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카츄샤 님의 서재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전쟁·밀리터리

카츄샤
작품등록일 :
2020.04.22 04:51
최근연재일 :
2022.03.08 11:44
연재수 :
119 회
조회수 :
17,323
추천수 :
200
글자수 :
565,196

작성
20.06.07 18:46
조회
1,183
추천
9
글자
37쪽

(2) 1화.[사람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DUMMY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진짜로 쏠 것 같아서, 일단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취했다.


여기서도 이게 항복 표시로 받아들여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슬 퍼런 총구의 냉기가 이마에 그대로 전해지는 와중에 살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뒤쪽에 쓰러져 있는 누이들과 관장님이 무사한지 곁눈질로 확인한 후, 짧게 영어로 소리쳤다.


“우...우리는 민간인입니다! 쏘지 말아요!”


그러자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금발의 여자는 살짝 눈을 찌푸린 채,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는가. 외견을 보아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아닌 듯한데...”


“그러게, 아시아 쪽에서 온 거 아냐? 생긴걸 보아하니, 그 중에서도 극동 지방 근처에서 온 것 같은데?”


...아시아라고? 뭐야, 마법진 같은 거에 휘말려 와서 무슨 판타지물의 이세계 같은 곳인 줄 알았더니,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보면 우리 세계랑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우리 세계의 어딘가라는 소리는 아니다. 저들의 외모와 복장을 보면 확실히 여기가 우리 세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둘 다 피부도 굉장히 하얗고, 정말로 조각 같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뭐랄까, 마치 서양의 슈퍼모델처럼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까지는 어찌저찌 예쁜 여자애들이 옛날 군복 걸치고 리인 액트를 하는 것이라고 억지로나마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두 귀가 위쪽으로 길고 뾰족하게 돋아 있다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

그래, 마치 판타지의 엘프처럼 말이지. 엘프라 하면 무조건 활을 든 채 초록색 나뭇잎 옷 같은 걸 두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편견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리스 넌 예전에 극동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었더랬지. 복장이 정말 특이하다만...혹, 안에 폭발물 같은 물품을 숨긴 것은 아니더냐?”


“으음...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하지만 확실히 극동에서 본 적은 없는 의상이네. 꼭 타이어를 여러 겹 둘러놓은 것 같아. 아, 색깔만 하얀색이면 딱 비*덤이네, 이거. 너 혹시 아시아가 아니라 프랑스 출신이니?”


...혹시 이 동네는 우리 세계랑 대륙 이름만 같다거나 뭐 그런 수준이 아니라, 엘프 같은 이종족이 있다는 걸 빼면 그냥 우리 세계의 복사판인 것은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프랑스에 미*린 타이어까지 있는 걸 보면 그냥 말 다한 것 같은데...


“으음, 아무래도 좋다. 자세한 것은 부대로 데려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자꾸나.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은 군 작전지역에 들어온 거수자이니 말이니라.”


“으아아...작전지역 안에서 거수자가 한참동안이나 얼쩡거렸는데도 못 잡아냈다니...클라크 그년이 또 무슨 잔소리를 할지...윽, 위장약을 어따 뒀더라...”


“여봐라, 아무리 타 군종인데다 그녀가 이 자리에 없다고는 하나, 파견을 나온 이상 일단은 우리 상사이니라. 그 표현은 천박해 보이지 않느냐.”


“알았어, 알았어. 뒤에 사람들도 슬슬 일어나려는 모양이니까, 정신 차리거든 간단하게 몸수색하고 출발하도록 하자고.”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엎드린 채 이마를 짚고 있는 작은누나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아린이와 큰누나, 그리고 관장님이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아린이나 관장님이야 운동을 했으니 괜찮다 쳐도, 큰누나는 그냥 보기에도 무리해서 일어서려는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큰누나의 옆으로 다가가 부축을 해주며,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작은누나를 불렀다.


“작은누나,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아이고 머리야...아, 응,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아린이랑 언니나 잘 챙겨줘, 특히 언니...”


그러자, 분명 작은누나가 한국어로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금까지 앞에서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까 그 두 명이 다가오더니, 각각 아린이와 작은누나의 팔을 자신들의 어깨에 둘러메고는 옆구리에 자신들의 팔을 한쪽씩 끼워 부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관장님은 에린이 도와주려는 걸 손을 흔들어 사양하고는, 오히려 내 옆에 붙어 큰누나를 부축하는 것을 함께 도와주었다.


