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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님의 서재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던전에서 하는 일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부기스
작품등록일 :
2018.06.28 21:32
최근연재일 :
2019.01.07 01:2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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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02
추천수 :
496
글자수 :
34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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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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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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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21쪽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1)

DUMMY

***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1) ***


----------

[발광석(일반)]

던전에 산재한 잉여 마력을 에너지 삼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광석.

마력이 응집된 곳에 생겨나는 광석으로 빛이 잘 들지 않는 던전 또는 장소에서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발광석은 정말 비싼 가격으로 인해 수요가 많지는 않지만, 에너지 대비 효율이 높아 부유한 던전 로드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

마력이 유지되는 한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


"......."


라온은 발광석이 잔뜩 깔린 던전을 거닐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이······."


통통한 그의 볼살은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고 그의 매력적인 입술은 오리처럼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표정만 보더라도 뭔가 원하는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듯했다.


"주군,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오늘은 분명 하수인 녀석들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분명히요!"


불만이 가득한 라온의 옆에서 중년의 타천사, 경비대장 '아이론'이 라온을 위로했다.

오우거 한 마리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공을 인정받아 경비대장으로 급속 승진한 날개를 잃은 타락한 천사 아이론은 2미터는 되어 보일 정도로 큰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니 거한이었다.

움직이기 편한 가죽 갑옷과 등 뒤에 미어진 커다란 대검.

그는 해골 병사 메돈과 마찬가지로 대검을 사용하는 전사였다.

대검술에 대해선 메돈도 고개를 끄덕여 줄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던전 방어에도 뛰어난 자질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라온의 던전을 최전방에서 지키는 방패, 경비대장 아이론.

아이론은 지금 경비대장으로서 라온을 보좌하는 중이었다.


"주군, 기분을 푸십시오! 오늘은 분명 하수인 녀석들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굵직한 목소리로 아이론이 라온을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위로에도 라온은 튀어나온 입을 집어넣지 못하고 칭얼거렸다.


"도대체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지? 응? 천사와 악마는 현재 싸우고 있는 중 아니었나? 내 던전을 확인하고 바로 공격해야 정상이잖아. 이놈들 너무 안일한 거 아니야? 아니면, 게이트가 오지에 생성되었나?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천사의 하수인이란 놈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하아······. 설마···! 내가 너무 만만해서 그냥 내버려 두는 건가? 가만히 놔둬도 상관이 없어서!? 아오! 이놈의 차원 게이트는 밖으로 내보내 주지도 않고 말이야! 답답해!"


라온이 차원 게이트에 출근 한 지 벌써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타차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와야 할 천사의 하수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라온도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비해 깊은 고민도 하며 기다렸지만 단 한 사람도 공격해오지 않았다.

라온의 던전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것일까.

아무리 오매불망 게이트 앞에서 기다려도 천사의 하수인들은 라온의 던전에 오지 않았다.

이제는 상급 악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하수인이라도 찾아왔으면 싶을 정도였다.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열흘이 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이에 라온은 도리어 화가 났다.

자신의 던전이 얼마나 얕보였으면, 녀석들에게 ‘방치’ 당하고 있는 것일까.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상황은 분명 좋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라온은 이 상황이 싫었다.

천사들에게서 자신의 던전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빨리 '정보'를 얻어 다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라온의 어긋난 생각이 공격해 오지 않는 천사의 하수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라온은 점점 비뚤어지고 말았다.


'비둘기 녀석들. 내 던전은 고작 하급이라 이거지!?'


라온은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잡지 않고 천사의 하수인들을 씹었다.

물론, 어느 누가 감히 하급 악마의 던전을 '고작'이라고 칭하겠냐마는.

이미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라온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생각이었다.

라온의 뒤틀린 생각은 이러했다.

적들은 라온의 군대가 아무리 던전 밖으로 새어 나와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이렇게 자신의 던전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리라.

