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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57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14 00:11
조회
805
추천
3
글자
9쪽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소금 민들레



DUMMY

2.


허버트가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라우라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어났다. 인기척에 앉은 채로 깜박 졸고 있던 고운이 화들짝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안 졸았습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허버트는 웃음을 참았다.

“더 주무시지 않고요.”

“우유니를 살펴봐야 해. 큰 고장이 아니면 좋겠는데.”

허버트가 우유니에게 다가갔다. 고운도 잠자코 뒤따랐다. 엎드려 있는 상태로 새벽 사이 쓸려온 모래에 반쯤 묻혔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똑바로 눕혔다. 피부가 벗겨지지 않은 왼쪽 눈이 감겨 있었다. 전원은 켜진 상태였으나, 드러난 오른쪽의 안구에 빛이 없었다.

“이 녀석, 꼭 자는 것 같……”

고운이 말하다가 이상한 비유였다고 깨닫고 입을 닫았다. 안드로이드에게 잠이란 없었다. 고장이 나거나 전원이 꺼질 때 외에 안드로이드가 기능을 정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별일이 없는 한 24시간, 365일 늘 가동 상태였다.

잠든다는 상태는 안드로이드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고운은 우유니를 무심코 인간처럼 보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애써 생각을 접고 허버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떻습니까?”

“외관상으로 문제는 없어 보이네. 내부 충격이 어떻게 됐을지는 몰라.”

“그럼 어떻게 하죠?”

“그게 문젠데. 이러고도 내가 기계공학 박사라니, 우습군.”

허버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설비 없이 단순한 지식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전원을 껐다가 켜보시죠? 저는 기계는 잘 모르지만, 가끔 컴퓨터가 먹통이 됐을 때 껐다가 켜면 제대로 돌아가던데요.”

고운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해 볼까.”

허버트가 반쯤 포기한 어조로 대꾸하고 우유니의 전원을 껐다 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운은 머쓱하게 물러났다.

“역시 고장 났군요.”

“그렇군. 음? 잠깐.”

우유니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이 바짝 긴장했다.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몇 분 흘렀다. 우유니의 감긴 눈꺼풀이 떠졌다. 허버트가 우유니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우유니의 고개가 움직였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가동 했습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상은 없나?”

“기존의 문제에서 추가 피해는 없습니다. 충격 탓에 내부 회로가 일시 정지했습니다. 치명적인 오류는 없습니다.”

“그 외의 기능은 어떻지?”

“……”

“우유니?”

“꿈을 꿨습니다.”

우유니의 입에서 전혀 예상외의 말이 나왔다. 고운이 얼굴을 찡그렸다. 꿈?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꿈이라고?”

“예.”

“안드로이드가 꿈을 어떻게 꿔?”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태를 ‘꿈을 꿨다’라고 말하도록 학습 되어 있습니다. 가동이 중지한 동안 단편적인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박사님, 어떻게 된 일이죠?”

허버트는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궁리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내 생각엔 가동이 완전히 중지하지 않았고, 안드로이드 인지 기능이 먼저 먹통이 된 후 하드웨어가 뒤이어 먹통이 되면서 일어난 플래시백 현상으로 보이네. 계속 처리 중이던 메모리의 단편적인 정보가 방전되는 전류처럼 흘러나온 것이겠지. 마치 우리가 주마등을 보듯이 말이야.”

“그럴 수도 있습니까?”

“안드로이드는 무척 섬세하고 어떤 부분에선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네. 인간은 잠을 통해 깨어 있을 때 습득한 정보를 처리하고 정리하지. 안드로이드에게 잠은 필요 없지만 유사한 기능은 장치되어 있네. 그렇지 않으면 안드로이드가 받아들이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져서 과부하가 일어나. 보통 지시를 받지 않는 대기 상태일 때 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안드로이드의 잠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않겠나. 그래. 어떤 이미지였지?”

고운은 선 듯 동의하기 어려웠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서로 공존하고 살았지만, 입장은 여지없이 달랐다. 고운에게 안드로이드는 그저 기계일 뿐이었다. 아무리 인간처럼 행동하고 사고해도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였다.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별을 짓지 않는 허버트의 말이 석연치 않았다.

우유니가 말했다.

“흙과, 식물을 보았습니다. 배수펌프가 있는 넓은 장소였습니다. 관을 따라 물이 흘러갑니다. 저 외에 인간 형체가 둘 있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뭐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제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식물은 초록색입니다. 초록색에 하얀색이 덮여 있습니다. 정확한 분석은 불가능합니다. 19.2초 동안 재생되고서 사라졌습니다.”

