2권 (1)

DUMMY

(날짜 미기입)


이른바 공장이다. 병사들을 기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찍어내서 쓸만한 인재를 뽑으려는 공장이다.

여기엔 의지란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 뿐이라 당연히 살기 위해서 행위를 쳐하기만 한다. 기댈 수 있는 것도 없다. 오로지 기댈 것은 자신이 잘 해낸다는 불확정인 요소만이다.

못한다면? 난 봤다. 일부러 다쳐서 꿀을 빨려 했던 멍청한 놈은 살가죽이 뜯겨 죽었다. 피도 양동이에 받아내어 식인종이란 말 이상이 안 나왔다. 나도 걸리면 저렇게 될 거라고 조용히 지냈다.

그래서 빠져나왔다. 경비나 보안은 허술했다. 생각만 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는 높이의 벽이 한 곳 있었다. 마침 쓰레기 당번이었다. 눈이 없다는 확실한 근거로 그곳으로 빠져나갔다.

하염없이 달려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가서 나자빠졌다. 뒤를 돌아보나 추격은 무리인 듯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맨땅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편하게 자버렸다. 저 곳보다는 훨씬 따스한 잠자리였다.

노숙이 이리 기분 좋을 상이었던가. 살면서 죄라는 걸 느껴보지 않았다. 죄와는 거리가 먼 청정한 사람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모범 시민은 아니더라도 내 명예는 준법 시민이라도 되었다.

술 취한 진상 손님을 향해서 쌍욕을 한 번 날린 것도 죄라면 죄겠지만, 과연 그게 이토록 나를 내다버릴 정도로 심한 죄였던가.

알고는 있다. 이게 벌이 아니라는 거. 가만 보면 나보다 더 착한 사람도 그곳에는 많았다. 악질인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똑같이 끌려왔다는 건 평등하다는 말인가.

군대도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 합이 안 맞거나 심각한 전체주의 성향이 강하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모범적이란 비적성인 곳인 걸 제외하면 그랬다.

어떤 사람이든 여기선 천하게 된다. 그래서 벌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죄를 벌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끌려왔으니까 호되게 대우를 받아, 그럼에도 열심히 윗대가리들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일방적인 강요는 날 이리로 내몰았다.

고로 난 나쁜 선택을 한 게 아니다. 나오지 못한 쪽이 배신자라고 닿지 않을 비난을 하더라도 알 바가 아니다. 어떻게 해도 내가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구원해줄 만큼 내가 덕이 높지도 않다.

그리고, 구원한다고 해서 밖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모른다면 나 혼자 나가는 거면 충분하다. 똑같은 식인종을 조우해서 일용할 양식이 되는 거면. 적은 사람과 다른 괴물이라면서 하는 짓은 이쪽이 괴물 같다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예상 밖으로 따뜻한 인정이었다. 자는 도중에 길거리에서 주워 수레로 끌고 가는 행위는 흡사 식인종의 납치였다고 생각했다.

일기도 쓰게끔 흔하지 않은 종이까지 쥐어주는 걸 보면 식인종은커녕 복권에 당첨된 거다.




(날짜 미기입)


더 종이를 얻어 쓴다. 이들이 해준 배려들은 많아서 못 적는다.

그러나 불화가 있긴 했다. 솔직히 그들이 모르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다. 내가 이 쪽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말해주어도 못 알아듣는다.

이해해도 뭐 이점은 없긴 하다. 그럼에도 이해해주지 않는 건 허전하다. 해봤자 단순히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기는 건 내가 탐탁치 않다. 이상한 사람이 되어 고립되었다는 상황은 싫다.

반대로 단점은 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걸 인정을 안 해주니 문화나 상식이 다른 게 통용이 안 되었다. 내가 알 리가 없는 이쪽의 문화를 어떻게 안다고 매번 지적 받았다.

꼰대들이 문제이긴 하나 얻어먹는 것들을 생각하면 참는다. 애초에 무시하는 편이 좋은 게 일기를 쓴다 해서 문자도 모르는 주제에 내가 무슨 내용을 쓰든 읽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문맹들이 너무 많다. 이건 안 좋다. 내가 이쪽의 언어를 배울 수가 없다는 건 크다. 내가 도리어 통하지도 않을 문자를 가르치는 건 기만하는 것이라 운명이라 생각한다.

근데, 말이 통하는 걸 보면 내가 문자를 가르쳐도 상관없다고 생각이 들긴 한다. 안 할 작정이긴 하다. 귀찮고, 자신도 없다. 가르치는 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나 하라지. 서당도 아무나 여는 건 아니다.




(날짜 미기입)


달력이 없다는 건 일기의 반쪽을 앗아간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농사를 짓는 마을이 날짜를 알 수 없겠냐마는, 이들의 방법은 대강 세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알 방도는 없었다.

현실에서 본 마지막 날짜는 4월 초이긴 했다. 그것도 이젠 희미하다. 5, 6일이었을 듯 싶다. 벌써 며칠이 지난지도 모른다. 어쨌든 달력이 없어 그렇다.

