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풀때기밭 곡식창고

종말 3부작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RALL
작품등록일 :
2012.11.19 03:14
최근연재일 :
2013.01.16 00:09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2,282
추천수 :
109
글자수 :
147,598

작성
12.11.11 01:28
조회
885
추천
3
글자
18쪽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소금 민들레



DUMMY

2.


고운이 일어났을 때 허버트는 없었다. 발자국이 비탈까지 이어져 있자 뒤따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허버트는 쉘터 입구에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님?”

허버트가 깜짝 놀라 고운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상한 조짐을 느끼고 고운이 죽 미끄러져 내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 뭐가 있습니까?”

“쓸모없는 나무 자재와…… 자네가 살펴보겠나.”

허버트가 가장 안쪽을 가리켰다. 고운이 의아해하며 쉘터 안으로 들어가 몸을 낮추고 틈새를 살폈다. 한쪽 벽에 파묻혀있는 것은 사람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얼굴 절반의 피부가 벗겨져 기계 섬유와 금속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안구 대신 호박색의 유리 눈이 바깥쪽에서 새어 들어온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움직이진 않으나 죽은 것은 아니다. 고운은 정체를 파악하고 불에 덴 듯 놀라 물러났다.

“안드로이드잖습니까!”

“그러하네.”

“제길, 어서 여길 뜹시다. 못 볼 걸 봤군!”

“잠깐만, 고운.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무작정 나쁘다고 판단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당혹스럽지만 이대로 놔두고 가면 더 나쁜 일을 초래할 수도 있네. 추격자가 우리를 쫓고 있어. 분명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따라오고 있겠지. 그들도 이걸 발견할걸세. 내버려두고 가면 적을 하나 더 늘리는 꼴이 될 거야. 우린 이미 이 쉘터를 발견해서 파버렸고, 다시 모래 속에 묻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려.”

“뭘 생각하시는 겁니까.”

허버트는 혼란을 애써 진정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의 가능성과 위험요소를 모두 예상하고 처신해야 했다. 생존자들의 희망을 저버린 일에 대한 대가로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 아닌지, 자신에게 몇 번이고 신중히 되묻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천천히 말했다.

“내 생각은…… 저걸 꺼내자는 걸세. 알겠나? 쉘터를 다시 덮기는 어려워도 저거 하나를 파묻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혹여나 저 안드로이드가 쓸 만하다면……”

“박사님!”

“알고 있네. 자네가 듣기에는 내 말이 헛소리로 들리겠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야. 손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큰 보탬이 될 걸세. 확신할 수 있네.”

“박사님의 그 확신이 결국 개죽음을 만들지도 모른다면요?”

“고운. 나는 기계공학 박사네. 기계에 대한 점은 누구보다 잘 알아. 나를 믿게. 믿어주게.”

고운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허버트를 노려보았다.

“불신을 자초한 건 박사님 본인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파묻는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안타까워하는 허버트를 외면하고 고운이 쉘터 밖으로 나갔다. 허버트는 맥없이 쉘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거운 한숨이 쓸려 나왔다. 고운이 한 말에 거짓이나 비약은 없었다. 진실을 말했기에 더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고운이 불러온 사람들 역시 안드로이드라는 말에 기겁하고 경계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고서야 무거운 자재를 하나씩 치웠다. 자재를 모두 빼내고 안드로이드를 끌어냈다. 척 보기에도 머리 부분의 파손이 심했다. 제법 구시대의 물건인지 덩치가 무척 컸고, 인간 형태였지만 세련미는 떨어졌다.

“뭐에 쓰이던 물건이었을까요? 이렇게 생긴 놈은 처음 봅니다.”

한 젊은이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안드로이드의 상태를 차차 확인하던 허버트는 감격에 젖었다.

“맙소사. 자네들이라면 모를 법도 하지. 100년은 된 모델이네. 정부에서 염가로 농민이나 어민에게 제공했던 안드로이드야. 육체노동에 특화된 녀석이지. 현대 안드로이드의 프로토 타입일세.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놈인데.”

