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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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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54
추천수 :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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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98

작성
13.01.1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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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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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1쪽

<6> 하늘과 바다 - 2

소금 민들레



DUMMY

2.


온실은 온통 흙색이었다. 우유니는 온실의 입구에서 중년 남자,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흙을 손으로 만지고, 썩은 뿌리를 골라냈다. 남자는 안타깝게 뿌리를 내려다보고 눈물을 머금었다.

“이번에도 실패야.”

남자가 말했다. 주저앉아 상심에 젖어 있는 남자의 등을 여자가 감싸 안고 다독였다.

“기운 내요, 여보. 다음에는 분명 꽃피울 거예요.”

“역시 무리였는지도 몰라. 아버님 대부터 벌써 30년째야. 더 이상 해 나갈 자신이 없어.”

“30년이나 해 왔잖아요. 여기서 꺾이면 안 돼요.”

“모두 다 떠나갔어. 동료도, 친구들도. 더 이상은 지원도 받지 못해. 누굴 위해서, 이젠 뭘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남자가 흐느꼈다. 여자도 함께 울며 남자의 머리를 품에 당겨 안았다. 우유니는 그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몰라요.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서였잖아요. 이 세계를 위해서였잖아요? 지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우리들의 꽃이 세상을 품어 안을 거예요. 용기를 가져요.”

“미안해. 미안하오.”

“당신 곁에는 나와……”

여자가 우유니를 바라보며 웃었다. 남자도 우유니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일어섰다. 우유니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자네가 있었지. 미안하네.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딸도 있었지.”

남자가 우유니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품에 젖먹이 아기가 안겨 있었다. 우유니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으며 옹알이 소리를 냈다. 화면이 흔들렸다. 노이즈가 생겼다. 남자가 아기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럼 잠깐 토질을 확인할 테니 딸을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온실 저편으로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아기를 본다. 아기가 우유니의 얼굴을 향해 손을 버둥거렸다. 손가락으로 볼을 살며시 건드렸다. 아기가 웃는다. 우유니의 눈이 깜박였다. 아기가 따라 깜박인다. 아기의 조막만한 손이 우유니의 손가락을 잡았다. 보동하고 부드럽고 따듯한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기가 웃는다. 우유니의 시야가 흐려졌다.


“우유-니. 우유니-”

화면이 사라지고 라우라가 보였다. 라우라 뒤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일어나, 얼른 가자. 고운- 우유니 일어났어.”

“아직 충전이 덜 된 거야? 왜 먹통이 됐어?”

고운이 다가와 물었다. 우유니가 몸 상태를 점검하고 대답했다.

“복구된 메모리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진척은 있어?”

“잘 안 됩니다.”

방공호에 있을 때에는 메모리 복구에 소모할 전력이 없었다. 복구를 진행하고 있어도 복구 때마다 생기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유니가 캠프를 정리했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겨 본격적인 소금 사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운이 나침반과 지도를 통해 설정해둔 경로를 따라 앞장서고, 라우라와 우유니는 뒤를 따랐다. 라우라는 소금이 밟히는 소리가 좋은지 우유니의 손을 꼭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아침 무렵에는 물이 엷게 고여 있는 지대에 접어들었다. 국지적으로 내린 빗물이 고였다. 단지 빛을 반사하던 하얀 소금 위에 물이 녹아들자, 풍경을 비추는 깨끗한 거울이 되었다. 하늘의 푸른색을 머금고, 동그마니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안았다. 걸을 때마다 튀는 물방울과 파문이 미안할 정도로 맑고 선명했다. 어디가 하늘인지 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라우라는 하늘을 걷고 있다며 좋아했다.

풍경의 변화가 거의 없었는데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운은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지옥 같은 더위도 없었고, 사방은 푸르게 트였다. 메말랐던 마음에 이슬이 내리듯이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절망에 찌든 사람이 없었다. 생존자 행렬에서 가장 참을 수 없던 답답함에서 해방된 것이다. 현실이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냥 다 꿈같아.”

“고운 자?”

라우라가 천진하게 물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잔다.”

“자면 안 돼- 걸을 때 자면 넘어져.”

라우라의 의미 없는 말에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과 한 대의 안드로이드가 하늘 거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메마른 소금과 고인 웅덩이를 번갈아가며 밟아 발자국을 남기고 지웠다.


해가 지고 어둠이 어스름히 내렸다. 우유니가 고운을 멈춰 세웠다.

“북동쪽 1킬로미터 거리에서 뭔가가 접근 중입니다.”

“감지할 수 있어?”

“안드로이드 감지 범위는 200미터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습니다. 차량 엔진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둘러 몸을 숨겨야 합니다.”

우유니가 라우라를 번쩍 들어 어깨에 걸치고 남쪽으로 달렸다. 고운도 뒤를 따랐다. 물이 깊게 고인 웅덩이를 찾아 라우라를 내려놓았다. 우유니가 감지한 차량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고운이 총을 빼들고 라우라에게 소리쳤다.

“절대로 가만있어야 해! 금방 올 테니 소리도 내지 말고 죽은 듯이 있어!”

“응! 가만히 있을게.”

고운이 라우라를 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라우라는 몸을 바닥에 바짝 붙인 채로 물속으로 숨었다. 차량이 눈에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날렵한 로켓 모양의 산악용 부상 수송선이 굉음을 내며 날았다. 바퀴 대신 제트 엔진을 이용해 지표에서 최대 10미터 상공을 날 수 있는 차량이었다. 고운과 우유니가 양옆으로 몸을 굴려 충돌을 피했다. 수송선이 둘을 지나쳐 급정지했다. 반동으로 30미터는 더 앞으로 나갔다.