틈이 날 때 일기를 쓰나 이젠 쓸 것도 없다. 쓸 것도 없다는 말을 쓴 것부터 답이 없는 상황이다. 서핑이나 할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날짜 미기입)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마을에 미심쩍은 건물이 있어 엿보았더니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아이 둘, 한 12살, 13살 연하라고 보는 애들이 어디로 가나 심심해서 미행한 게 그 건물이었다.

허름한 건물이라 간단히 안을 엿볼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비밀기지 같은 거일 줄 알았다가 큰코 다쳤다.

마법이었다. 푸른색 기운을 동동 떠다니게 만드는 기이한 술수였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장난을 넘어서 대단히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 줄 알고, 나야 질책은 못했다. 그저 보면서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보고 배우려 했다. 그게 안 되니까 마법이다. 어떤 간단한 시늉도 나에게는 참고도 안 되었다. 다른 속임수가 있을 거라고 작정하고 찾아보려 해도 엿보기는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없는 친화력까지 동원하여 배우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것은 아닌 게 이쪽의 일상에서는 비범하게 작용할 것이라 확신했다.

부디 자존심까지 구기고까지 배우고 싶었다.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촉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가서 어찌저찌 간곡히 부탁했다.

사실 안 가르쳐준다는 동심의 이기주의에 그냥 협박하기로 했다. 이걸 비밀로 하는 대신에 가르쳐달라는 이야기였다. 고자질을 빌미로 삼는 건 추했다. 어린이니까 가능한 거긴 했다.

마법 같은 게 배운다고 해서 간단히 구현할 수 있는 거면 이 애들만 쓸 수 있는 상황이 이상한 거였다. 배우는 방법도 이상하긴 했다.

배운다고 하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다. 무슨 자해냐고, 싶었다. 노끈을 아무대나 둘러 묶어서 서서히 잡아당기는 게 배움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이 들었다.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애들도 하기 때문에. 대신 조여서 뻘건 표시는 들키지 않으려고 허벅지에 하라 했다. 허벅지는 별로인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근육이 많아서 통증은 덜 느끼는 곳이라 무리다.

정작 통증이 관건이라면서 지들이 제대로 실천을 안 하고 있으니 전자기기도 없는 곳의 꼬맹이들은 지식이 결여되어 있긴 하다.

그래서 그런지 정작 지들이 '블루드'라고 명칭을 들었으면서 무슨 뜻인지는 모를 거다. 내 판독으로는 블루+블러드인 '파란 피'인 것 같은데, 체내에서 뽑아내는 거니까 맞긴 할 거다.





(날짜 미기입)


여전히 마법을 못 써도 애들 정도는 도와줄 순 있다. 뻘건 자국이 싫어서 허벅지라면 허벅지를 안 하는 방향으로 도와줬다.

자국이 남는 이유가 피가 안 통해서인데, 서서히 마사지만 해주면 그런 건 필요 없다. 굳이 알려하지 않았다. 마사지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으면 곤란하긴 했다.

허벅지 대신에 정한 부위는 손목이다. 가늘고, 가는 만큼 근육은 없지만 혈관은 많은 곳. 그래서 적합하다. 앞으론 허벅지 따위는 안 한다. 손목이어야지 제대로 통증을 느낄 수 있지.

근데, 참 웃기긴 하다. 순전히 자해 같은 상황이라 이게 배움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애들 말대로라면 한절기는 지나야 효과를 본다고 해서 참고 해본다.




(날짜 미기입)


슬슬 걱정이 안 설 수가 없다. 난 탈영병이다. 엄연히 강제로 끌려가긴 했어도 탈영병이다. 안 걸리면 좋겠지만, 실제로 안 걸렸고 이 마을 사람들도 모른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는 걸 믿지 않는 이상 미친놈이라 여길 뿐이겠다.

그렇지만, 그걸 인정이라도 한듯 전혀 추적하러 오질 않고 있다. 내가 아는 군대는 한 명이라도 점호에서 삐끗나면 단체로 기합을 받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아님 내가 없어진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모른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조금 긍정적이게 생각한다.




4월 18일


드디어 날짜를 알고 있는 주인을 만났다. 유일하게 달력을 소지하고 있는 주민이며, 달력에는 일가견이 있어 스스로 자체 제작한다고 한다. 촌장도 아니다. 일개 주민이다. 촌장이 알아야 사실이 아닌지 의심해 본들 내게 의심 말고는 권한이 없다.

개인적으로 촌장 이상으로 권위가 필요한 사람이라 본다. 촌장이 표면만 봐도 하는 게 없긴 하다. 주도적으로 이루는 건 없고 마을을 둘러보는 중에 나와 만나는 게 태반이다.

내가 본 꼰대 중의 한 명이 이 작자다. 아무래도 이방인이며 얹혀 사는 것과 더불어 그다지 현 문화에 정착하지 못해 일거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만하긴 하다. 훈계의 내용은 꿈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난다. 엄연히 나를 위해서 하는 좋은 말씀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여러 근거를 들어서 그거라고 본다.