“으음, 수상한 점이 많기는 하나, 딱히 지금 상황에서 적대시할 요소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도와주는 것이다. 원래는 강제로 끌고 가도 이상할 게 없으니 부디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거라.”


“뭐, 자세한 건 아까 에린 말처럼 부대에서 조사를 해 봐야 나오겠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생색 낼 건 없지. 아 참,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가 아직이네. 난 리스, 저 애는 에린이야. 아까 우리가 얘기하는 거 들으면서 대충 눈치챘겠지만.”


무뚝뚝한 에린과 달리 킥킥 웃으며 리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리스라는 아이는 성격 자체는 활발한 것 같았다.

아까 나한테 부딪혀 생긴 코피 자국이 좀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런 걸 담아두는 성격은 또 아니었는지 히히 웃으며 에린과 함께 부대로 가는 길에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아직 우리가 방금 겪은 소환이나 이세계에 대한 말은 함부로 꺼내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에린은 가끔 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


“뭐야, 저거...진짜야?”


두 명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해안에서 좀 떨어진 숲 속 공터에 위치한 간이 숙영지였는데,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부터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까지, 엘프에 인간에, 심지어 동물귀와 꼬리, 심하면 거기에 동물 뿔까지도 달고 있는 희한한 사람들 투성이었다.


작은 누나가 손으로 그 중 가장 가까이 있던 토끼 귀를 가진 병사를 가리키며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옆에 있던 에린은 오히려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작은 누나에게 반문했다.


“왜 그러느냐?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참고로 작은누나는 영어를 지지리도 못하기에 방금 에린이 한 말을 못 알아들었을 거다.


“사람이 동물귀를 달고 있는 모습이 신기한가 봐.”


내가 대신 나서서 통역해주자, 에린은 더더욱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상 천지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이 수인족인데 대체 무엇이 그리 이상하단 말이냐? 아까는 그대들 인간과 달리 뾰족한 귀를 가진 본녀나 리스를 보고도 딱히 이상해하는 기색이 없더니...더더욱 수상하구나. 아니, 이건 수상하다기 보다는 이상하다고 보는 것이 맞겠구나.”


“그러게, 꼭 무슨 딴세계에서 온 것 마냥 행동하니깐 보고 있는 우리가 오히려 더 당황스럽네. 혹시, 진짜로 뭐 다른 세계에서 왔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농담조로 쿡쿡 웃으며 리스가 말했지만, 너무 농담이라는 듯이 말하니까 정작 우리 입장에선 그저 벙찐 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고, 우선 이들을 대대장님께 데려가자꾸나. 처우는 그분께서 판단하시겠지. 여보게, 미아 하사. 순찰 임무 도중 거수자를 발견해서 말이네만, 괜찮다면 대대장님이 계신 곳으로 좀 안내해 주겠나? 이미 몸수색은 끝마쳤네.”


그러자 그 토끼귀의 하사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듯 그대로 뒤돌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와...그런데 이 사람 진짜 예쁘다. 어어, 와...왓츠 유어 네임?”


작은누나가 빈곤하기 그지없는 영어실력으로 말을 걸자, 순간 토끼귀가 살짝 움직이더니, 이내 그녀가 반쯤 뒤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미아.”


청아하다고 해야 하나, 도도한 이미지에 맞는 쿨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인상 자체도 마치 내 동생인 아린이와 비슷해서,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내가 뭘 잘못했나? 라는 생각이 들어 괜히 움츠러들게끔 만드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아린이야 가족이니 익숙해졌다고 쳐도, 생판 처음 보는 남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작은누나는 괜히 부축을 받은 채로 그 자리에서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녀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니라.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에린의 말을 뒤로한 채 계속해서 우리는 주변에 있던 군인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텐트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마침내 주변의 다른 2인용 텐트들보다 큰 월 텐트 앞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이 부대의 상급자 내지는 책임자들이 모여있을 지휘소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처음부터 계속 의구심이 들었지만 묵혀두었던 건데, 방금 전 텐트 밖에 세워진 차량을 보고 대략 확신이 들었다.


