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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65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21 13:28
조회
523
추천
3
글자
10쪽

<4> 마지막 날 - 5

소금 민들레



DUMMY

5.


우유니의 예상대로 허버트와 생존자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추격자는 허버트가 올 길을 미리 가로질러 왔다. 양옆은 높은 암벽이었다. 얼굴이 뭉개진 안드로이드가 외길을 가로막았다. 맞닥뜨리자마자 쏜 총에 생존자 한 사람이 가슴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허버트가 사람들을 끌어 추격자의 시야가 닿지 않는 언덕을 엄폐 삼았다. 쓰러진 사람은 이미 죽었다.

허버트 편에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덤벼들진 않았지만, 그들은 30분 째 움직이지 못했다. 피신한 언덕 뒤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포착되면 총탄이 날아왔다. 허버트는 현 상황에서 가장 최적의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싸웁시다. 이렇게 숨어만 있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 길을 넘어가려면 안드로이드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싸우자는 말에 떨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못한다고 수선을 부렸다.

“저런 무기를 든 놈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사람이 죽었어요!”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합니까? 추격자가 가진 무기도 무한히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닙니다.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유도하면 약점이 드러날 겁니다. 제발 용기를 냅시다. 우리가 살려면 여기를 꼭 통과해야 합니다.”

서로 눈치를 보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는 아이작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도망과 싸움은 달랐다. 스물다섯 명이 스무 명이 되고, 스무 명이 열 명이 됐다. 열 명이 또다시 줄어 아홉 명이 되자 이제는 자신의 목숨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허버트는 암담하고 답답했다. 그들을 비난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더 답답했다. 누구나 목숨은 소중하다.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험에서 피하고 싶은 욕망은 당연했다. 용기와 치기를 더 엄격하게 잣대를 재고 구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리하게 부탁하지 않겠소. 다만, 계획을 듣고서 결정해 주십시오.”

허버트에게는 그들의 참가를 강요할 권리가 없었다.

“안드로이드 하나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면 총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총탄을 함부로 남발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저격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총을 쓰게 되겠지요. 제가 미끼가 될 테니, 놈이 움직이면……”

허버트는 주변에 널린 돌을 주워들어 보였다.

“이걸 놈에게 던져서 주위를 분산시켜 주십시오. 이 자리에서. 그리고 제가 놈을 붙잡으면 모두 나와서 포박하는 겁니다. 그럼 괜찮습니까?”

여전히 사람들은 쉽게 따르지 못했다. 그들에게 박힌 두려움의 뿌리는 깊고 단단했다. 허버트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부탁합니다. 이 이상 좋은 방책이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날 따라주십시오.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가만히 앉아 죽을 겁니까?”

종국에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생존자들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괜찮겠습니까?”

아이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허버트는 대답 대신 아이작의 손에 돌을 쥐여주었다. 평소와 달리 아이작은 허버트를 말리지 않았다. 허버트가 할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 청년들은 죽거나 실종됐다. 가장 몸이 성하고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허버트뿐 이었다. 아이작은 최소한의 죄책감으로 자진해서 돌을 줍고 사람들에게 쥐여주었다.


준비가 끝났다. 허버트는 숨을 고르고 주먹 크기의 돌을 양손에 각각 들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바위를 눈여겨보고, 왼손의 돌을 언덕 너머로 던졌다. 연이어 오른손의 돌을 첫 번째 돌의 반대 방향으로 던졌다. 첫 번째 돌은 아무 이상 없이 굴러갔고, 두 번째 돌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허버트는 첫 번째 돌을 던진 방향으로 몸을 굴렀다. 뒤늦게 허버트가 구른 바닥으로 빛이 날아들었다. 허버트는 보아둔 바위를 향해 달렸다.

안드로이드의 반응이 더 빨랐다. 총탄이 옆구리를 꿰뚫었다. 화끈거리며 고통이 엄습했다. 허버트는 이를 악물고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안드로이드가 허버트를 향해 달려들 찰나, 아이작을 필두로 생존자들이 언덕 뒤에서 무더기로 돌을 던져댔다.

날아드는 돌을 피하려고 몸을 트는 사이, 허버트는 안드로이드에게 접근했다. 몸통에 머리를 받아 넘어트렸다. 총을 든 팔을 양손으로 꽉 붙들고 몸으로 눌렀다. 안드로이드는 반대편 팔과 다리로 허버트의 등과 다리를 세게 쳤다. 허버트가 안드로이드를 붙잡은 채로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어서! 어서 이놈을!”

허버트가 소리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춤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총은 안드로이드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보통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안드로이드의 힘을 허버트가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세는 금방 역전되어 안드로이드는 허버트의 팔을 붙잡아 비틀었다.

“바, 박사님!”

