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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66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13 00:08
조회
754
추천
4
글자
9쪽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소금 민들레



DUMMY

4.


일곱째 날 밤의 일로 생존자들은 초조했다. 피곤함에 지쳤지만 동이 트기 전에 서둘러 움직였다. 사람들 간 거리를 바짝 좁혀 걸었다. 허버트의 요청에 따라 이번에도 고운이 선두에서 걸었다. 평소보다 모래 먼지가 자욱해 시야가 좁았다.

“팍팍하군. 젠장.”

평소보다 헬멧 바이저에 먼지가 많이 묻어났다. 몇 분 간격으로 쓸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유가 사라져 조급했으나 진행은 눈에 띄게 더뎠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자연히 걸음도 느려졌다. 고운은 먼저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뒤따르는 사람들과 걸음을 맞춰야만 했다. 답답했다. 답답하니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쯤 해 둬. 다들 참고 가고 있잖아.”

고운의 바로 뒤를 따르던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고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케인과 몸을 기대어 걷는 케인과 닮은 남자였다. 케인이 당황하며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케인의 아버지 아이작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고운의 시선에 맞섰다.

“자넨 너무 불만이 많아. 모두 다 힘들다고. 다 같이 도와가며 의지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행동거지냐?”

“훈계는 집어치우시죠, 아저씨.”

“버르장머리 없기는!”

“뭐라고?”

“아버지. 그만 하세요. 고운. 미안해. 아버지도 본의가……”

예민해져있는 두 사람에게 케인의 만류는 들리지 않았다.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 줄 아느냐? 서너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멋대로 지껄이지 마! 나잇살 좀 먹었다고 으스대기는.”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야?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박사님께 대들고, 라우라를 괴롭힐 때 알아봤다. 이 못돼먹은 녀석!”

“보자보자 하니까……!”

두 사람의 언쟁으로 행군이 멈췄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둘러쌌다. 고운은 곧이라도 덤벼들 태세로 으르렁거렸다. 아이작이 해보란 듯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덤벼드는 꼴이라니.”

“고운, 그만둬. 아저씨 말이 맞아. 네가 잘못했어.”

“사과해.”

사람들이 아이작 편을 들어주고 나섰다. 아이작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더 언성을 높였다.

“봐라, 너만 조용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앞으로는 조용하겠다고 약속해!”

“그딴 약속 누가 할까 봐? 치사하게 쪽수로 사람을 비난하는 주제에!”

“이 녀석이 반성할 줄은 모르고 갈수록 더하는군.”

“닥쳐!”

고운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뒤따라오던 허버트가 전열의 소란을 보고 서둘러 뛰어왔다. 우유니와 라우라도 뒤따랐다.

“사람들- 고운 괴롭힌다! 고운 괴롭힌다!”

허버트보다 빠르게 라우라가 끼어들어 고운의 허리를 꽉 붙들어 안았다. 고운이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뭐, 뭐야! 이거 놔!”

“고운 왜 괴롭혀! 괴롭히지 마! 고운 착하단 말이야!”

“야! 내 말 안 들려?”

“아저씨 미워! 왜 고운 나쁘게 말해? 고운 바보지만 착해! 라우라 알아.”

“누가 바보야! 떨어지라니깐!”

아이작이 주춤했다. 라우라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허버트가 뒤늦게 가담했다. 우유니는 라우라가 들러붙은 고운을 가뿐하게 들어 세웠다.

“다들 힘든데 여기서 이렇게 싸워야 되겠습니까.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박사님. 저 녀석이 박사님과 라우라에게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아시잖습니까.”

“고운에게 악의는 없어요. 정말로 나쁜 청년이었다면 여기까지 함께 오지도, 이 힘겨운 행군의 선두에 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제 힘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덕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뭘 했다고요. 박사님이 하자는 대로 했으니 살 수 있었지요.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미안하다, 고운.”

허버트의 말에 고분고분 몸을 낮추고, 아이작은 활짝 웃으며 고운에게 사과했다. 고운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그렇게나 기세등등하더니 허버트와 라우라가 편을 들어주지 않자 태도를 바꿔버렸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토해내려다, 아이작의 뒤에서 애처롭게 서 있는 케인을 보고 꾹 참았다. 고운을 비난하던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흥분했다느니, 어른답지 못했다느니 하며 아이작을 비난했다. 아이작은 머쓱하게 사람들에게도 사과했다. 고운은 새벽에 케인의 말에서 느꼈던 불쾌한 기분을 지금도 느꼈다.