리스나 에린의 복장이며 내 눈앞에 있는 차량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세계는 시기상으로 치면 대략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 사이, 그러니까, 한 30년대 초중반쯤의 미국인 것 같았다. 에린이 나에게 겨누었던 소총은 아무리 봐도 미군의 M1903 스프링필드에, 쓰고 있는 헬멧은 정면에 미 해병대 로고가 박힌 영국제 브로디 헬멧, 그리고 입고 있는 군복 역시 1차대전기의 미 해병 군복을 소폭 개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텐트 앞에 세워진 차량은 아무리 봐도 미국의 T형 포드를 군용으로 개조한 소형 트럭이었다. 세상에, T형 포드라니, 박물관에서나 겨우 볼 수 있을법한 자동차가 길가에 버젓이 세워져 있으니, 일단 확실히 장식용이 아님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조수석에는 보란 듯이 냉각수통을 달고 있는 1917 브라우닝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는 등, 영락없이 1차대전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한, 그야말로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앞서가던 미아 하사가 내 누이들을 부축하고 있던 리스와 에린을 대신해 텐트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한 사람과 함께 다시 텐트 밖으로 나왔다.


미아 하사가 데리고 나온 그 여성은 키가 정말 크고, 긴 흑발 생머리에 매우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한 고양이 수인이었다.

mmiz 2화 일러 1 완성.jpg

그녀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뒤에 난 검고 긴 꼬리로 텐트 벽을 탁탁 때렸다. 그렇게 잠시 우리를 노려보더니, 이내 입을 떼었다.


“그래, 이 얼빠져 보이는 녀석들이 거수자란 말이냐?”


큰 키와 사나운 외모에 어울리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아까의 미아 하사 때와는 다른 의미로 움츠러들었다. 이건 마치 눈앞에서 맹수 하나가 으르렁거리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게다가 뭐냐, 그 타이어를 둘둘 감아놓은 듯한 꼬락서니는? 어디 서커스단 출신이라도 되는 거냐?”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복장도 이상하고 멍청하게 생긴 녀석들이 뭔가 대단한 이유를 가지고 침범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생긴 것처럼 멍청하게 놀러다니다 길을 잃고 작전지역으로 들어온 거겠지. 그렇지 않나, 미아 하사?”


뭐? 거참. 아무리 무섭게 생겼어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 보고 대놓고 저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총 든 무서운 늑대 누님 앞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괜히 혼자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에린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내 뒷덜미를 살짝 잡으며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내 노파심에 미리 일러준다만 괜한 짓은 말거라. 원래 성격도 불같거니와 해병대 SDI 출신인지라 사람 복장 뒤트는 데에는 도가 트인 사람이니라. 건드려 봤자 너에게 좋을 것 하등 없으니, 괜히 험한 꼴 보고 싶지 않다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라. 게다가 넌 지금 여차하면 사살당할 수도 있는 입장이 아니더냐.”


엑, 방금 에린의 말을 듣고 문득 하트먼 상사가 도넛으로 파일 훈련병을 죽도록 갈궈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그 양반도 해병대 선임교관이었구만 그래. 하지만 난 자기 밑에 있는 훈련병도 아닌 엄연한 민간인인데 말이지...


뭐, 일단 여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다 소환의 여파인지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통에 더 이상 골 때리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더 볼게 있나? 난 순찰 좀 다녀올 테니까 헌병에 인계하기 전까지 알아서 지휘소 안에 구류해 놓도록. 저번처럼 헛짓거리를 했다간 내 손수 그 무겁고 커다랗기만 한 엉덩짝 모양새를 원숭이 친구로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하도록.”


그녀는 리스와 에린을 노려보며 내뱉듯 한마디하고는 당번병으로 보이는 한 병사와 함께 다른 텐트들이 있는 쪽으로 가 버렸다.


“어차피 순찰 핑계로 또 장교부터 병사까지 골고루 털러 다니는 거겠지, 뭐. 교관 생활을 오래 했다 쳐도 처음부터 다시 장교 교육 이수해서 작대기를 달았으면 장교답게 행동해야지, 저 나이에 중령씩이나 되어서도 교관 시절 습관을 못 버리면 어떻게 해? 콩가루 부대가 따로 없다니까 진짜.”


쯧, 하고 크게 혀를 차며 리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선임교관까지 단 양반이 뭘 어떻게 해야 장교 교육을 다시 받고 중령까지 올라간 건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앞으로 나와 크게 엮일 일은 없을 사람 같으니 에린 말처럼 괜히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휘소 의자에 앉아 누이들과 리스, 에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웬 여러 대의 차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우리가 있는 지휘소 앞에서 멈춰섰다.


그와 동시에 텐트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입구 쪽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지휘소 문을 탁 제치며 웬 검은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한 여성이 들어왔다.


