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풀때기밭 곡식창고

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61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14 00:12
조회
690
추천
3
글자
10쪽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소금 민들레



DUMMY

3.


아이작은 고운과 친하게 지내는 아들이 불만이었다. 어제 시비가 있었을 때 허버트의 만류로 물러나긴 했지만 용서하지는 않았다. 아이작의 기준에서 고운은 케인이 사귀어선 안 되는 나쁜 친구였다. 매사 거칠고, 성질을 부리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사회성 좋지 않고 성격 나쁜 친구를 사귀려는데 그를 용인할까? 더욱이 고운이 밉상인 건 허버트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 문제만 아니었다면, 고운의 거친 성미 정도는 눈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케인. 저놈과 가까이 지내지 마.”

아이작이 말했다. 케인은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앞서 걷는 고운을 책망했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 누구 덕에 지금까지 살았는지 정말 모르나?”

“아버지. 고운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본성이 뭐가 중요하느냐? 저놈이 박사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버젓이 하는데. 박사님께서 마음이 넓은 분이시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우리도 진작 사막 모래 속에 파묻혔을 거야. 잘 들어 두어라.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박사님이 꼭 필요하다. 입이 닳도록 말했어. 그러니 너는 절대 저놈처럼 밉보일 짓을 하면 안 된다. 알겠지?”

“예. 네. 네. 아버지.”

케인은 창백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비틀거렸다. 아이작이 왜 또 그러느냐며 타박하고 케인을 부축했다.

오후에 접어들며 비가 내렸다. 보호복 필터로 걸러져 들어오는 공기에 습기가 가득 찼다. 아직 기온이 완전히 내려가지 않아 후덥지근하고 꿉꿉했다. 모래가 젖어 걸음이 무거웠다. 한참을 걷다 중간 열의 한 사람이 쓰러졌고, 일어서지 못했다. 허버트가 상태를 살폈다. 평소 심장과 기관지가 좋지 않은 노인이었다. 그는 한참을 켈룩거리더니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졸도했다. 허버트가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을 시도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낙오되고, 생존자는 열아홉 명이 되었다.

시신을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허버트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의 시신을 버려두기로 했다.

“조금만 더 버티지……”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거나 애통해하는 사람은 라우라 뿐이었다. 라우라는 콧물까지 흘리며 울었고,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간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할부지, 할부지- 할부지이-”

깨어나지 않는 노인의 옆에 주저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버트가 달래다 못해 우유니에게 부탁했다. 우유니가 라우라를 억지로 안아 들었다. 싫다고 버둥거려도 끄떡없었다. 이내 지쳐 우유니의 어깨에 늘어졌다. 잠깐의 애도를 끝으로 다시 전진했다. 여기까지 오며 숱한 죽음을 맛본 사람들이었다. 죽음을 대할 때마다 다음에는 자신이 주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먹구름이 가득해 낮이었는데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늦은 오후 무렵에는 바닥이 딱딱해졌다. 푹푹 파이던 모래가 사라지고 질척한 흙탕물이 밟혔다. 사막을 벗어나자 단단한 지대가 펼쳐졌다. 모래가 거의 밟히지 않게 되고 사막이 저 뒤편으로 사라질 무렵에야, 생존자들은 지옥 같은 사막을 벗어났다는 기쁨에 젖었다.

앞쪽 멀리 낮은 산세가 보였다. 허버트는 그곳을 가리켰다.

“저 산을 넘으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목표가 바로 눈에 보이자 안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고 허버트는 우유니와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확인했다.

낮은 산이라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산행할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가파르고 거친 암벽의 산이었다. 비까지 내리니 산을 그대로 통과하기는 불가능했다. 우회로가 필요했다. 허버트가 우유니에게 물었다.

“이 일대 지형 정보가 있나?”

“죄송합니다. 제게 내장된 지리정보는 사막이 고원이었던 때의 정보입니다. 현재처럼 지형 변화가 심한 경우 대략적인 프로파일링만 가능합니다.”

“곤란하군.”

“허락하신다면 지금부터 앞질러 가서 지형 정보를 입수하겠습니다.”

“위험하진 않겠나?”

“큰 지장은 없습니다.”

