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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님의 서재입니다.

쾌적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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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별자리
작품등록일 :
2020.09.14 15:49
최근연재일 :
2020.09.14 16:08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639
추천수 :
20
글자수 :
76,493

작성
20.09.14 15:5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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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에고이스트

DUMMY

황금기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나이 차가 1살 밖에 나지 않았지만 여자친구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선 내가 돈을 모두 부담해야만 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난 여름방학 동안 모든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쏟았다.


하지만 당시 최저 시급은 3500원이 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3천 원조차 주지 않는 곳이 넘쳐났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유원지나 무거운 장비를 나르는 것처럼 몸이 힘들다 못해 고달픈 일을 주로 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정확히는 주말에 한 번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얼굴을 보면서 견뎠다. 함께 영화를 보고, 좋은 곳에 가서 식사를 하고,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등. 다양한 장소에서 추억을 만드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여자친구를 조금 더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행복한 얼굴로 하루 종일 웃음짓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비싼 선물을 샀다.


월급의 반이 넘는 금액이었던 터라 나는 조금이라도 싸게 사고자 온라인 쇼핑을 이용했다. 그러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더니!! 벌써부터 지 애인한테 돈을 다 갖다 받치는 거 보니까 결혼하면 엄마 같은 건 바로 내다 버리겠구나! 이 쌍놈의 호로새끼!"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나는 남은 월급의 반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돈을 받은 어머니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최고로 기뻐하셨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리니까 애인에게 너무 많은 돈을 쓰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중에 남은 돈이 없어졌다. 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사뒀던 선물은 여자친구의 생일에 맞춰 예쁘게 포장해 건네줬다.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난 무척이나 뿌듯했다.


힘들면서도 행복했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대학 기숙사로 가면서 나는 몸이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피로가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대학은 2학기까지만 다니고 자퇴할 생각이었던 터라 난 수강신청을 최대한 편하게 짰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목요일 아침까지만 수업을 들으면 일주일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남는 시간에 알바를 하고 주말엔 이전처럼 데이트를 즐겼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자 정작 게임을 하거나 기숙사 멤버들과 놀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자퇴할 생각이었고, 수업에 나가도 피곤해 잠만 잤던 터라 나는 과감하게 수업을 모두 빠져 버렸다.


그랬더니 푹 자고 일어나서 게임을 하다 기숙사 멤버들과 놀 시간까지 생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2학기가 지나 버릴 정도로 엄청 재밌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끝나고 여지없이 학사경고가 날아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이후 나는 부모님께 군대를 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를 휴학했고, 곧바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에서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지만 상담사는 나와 몇 차례 얘길 나눠보더니 별 이상 없다며 정상 판정을 내렸다.


검사에서 걸리는 게 없었기에 1급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난 공익 판정을 받았다. 눈과 간이 안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현역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여자친구도 계속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순수하게 기뻤다.


신청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갈 수 있다고 들었던 현역과 달리 공익은 자리가 얼마 없는지 대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가장 빠른 시간은 그해 겨울이었고, 나는 거의 1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대학에 있을 때처럼 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여자친구와 만났다. 남는 시간은 비슷한 처지였던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게임 리그와 유럽 축구를 보며 놀았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와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삶이 쭉 이어지기를 바라는 한 편, 공익이 끝난 뒤 직장을 잡고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미래를 그렸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변함없는 붉은 천장을 마주하며 나는 의문에 빠졌다.


암울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대학생이 된 뒤부터는 꿈꾸기만을 기대할 정도로 행복했다. 특히 여자친구와 함께한 시간은 너무 행복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계속 행복하길 바랄 정도였다.


'불행한 운명이었던 걸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기만 했다. 훈련소에서 나와 공익요원으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아버지가 갑작스레 아프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픔을 가족에게 풀었다. 밥을 먹다 밥상을 뒤집어엎고, 밤새 물건을 집어던지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게 일상이 됐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다.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전문대에 들어간 그녀는 용돈을 벌기 위해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나면 집에 가기 위해 항상 버스를 탔다. 여자친구의 사고는 그런 삶이 일상이 될 무렵 일어났다.