아까의 대대장같은 큰 키에 머리색은 은색에 가까운 하늘색, 그리고 이 사람 역시 고양이 수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쪽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마찬가지로 경호원 포스를 풍기는 키 큰 누님들 네댓 명이 그녀와 같은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는, 어느새 스크럼을 짜고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부터는 왜인지 심장에 안 좋은 일들만 연달아 일어나는 것 같은데, 이건 그 중에서도 내 기준으로 탑이 아닌가 싶었다. 하다하다 이세계에서 황금 포드 트럭에 태워져 남산으로 끌려가게 되는 걸까.


그런데 놀랍게도 마치 당장이라도 물이 정답을 알고 있다며 내 모가지를 잡아 수조에 쳐넣어버릴 것만 같이 생긴 이 누님은, 그 자리에서 선글라스를 벗어 보이며 내게 사죄하듯 깊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저희의 실수로 인하여 선생님께서 이런 고초를 겪게 해 드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곧, 이 부대에서의 간단한 인계 절차를 거친 뒤 왕성 국무부 대표인 저, 리안 스미스가 책임을 지고 선생님과 일행 분들을 안전하게 왕성까지 모셔갈 터이니, 부디 이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아까의 대대장처럼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꽤 날이 서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눈을 감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한 태도 때문인지 선글라스를 썼을 때처럼 그리 위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과 정중한 태도가 겹쳐 뭔가 스마트해 보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나저나 왜인지 옆에 있던 리스와 에린, 미아 하사는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어서는, 바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러더니 옆에서 낭창하게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는 마치 “도대체 진짜 뭐 하는 놈들이지?” 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 오고 있었다.


“아, 당신들도 편하게 앉아 있어요. 희한하게도 한 텐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구면이군요. 세상이 참 좁네요.”


아무래도 리스, 에린, 미아 하사와는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여기에 우리 빼고는 그 세 사람 뿐이니 구면인 사람 셋이라면 당연히 그들이겠지.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세 명이 자세를 쉽게 풀지 않자, 눈치를 보던 우리도 일어나야 하나 어째야 하나 하고 있는데, 자신을 리안이라 밝힌 그 여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문께서는 저희에게 매우 중요한 분이십니다. 지금 당장 조립식 소파를 준비해 드리겠으니 부디 일행분들과 편히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편히 앉아있느냐고요..


--------------------------------------------------------------------


하지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뒤에 있던 경호원 누님들이 일사분란한 동작으로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선가 간이용 소파 키트를 가져와 뚝딱뚝딱 조립해서는 내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말이 간이용 소파지, 4~5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소파였다. 도대체 이런 걸 왜 갖고 다니는 거야?


“여왕 폐하께서 행차하실 때 사용하시는 소파입니다. 폐하께서 편히 계시라고 고문께 친히 내어주셨으니 부디 부담없이 사용하시길,”


여왕 전용 소파라니, 그딴 걸 부담없이 쓸 수 있겠냐...? 어쩐지 조립 키트 치곤 소파 가죽부터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이 들더라니.

아무리 여왕이 나 쓰라고 빌려줬다고는 하지만, 사용인이 사용인이다 보니, 왜인지 저절로 앉는 동작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게 여차해서 이런 걸 망가뜨렸다 변제하라 하기라도 하면 당연히 엎드려 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단 쓰라고 줬으니 쓰기는 써야겠지.

먼저 큰누나를 편하게 앉히고, 차례로 다른 사람들이 앉고도 꽤나 널찍한 공간이 남아서 나 역시 소파 끝자락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텐트 바깥에서 급히 달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까의 그 대대장이 숨을 헐떡이며 텐트 문을 열어젖히고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아니, 그렇게 눈치를 살필 거면 텐트 문은 왜 팍 하고 열어젖혔대? 그녀는 경호원들에게 가려져 있던 내 앞의 누님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붙여 도착을 보고했다.


“5...54대대장 클라크 핸더슨 중령입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54대대를 대표하여 국무장관 각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자..자네는 어서 차를 내오게, 어서!”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볼에서는 몇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마치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자신을 리안이라 밝힌 그 누님은 방금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가봐야 하니 차는 사양하겠습니다. 우선 시간이 없으니 간략히 전언을 하겠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저희 왕성 국무부의 주요 인물입니다. 다만 저희의 행정적 오류로 인해 이 지역에 잘못 들어오게 되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는 왕성으로 속히 모셔 가야 하니 부디 대대장님의 재량으로 이 일은 어떻게 좀 무마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화려한 금색 문양으로 장식된 편지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그 편지지의 중앙에는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붉은 실링 왁스가 찍혀 있었는데, 그곳엔 TOP SECRET이 아닌, 마치 미국의 국장과 흡사해 보이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편지지를 본 대대장은 숨을 크게 삼키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공손하게 받아들고는, 함부로 뜯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편지지를 받아든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무, 물론입니다! 각하께서 여기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테니, 부디 걱정 놓으시길..!”