“얼른 묻어버리죠. 오늘도 많이 걸어야 할 텐데 이런 데서 시간낭비 하고 싶습니까?”

고운이 끼어들어 허버트의 말을 막았다. 그는 현 상황의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5분도 안 걸려. 잠시만 확인하게 해 주게. 부탁하네.”

“박사님의 과학자로서 호기심을 충족할 시간이라면 1분 1초도 아깝습니다!”

허버트는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이 험난한 상황까지 오게 한 데에 이바지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허버트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단지 감정적인 문제로만 생각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저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허버트는 고운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자네는 날 믿어야만 해. 나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네. 살아서 다음 방공호까지 가도록 하고 싶네. 가능하다면 그 이상까지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걸세. 내가 가능한 방법은 뭐든 써 볼 생각이야. 자네가 날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했다면 지금 여기서, 나를 믿어주게나.”

“뻔뻔스럽게도……”

고운은 분노를 어찌할 바 모르고 이를 갈았다. 허버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치를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눈빛에는 허버트에 대한 신뢰가 그득했다. 상황은 고운에게 불리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존을 책임진 자가 허버트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허버트가 처음부터 지도자는 아니었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방황했다. 전혀 이런 상황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문명의 혜택 속에서 평화롭게만 살아가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적과 자연의 분노 앞에서 우수수 죽어나갔다.

각지의 생존자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속에 허버트가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냉철하게 현실을 보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자연스럽게 허버트는 생존자 무리를 살피는 지도자가 됐다.

허버트의 존재를 의심하고 믿지 못한 사람들은 허버트와 갈라져 다른 길을 갔다.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어찌됐든 허버트를 따르면 생존 확률이 높았다. 고운은 억지로 분을 삼켰다.

“맘대로 하십시오! 그놈에게 전부 몰살당하면 퍽 좋겠군요?”

거친 말을 내뱉고 물러났다. 허버트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안드로이드를 살폈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허버트는 고운에게는 설명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현재 추격자들은 마더 컴퓨터 ‘데메테르’의 지배를 받고 있네. 50년 전 인류는 안드로이드의 효과적인 제어를 위해 모든 안드로이드에게 원격 조종 기능을 탑재하도록 했지. 데메테르는 그 기능을 통제하는 컴퓨터야. 이런 오래된 안드로이드에는 원격 조종 기능 같은 건 없어. 설치 자체가 불가능 하지.”

허버트는 날카롭게 부서진 자재 조각을 들고 안드로이드의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얼마나 쌓였을지 모를 검은 먼지를 뜯어내고 얼기설기 얽혀 있는 전선과 신경회로를 건드렸다.

“고칠 수 있습니까?”

“모르네. 부서진 부분은 기동에는 무리가 없는 부분이네만. 자세한 건 분해해봐야 해. 설비가 없으니 운에 맡기는 수밖에.”

허버트는 등 뒤에 숨겨진 뚜껑을 열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안드로이드를 태양빛이 잘 비쳐드는 곳까지 끌어냈다. 태양열 에너지가 안드로이드를 일깨우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나자 초조해졌다.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변했다.

“움직이지 않는데요. 단단히 고장 났나 봅니다.”

“그런가.”

아쉬운 마음에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흔하게 보기 어려운 것을 보았다는 일로만 만족하기로 했다.

“박사님- 박사님. 여기 있어?”

라우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놀란 목소리였다. 쉘터 안쪽으로 고개를 배꼼 내밀더니 허버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디 간 줄 알았단 말야! 라우라 버리고 가는 거야?”

“그럴 리가 있느냐. 자. 금방 갈 테니 돌아가 있으렴.”

“싫어. 같이 있을래.”

투정부리던 라우라가 안드로이드를 발견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사님, 저거 뭐야?”

“라우라도 처음 보겠구나. 오래된 안드로이드란다.”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그게 뭐야? 라우라 처음 본다.”