버스에서 내린 뒤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차가 굉장한 속도로 돌진해왔던 것이다. 버스에 가려 주위 보지 못했던 그녀는 그대로 치여 차 밑으로 깔려 들어갔고, 무려 20m를 끌려가 자리에서 즉사했다.


신호등은 파란불이었다. 운전자는 음주운전, 신호 위반, 과속 등 운전 시 어길 수 있는 법이란 법은 거의 다 어긴 40대 남자였다. 하지만 남자는 면허만 취소됐을 뿐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 유가족과 2억에 합의를 봤다는 이유였다.


사건은 빠르게 종결됐고, 이제 막 21살이 됐던 여자친구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고 있던 꿈속의 나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다.


눈을 감으면 함께 했던 추억, 같이 그리던 미래, 희망을 안고 나눴던 대화들이 두서없이 수시로 떠올랐다. 그녀의 귀여운 글씨체를 담은 편지, 사귄 지 1년을 기념해 맞췄던 커플링, 첫 알바 월급으로 사줬던 지갑처럼 흔적을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밥도 굶은 채, 눈알이 빠질 것처럼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과 사회는 가혹했다. 아버지는 보기 짜증 난다며 욕설을 퍼부었고, 사회는 휴가를 다 썼으니 얼른 복귀하라며 재촉해댔다. 슬퍼하는 것조차 허락받을 수 없었다.


망가진 기계처럼 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집 해체가 3개월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집도, 사회도, 그냥 모든 게 싫었다. 그래서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다 복무가 끝난 당일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무언가 많은 게 달라지길 바라면서.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어에 대한 조막만 한 자신감은 공항에서 직원과 대화를 하다 박살 났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같은 한국 사람이 알선하는 일자리뿐이었다. 일하고 돈만 벌 수 있다면 어찌 됐든 좋았기에 바로 그 방법을 택했다.


꿈속의 나는 호주에 있는 한국인들과 같이 일하면서 참 많은 일을 보고 겪었다. 인종차별, 마약, 매춘, 도박, 사기 등등. 그중에서 직접 당한 건 인종차별과 사기였다. 일을 해도 손해를 보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않고 서울에 올라가 일을 하겠다고 말하자, 욕설과 함께 지금까지 쓴 대학 등록금을 내놓으란 얘길 들었다. 결국 열심히 일하며 모은 돈 중 30%를 그 자리에서 뜯겼다.


가진 돈이 크게 줄어들면서 월세가 부담이 되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마침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 있던 고등학교 때 친구와 같이 살기로 했다. 나름 잘 대해줬다고 여겼지만, 친구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몇 개월 뒤 뒤통수를 치고 나가버렸다.


새로 잡은 직장에서도 적응에 실패했다. 2시간 동안 전화로 욕을 하거나, 그냥 마음에 안 든다며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 모두 웃는 얼굴로 상대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생일날 전화한 부모님은 이젠 키워준 비용을 내놓으라며 매달 50만 원씩 뜯어갔다.


꿈속의 삶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지.'


버티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둔 뒤 남은 돈과 보증금을 까먹으며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그러면서 밥도 거의 먹지 않아 몸무게도 급격하게 줄고 건강도 계속 나빠졌다. 희망은커녕 절망만 가득한, 살아서 뭐 하나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 역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줄곧 고통받아 많이 지친 상태였다. 누적된 몸의 아픔만큼 마음도 마모되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꿈속의 내가 죽으면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시간이 됐는지 또다시 아픔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번엔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은 여느 때처럼 의지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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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고이스트 20.09.14 30 2 10쪽
» 에고이스트 20.09.14 3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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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에고이스트 20.09.14 33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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