“그럼 저희는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괜히 여기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보안상 좋을 것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분들을 처음 발견한 것은 누구죠?”


리안의 물음에 리스와 에린이 엉거주춤하게 손을 들자,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 역시 동행해 줄 것을 대대장에게 부탁했다. 물론 대대장은 곧바로 승낙했고.


이어서 리안이 눈짓하자, 양복 누님들은 마치 에스코트하듯 우리 주위에 스크럼을 짜고 둘러싸서는, 텐트 밖의 리무진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리무진에 우리를 태운 뒤, 차례대로 줄을 지어 부대 입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니 대대장을 비롯한 간부로 보이는 사람 여럿이 떠나가는 우리 등에 대고 경례를 하고 있었고, 리안이라는 여자는 내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앉아 간략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왕성에 도착하면 여왕 폐하께서 직접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다만, 우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기 오시게 된 것일 테니 간단히 정황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르티아라고 불리는 이 나라의 북부 지방 전체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북부 워싱턴의 영주인 엘렌 공작이 그 가문의 비호를 받는 휘하의 귀족 집안들과 결탁을 맺고 상당한 수의 사병을 모아온 정황이 포착된 지 약 2년이 지났으며,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연합을 결성해 자치를 주장하며 쿠데타를 빙자한 내전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지금 저희랑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 아까 영훈이를 고문이라 부르던데, 설마 전쟁과 정치에 이용하고자 불렀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거기까지 들은 큰 누나의 물음에 리안은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약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저희 정규군의 숙련도나 장비, 인적 자원의 수는 전에 비해 말 그대로 없다시피 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당파 귀족들 사이에서 나온 대안이 이 세계와 비슷한 역사를 거쳐갔으며, 보다 수십년 앞선 기술을 가진 세계의 국가에서 군사 고문을 모셔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왕당파 중에서도 1차대전의 참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장군이나 귀족들 중에는 이를 탐탁잖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 귀족과 장군들의 오히려 그런 경험을 했으니 그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에서 이끌어가기 위해 고문을 모셔와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되어, 결국 일선에서 지휘를 펼칠 수 있는 지휘관 겸 군사고문을 모셔오는 방향으로 사안이 결정되게 되었다고 한다.


“네? 그럼 왜 저를 부른거죠? 저는 그냥 평범한 학생일 뿐이고, 그럴 거라면 차라리 미군이나 한국군 장교를 데려오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그러자 그녀는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서 신문지 한 장을 건네받아 내게 보여주었다. 익숙한 글씨가 쓰여진 그 신문은...내가 살던 지역 주간지의 최신 호였다.


[육군 참모 총장배 전국 고등학생 국가 안보 지식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00고등학교 1학년 한영훈]


“...설마, 지금 이거 하나로 저를 부른 건 아니죠?”


제발 그녀가 고개를 젓기 바랐지만, 그런 내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맞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실전 경험에 관한 유력한 후보지였던 미국이나 한국 출신의 장교로 소환을 진행하기 위해 제한적이긴 하지만 정보원을 통해 정보 수집을 하던 도중, 우연히 그 지역에서 정보 수집 중이던 정보원으로부터 이 대회에 관한 정보를 받게 되었고, 저희가 원하는 인재에 부합하다고 생각하여 모셔 오게 된 것입니다.”


말도 안 돼. 내가 치른 대회는 어디까지나 전국에서 고등학생들을 선발해 유명한 근대 전쟁의 역사와 작전에 관한 상식을 맞히는 수준의 작은 대회지, 절대 부대 지휘나 전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역량을 요구하는 대회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만 들으면 그들은 마치 날 뭔가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고 데려온 것만 같아 보였다.


내가 황급히 이 점을 설명하자, 이번엔 리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이내 이런 일도 예상했다는 듯, 아니면 마치 체념했다는 듯 눈을 감고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뜸을 들이다 담담하게 말했다.


“...이세계인을 소환하는 것은 저희 여왕께서 일생에 부담하시는 마력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 한계인 5번만 가능합니다. 그것도 연달아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음 소환은 여왕님께서 체력과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신, 적어도 몇 년 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게다가 소환에 반대했던 귀족 파벌들 역시 이 일을 문제삼을 가능성이 크기에, 저희 역시 이 일을 완전히 무마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희 정보력 수준에도 한계가 있어 이런 일을 완전히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정말 죄송합니다.”