라우라는 허버트를 벗어나 안드로이드에게 다가갔다. 기웃거리며 안드로이드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울 것 같은 얼굴로 허버트를 돌아보았다.

“박사님, 죽었어? 죽은 거야? 안드로이드- 죽었어?”

“고장 났단다.”

“죽은 거야?”

허버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처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답을 해 주지 못하자 죽은 것이라고 알아들은 라우라는 안드로이드를 꼭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죽었어. 아팠을 거야, 어떡해. 어떡해. 안드로이드- 어떡해.”

“라우라.”

“죽는 거 싫어. 아픈 거 싫어. 안드로이드- 죽었어.”

“묻어줘야지. 죽었으니까 묻어줘야지? 편하게 가도록 해줘야지.”

떼어내려고 달래보았지만 라우라는 안드로이드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놓을 줄 몰랐다. 더 시간을 지체해선 곤란했다. 청년들이 안드로이드를 잡고 허버트가 라우라를 잡아당겼다. 라우라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심하게 쳐서 허버트와 함께 반동으로 나뒹구는 찰나, 중간에서 우뚝 멈췄다. 머리를 부딪칠 거라 예상하고 눈을 꽉 감은 허버트는 몸에 충격이 없자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놀라서 굳었다.

“아! 안드로이드- 살았어!”

라우라가 기뻐서 소리쳤다. 허버트가 몸을 일으켰다. 안드로이드가 라우라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박사님- 안드로이드- 살았어, 움직여!”

안드로이드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라우라를 보고, 허버트를 보고, 자신을 잡은 사람들을 보았다. 눈동자에 빛이 점멸했다. 모두가 안드로이드를 둘러싸고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안드로이드는 한참 눈을 빛내다가 입을 열었다. 울림이 있는 딱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체 파손율 9%입니다. 정비가 필요합니다. 메모리 슬롯이 파괴되었습니다. 데이터 접근이 불가합니다. 위성 통신 연결이 실패했습니다. 가동 적합 환경이 아닙니다. 파손 부위의 부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경고합니다. 점검이 필요합니다. 경고합니다. 점검이 필요합니다.”

“박사님, 안드로이드- 이상한 말 해.”

“역시 고장인데요?”

“아니야. 제대로 가동하고 있네. 구식이지만 인공지능은 확실히 장착되어 있어. 내부 오류는 스스로 고쳐나갈 걸세. 외부 파손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방공호에서 고칠 수 있을 거야. 사용자 데이터는 남아있나?”

허버트가 안드로이드에게 물었다.

“메인 메모리 슬롯을 읽어 들일 수 없습니다. 임시 메모리를 가동합니다……………… 사용자 설정이 필요합니다.”

“허버트 알리오 그레이엄.”

“성문 확인하였습니다. 허버트 알리오 그레이엄님을 임시 사용자로 등록합니다.”

“움직여 보겠나?”

안드로이드는 라우라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지 어느 곳 하나 불편함 없이 움직였다. 머리의 파손은 영향이 없어보였다. 안드로이드가 허버트의 말대로 움직이는 모양새를 본 사람들이 감탄했다. 쉘터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컸다. 가장 작은 라우라는 안드로이드의 가슴께 정도밖에 닿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크다, 무지 커. 라우라 보다 한참 커. 거인이야.”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했을 테니. 220센티미터는 되겠군.”

“223.5센티미터입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라우라 업어줘. 업어줘.”

안드로이드는 순순히 라우라를 등에 업었다. 허버트는 흡족하게 웃고 사람들과 함께 쉘터 밖으로 나왔다. 생존자들의 곁으로 돌아오자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허버트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해는 했지만 두려움을 지우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눈치만 살폈다. 먼저 돌아온 고운은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허버트는 안드로이드에게 현재 위치와 방향에 대해 물었다. 안드로이드는 주변 일대를 죽 둘러보고 5퍼센트의 오차를 가진 좌표를 말했다. 안드로이드의 말을 참고해 허버트는 경로를 수정하고 생존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고운에게 선두를 부탁하자 대답도 않고 앞으로 가버렸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허버트는 안드로이드와 함께 마지막을 따르며 대화를 나눴다. 안드로이드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곧잘 흥미 있게 듣던 라우라는 어려운 이야기가 오가자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

“마지막으로 가동했던 때가 언제지?”

