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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84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30 01:10
조회
597
추천
2
글자
11쪽

<5> 하이퍼케인 - 8

소금 민들레



DUMMY

8.


방공호의 생존자들은 우유니가 설명한 두 개의 안으로 논의했다. 고운과 라우라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고 케인은 자리를 채우고 있었지만,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아이작을 포함한 8명의 사람만이 모든 결정에 앞장섰다. 2주하고도 사흘 만에 의견이 한데 모아졌다. 아이작이 우유니가 충전상태로 들어간 틈을 타 고운을 불러 앉혔다. 고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래서야 감시받는 죄수와 다름없다. 고운은 넌더리를 내고 아이작의 말을 기다렸다. 아이작이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고운을 흘겨보았다.

“그간 반성은 했느냐?”

“반성할 일이 있어야 하던가 하지.”

“아직 정신을 못차렸구만.”

“정신 차릴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야.”

“그 기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동안 고운은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줄곧 생각했다. 모든 정황을 아무 사고 없이 해결하려면 아이작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당한 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방공호 내의 사람을 모두 죽여 버리는 방법도 생각했다. 실지로 생존자들은 고운이 물리적 위해를 끼칠 가능성을 가장 경계했다. 그러나 고운은 허버트의 의도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고, 인간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자신의 앞을 막을 우유니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넌 지금 우리를 죽이고 싶을 거야, 그렇지?”

“이젠 독심술까지 부릴 생각인가? 할 말 있으면 빨리하라고.”

“그렇게 시간을 줬는데도 거 참. 귓구멍 파고 잘 들어라.”

아이작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우린 하이퍼케인이 지나가기 기다리고, 상황을 봐서 다음 방공호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더 컴퓨터를 정지시키는 안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어 보인단 말이지.”

“뭘 어쩌고 싶은데?”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본다, 이 말이야. 그러니……”

고운은 아이작의 얼굴에 피어나는 음흉한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 일을 네게 맡기고자 한다.”

“……뭐?”

“박사는 마더 컴퓨터를 정지하는 일을 최종 목표로 여기까지 왔다지? 박사가 네게만 부탁했다는 건 마더 컴퓨터 일을 네가 해주길 바라서였기 때문이지 않겠어? 그러니 그 일은 네가 함이 마땅하지. 물론 너 혼자.”

몸이 떨렸다. 아이작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뼈에 사무쳤다. 고운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칼날이 됐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우유니에게 들었다면 데메테르로 향하는 여정의 위험성도 분명히 알 터였다. 알면서도 고운에게 혼자 죽으러 가라 했다. 비겁함에 치가 떨렸다. 아이작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방향으로 반동분자인 고운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이 비겁한 인간들! 죽이고 싶으면 그냥 여기서 죽이지 무슨 생각이야?”

“죽이고 싶다니, 그럴 리가 있느냐. 단지 우리는 네가 잘 해주기를 믿고 있단다. 네가 승전보를 안고 돌아오길 기다려주마.”

“닥쳐!”

고운이 달려들어 아이작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운의 팔과 다리를 붙들고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기계 팔과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운이 아이작의 목을 졸랐다. 컥컥 대며 아이작이 버둥거렸다.

“사람을 이딴 식으로 우롱해?”

“이거 놔……!”

“박사님이 멍청했어! 댁 같은 인간들을 끌고 여기까지 오다니, 쓰레기 같은 놈들!”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 폭발했다. 고운을 말리려던 사람들이 고운의 머리와 등을 있는 힘껏 치고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아이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질식했다. 고운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흘렀다. 고운은 아이작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케인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고운의 팔에 매달리며 울며 소리쳤다.

“고운! 고운! 제발 그만해! 우리 아버지 살려줘. 응? 제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는 꼼짝도 않던 고운이 케인의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나, 나는 아버지 없으면 안 돼. 제발…… 용서해줘. 살려줘……”

“케인 너, 잘도 그딴 소릴 나불거려?”

“미안해. 미안해! 차라리 날 죽여. 아버지는 살려줘. 응?”

고운은 크게 욕을 내뱉고 아이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람들이 처치를 시작했다. 고운은 뒤늦게 맞은 곳의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케인이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미안해.”

“네 사과 따위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미안……”

“닥쳐! 나 건드리지 마!”

풀리지 않는 분을 노성으로 대신하고 고운이 방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고운에 대해 악담을 퍼부으며 생명을 보존한 아이작을 의무실로 옮겼다. 고운의 방으로 가서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사람들의 앞을 케인이 가로막고 사정했다. 그들은 아이작의 아들인 케인의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고운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의식을 잃었다. 케인이 우유니의 충전이 끝나기를 기다려 치료를 부탁했다. 우유니는 소란을 피해 숨어 있던 라우라와 함께 고운을 찾았다. 라우라는 고운이 죽는 줄 알고 자지러졌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가벼운 외상과 뇌진탕이었다. 우유니가 치료를 마치자 금세 깨어났다.

이대로는 안 된다. 고운은 정신이 들고서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고운은 천장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들을 죽일 수도 없었고, 굴복할 생각은 더 없었다. 남아있는 길은? 큰 위험이 찾아와서 사람들을 구해내고 감사를 받는다는 영화 같은 일도 생각했다가 자괴감만 느꼈다. 결론은? 그들과 헤어져 떠나는 길이 최선이었다.