허버트는 고민에 빠졌다. 현재의 난항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면 우유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보내야했다. 우유니가 없어질 경우, 혹여나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했다. 우유니에게 의존하는 것. 정보, 체력, 감지능력, 추격자에 대한 대비, 그리고 라우라. 모두 중요했다.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제까지의 행군에 우유니의 기여는 고작 며칠이었다. 허버트 자신이 예상하고 우유니를 가동시켰지만,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안정감이 이렇게나 차이가 났다. 새삼 놀라웠다. 우유니가 목숨을 구한 적 있기에 체감 상 더 크게 다가왔다. 허버트는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상황을 생존자들에게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생존자들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박사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아이작이 말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아이작의 말을 따라 했다. 허버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고운을 바라보았다. 고운은 여전히 퉁명스럽고 거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안드로이드 없이 왔던 길 아니었습니까. 덤을 너무 아끼다가는 본전도 못 찾습니다. 저라면 보내겠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일을 잘하니 마음이 풀어지셨습니까?”

“너 이 녀석! 자꾸 그렇게 박사님을 무시할 테야?”

아이작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케인이 아이작의 팔을 붙잡고 간곡히 만류했다. 고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허버트가 아이작을 진정시켰다. 아이작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는 걸 원하지 않는 이들이 아이작을 데리고 멀리 떨어졌다. 고운은 고개를 돌린 채 그쪽을 보지 않았다. 상황이 진정되자 허버트가 결정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우유니를 보내겠습니다.”

허버트가 우유니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앞질러가서 최대한 살피고 돌아오게. 우리는 여기서 5킬로미터 내 인근에서 쉬도록 하지. 자네가 감지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새벽, 동트기 전까지는 돌아오게나. 혹여 귀환이 늦어진다면 아침 9시까지 기다리겠네. 그 사이 별일이 없기를 바라지. 라우라가 깨어나기 전에 어서 떠나게.”

허버트는 우유니가 안은 라우라를 업으려고 등을 댔다. 우유니가 조심스레 라우라를 업혀주었다. 어서 가라며 고갯짓을 하자 우유니는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물러났다. 달리기 시작하자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허버트는 복잡한 심정으로 우유니를 전송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평소보다 금세 날이 어두웠다. 서둘러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발품을 팔아 산 아래로 얕은 동굴을 발견했다. 산사태나 침수의 위험성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자리를 결정했다. 생존자 모두가 들어가니 발 뻗고 눕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그러나 비바람을 막고 훤하게 드러난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분에 겨운 장소였다.

라우라가 깨어나 우유니를 찾았다.

“박사님- 우유니 어딧어? 우유니-”

“잠시 주위를 살펴보러 나갔단다. 내일이면 돌아올 거야.”

허버트가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우라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우유니를 찾다가 공포에 질렸다.

“우유니, 우유니-!”

“라우라.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

“거짓말! 우유니- 우유니이- 우유니 어디 있어? 가버렸어? 라우라 놔두고 갔어? 우유니! 우유니! 꺄아악!”

라우라가 극도의 공황에 질려 발작했다. 숨이 넘어갈 만큼 크게 비명을 지르고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허버트가 몸을 눌렀고 가까이 있던 고운이 거들었다.

“얘 왜 이럽니까?”

“라우라! 내 말 들리느냐? 라우라?”

기어이 까무러쳤다.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었다. 허버트가 라우라의 보호복을 느슨하게 꺼트렸다. 몸의 압박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눕히고 헬멧 바이저 위에 손을 올려 희미한 빛을 가렸다. 라우라는 꺽꺽대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허버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박사님……”

“조용. 모두 조용히 해주게. 조용히.”

감전된 사람처럼 움찔거리던 라우라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1분여 만에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제 괜찮네.”

“어떻게 된 겁니까?”

“경기를 일으켰네. 우유니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크게 충격을 받은 거지.”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허버트는 고맙다고 말했다. 늦은 밤이 되자 사람들이 잠들었다. 고운은 동굴의 가장 입구에 자리 잡고 앉아 잠들지 못하는 허버트를 바라보았다. 라우라가 신경 쓰여서 제대로 쉬지 못하는 허버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했다.

정말로 라우라가 그저 딸이 생각나서 그런 거냐고. 고운은 묻고 싶었다. 라우라에 대한 허버트의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각별했다. 몇 번이나 물어보려 시도했지만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신경 쓸 이유도 없지 않은가. 포기하고 동굴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내리는 비가 술렁거리는 마음을 씻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홉째 날, 생존자들은 29킬로미터를 걸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2.11.14 11:17
    No. 1

    트라우마가 있나보군요. 박사님이 원인일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LL
    작성일
    12.11.16 01:19
    No. 2

    지드 님 / 정신은 한참 어린애라서... 자고 일어났는데 부모가 없어졌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라 생각하고 썼습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종말 3부작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종말 3부작>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7 12.11.10 996 1 -
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6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3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2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1 2 14쪽
»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1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