“33년 8개월 전입니다.”

“자네가 있던 쉘터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고 있나?”

“지난 데이터가 복구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위성 교신이 되나?”

“시도 중입니다. 현재까지 교신 가능한 위성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자네가 접근 가능한 위성은 자네만큼 오래된 위성이 아니면 어려울 테니까. 대부분 수명을 다해서 사라졌을 거야. 가동률은 어떤가?”

“87.9%입니다. 동력원이 정상 가동 중입니다. 태양 에너지는 충분합니다.”

“안드로이드 강령을 말해보게.”

“첫째,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둘째,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최우선시 한다. 셋째,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말에 복종한다.”

“그래. 자네 이름은? 옛 주인이 자네를 뭐라고 불렀나.”

제깍제깍 답하던 안드로이드가 한참 말이 없었다. 불안해진 허버트가 중단 명령을 내리기 전에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좀 전과는 다른 어휘를 구사했다.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안드로이드는 인공지능 자가 발전이 가능했다. 가르치면 소화해내고 피드백을 통해 성장했다. 허버트가 안드로이드와 대화중에 기억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으므로, 안드로이드가 본래 알고 있던 단어일 가능성이 컸다.

“데이터 자가 복구는 가능한가?”

“복구 진행 중입니다만 메모리 기기가 파괴되어 100%는 불가능합니다. 복구 설비가 필요합니다.”

“알겠네. 그럼 자네를 부를 이름이 필요하겠군. 작명엔 영 소질이 없는데.”

허버트가 난처해하다 라우라를 흔들어 깨웠다.

“라우라. 안드로이드 이름을 생각해 보겠니?”

“이르음?”

“뭐라고 부르고 싶으냐.”

“우응, 우유-니. 우유니- 우유니라고 부를래.”

“그러려무나. 들었나?”

“등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우라가 꺄륵 웃으며 우유니라 이름 붙여진 안드로이드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스무 명의 사람에 안드로이드 한대가 더해진 행렬이 걷기에 박차를 가했다. 허버트의 예상대로 평탄한 지대에 모래도 눈에 띄게 줄어 걷기는 한결 편해졌다. 전날의 불볕더위를 보상하듯이 기온은 정확히 50도에서 안정되었다.

안드로이드답게 우유니는 육체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모두가 쉴 때 홀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계를 섰다.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움직이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공포는 쉽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유니가 눈앞에서 오가는 모습만으로도 흠칫흠칫 놀랐다. 그 모습을 이상하다 생각한 라우라가 사람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상하다. 왜 놀라? 우유니- 좋은데. 고운, 고운도 우유니 무서워?”

“뭐가 무섭다는 거야? 저리 가.”

식사를 하고 한층 기분이 나빠진 고운은 라우라가 성가셨다. 유난히 날카로운 반응에 라우라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 소리쳤다.

“왜에 싫어하는데! 우유니 착해! 고운은 나쁜 사람.”

“뭐야? 이 바보 계집애가, 저리 꺼지라고!”

“고운이 더 바보! 왜 화내는데! 문어! 말미잘!”

“이게……!”

고운이 라우라를 밀쳤다. 뒤로 쓰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라우라가 빼액 울었다.

“고운 미워! 미워어-”

“남 속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이지 마, 바보야!”

“라우라는 바보 아냐! 고운이 더 바보면서!”

허버트가 달려와 난동을 피우는 고운을 붙잡아 말렸다. 뒤늦게 따라온 우유니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라를 번쩍 들어 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마치 아이 돌보는 부모처럼 능숙하게 달랬다. 허버트가 고갯짓해 두 사람을 멀찍이 보냈다. 고운은 허버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출발 채비를 갖췄다. 허버트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술렁이는 생존자들을 보듬었다.

