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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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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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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0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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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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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권 (6)

DUMMY

6월 25일


그칠 줄 모르는 창작 정신에 내 방을 그림에 빼앗기는 느낌이라 다른 방에 임시로 방치하기로 한다.

벌써 5장 째다. 몸통 만한 캔버스가 5장이면 나 하나만큼의 부피를 차지하고도 넘친다.

내가 걱정할 팔자는 아니라도 무료한 캔버스만 나한테 주구장창 주고 있는 게 조금 불안하다. 캔버스 주인의 일상은 과연 안녕하고 있는 건지 쏟아붓는 물감의 양만 해도 가늠이 안 간다.

혹여나 서민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닌가. 자세한 정체도 모르면서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돈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높은 신분에 위치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고, 서민 감부라거나 여러 가지 많다. 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6월 26일


드디어 휴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림의 주인은 나타나서 작업을 개시하려 했다. 거치대가 철수되지 않는 이상 나타난다고 판단했다.

작업에 들어가면 방해를 못하니 그 전에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점심도 거르고 하는 사람이라 그 집중력은 존중받아야만 했다.

제일 먼저 통성명부터 하였다. 그동안 신세를 지냈지만서도 서로 이름을 모른 채로 살기 바빴기에 제대로 기초적인 개인 정보도 공유하지 못했었다.

통성명에서 나는 한 가지 꼼수를 알아냈다. 한자어스럽게 짓지만 않으면 의심받는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마을에서의 패착 중 하나는 아마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아니라도 존재 자체가 신비롭고 비정상적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겠지만 이름도 중요한 법이었다.

어느 나라 식이라고 정의는 못해도 영어스럽게 지어낼 걸 보자면 맞는 이론이었다. 도축장 주인에게조차 원래 이름 대신 가명을 써서 일을 얻어냈으니 말이다.

그림의 창작자인 이 사람도 이름은 '레네'라고 한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성은 따로 없다. 그렇다면 귀족 출신이란 추측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들은 바로는 성은 보통 영지가 있는 사람 아니면 없다고 들었으니.

사전 의례에 불과한 통성명을 마치고 그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대목을 물었다. 그릴 만한 재력이 되는지 말이다.


"그걸 물어서요?"


그래도 경계심은 여전했다. 경계심이 여전하면서도 이곳에서 그림을 터놓고 그리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해도 인정해주었다. 남의 재력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흑심이 있을 법한 발언이기에 아무 이유도 없다, 고 말해도 믿어줄지는 자신이 없었다.


"있는 편이라고 하면 되나요."


그냥 있는 편이라고 하기에는 낭비가 심해 보인다, 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 본다면 꽤 많은 편이긴 해요. 부족함이 없긴 하죠. 근래 들어서 이렇게 그리는 거 아니면 하는 일이 없긴 하죠."


본 직업이 화가인지 물어보았다.


"네. 오래 그리다가 그렇게 되었죠."


오래 그린다는 말이 좀 이상했다. 평균적인 생활 수준이 좋은 시대가 아닌데도 옛날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건 어지간한 형편 아니면 안 될 것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물어보았다.


"이 성이요, 옛 친구가 살았던 성이에요."


친구가 성에 살았다는 건 나처럼 비공식적으로 터만 빌려서 산다는 말은 아니었을 거다. 진짜 성의 주인이었던, 주인이 아니라도 주인의 혈육이었을 사람이 친구라는 뜻을 이해했다.

그다지 기나긴 세월을 지낸 폐허가 아닌 이유도 같이 이해되었다. 시기상으로도 레네의 나잇대를 보자면 10년 이상은 절대 무리였다.

옛 친구가 어째서 떠났는지도 술술 말해주었다.

국가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도권도 아닌 마을인 이곳에 직접적으로 반란의 여파가 불어오지는 않았다. 소문으로 반란이 끝났다고 하고 왕이 바뀌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단지 거기에서 끝나는 듯 싶었으나, 이는 서민에게는 큰 영향이 없되 마을의 영주인 이 성의 전 주인에게는 여풍이 불어왔다. 말이 정돈이지 실상은 물갈이였다. 영주 권한들을 다시 거둬들여 새로 재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 재배정이 정상적으로 이뤄졌으면 고성이 생길 일도 없었겠다. 그러나 반란 성공과 함께 제대로 정권의 영향력이 퍼지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 먼저 침략 당한 쪽이기에 어쩔 수 없이 수습에 급급해져서 이 성은 주인을 다시 배정받지 못한 채로 남겨졌다고 한다.

레네의 옛 친구라 불리는 사람은 유배가듯이 다른 데로 떠나졌다고 한다. 근래에는 소식도 없어 몸이 멀어진대로 마음도 옅어진 상태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인데 나 같은 저 세상 사람에 관한 소문은 안 퍼진 모양인가 보다. 정보 통제가 되는 거라고 보는 게 확실하겠다. 내가 퍼뜨린다 해서 얼마나 전파될지 모르겠다. 오히려 전파되면 내가 위험해지는 게 시간문제겠다.

그러니까, 요컨대 옛 친구라는 백이 있어 그림을 계속 시도할 수 있었단 소리였다. 그래도 백이라고 말하기에는 본 실력조차 남달라서 재능을 제대로 꽃 피운 거라 그걸 가지고 아무도 욕할 순 없다. 행운이 따라도 능력이 없으면 한계는 역력하다.