“자네가 과거에 어디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영상이겠군. 역시 농지에서 사용됐어. 언제의 영상인지는 알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 혹여 다른 영상을 보거나 메모리 복구가…… 기억이 돌아오거든 말해주게.”

“예.”

우유니는 몸의 모래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라우라에게로 돌아가려 할 때 허버트가 불러 세웠다.

“우유니.”

“말씀하십시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살았어. 그리고 미안하네.”

허버트가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우유니는 사양의 말 대신 고개를 숙여 답하고 돌아갔다. 고운은 괴이한 눈으로 허버트와 우유니를 지켜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허버트가 고운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가.”

“박사님은 안드로이드를 사람처럼 대하는군요. 박사님 입장에서야, 박사님이 만드는 입장이니 애착이 유별나리란 생각은 듭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나?”

“안드로이드는, 저 빌어먹을 추격자를 차치하고서 어쨌든 당연히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하잖습니까? 왜 그렇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점점 박사님이란 사람을 모르겠습니다. 라우라야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다 치고요.”

허버트는 고운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고운. 나는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겠네. 다만, 나는 자네에게 하나를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

“뭡니까?”

“사람이 하는 대로 돌아온다는 걸세. 그것이 안드로이드건 같은 사람이건. ‘당연’이란 없어. 인간에게 위해를 끼친 존재가 된 안드로이드가 본디 인간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지금의 모순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나.”

고운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처했다. 허버트는 웃으며 고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자네가 빠르게 행동해 준 덕에 셋 다 살 수 있었어.”

“그저 박사님이 이런 곳에서 돌아가셔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찌 됐든, 자네가 나와 라우라와 우유니를 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감사받아야 해. 우유니도 돌아왔으니 자네도 좀 쉬어두게. 오늘은 출발을 늦게 해야겠어.”

“괜찮겠습니까?”

“최소한 어제만큼만 이동할 수 있으면 돼. 오늘 걸으면 사막은 벗어날 테고, 내일은 더 가속이 붙겠지. 기후와 추격자가 큰 변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다들 힘들어. 미리 충분히 쉬어두고 오늘내일 최대한 걷는 방향으로 하세나.”

고운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잠든 사람들은 억지로 두들겨 깨우지 않는 이상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휴식을 허락받자 긴장이 풀린 고운은 갑작스레 피로를 느꼈다. 마음은 허버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머리를 바닥에 대자 바로 잠들었다.

허버트는 우유니에게 평소보다 세 시간 늦은 오전 10시에 모두를 깨우라 지시했다. 라우라가 몸을 뒤척여 허버트에게 기대왔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라우라 헬멧의 모래를 쓸고 천진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힘들고 어렵게 말했다.

“미안하다, 라우라.”

목이 메어왔다. 허버트는 라우라를 소중히 품어 안았다. 우유니의 황금색 눈동자가 허버트와 라우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껍게 깔린 구름 틈새로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들었다. 습도가 상승하며 기온과 이산화탄소 농도가 제법 가라앉았다. 우유니는 허버트가 지시한 10시가 되자 모두를 흔들어 깨웠다. 그전까지 누구도 깨지 않았다. 일어난 사람들은 식사를 했다. 라우라는 마지막으로 깨어났다.

“아, 우유니- 일어났네, 잘 잤어? 좋은 아침!”

라우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우유니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사람들이 라우라와 우유니를 이상하게 쳐다보다 말았다. 라우라의 이상한 행동이 어두 하루 이틀 일이던가. 식사가 끝나고 허버트가 말했다.

“오늘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오셨습니다. 이제 50킬로미터 정도만 더 걸으면 안전한 방공호에 도착합니다. 추격자들도 새벽의 모래폭풍으로 발이 묶였을 겁니다. 이제 머지않았으니, 다들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십시오. 오늘 이 지긋지긋한 사막을 벗어납시다.”

열악한 상황은 변함없었지만, 허버트의 말은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사막을 열흘 내에 종단한다는 힘든 일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2.11.14 11:14
    No. 1

    지나친 감정이입과 배척, 결과가 나와있는 세상에선 현실적이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LL
    작성일
    12.11.16 01:18
    No. 2

    지드 님 / 어려운 현실에서는 어떤 쪽도 방어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저런 상황일 땐 아마 제대로 사고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지금 현실을 감사히 여기게 됩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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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49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8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0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4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6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2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3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3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2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0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0 3 10쪽
»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6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3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4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4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5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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