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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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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58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1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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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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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4> 마지막 날 - 3

소금 민들레



DUMMY

3.


걸을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날이 밝자 그나마 높은 곳이랍시고 오른 언덕에서는 더욱 더 높은 산세만 보일 뿐이었다. 아침 물안개 때문에 먼 거리는 볼 수 없었다. 미아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 때문에 높은 곳에서 흘러넘친 물이 범람한 강물처럼 쏟아졌다. 휩쓸리지 않도록 더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갔다. 고운과 달리 평범한 체력과 악력을 가진 케인과 라우라는 암벽을 타거나 오래 걷는데 문제가 많았다. 주기적으로 쉬어주지 않으면 금세 뒤처졌다.

힘들다고 난리를 치던 라우라도 너무 지쳐서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저 걷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업어줄 수도 없었다. 케인은 묵묵히 따르고 있었지만, 가여울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저쪽에서 좀 쉬자.”

“난 괜찮아.”

“그렇게 헉헉대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쟤는 너보다 더 심해. 한 시간만 쉬자.”

“그래도……”

“잔말 말고 하자는 대로 좀 해!”

고운이 소리치자 케인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라우라를 부축해서 처마처럼 깎인 암벽 아래로 향했다. 아직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위안이었다. 라우라는 주저앉은 케인의 옆에 누웠다. 여린 목소리로 훌쩍였다.

“박사님…… 우유니…… 엄마아……”

고운도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기계로 된 팔과 다리는 지치거나 통증을 느끼지 않았지만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라우라에게 화낼 기력이 없었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엄마-”

“라우라. 괜찮아. 울지 마.”

케인이 라우라를 달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고운은 케인에게 놔두고 쉬라고 잔소리하고 대신 말대꾸를 했다.

“집이 어딘데.”

“몰라……”

“집이 어딘지 모르면 어떻게 가려고.”

“몰라아.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라우라 말 잘 들을 테니까, 약도 잘 먹을 테니까, 집에 보내줘. 집에 가고 싶어. 박사님이 집에 데려다 준다고 약속했단 말야.”

“아빠는 없어?”

“라우라는 아빠 없어. 라우라 태어났을 때, 멀리 갔대. 머얼-리. 그래서 라우라는 아빠 없어. 엄마랑, 만날 하얀 옷 입은 언니들이랑 살았어.”

라우라의 말 빠르기가 점점 느려졌다. 울면서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고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박사님은 어떻게 알아?”

“박사님- 라우라 집에 왔었어. 놀러 왔어. 엄마 친구래. 라우라 쪼꼬만할 때부터 봤어. 박사님 맛있는 거도 잘 사줬어.”

“그럼 엄마는 어디 있는데?”

“몇 밤 몇 밤 전에 엄마 죽었어. 엄마 아파서, 라우라 혼자 두고 별님 됐어. 박사님이 라우라 데리러 왔어. 라우라 지켜준댔어. 비행기 탔다? 박사님이 이거 입혀줬어. 케인도 보고, 고운도 봤어……”

맥락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다 곯아떨어졌다. 고운은 이야기 속의 허버트에 대해 생각했다. 땅 끝 방공호에서 허버트를 처음 보기 이전부터 허버트와 라우라는 관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허버트가 방주에 오르지 않고 남은 이유, 라우라에게 그토록 신경 쓰는 이유는? 라우라는 허버트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고 최소한 자진해서 방주를 사양할 이유 중 하나였던 건 아니었을까.

허버트와 떨어지자 더 그에 대해 알게 됐다. 허버트의 처지, 행동, 속내까지 짐작했다. 반감을 품은 상대를 이해한다는 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직 허버트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모든 진실은 허버트의 입에서 나와야 하며, 그전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만, 허버트가 지나치게 많은 책임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불편한 사실이었다. 그의 본래 성정 때문인지, 혹은 그가 생존자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배알도 없이 간도 다 꺼내주려는 허버트의 행동이 싫었다.

“좀 더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버트는 미움 받아도 싼 사람이었다. 더 뻔뻔하고 나쁜 사람이었다면 방주 일을 빌미 삼아 실컷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살려고 그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났다. 아이작 같은 사람에게 화도 낼 줄 알고, 성질도 부리면서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없으면 너희는 살 수 없다고 으름장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났다. 애꿎은 돌을 주워 밖으로 던졌다.

30분쯤 지나자 케인이 교대해 주겠다고 나섰다.

“고운도 좀 자둬. 네가 제일 잠을 못 잤잖아. 난 몸은 피곤해도 잠은 안 오니까, 이제 깨어 있어도 돼.”

“알았다. 30분 뒤에 칼같이 깨워. 안 일어나거든 두들겨 패서라도.”

케인이 누워 있던 자리에 팔을 베고 누웠다. 라우라의 잠든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검고 곱솔거리는 머리카락이 이마와 볼에 흘러내렸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와 동글동글한 인상은 라틴계 혼혈 같았다. 아름답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귀염상이다. 아무런 근심 없이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으니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고 돌아누웠다.


몇 초 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무척 힘들게 일어났다. 깨워지고 나서도 몇 분간 멍하니 앉아있었다. 케인은 그동안 라우라를 깨웠다. 세 사람은 다시 안개 자욱한 암벽의 산을 올랐다.

“박사님이랑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

“생존 확률로 따지자면 여기보다 그쪽이 더 높아. 최소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아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니까. 네 아버지도 무사하실 거고. 지금은 우리나 생각하라고.”

“라우라 돌 싫어. 바위 싫어. 걷는 거 싫어- 힘들어.”

“누군 좋아서 이러냐? 얼른 올라오기나 해!”

