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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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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59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3.01.14 20:44
조회
438
추천
3
글자
7쪽

<6> 하늘과 바다 - 5

소금 민들레



DUMMY

5.


고운과 라우라는 최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도중 위쪽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크게 요동쳤다. 라우라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고운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고운이 라우라를 일으켜 세웠다. 짐작 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말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우유니 혼자서 감당할 수위였으면 혼자 떨어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위층과 달리 널찍한 복도가 나타났다. 고운이 조심히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렸다.

[ 데메테르 중추에 침입자 발생, 방범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

고운은 반사적으로 라우라를 끌었다. 그들 바로 뒤로 양쪽 벽이 열리더니 푸른 광선이 철창처럼 솟아났다. 보호복 표면을 살짝 스친 만으로 녹아들었다. 다음은 천장이 움직였다. 짜부라뜨릴 요량으로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달려!”

두 사람이 기겁하고 달렸다. 발이 느린 라우라가 뒤처졌다. 복도의 끝이 보일 무렵 천장은 두 사람의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허리를 굽혀 달려야 할 만큼 낮아졌다. 이대로는 끝에 다다르기 전에 압사당할 것이었다. 고운이 라우라를 앞으로 밀고 팔과 다리를 펼쳐 천장을 받아냈다. 쿠웅, 하강하던 천장이 일순 정지했다. 그러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고운의 발이 바닥에 구겨지며 패여 들어갔다.

“고운!”

라우라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 가!”

지직거리며 고운의 기계 다리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팔에 심긴 금속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보호복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우라가 허위적 달려 겨우 빠져나갔다.

“고운, 고운!”

고운은 이를 악 물었다. 퍽 소리를 내며 다리가 무릎부터 완전히 뭉개졌다. 지지대가 없어진 고운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고운은 말을 듣지 않는 팔을 끌어 힘겹게 기어 나왔다. 천장이 바닥을 덮었다. 라우라가 새하얗게 질려 벌벌 떨었다.

“어떡해, 고운! 다리……”

“별 거 아냐. 안 아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기계 부위인 팔 다리 자체는 아프지 않았지만 연결 부위에 가해진 충격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넓적다리부와 어깨뼈가 다쳤다. 고운은 너덜거리는 팔을 간신히 움직여 카드키를 라우라에게 내밀었다.

“끝이 머지않았어. 난 여기서 못 움직이니까, 네가 가.”

“시, 싫어…… 무섭단 말야-”

“찡찡대지 마! 박사님이랑 우유니가 뭣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화 내지마아- 갈게, 라우라 갈게.”

라우라가 엉엉 울면서 페르세포네를 받아들고 떠났다. 뒷모습을 전송한 고운은 억지로 몸을 뒤집었다. 하얀 불빛이 내리는 천장을 흐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서 팔로 바이저를 가렸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팔이 눈에 들어왔다. 기운이 빠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박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온통 허버트의 잔재였다. 허버트를 따라왔고, 허버트의 명을 받은 우유니에게 보호받고, 허버트가 마련한 계획을 손에 쥐고, 허버트가 만들어낸 팔과 다리로 생명을 구하고, 허버트의 딸인 라우라를 보냈고, 허버트의 죄의 증거인 데메테르를 정지시킬 것이었다.

문득 거기에 박고운의 의지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 새로운 삶을 안겨준 존경하는 사람, 배신감, 반감. 사실은 용서하고 싶었고, 용서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고운은 가족이 없었다. 고운의 부모는 고운이 팔다리 없는 아이여서 버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몸으로 기어 다니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중 허버트의 연구소 자선으로 고운은 팔과 다리를 얻었다. 고운에게는 얼굴밖에 모르는 허버트가 일생일대 감사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던 셈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저 사람에게 보답하겠다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제길. 다 갚은 걸로 해요. 더는 부탁하지 마세요.”

고운은 발소리를 들었다. 고통으로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고운.”

친근한 목소리가 들어 팔을 치웠다. 눈부신 빛을 등지고 허버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허버트가 아니었다.

“라우라?”

“고운-”

정신이 확 깼다.

“뭐야! 왜 돌아왔어?”

라우라가 고운의 양 어깨를 팔로 걸고 낑낑대며 끌었다.

“고운은 같이 가야해. 라우라랑 같이 가야해.”

“임마! 위험해! 그냥 놔두고 가!”

“싫어. 싫어! 라우라랑 같이 가!”

무거운 고운의 몸을 라우라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끌었다. 고운의 없어진 다리를 보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미안해, 라우라가 다치게 했어. 아프게 했어. 미안해, 고운. 미안해.”

“……”

“아빠 갔어. 우유니도 갔어. 라우라 혼자 싫어. 라우라는, 아빠 좋아해. 엄마 좋아해. 우유니 좋아해. 고운 좋아해.”

라우라의 팔에 힘이 빠져 뒤로 나뒹굴었다. 꿋꿋이 다시 일어나서 끌었다. 고운은 통곡하고 싶었다.

“근데 다 라우라만 두고 갔어. 라우라가, 가지 말라고 했단 말야. 근데 갔어. 그러니까, 라우라 이제는 같이 갈래. 같이 갈 거야! 절대 안 놓을 거야!”

“라우라……”

“쓸쓸한 거 싫어. 고운도 혼자면 싫잖아. 그치, 그렇지?”

라우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하지만 고운을 잡은 손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라우라가 잡은 곳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고운은 울음을 참고 애써 웃었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라우라의 목을 끌어안았다.

라우라의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깊이깊이 박혀서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귀찮고 도움이 안 되는 이상한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이서 고운을 지탱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함께 가자고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고 온몸으로 고운을 안아주었다.

허버트에게, 케인에게, 우유니에게 라우라는 특별한 존재였다. 사랑하는 딸로, 순수한 친구로, 안드로이드를 그 이상으로 행동하게 하는 존재로, 모든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고운에게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키고 함께 살아갈 존재였다.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운이 라우라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고 웃었다.

“고마워. 라우라. 나도 박사님하고 우유니 좋아해. 널 좋아해.”

“좋아해. 라우라 고운 너무너무 좋아해-”

“같이 가자. 꼭 살아남자.”

“응!”

고운은 양 팔의 팔꿈치를 디뎌 앞으로 기어갔다. 한쪽 팔은 라우라가 잡아주었다. 느린 속도로 조금씩 기어가, 데메테르의 중추에 도착했다.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믿고 믿으며 살고 싶다. 너무도 쉽게 죽는 몸뚱이라도, 오늘내일 비바람에 쓸려 죽더라도, 그래도 더 살아가고 싶다. 그 의지를 향해 고운과 라우라가 마지막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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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6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3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2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0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0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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