빠직.

미간에 힘줄이 돋아난다.

라온은 30일 뒤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천사의 하수인과 인간들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나는 고작 하급 악마라 이거지···? 나참···!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천사의 하수인들 정말 대단하시네! 하! 고작 하급 악마가 이거 ‘위대한’ 천사의 하수인을 불쾌하게 할 뻔했어!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구만! 그래! 어!? 내가 잘못했네! 내가! 내가 고작 하급 악마라는 게 잘못이야! 어!? 이 개 같은 비둘기 자식들! 두고 봐. 하급 악마를 무시해? 후우. 조금만 기다려라. 고작인 하급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얼마나 무서운 새끼인지 보여줄 테니까!'


라온의 그 비뚤어진 생각은 점점 잘못된 길을 향해 나아갔다.

정말 오늘이라도 녀석들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정말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지도 몰랐다.


‘뒤졌어. 싹 다 갈아버리겠어.’


라온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어가며 경비대장 아이론과 함께 발광석이 만연한 던전을 거닐었다.

아이론은 자기 혼자 풀이 죽었다가 자기 혼자 뜨겁게 불타오르는 라온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상태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걸 아이론은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차원 게이트에 도착해 오늘도 천사의 하수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자신의 주군이 다시 의욕을 불태우면 좋은 일인 거지.

아이론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며 경보하듯 걸어가는 라온을 열심히 뒤쫓았다.

30일 뒤면 만나고 싶지 않아도 적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지직! 지지직! 여기는 종달새···! 여기는 종달새···! 올빼미! 올빼미 응답하라!


그때, 라온의 손에 들려 있는 마력 무전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올빼미'를 부르는 '종달새'의 목소리에 라온은 엄청난 속도로 반응했다.

'종달새'는 차원 게이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이다.

그 경비병들이 이런 급박한 통신을 걸었다는 것은······.


"야, 종달새! 올빼미다! '병아리'가 왔나!?"

- 여기는 종달새! '병아리' 침입! '병아리'가 침입했다고 알린다! 그런데 ‘병아리’가···! ‘병아리’가 피 묻은 칼을 들고 뛰쳐 들어왔다! 지원! 지원 바람! 숫자가 너무 많다!

"오케이! 너희들은 다 뒤로 빠져! 게이트는 일단 내어줘라! 내가 지금 간다!"

- 롸··· 롸저댓!


라온은 경비병의 입에서 병아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달려나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병아리'들이 던전에 들어왔다.

빨리 마중 가야만 한다.

라온이 타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부리나케 뛰어갔다.


"주군···! 저도 같이···!"


그의 곁에서 무전을 함께 들었던 아이론도 라온을 뒤따라 뛰쳐나갔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는 라온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아이론은 라온의 뒤꽁무니를 헐레벌떡 쫓아가면서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라온을 쫓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비대장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여기는 뻐꾸기! '병아리'가 던전에 침입했다. 주둔지 내의 모든 병력은 게이트로 모이도록 하라! 올빼미가 병아리를 잡아먹는다! 어서 움직이도록!"


아이론의 무전을 들은 던전 내의 타락한 천사들이 차원 게이트를 향해 집결한다.

천사와 악마의 첫 번째 전투.

공포의 악마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이 이제 곧 시작되려 한다.








***


한 시간 전, 던전 ‘타락한 천사의 요람’으로 통하는 ‘던전 게이트’ 앞의 공터.

도시 실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공터에는 이백에 달하는 용병대 ‘늑대 이빨’과 오십의 짐꾼들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나 있었는데.

오랜 행군은 아니었는지 그들에게선 지친 기색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실비실한 짐꾼들조차 아직 생생할 정도였다.

사실 라온의 던전 게이트가 생성된 위치는 도시 실리아의 서문에서 걸어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다.