“안드로이드입니다. 다섯이 탑승 중입니다.”

“많잖아!”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우유니가 수송선을 향해 돌진했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안드로이드 두 명이 양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두 명은 문을 방패삼아 그 뒤에서 우유니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지면을 밟은 안드로이가 우유니를 지나쳐 고운을 노렸다.

우유니에게 총탄이 쏟아졌다. 우유니는 방향을 틀어 피하고, 도움닫기로 발을 굴러 수송선 5미터 앞에서 높게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굴러 차량 위에 안착했다. 우유니의 체중과 힘에 차량이 휘청거렸다. 우유니는 문 뒤편에 매달린 안드로이드 하나의 얼굴을 발로 밟아 떼어냈다. 다른 안드로이드가 총을 쐈지만 우유니의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유니가 문 안쪽으로 재빠르게 차량 내로 들어와 반대편 안드로이드를 걷어찼다. 안드로이드는 문과 함께 떨어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이어 손을 뻗어 운전자 안드로이드의 목을 비틀어 부쉈다. 아래로 떨어진 안드로이드가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다. 우유니는 차량의 조종키를 꺾어 급선회했다. 엔진 기류에 휘말린 안드로이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우유니는 수송선을 한 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리며 아래쪽의 안드로이드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막은 뒤, 운전자 안드로이드의 품에서 총을 꺼내 조준했다. 조준시야에 정확히 들어온 순간 선회를 멈추고, 쏘았다. 총탄은 왼쪽 안드로이드의 머리에 명중했다. 반대편 안드로이드도 피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고운은 달려드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한 명의 어깨를 관통했지만, 안드로이드는 멈추는 기색 없이 달려들었다. 고운은 뒤로 몸을 빼다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웅덩이 근처였기 때문에 혹 라우라를 눈치 챌까 걱정됐다. 고운의 보통 인간을 넘어서는 기계 다리의 운동신경으로도 안드로이드의 추격을 피하긴 무리였다. 사냥감을 모는 것처럼 두 안드로이드는 양 갈래로 갈라지더니 고운의 앞과 뒤를 가로막는 데 성공했다.

“데메테르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죽인다.”

“죽어라, 인간.”

“누굴 죽여!”

안드로이드 하나가 주먹을 날렸다. 고운이 왼팔을 들어 막았다. 기계 팔에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얼마나 힘이 강한지 고운의 몸이 옆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일부로 앞으로 몸을 굴러 포위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고운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발길질이 날아왔다. 몸통을 기계팔로 보호하며 막았다. 기계 부위가 아니고 몸통에 맞으면 그대로 꿰뚫려 죽을 만큼 막강한 힘이었다.

“무식하기는, 정말!”

고운이 성질을 부리며 총을 쐈다. 두 안드로이드가 물러나며 피하는 틈을 타 일어섰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거나 막는 데만도 정신이 쏠려 역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금세 숨이 가빠졌다.

발이 고운의 옆구리를 약간 엇비껴 때렸다. 스쳤는데도 갈비뼈에 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고운이 신음을 터트리고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이어지는 밟기 공격을 피했다. 총으로 안드로이드의 발치를 무차별로 쏘자 일시적인 접근은 막을 수 있었다. 고운이 한쪽 팔로 옆구리를 감싸 쥔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총탄이 다 떨어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안드로이드가 몸을 날렸다. 고운은 피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두 안드로이드는 고운에게 닿기 전에 공중에서 큰 충격을 받고 두 동강 나버렸다.

우유니가 수송선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우유니가 차량에서 내려 고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큰 상처는 아닙니다. 다행입니다.”

“스쳤으니까. 그나저나 좋은 걸 얻었군.”

“위험한 상황입니다. 수송선 내 레이더로 똑같은 차량 여러 대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중입니다.”

“젠장!”

고운이 서둘러 웅덩이로 가 라우라를 끌어올렸다. 흙탕물을 대충 털어내고 수송선에 태웠다.

“관제기지로 직행하겠습니다.”

“서둘러!”

수송선의 최대 속력으로 소금 바다를 가로질렀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라우라가 눈을 꽉 감고 오들오들 떨었다. 고운이 라우라를 한쪽 팔로 당겨 안았다. 고운의 팔도 떨렸다.

“정말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행복한 기분이었는데,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아까의 상황에 오한이 들었다. 우유니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안드로이드의 팔에 몸이 꿰뚫려 죽었다.

이대로라면 고운은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본 경외가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인지도 몰랐다. 옆구리의 아픔이 생생했다. 사신을 직면에서 돌려보냈다. 떨림이 멎지 않았다. 정말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지만 고운은 자신이 없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라우라에게 물었다.

“라우라. 살고 싶어?”

“응, 살고 싶어.”

“왜?”

“그냥. 그냥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거, 무서워. 고운이 죽는 거 싫어. 우유니가 죽는 거 싫어. 혼자, 싫어. 라우라 죽기 싫어. 예쁜 거 많이많이 보고 싶어.”

고운이 크게 심호흡했다. 의지를 잃어가는 마음을 질책했다. 라우라가 말했다.

“고운, 죽지 마.”

“응. 라우라 너도.”

라우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직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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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8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6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3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3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2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1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0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0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5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4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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