“자. 갑시다.”

사람들이 다시 삼삼오오 모여 걷기 시작했다. 라우라는 심통난 얼굴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운을 풀어주었다. 고운은 못 박힌 듯이 서 있다가 라우라의 헬멧을 탁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쳤다.

“아야- 고운이 라우라 때린다.”

“다신 그러지 마.”

“그치만 고운 괴롭혔는 걸. 고운 잘못한 거 없는데. 그치 박사님, 그치 우유니?”

라우라가 동의를 구하자 허버트와 우유니가 수긍했다. 고운은 입술을 꽉 깨물고 더 대꾸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으로 허버트를 바라보았다. 허버트는 고운의 시선을 부드럽게 마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 고운- 고우운-”

고운이 다시 맨 앞으로 가버렸다. 따라가려는 라우라를 허버트가 막았다. 행군이 이어지는 동안 고운은 부쩍 말이 없어졌다. 성질을 부리는 횟수도 줄었다. 아이작은 약발이 들었다고 의기양양해했다. 케인은 고통스러웠다.


허버트와 걸음을 맞춰 걷던 우유니가 물었다.

“별에서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자네 판단은 어떤가?”

“현재로서는 명확한 기준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버트는 사람들을 살펴보라 지시했다. 우유니는 천천히 각기 다른 생존자를 분류했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인종. 거기에서 멈췄다. 남녀노소라는 최소한의 기준만 들어맞을 뿐, 어떤 공통점도 보이지 않았다. 우유니가 어려워하자 허버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고운.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 양팔과 다리가 기계라네. 저 아이는 라우라. 보다시피 정신이 성장하지 못했지. 아까 고운을 혼냈던 남자는 아이작. 선천적으로 장기가 기형이라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네. 그 아들 케인. 자폐증을 앓고 있어. 헉슬리. 백혈병을 앓았지. 지금은 완치됐다고 하더군. 엘렌. 청각 장애로 태어났고……”

우유니는 허버트가 불러주는 특징을 모두 기억했다.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병력이 있는 사람들을 남겨둔 겁니까?”

“떠난 사람들은 남을 사람들을 ‘열성인자’라고 말했다네. 혹은 ‘별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했지.”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이 아프고 제정신이 아닌 건, 파괴적 진화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자연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열등한 존재라는 의미네.”

망가진 환경은 극단적인 기후를 만들었다. 기온이 높아지며 바다가 끓었다. 이산화탄소와 독가스가 대기 중에 퍼져 나갔다. 지상에 발붙인 생물들이 사라졌다. 학자들이 2억 5천만 년 뒤에나 올 것이라 예상한 생태 절멸이 300년도 채 되지 않아 찾아왔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구분해서 무슨 이득을 얻었습니까?”

우유니의 어조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인류는 생존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말을 맞이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별을 버린다.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간다. 그렇게 방주 계획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모든 인류를 우주로 보낼 수는 없었어.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가 생겼지. 무슨 이득을 얻었느냐고? 책임. 책임의 회피. 정당성을 얻었다네. ‘이 별이 이렇게 된 이유는 열등한 존재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선택을 받은 완전한 우성인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우리가 이 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암적 존재인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류만이 모든 생명체 중 파괴적 진화를 일삼는 이들이다. 인류가 사라진다면 자연 또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우유니는 말이 없었다.

“인류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명체이지.”

허버트 역시 그 말을 끝으로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이제 푸른 하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다 역시 푸르지 않았다. 끝도 없이 칙칙한 색이 온 세상을 지배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진즉 흥미를 잃은 라우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풍경과 맞지 않는 맑고 청아한 음색이었다.

세계는 종말의 구덩이였고, 생존자들은 그 가운데에 있었다. 동이 트고 여전히 붉고 뜨거운 여덟째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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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ment ' 3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2.11.13 10:01
    No. 1

    구분하는 순간 차별이 생겨난다고 하죠..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LL
    작성일
    12.11.14 00:13
    No. 2

    지드 님 / 맞아요.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려고 다른 것과 자신을 구분짓지만, 그 구분에서 차별 또한 생겨났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저드리스
    작성일
    13.02.07 18:43
    No. 3

    상대적인 것. 열성과 우성에 대해 기준점을 세우는 순간 차별은... 어쩔수없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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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7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4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3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1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1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5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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