리안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목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올라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뭐야, 결국 자기네 사정을 위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멋대로 엉뚱한 사람을 데려다놓고는, 더군다나 내 가족들까지 휘말리게 해 놓고는, 뭐? 자기네 입장과 사정이 있어 못 돌려보내주니까, 나더러 꿩 대신 닭처럼 언제 총알에 벌집이 될 지 모르는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라는 뜻 아냐? 그야말로 이건 머리에 총 맞은 소리다. 사람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그대로 손을 들어 내 앞에 고개 숙인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는데, 의외로 그녀는 나에게 붙잡힌 채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는, 그저 힘없이 고개만 계속 떨구고 있었다. 옆의 경호원들 역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뿐, 딱히 내 행동을 제지하려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게까지 느껴져 그 상태에서 다시 한번 그녀를 윽박지르려는데,

의외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제지한 것은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던 큰누나였다.


나를 입양해 주신 양부모님마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이런 상황 판단에 있어선 늘 냉정을 유지해가며 가장으로서 우리 남매를 이끌어왔던 큰누나는, 리안을 붙잡은 나를 끌어안으며 마치 일부러 저들에게 들으라는 듯 내게 말을 건넸다.


“그만 하렴, 영훈아. 아무리 저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고 우리를 돌려보내 줄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잖니? 아마 네 행동을 보고도 이 사람들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다는 건, 네 이런 반응 정도는 이미 예측하고 각오했다는 뜻일 거야. 네가 전쟁에 나가게 된다면 누나도 같이 따라가서 널 지켜줄테니 일단은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러자 내게 강하게 어깨를 붙들린 리안 역시 말을 이었다.


“누이분의 말씀대로, 정말 죄송하지만 선생님 일행을 돌려보내 드리기는 어려우며, 지금 고문께서 느끼실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선생님이 아닌 누구일지라도 갑자기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면 당연히 같은 반응을 보이시겠지요. 보시다시피 경호원들에게도 이미 말을 전해두었으니, 선생님께서 그것으로 만족하신다면 부디 원하시는 만큼 저를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저는 페하를 보좌하여 국정을 이어가야 하는 몸이니, 부디 목숨만은 거두어가지 않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말한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외무를 이끌어가는 국무 장관이라는 사람이 직접 자기 몸을 어떻게 해도 좋으니 도와달라고까지 하다니, 마치 무언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배 째라는 식의 대응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쯤 가면 정말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화나고 억울한 감정이 계속 교차했지만, 어차피 큰누나 말대로 계속 화내고 저항해봤자 딱히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일단 내가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부터 물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전에, 나는 어깨를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한 마디 했다.


“...대신 이것 하나만은 약속해 주세요.”


그리고 리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가족과 관장님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하고, 절대 당신들 일에 말려들게 하지 마세요. 내가 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약 이 사람들한테 문제 생기면 난 내 모든 힘을 다해서 당신들 일을 방해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알았어요?”


이게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협이다. 아마 이 사람들에게는 그저 가소롭게 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리안은,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가족분들과 함께 오신 여성분의 안전은 제가 직접 책임질 테니, 부디 걱정 말아주십시오.”


그러더니, 그 날카로운 눈꼬리를 조금 늘어뜨리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저희를 도와주시는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저한테는 선택권이 없잖아요. 다만 군인도 아닌 제가 총알받이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이런 대회에서 수상을 하셨다면 근대 군사작전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이 있으실 테니, 분명 큰 도움이 되어주실 겁니다.”


리안이 저렇게 말한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상태가 당나라 군대라 할지라도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이 나라 장교들이 나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을 텐데, 나보고 그런 사람들을 지휘하라는 건가?


“게다가 1차 대전에 참전한 베테랑 장교들도 분명 남아있을 텐데, 제 존재 가치가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1차 대전 이후에도 귀족들 간의 파벌화와 세력 확장, 그리고 암투가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기존 장교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귀족가의 자제들은 물론, 사병 출신에서 장교가 되어 출세한 이들 역시 이런 사건들에 휘말려 처형되고 암투에서 희생되어서 이제는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 장교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그만큼 사람이 줄어드는 바람에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까 말씀드린 엘렌 공작가가 상당히 큰 사병을 보유하고 있고, 육사를 졸업하고 복무 연한을 채우자마자 군을 그만두고 귀족가의 사병에 들어간 이들도 많아서 정규군의 규모마저도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어 장교와 사병 모두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정규군이 와해 직전의 수준이 되어 왕가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고, 마지막 카드 삼아 아까 설명했듯 여왕의 소환 능력을 이용해 우리 세계에서 군사 고문을 부르게 되었다는 뜻인가.