던전 내부를 공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던전 게이트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 일찍 던전 게이트에 도착한 원정대는 휴식과 함께 던전 공략을 위한 마지막 점검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속닥거리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대장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바로 작업 할까? 아니면 안에서 해?”

“음······. ‘도축’ 작업을 완료하고 던전을 공략해야 될 것 같아. 괜히 짐꾼들을 던전 안으로 데려갔다가 훼손 되기라도 한다면 값이 많이 떨어지니깐, 지금 바로 ‘도축’을 시작하도록 하지. 에론, 단원들에게 알려라.”

“좋았어, 으흐흐! 오랜만에 손맛 좀 보겠구만. 나는 탱글탱글한 눈알을 뽑을 때가 제일 짜릿하더라. 그럼 나 먼저 작업하러 간다. 대장도 천천히 오라고! 제일 실한 놈으로 남겨둘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에론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짐꾼들을 향해 이동했다.

걸어가는 도중 동료들에게 신호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흐흐흐!”


에론의 신호를 받은 용병들이 군침을 흘리며 짐꾼들을 둘러싼다.

굶주린 짐승처럼 그들의 눈에는 스산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론은 그런 동료들을 돌아보며 자신들만의 신호를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간격을 좀 더 좁혀! 한 명도 놓쳐선 안 된다! 퇴로를 차단해! 너희 둘은 뒤로 빠져 혹시 모를 목격자를 제거해!’


에론의 지시를 받은 용병들이 퇴로를 차단한 후 천천히 짐꾼들에게 다가갔다.

고작 F등급인 짐꾼들이 D급 용병단의 용병들을 떨쳐내고 도망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쪼이는 맛이 있어야 도축 작업도 재밌는 법이다.

희희낙락거리며 ‘범죄자’들이 토끼몰이를 시작한다.


‘자! 마음껏 즐기라고! 으흐흐!’


서서히 짐꾼과 용병들 간의 거리가 좁혀진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순간에도 무지한 짐꾼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주변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뭐···. 뭐야···?”


차원 난민 박찰선은 시커먼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용병들로 인해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무기를 꺼내 드는 그들의 행동에 찰선은 당황하고 말았다.


‘왜?’


찰선의 의문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껴주기까지 했던 에론이 찰선을 향해 소름 돋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찰선은 ‘친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말을 잃고야 말았다.


“이런, 이런! 우리 귀여운 토끼들! 뭘 그렇게 멀뚱멀뚱하게 쳐다보실까? 우리 서로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고! 설마 아직까지 상황파악 못 한 병신 새끼는 없겠지? 으흐흐!”


에론이 반응하지 못한 짐꾼들을 향해 말했다.

에론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짐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늦어도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이미 퇴로는 막혀있었으며 범죄자들의 칼날은 휘둘러지고 난 후였다.


“아아악!”


촤아아악!

제일 앞에 있던 짐꾼 한 명이 용병의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질퍽한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짐꾼들이 소리 지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하얘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는 녀석.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살려 달라 애걸하는 녀석.

어린아이 마냥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녀석.

그리고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녀석까지.

공터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갔다.


“야, 야, 야! 조심히 다뤄! 괜히 잘못 찔렀다가 장기에 손상이라도 가면 값어치 떨어진다고! 그런 것들은 너희들 몫에서 다 삭감할 거니깐 알아서 해! 알겠어!?”


에론의 잔인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짐꾼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죽은 것 다름없는 상태였다.

용병들의 칼날에 짐꾼들의 눈, 이빨, 배 속의 장기들, 심지어는 똘똘이까지 잘려나가고 있었다.

찰선은 그 광경을 목격하며 그저 멍하니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의 친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찰선의 검은색 눈동자엔 믿었던 친우에 대한 배신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지?

친구라고 생각한 네가 어째서!

찰선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에론이 이렇게 자신을 배신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향 대한민국에서도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던 찰선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친구였고 처음 겪어 본 배신이었다.