역사적으로 단명한 어떤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 내가 화가는 아니라지만 남 부러운 상황이다. 자신만의 재능을 찾았고 그대로 쭉 이어나간다는 것은 나와의 길과는 정반대다. 난 어찌해도 무언가 재능이란 걸 찾은 적이 없어서 방황했었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이곳에 왔기에 하루살이랑 비슷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6월 27일


이제야 깨달은 사실인데, 계속 찍어낸 캔버스들을 이어붙이면 한 장면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벽에 기울인 채로 방치만 해두어 몰랐던 사실을 눕혀놓고 보니 퍼즐처럼 결합할 수 있었다. 7장 째인데 대충 예상되는 구도는 3x3이다.

그것도 어떤 걸 형상화한 것이냐면 바로 이 성이었다. 성 안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성 밖의 구도를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점이 하늘에서다. 무슨 드론으로 촬영하거나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일일이 재현하고 있었다.

레네는 그림에 재능있는 정도가 아니라 두말 할 것 없이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이 그림들만 봐도 소름이 돋는데 자택에 있을 다른 작품들은 어떤 형식일까. 있다면 팔렸어도 이상하진 않겠다. 혹시나 모를까, 출장까지 하여 떼돈을 벌 수 있는 인맥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옛 친구가 영주의 자식쯤이었다면 다른 인맥도 있는 게 이상하진 않다.




6월 28일


얼떨결에 레네의 집을 알게 되었다. 확증은 아니긴 하다. 다만, 자택 내부자체가 특이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운반장이 병인으로 며칠 자리를 비워둬서 내가 대신 운반을 맡기로 했다. 포에 싸진 고기들을 수레에 차고 넘치게 담아, 아무리 수레라도 힘들었다. 정녕 이걸 혼자서 해야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막상 목적지에 가면 일과가 끝일 거라는 게 정설이라 다행이라 여겼다.

거주 지구라 보이는 곳을 경유했다. 운반지가 그 부근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일부러 레네의 집을 찾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근데, 아무리 안을 안 보고 싶다 하더라도 유리에 코팅이란 걸 모르는 시대에 곁눈질로 봐도 안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들이 쉽사리 포착되었다. 관음증은 아니라서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다반사였다.

문제는 레네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만은 달랐다. 멀리서도 심상치 않은 외형이었다. 다름 아니라 창문으로 보이는 족족 알록달록 했다.

바로 그 집 옆을 지나갔을 때는 색이 나를 미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온 벽이 캔버스나 액자로 가득차서 벽에 기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성에 있는 것처럼 이어지는 작품은 없었지만 그게 아니어서 더욱 문제였다. 다 단일 작품들이라 각자 보지 않고 전체로 보자면 기괴한 장면이었다.

정작 레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확증은 없다. 그래도 위치는 외워두었다. 언젠가 만나러 갈 수도 있는 것을 일단 기억해 두고 있다.




6월 30일


내가 없는 사이 9장 째를 완성한 후 캔버스 거치대를 치워져 있었다. 물감이 든 지게와 함께 같이 치워간 듯헀다.

놀랍게도 어떤 피스든 컨디션 난조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다 하루에 만들어버린 작품 같이 물감의 농도도 비슷했다.

솔직히 이런 작품이면 어떻게든 경매로 해서 거금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만 같긴 하다. 무려 9정이나 되고 각각 단일로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맥락이 있었다. 9장을 각각 나뉘어서 경매를 시키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었다.

상상만으로 만족한다. 상상이 그렇다는 거지 안 할 거다. 너무 배은망덕한 상상이라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기껏 만들어준 선물을 금전으로 바꿔먹는다면 레네는 보나마나 실망할 거다.

아니다. 생각해 보면 화가로 돈을 번다는 이야기는 그림 자체를 상품으로 본다는 소리 아니겠나.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고 있다면 팔아도 된 역시 이건 아니다.




7월 2일


이미 종강했으려나. 쓸 게 없다. 레네도 없어서 그렇다 할 사건이 없다. 무소식이라 좋아해야 하는 거겠지.




7월 3일


어제 말이 씨가 되어 오늘의 열불 나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터졌다, 는 건 정정해서 터지기 직전이라는 걸로.

나비효과를 잊고 있었다. 잊은 게 아니라 인식을 못한 거라도 꽤나 바보 같았다. 아무리 세탁을 했더라도 누명과 함께 실질적인 범죄도 저지르고 왔으니 수배범이 되는 것은 맞았다.

내가 버리고 온 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그 마을에서 시작된 흉조가 나한테 넘어왔다는 게 문제다.

추적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미행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다. 갑자기 도살장에 등장한 추적자, 라고 부르기에는 단순 수사관 같은 행보를 보인 사람은 어떤 이름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한자어 이름 그대로 썼다면 들켰겠지만 가명이란 존재를 모르는지 순수하게 단지 그것만 물어보고 갔다. 정작 그 사건의 장본인이 나는 여기 있었음에도 말이다. 찾는 이유에 대해서 사건 경위라도 알려주었으면 의심 받을 법했으나 행운은 나의 편이었다. 몽타주조차 모른다는 걸 아는 계기이기도 했다.

방치하는 게 좋은 작전이란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나 여기서 제압이란 선택지를 고르면 내가 이 마을에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애초에 누명인 이상 제압이란 선택지를 고르는 것 자체가 오해를 풀 여지조차 없게 만드는 방법이다.

딜레마라면 선택지가 2가지 이상이라도 생각나야 하겠으나 이건 딜레마도 아니었다. 창의력이 부족한 탓이라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반 이상이라도 가면 좋겠다는 게 내 결론이다.




7월 4일


그러고 보면 잊고 있었다. 레네한테 자기소개를 하면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추적자가 레네에게도 찾아갔으면 알아차렸겠다. 나는 이후로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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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1권 (55) 20.07.26 6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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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권 (51) 20.07.20 49 0 13쪽
50 1권 (50) 20.07.18 5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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