떠난다면 어떤가, 그대로 죽어야만 하는가? 아이작이 우유니를 내줄 리 없었다. 우유니는 어느 쪽에서도 필요한 존재였다. 라우라는 어떤가? 고운이 혼자 빠져버리면, 그들이 라우라를 잘 돌봐 줄지 의문이었다. 허버트에 대한 적대가 끝도 없는데 허버트의 딸인 라우라를 별개로 생각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죽겠군.”

“고운 아파?”

“아니. 라우라.”

“응.”

“만약에 내가, 여기서 혼자 나가면 넌 어쩔래.”

라우라는 대답 대신 고운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라우라 혼자 두지 마. 무서워. 무서워.”

“나랑 같이 가면 위험한데. 죽을지도 모르는데?”

“갈 거야. 라우라는 고운 따라갈 거야. 여기 무섭단 말야!”

뭐가 그리 무섭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무섭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케인을 떠올렸다. 케인도 무섭다고 했다. 고운의 팔을 잡은 케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무서워했다. 고운이 라우라의 등을 어색하게 툭툭 쳤다. 아파했다. 딴에는 위로하고자 했는데 아파하자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라우라가 고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라우라랑, 고운이랑, 우유니랑 같이 가면 안 돼?”

“우유니는 못 가.”

“왜?”

“그야, 저들이 우유니를 보내지 않을…… 잠깐.”

퍼뜩 무언가가 고운의 뇌리를 스쳤다. 고운은 문가에 서 있는 우유니를 돌아보고 물었다.

“너, 혹시 박사님이 나와 라우라를 최우선으로 지키라고 내린 명령, 사람들한테 말 했어?”

“아니오. 그 부분은 박사님께서 오로지 고운님께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혼자 방공호에서 쫓겨나면 넌 어떻게 행동하지?”

“고운님과 라우라님 두 분이 함께 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인간이 있는 방공호에 남게 됩니다.”

“박사님의 명령은 ‘나와 라우라가 함께’가 전제되어야만 발동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버트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단 말인가? 의도를 알 길은 없으나, 지금 이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운은 계산을 마쳤다.

“그래. 라우라. 같이 가자.”

“정말?”

“그러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우유니, 너도.”

고운이 라우라와 우유니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아이작이 깨어나고 고운은 자진해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아이작은 돌변한 고운의 태도를 미심쩍어했지만 큰 의심은 하지 않았다.

“라우라도 갈 거야! 고운 따라갈 거야!”

라우라가 고운을 따라가겠답시고 떼를 썼다. 말리던 사람들은 라우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포기했다. 아이작은 오히려 호재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정신도 온전치 못한 계집아이를(그것도 박사의 딸을) 돌보는 일이 탐탁할 리 없었다. 못이기는 척 그러라고 허락했다. 더욱이 라우라는 우유니를 신경 쓰지 않고 고운만을 따르겠다고 했다. 우유니가 혹여 라우라를 위한답시고 돌발 행동을 할 여지는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무엇보다 인간의 의사를 존중했으므로.

일주일 뒤 비 오는 새벽, 고운은 라우라와 함께 방공호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이작은 우유니의 충전 시간을 교묘하게 골라 그들을 내보냈다. 가장 안쪽 입구에서 아이작이 고운에게 악수를 청했다. 기쁨으로 만연한 표정이었다.

“그럼 고운. 무사하길 빈다. 일이 잘 끝나면 다시 돌아오렴.”

“여러분도 무사하기를 바라죠.”

“라우라도 조심해라.”

“응- 빠이빠이-”

가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고운과 라우라는 방공호를 떠났다.

“이제 속이 다 시원하군!”

아이작이 껄껄대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깊게 동감했다.

“꼴도 보기 싫은 것들이 사라지니 막힌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한 이틀 버티겠나?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잔인한 말을 여과 없이 내뱉는 사람들에게 케인만큼은 호응하지 못했다. 약자의 처지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나머지 모두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케인은 자신이 발을 붙이고 서 있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제 푹 쉽시다. 쉬고 일어나서 안드로이드가 깨어나거든 다음 방공호까지의 여로를 잡아보죠.”

아이작의 말에 따라 생존자들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쉬러 갔다. 케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건 아니에요. 이건 아니라구요.”

“더 말 말거라.”

“아버지!”

“너도 저 녀석들은 이제 잊어버려. 넌 이 아버지만 믿고 있으면 된다. 만에 하나라도 놈들을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호통을 들은 케인은 크게 상심하고 주눅이 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다가도 고운과 라우라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꿈을 꾸고 깨기를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해서 할 수 없었다.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고운과 라우라가 떠난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날, 우유니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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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2.11.30 10:55
    No. 1

    따라갔군요. 하하 속 시원하네요. 못된 인간들.. 고운일행의 길이 평탄치는 않겠지만 저런 악의 속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낫지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RALL
    작성일
    12.12.07 05:43
    No. 2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고 살아가는 일이 정말정말 힘들다는 걸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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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51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2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5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8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3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5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4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1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1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7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4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7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6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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