‘..그럼 더더욱 군인을 불렀어야 하는 거잖아..’


마지막 카드인 소환에서 안전빵인 군인을 놓아두고는 지역 주간 신문에서 잠깐 본 나를 별 조사도 하지 않고 냅다 부르다니, 이젠 약간 어이가 없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계속 이런 말만 반복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제가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킨 일은 최대한 할 수 있게끔 노력은 해 볼게요. 뭐, 결과야 어찌 될지 전혀 모르지만요.”


그러자 리안은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도 아까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나아져서,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 보았다.


“그러니까, 저는 지휘관으로서는 어떤 부대를 지휘하게 되는 거죠?”


“워싱턴 소재의 독립 제 22 경기병 중대입니다. 최근 실험적으로 해외로부터 새로운 장비를 들여오면서 조만간 인력이 더 증편될 예정입 니다만, 아직까지는 100여명 정도의 작은 부대이지요.”


“...저는 말 탈줄 모르는데요..”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도 소수의 진짜 기병대가 운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지휘하시게 될 부대는 이미 차량화가 완료된, 전차를 주력으로 삼는 부대랍니다. 기병대란 명칭은 전통에 따라 계승된 이름일 뿐이죠.”


아, 하긴. 이미 기병대가 도태되어갈 시점에 맞춰 미군 역시 2차 대전 이전에 대부분의 기병대를 폐지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여기 사정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리안 입으로 우리 세계와 비슷한 역사를 거쳐간다고 했으니, 아마 비슷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되겠지.


“슬슬 왕성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적어도 10분 내로는 도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시가지로 진입한 우리 옆에는 경찰 오토바이들이 에스코트를 위해 따라붙었다. 새까만 경찰 오토바이의 연료통에는 ‘METROPOLITAN POLICE DEPARTMENT’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걸 보아하니 확실히 이곳이 수도 워싱턴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리안은 다시 선글라스를 착용하며 내게 혹시 추가적으로 질문할 것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지금은 딱히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 방금 전부터 빤히 정면을 주시하던 작은 누나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대고 무어라 말을 했다.


“어?...뭐, 뭐라고?”


...하아, 이 철딱서니 없는 누나는 정말이지 황당하면서도 곤란한 말을 내게 통역해 달라며 부탁해 왔다. 나는 진심으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점에선 방금 전까지의 험악한 상황이 무색하게도 이런 질문을 통역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누나의 배짱이 어찌 보면 대단하게도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아까의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던 터라, 이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누나의 질문을 통역할까 어쩔까 계속 고민하던 차에 작은누나 앞에 앉아 있던, 그러니까 아까부터 우리 누나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경호원 하나가 마치 개미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혹시, 소녀가 아가씨께 무언가 결례라도 끼친 것인지요...?”


뭐랄까, 인상과 어울리는 상당히 높은 톤의 목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숫기가 있어보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으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우리 누나에게 노려지고 있는 모양이네요. 우리 작은누나는 푹신하고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물론 그 경호원도 경호원답게 체구가 좀 큰 편이긴 했지만, 경호원이라기엔 좀 여리여리한 얼굴 인상에, 마치 장모종 고양이처럼 컬이 풍성한 주홍빛 머리칼, 그리고 특히나, 옆에 있던 리안이나 다른 수인 경호원들보다도 유달리 푹신하고 윤기가 흘러 보이는 탐스러운 여우 귀와 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오죽하면 자리가 꽤나 널럴했음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옆으로 빼서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정말 컸다;.) 안타깝게도 그게 우리 누나의 센서를 건드려 버리고 만 모양이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풀린 다음부터는 이상하게도 자기 앞만 빤히 쳐다본다 했더니, 그새 자신을 만족시켜 줄 목표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저것 봐. 얼마나 무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한 체구 한다는 경호원이 마치 고양이 앞의 사냥감마냥, 자신보다 체구도 한참이나 작은 누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사람, 숫기는 없어 보여도 아까의 말투나 옷에 달린 금색 칼라장이 꽤나 화려한 걸로 봐서는 꽤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 같은데, 이런 말을 해도 정말 괜찮을까? 그러고 보니 아까 부대에서 월 텐트 안으로 리안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녀가 대동했던 경호원들 중에서도 못 봤던 얼굴 같은데...