에론의 입장에서는 배신이 아니겠지만, 찰선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에론은 찰선에게 있어서 낯선 세상에서 처음 만난 은인이었으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구였는데.

찰선의 고개가 푹 떨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던 친우가 사라지니 텅 빈 공허함만이 찰선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에론이 그런 찰선에게 말을 걸었다.


“여! 차르손! 왜 고개를 숙이고 있어?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하하! 상태 안 좋으면 제값을 받기 힘든데. 아프지 말라고, 브로! 넌 내가 직접 도축해 줄 테니깐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자, 이리와. 내가 아프지 않게 해줄게. 으흐흐흐! 일단 눈깔부터 시작하자고.”


에론이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온다.

섬뜩한 오한이 찰선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찰선 근처에서는 이제 비명이 더 이상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은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일부는 입을 틀어 막힌 체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남색을 즐기는 용병에게 후장을 뚫린 짐꾼도 있었다.

찰선은 멍하니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빨리 끝내자고 내가 너랑 친분도 있으니 고통스럽지 않게 해줄게. 이리 와봐, 이 새끼야.”


에론의 시커먼 손이 찰선에게로 뻗어간다.

찰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왜······. 왜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자신은 이런 낯선 세상에 혼자 떨어져 이런 잔인한 사건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찰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천사와 신을 원망했다.

에론의 검붉은 손이 찰선의 어깨에 닿았다.


“······!”


그때였다.

찰선이 에론의 손을 마주한 순간.

그 짧은 순간, 찰선의 뇌리에 한 명의 여인이 떠올랐다.

이세계에 홀로 떨어진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인.

찰선에게 남은 단 하나의 가족, 어머니가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이다.

찰선에게는 어머니가 고향인 대한민국에 남아 있었다.

사라진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재생된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런 낯선 세상에서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어머니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에론의 눈에서 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리 오라고···! 아···?"


찰선은 다가오는 에론의 손을 뿌리치곤 에론의 가랑이 사이로 몸을 날렸다.

에론이 방심했는지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찰선을 놓치고 말았다.

‘자유의 천사’에게 선택받은 찰선은 재빠른 몸놀림이 특기였다.

그 유연한 움직임을 통해 찰선은 에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곧장 스킬 ‘바람의 축복’을 두 발에 둘렀다.

도망치기 위해선 이 스킬보다 유용한 스킬은 없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야! 저 새끼 잡아!”


가랑이 사이를 내줬다는 굴욕을 느낀 에론이 화가나 찰선을 삿대질하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에론의 말을 들은 용병들 몇 명이 찰선을 잡기 위해서 달려든다.

찰선은 그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기 시작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 정말 희박한 확률로 각성을 하곤 한다.

지금 찰선의 상태가 그 각성과 같았다.

F급이 분명한 찰선일 진데 D급에 달하는 용병들의 공격을 하나씩 피해내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꾸라지처럼 용병들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찰선은 계속해서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지···!’


아쉽게도 빈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퇴로는 꽉 막힌 상태였고 빈틈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용병들에게 붙잡힐 것이다.

찰선은 미친 듯이 눈알을 굴리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때, 찰선의 시야에 푸르게 빛나는 포탈이 들어왔다.


‘던전 게이트···!’


하급 악마의 던전으로 이어지는 포탈.

찰선은 고민했다.

이곳에서 죽으나 저곳에서 죽으나 똑같은 것 아닐까?

악마에게 죽으면 영혼을 빼앗겨 평생을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데······.

악마에게 죽느니 그냥 같은 인간들에게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영혼이든 뭐든···!

죽으면 어차피 모든 게 끝이잖아.

찰나의 순간, 찰선은 수많은 고민을 했고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연장시켜야만 한다는 결론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선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야 해!’


던전 속에서 조금이라도 생존한다면 다른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최후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찰선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던전 게이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야! 저 새끼 빨리 잡아! 뭐 하는 거야!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너희도 빨리 따라 들어가! 어서!”