높은 턱을 고운이 먼저 올라가고 나머지 두 사람을 쉽게 끌어올렸다. 케인이 감탄했다.

“언제 봐도 그 팔다리, 편해 보여.”

“보통 인간 악력이랑 비교하지 마.”

“슬프진 않았어?”

“왜? 이렇게나 편한데. 몸 병신이야 장애도 아닌 세상이야. 힘들거나 슬펐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단지……”

“단지?”

쌓인 돌무더기와 만났다. 비 때문에 무너져 내린 여파였다. 고운은 신경질 내며 돌을 옆으로 치워냈다. 케인과 라우라도 거들었다.

“난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 덕분에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인간처럼 살 수 있게 해줬으니까.”

목적어가 빠진 말에 케인은 의아해했지만 곧 깨달았다. 고운은 말없이 길을 뚫고 넘어갔다. 케인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고운. 그거, 박사님이 만드셨지?”

“그래.”

고운은 침울하게 말했다.

“나한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어.”

케인이 고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 대신 위로를 전했다. 갸우뚱하던 라우라가 고운의 반대편 어깨를 케인과 똑같이 따라 했다. 졸지에 양쪽에서 위로를 받게 되자 고운은 당황하며 뿌리쳤다. 케인과 라우라의 페이스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가는 길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점점 더 깊은 골짜기로 나아갔지만, 험난한 지형은 갈수록 보이지 않았다. 일정한 고도에서는 닦인 길 마냥 뻗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단할 수 없었다. 만약 산을 북쪽으로 통과하는 길이 아니라 동쪽이든 서쪽이든 횡으로 빠지고 있다면 큰 문제였다. 막무가내로 걷고는 있었으나 여러 가지 최악의 사태를 고려해야했다.

한참을 걷던 도중, 앞서 걷던 고운이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뭔가 저 앞에 있어.”

고운은 얼른 케인과 라우라를 밀어 주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추격자에게서 빼앗은 총을 꺼내 들었다.

“고운-? 케인-? 숨바꼭질해?”

“쉿. 조용히 해, 이 맹추.”

“라우라는 맹추 아냐!”

케인이 버둥거리며 화내는 라우라를 진정시켰다. 고운은 저편 안개 속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가까이 다가오면 쏠 태세로 총을 조준했다. 저쪽에서도 뭔가를 감지했는지, 다가오다 멈춰 섰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운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안개 속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라우라가 즉각 반응했다. 고운과 케인이 넋을 놓은 순간,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우유니!”

라우라는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고운과 케인이 아차 해서 쫓아갔다. 가깝게 접근하자 확실하게 보였다. 우유니였다. 고운과 케인이 달려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허리에 꼭 매달린 라우라를 쓰다듬었다. 고운은 라우라의 헬멧을 쳤다.

“왜 때려!”

“이 맹추야! 추격자가 흉내 낸 거면 어쩌려고 달려가?”

“우유니 목소리 맞단 말야, 고운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 정말 맞는다!”

“때렸잖아! 고운 바보!”

우유니가 있으니 자신감이 생긴 건지 라우라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고운이 손을 들어 올리자 얼른 우유니 등 뒤로 숨어버렸다. 뒤쫓아 가려다 우유니에게 막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운은 울분을 삼켜야 했다. 대신 우유니를 노려보고 험상궂게 소리쳤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일대 지형과 우회로를 확인하고 귀환하던 참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9시 이전 도착을 예상했습니다만. 고운 님과 케인 님과 라우라 님은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박사님과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케인이 흥분한 고운 대신 설명했다. 추격자가 예상보다 빨리 따라붙은 일, 이동 중에 습격을 받은 일, 헤어지게 된 일,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일.

“그래서 우린 길을 따라 가고 있었어. 박사님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

“이 길은 산을 우회하여 목적지로 가는 길이 맞습니다. 세 분은 맞는 길을 찾아오신 겁니다.”

맞는 길을 왔다는 말에 고운은 무릎을 손으로 짚고 안도했다. 바짝 해오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케인도 기쁘게 웃었다.

“박사님 일행은 어디로 가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그게, 어두워서 잘 모르겠어. 다만 동굴 입구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간 건 알아. 박사님은 나침반을 가지고 계시니까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지 싶어.”

“산을 직접 통과하고 계시겠군요. 예상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박사님을 찾겠습니다. 고운님과 케인님과 라우라님은 길대로 가셔서, 산이 끝나고 평야가 펼쳐지는 지대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유니 어디 가? 라우라 두고 또 가?”

라우라가 울먹거렸다. 우유니는 라우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박사님을 찾아오겠습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꼭이야? 라우라랑 약속해.”

“네. 약속하겠습니다. 새끼손가락을 걸겠습니다.”

우유니는 라우라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라우라는 못내 아쉬워하며 우유니에게서 떨어졌다. 고운이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릴까.”

“세 분의 걸음 속도라면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될 거리입니다. 즉, 휴식 시간까지 예상한다면 오후 1시에는 당도하실 겁니다. 거기서 방공호까지는 12킬로미터입니다. 오후 5시까지 저와 박사님 일행이 도착하지 않으면, 산을 등진 채로 그대로 걸어가십시오. 방공호 표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는 길에 추격자는 없었어?”

“없었습니다.”

“알았어. 가 봐.”

“무사하시기 바랍니다.”

우유니는 깍듯이 인사하고 세 사람이 걸어온 길을 거꾸로 달려갔다. 육체노동형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답게 운동신경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삽시간에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케인이 감탄했다.

“설마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움직인 걸까?”

“안드로이드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고운은 우는 라우라의 팔을 붙들고 확신 받은 길을 걸었다. 설령 우유니가 잘못 알려주었더라도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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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8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6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3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2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0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0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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