라우라는 행군 중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따른 우유니의 행동은 허버트를 놀라게 했다. 단순한 노동용 안드로이드라기엔 행동이 무척 섬세했다.

“라우라. 괜찮습니다. 마음껏 우세요.”

이 얼마나 인간적인 말인가? 한 세기 전에 만들어진데다 메모리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안드로이드가 자연스럽게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허버트는 문득 마지막 기동 일이 33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50년 이상 가동 되었다면 인공지능에 많은 경험이 쌓여 있으리라 판단했다.

오로지 프로그램 명령대로만 작동하는 로봇과 달리 안드로이드는 스스로 성장하는 존재였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비롯된 모든 경험에서 사고하고 판단하여 움직였다. 동시에 안드로이드는 기계였다. 아무리 인간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져도 안드로이드는 기계의 한계 이상 진화하지 못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스스로 만든 인간적인 제약 때문이었다.

허버트는 우유니와 라우라의 모습에서 정체 모를 애틋함을 느꼈다.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무수한 문제와 논쟁들이 눈앞의 광경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어느새 라우라는 울음을 그쳤다. 우유니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허버트가 물었다.

“라우라. 우유니 좋니?”

“응! 우유니- 좋아. 너무 좋아.”

허버트는 라우라의 헬멧을 가볍게 콩콩 두드리고 웃어 보였다. 진리는 아마도 여기에 있으리라.


작가의말

우유니란 이름 참 예쁘지 않나요. ㅎㅎ
라우라란 이름도 어감이 예뻐서 좋아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종말 3부작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종말 3부작>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7 12.11.10 997 1 -
31 에필로그 : 선물 +20 13.01.16 651 11 3쪽
30 <8> 소금 민들레 +2 13.01.16 574 4 10쪽
29 <7> 구원 13.01.16 406 2 1쪽
28 <6> 하늘과 바다 - 6 +4 13.01.15 488 5 5쪽
27 <6> 하늘과 바다 - 5 +2 13.01.14 439 3 7쪽
26 <6> 하늘과 바다 - 4 +5 13.01.13 562 9 8쪽
25 <6> 하늘과 바다 - 3 +6 13.01.12 487 3 13쪽
24 <6> 하늘과 바다 - 2 +4 13.01.11 547 4 11쪽
23 <6> 하늘과 바다 - 1 +4 13.01.10 545 3 10쪽
22 <5> 하이퍼케인 - 9 +4 12.12.07 705 4 8쪽
21 <5> 하이퍼케인 - 8 +2 12.11.30 597 2 11쪽
20 <5> 하이퍼케인 - 7 +2 12.11.30 417 1 8쪽
19 <5> 하이퍼케인 - 6 +2 12.11.29 497 2 11쪽
18 <5> 하이퍼케인 - 4, 5 +4 12.11.27 559 1 15쪽
17 <5> 하이퍼케인 - 2, 3 +2 12.11.27 673 2 16쪽
16 <5> 하이퍼케인 - 1 +4 12.11.26 511 1 16쪽
15 <4> 마지막 날 - 5 +2 12.11.21 525 3 10쪽
14 <4> 마지막 날 - 4 +3 12.11.21 747 1 7쪽
13 <4> 마지막 날 - 3 +2 12.11.19 574 2 12쪽
12 <4> 마지막 날 - 2 +2 12.11.18 584 3 12쪽
11 <4> 마지막 날 - 1 12.11.17 622 2 13쪽
10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4 12.11.16 701 2 14쪽
9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3 +2 12.11.14 691 3 10쪽
8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2 +2 12.11.14 807 3 9쪽
7 <3> 여덟째 날과 아홉째 날 - 1 +2 12.11.13 814 2 14쪽
6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4 +3 12.11.13 756 4 9쪽
5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3 +1 12.11.12 765 3 15쪽
»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2 +5 12.11.11 886 3 18쪽
3 <2>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 1 12.11.10 1,144 4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