우리들 보고 열심히 살아가지고 마을을 부흥시키라는 돌려 말하기를 시전하는 거다. 다 잘 되어라 축복하면서 꼭 다른 데 가지 말고 남아서 살라는, 고향을 인질로 삼아서 하는 얘기는 나로 하여금 그런 해석으로 이어지게 한다.

찍소리는 못하지만 화풀이는 안 한다. 어디에서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늘 있는 거라고 체념한다.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는 것을 남을 위한다고 인정을 하지 않는 꼬라지에 감탄한다. 그 잘난 이타성을 실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세습이 권리는 맞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촌장이란 건.




4월 20일


한절기가 지나야 한다면서. 용케 어른됨을 보여줬다고 할지 마법을 이루는 데에 나도 성공하였다. 이른 성공에 심통이 난듯 교육비를 내라는 심보가 보였는데, 공짜는 싫으니 간식을 얻어 공물을 바쳐 잘 추스리고 있다.

내 선택은 옳았다. 이 마법은 장식이 아니다. 좀만 연구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보인다.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고, 심지어 만질 수 있는 물질이다. 그 말이란 물리적인 간섭이 가능하다.

과연 이걸 어디서 알아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자 나 같은 이방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나 같다는 게 똑같이 한국에서 왔다는 소리가 아니다. 아직도 마을은 날 그나마 기억을 잃어버린 착한 청년이라 보고 있는 걸 애들이 알 리가 없었다.

도대체 뭔 이유에서 가르쳐준지 몰라도 그랬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어린이들에게 이런 걸 가르쳐줘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잘 모르곘다.




4월 21일


잊고 있던 군에 관한 사실이 떠오르는 날이었다. 추적자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대규모의 행군이 우리 마을을 들이닥쳤다. 정확히는 지나가려 하다가 날이 새서 잠시 머물려고 온 것이었다.

그냥 자기들 손에서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그들이 얻어먹는다고 그 날 밤은 밖에서 자게 되었다. 정체 모를 이방인보다는 병사들이 우선 순위가 높으니까 그러려니 인정했다.

하지만, 조금 좀 먹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이를 공감해주는 건 촌장이었다. 아무리 쌓아도 언제 마을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태산이라고 한다. 아예 눈여겨 보지도 않는 주제에 우리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눌러붙어 뜯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검과 창과 방패를 들고 있으면 찍소리도 못한다.

나름 꼰대라고 해도 올바른 판단의 표본은 가지고 있었다. 그 말대로 지나간 자리에는 치우지 않은 찌꺼끼들이 난무해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병사 쪽을 욕하자니 이중잣대다. 정말 충성심으로 자리매김 할 수도 있는 거고, 언럭키하게 나 같은 동류가 탈출 못해서 저리 된 것일 수도 있고, 각자 사정을 생각하자면 양쪽 다 도덕적인 건 아니었다.

조금 분하기도 하다. 나만 도망쳤다는 걸 한계라고 느끼기는 해도 한계가 맞기에 촌장처럼 허무맹량한 상상만 바라는 게 아니냐는 둥, 몹시 불쾌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주기는 제 마음대로입니다. 20.07.08 68 0 -
73 2권 (15) 20.08.24 68 1 12쪽
72 2권 (14) 20.08.22 48 0 12쪽
71 2권 (13) 20.08.21 56 0 12쪽
70 2권 (12) 20.08.20 72 0 12쪽
69 2권 (11) 20.08.18 83 0 11쪽
68 2권 (10) 20.08.17 59 0 11쪽
67 2권 (9) 20.08.16 50 0 12쪽
66 2권 (8) 20.08.15 73 0 12쪽
65 2권 (7) 20.08.12 65 0 12쪽
64 2권 (6) 20.08.11 81 0 11쪽
63 2권 (5) 20.08.10 63 0 11쪽
62 2권 (4) 20.08.08 51 0 12쪽
61 2권 (3) 20.08.07 46 0 12쪽
60 2권 (2) 20.08.05 63 0 14쪽
» 2권 (1) 20.08.03 46 0 13쪽
58 1권 (58) 完 20.07.31 43 0 27쪽
57 1권 (57) 20.07.29 87 0 16쪽
56 1권 (56) 20.07.28 69 0 14쪽
55 1권 (55) 20.07.26 63 0 12쪽
54 1권 (54) 20.07.25 44 0 14쪽
53 1권 (53) 20.07.23 39 0 13쪽
52 1권 (52) 20.07.21 31 0 14쪽
51 1권 (51) 20.07.20 49 0 13쪽
50 1권 (50) 20.07.18 51 0 13쪽
49 1권 (49) 20.07.16 62 0 14쪽
48 1권 (48) 20.07.15 64 0 13쪽
47 1권 (47) 20.07.14 66 0 12쪽
46 1권 (46) 20.07.12 49 0 12쪽
45 1권 (45) 20.07.11 56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