“그...저희 누나가, 당신의 귀랑 꼬리가 너무 예뻐서, 괜찮으면 조금만 만져 봐도 되겠냐고 물어보는데요...”


슬쩍 옆을 보니 이제 누나는 마치 인간을 눈 앞에 두고는 죽통을 입에 물고 참던 네O코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물론 저런 표정이긴 하지만 당연히도 딱히 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끌어안고 마음껏 쓰다듬고 싶어하는 것일 뿐.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선 좀 자제해줬으면 했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리안은, 정말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 모양으로 늘어뜨리고는 그 경호원을 바라보며 무어라 한 마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에 포함된 단어 하나는 영어가 쥐약인 우리 작은누나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단어였지만, 또한 들은 순간 우리를 그대로 얼어붙게 만든 단어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코델리아 왕녀 전하(princess Cordelia)...”


...뭐?


작가의말

거진 한달 만에 인사를 올리게 되었네요. 내용을 중간에 자를까 하다가 너무 애매해서 분량을 조금 많이 올렸는데, 지루하지는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조만간에 프롤로그와 1화에 삽화도 추가될 에정이니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68 bookbug3..
    작성일
    20.06.25 04:05
    No. 1

    밀리터리 마니아 이후로 오랜만에 보네요 작가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bookbug3..
    작성일
    20.06.25 04:06
    No. 2

    그때처럼 다시 열심히 정주행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카츄샤
    작성일
    20.06.25 18:16
    No. 3

    잊지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학업이 겹쳐서 집필이 많이 늦어지고 있지만, 곧 방학 시즌이니 그때 또 열심히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짤막한 표지 단편. ☆(새 표지 공개!)☆ +2 21.12.15 133 0 -
공지 새로운 표지 러프입니다! 21.12.12 107 0 -
공지 (93)92화.[꽃이 지기 전에] 에피소드는 10월 21~22일 사이에 업데이트됩니다. 21.10.20 95 0 -
공지 연재 관련 공지. 21.08.11 89 0 -
공지 여우놀음 2화는 8월 11일에 공개됩니다. 21.08.10 100 0 -
공지 연재 관련 공지. +2 21.08.02 70 0 -
공지 (53)52화는 7월 9일에 업로드됩니다. 21.07.08 59 0 -
공지 (46)45화는 7월 3일 업로드됩니다. 21.07.01 58 0 -
공지 작품 제목 변경 공지 21.06.17 91 0 -
공지 생존신고 21.05.22 111 0 -
공지 We few, we happy few 연재 관련 공지입니다. +2 21.03.18 103 0 -
공지 (21) 20화.[Operation, Suicide squad](3) 에 삽화가 추가되었습니다. 21.03.14 84 0 -
공지 (17) 16화.[사라진 마틸다 생도] 에 삽화가 추가되었습니다. 21.02.27 156 0 -
공지 1화에 삽화가 추가되었습니다. 21.01.30 135 0 -
공지 표지 변경 공지 +4 21.01.14 107 0 -
공지 댓글을 달 수 있도록 수정했습니다. 20.12.11 88 0 -
공지 프롤로그에 삽화가 추가되었습니다. 20.11.24 195 0 -
119 (118)117화.[엘프 자매의 보은](1) 22.03.08 131 0 12쪽
118 (117)116화.[퀸즈 프로토콜](7) 22.03.07 69 0 12쪽
117 (116)115화.[퀸즈 프로토콜](6) +2 22.02.26 93 1 13쪽
116 (115)114화.[퀸즈 프로토콜](5) 22.02.24 77 1 9쪽
115 (114)113화.[퀸즈 프로토콜](4) 22.02.23 68 1 13쪽
114 (113)112화.[퀸즈 프로토콜](3) +2 22.02.14 80 1 11쪽
113 (112)111화.[준비 작업](3) 22.02.11 82 1 13쪽
112 (111)110화.[준비 작업](2) 22.02.05 78 1 10쪽
111 (110)109화.[준비 작업](1) 22.02.01 80 1 21쪽
110 (109)108화.[퀸즈 프로토콜](2) +2 22.01.25 88 1 11쪽
109 (108)107화.[퀸즈 프로토콜](1) +2 22.01.23 101 1 7쪽
108 (107)106화.[해바라기](5) +2 22.01.20 157 1 16쪽
107 (106)105화.[해바라기](4) 22.01.16 163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