그제야 사태의 위중함을 알고 아이작이 일어섰지만, 때는 늦었다. 와드득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허버트의 오른팔이 부러졌다. 단발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소리를 듣고서 용기를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어난 아이작도 뻣뻣하게 굳었다. 안드로이드가 일어나 허버트에게 다가갔고, 이번에는 목을 꺾을 요량으로 허버트의 헬멧을 벗겼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이작과 사람들 뒤에서 푸른 광선이 지나가 안드로이드의 이마를 관통했다. 연이어 어깨와 몸통에 맞았다. 안드로이드가 작동을 멈췄다. 생존자들 뒤로 총을 든 우유니가 나타났다. 우유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허버트에게 다가가 서둘러 헬멧을 다시 씌웠다. 허버트의 팔은 팔꿈치 아래쪽이 토막 난 것처럼 부러졌다. 상태를 확인하고 우유니는 처치를 시작했다.

안드로이드의 팔을 뽑아다 부목 삼고, 죽은 사람의 보호복을 벗겨 찢은 뒤 단단히 묶었다. 문제는 총에 맞은 상처였다. 옆구리의 상처는 무척 깊어, 처치를 하는 동안 허버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어떤가?”

아이작이 물었다. 우유니는 처치를 마치고 허버트를 등에 업었다. 남은 보호복으로 몸에 단단히 묶었다.

“좋지 않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우유니는 앞장서서 걸었다. 아이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혼란스러워하다, 다른 사람들을 챙겨 뒤따랐다. 우유니를 따라가며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낼 수 없었다. 허버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우유니는 헤매지 않고 길을 찾아갔다. 험준한 산행이었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정상을 넘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허버트는 그 때 정신을 차렸다. 우유니가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조금만 견디십시오.”

허버트가 깨어나자 아이작이 울먹이며 냉큼 다가왔다.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다리가, 이, 이놈의 몸뚱이가 움직이질 않아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책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허버트가 너그럽게 말했다.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아이작은 울면서 사과했다. 다른 생존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허버트는 다른 무엇보다 슬픔을 느꼈다.

“두 시간 정도 내려가면 산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고운 님과 케인 님과 라우라 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듣던 중 기쁜 소식이었다.

“케인이, 케인이 살아있다고! 어디 다친 데는 없던가? 응? 어떻던가!”

“무사하십니다. 다친 곳도 없으셨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무사한가?”

“네. 오후 5시까지 기다리고 더 늦어지면 먼저 방공호로 가시라고 했습니다.”

아이작이 펄쩍 뛰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허버트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그저 그러겠다고 했다.

허버트 일행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간은 5시를 넘겨 6시에 가까웠다. 날이 금세 어두워졌고 비바람도 거셌다. 그러나 저편의 보호복 불빛 세 개는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우유-니- 박사님- 여기- 여기!”

라우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사히 산을 넘은 열두 명의 사람들이 재회를 기뻐했다. 아이작은 케인을 끌어안고 세상이 떠나가랴 울었다. 우유니의 등에서 내려온 허버트도 고통을 참고 라우라를 꼭 안았다.

“박사님, 왜 울어? 라우라 앞으로 말 잘 들을게, 먼저 가지마. 응?”

“그래.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마.”

멀찍이서 멀뚱하게 서 있던 고운을 허버트가 불렀다.

“고맙네, 고운.”

“제가 뭐한 게 있습니까. 그나저나 그게 무슨 꼴입니까?”

고운이 날카롭게 물었다.

“추격자를 피하는 도중에 사고로 다쳤어. 별일 아니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신경 쓰지 말게나. 그보다도 빨리 방공호로 가야지.”

기쁨에 겨워하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허버트의 부상에 대해 묻자 무겁게 가라앉았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고운은 더 캐묻지 않았다. 허버트의 제안대로 이동이 시급했다. 우유니는 허버트를 업고 라우라의 손을 잡았다. 아이작은 케인을 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행방불명된 마지막 한 사람은 끝내 합류하지 못했다. 열 두 명과 안드로이드 한 대. 초라한 행렬이었다. 새카만 어둠이 찾아오고 비바람에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었다. 4시간을 더 걸어 방공호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방공호의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 겹의 문을 모두 통과하고 굳건하게 잠갔을 때, 비도, 바람도 더는 들어오지 않았을 때, 전등의 불빛이 환하게 비추었을 때, 보호복과 헬멧을 벗을 수 있었을 때.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고운마저도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한참을 울었다. 우유니만이 아무런 변화 없이 생존자들의 우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열째 날, 25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하며 스물네 명의 중 열두 명이 살아남았다. 다음 날 새벽부터 하늘의 진노가 지상을 거침없이 강타했다. 하이퍼케인이 왔다.


작가의말

어쩐지 조아라 스럽기도 하고 다술 스럽기도 하고... ㅎㅎ

몇 번 만지작 거리니 괜찮긴 한데 좀 더 지켜봐야겠네요. :)

다시 뵈어서 반갑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2.11.22 09:57
    No. 1

    허버트의 계획은 경솔하네요.. 미끼를 좀 더 던져서 총알을 다 소진시키는 방향이 좋지 않았을까요.. ㅠㅠ 리뉴얼에 적응하는건 좀더 걸리겠어요~ 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RALL
    작성일
    12.11.26 02:25
    No. 2

    여러모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변수를 무시하진 못하겠지요. ㅎㅎ 우유니가 하다못해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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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7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4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3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1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1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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