배신자 에론의 흥분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찰선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축축한 어둠을 지닌 던전 ‘타락한 천사의 요람’의 풍경이 찰선의 눈에 가득 들어온다.

찰선의 목울대를 타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


잠시 후.


“하아···! 하아···! 하아···!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귀찮게 하고 있어.”


에론과 수십 명의 용병이 찰선을 둘러싸고 있었다.

찰선은 그런 용병들 사이에서 피떡이 된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끄으으응······."


큰맘 먹고 던전에 뛰어들었지만, 찰선은 멀리 도망칠 수 없었다.

하필 게이트와 연결된 장소는 막다른 곳이었고 찰선은 자신을 잡기 위해 들어온 용병들에게 곧장 붙잡히고 말았다.

그 이후, 찰선은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손과 발이 뒤틀리고 이빨이 모두 부서졌을 정도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후우······.’


뭐, 어떻게 되었든지 ‘생존’아라는 찰선의 목표는 달성된 순간이었다.

찰선은 용병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죽였다.

찰선에게는 일단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찰선은 그렇게 눈을 감고 죽은 척 미동도 하지 않았다.


"캬악! 퉷! 쥐새끼 놈! 쯧!"


에론은 그런 찰선에게 가래침을 뱉어버리곤 눈길을 돌렸다.

일단 던전에 진입했으니 긴장해야 한다.

조금만이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죽을 수 있는 곳이 악마의 던전이기에.

용병대가 작업을 마무리하고 들어올 때까지 던전 몬스터들의 공격으로부터 버텨야 내야만 한다.


“하아······. 이 좆같은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젠장!"


에론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가랑이를 파고들어 도망치는 쥐새끼 때문에 눈이 돌아가 잘못된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후회되지만, 이미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버텨낼 따름이다.

에론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던전에 함께 진입한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하아, 일단, 대장이 들어올 때까지 주변을 탐색하······.”


에론의 말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어두운 던전의 통로를 뚫고 걸어오는 하나의 인형 때문이었다.

에론과 용병들은 그를 마주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짙은 긴장감이 그들에게서 피어오른다.

꿀꺽.

천천히 걸어오던 인형이 서서히 모습을 들어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실루엣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완전히 들어낸 던전의 '몬스터'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냐, 비둘기의 하수인들아.”


에론은 어둠을 뚫고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에 입을 벌려야만 했다.

어둠을 뚫고 드러난 두 개의 검붉은 뿔.

그리고 오른쪽으로 뻗어 나간 밤하늘처럼 어두운 칠흑의 날개.


"악마가 어째서 입구에···?"


던전의 최종 보스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등장했다.

에론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에론은 떨리는 눈동자로 악마를 관찰했다.

하지만 에론은 처음보는 그 종족을 알 수 없었다.

던전의 최종 보스, 하급 악마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일단······.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서열정리가 필요하겠지···? 그렇지 않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하급 악마.

에론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어서 나오는 다음 말에 손에 들려 있는 무기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모두 대가리 박아.”


쿵! 쿵! 쿵!

던전 주인의 목소리와 함께.

던전에 쳐들어 온 천사의 하수인들이 머리 박는 소리가 던전 안에 진득하게 울려 퍼져나간다.

라온의 데뷔전이 시작되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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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3) +1 18.12.23 186 3 25쪽
46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2) +1 18.11.29 240 4 25쪽
45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1) 18.11.22 222 5 24쪽
44 약속의 반지 ‘델피니엔’(2) +1 18.11.19 253 4 24쪽
43 약속의 반지, 델피니엔(1) +2 18.11.11 248 5 16쪽
42 식민지(3) +1 18.11.06 270 5 19쪽
41 식민지(2) +2 18.10.29 267 8 12쪽
40 식민지(1) +1 18.10.22 267 6 14쪽
39 꿩 먹고 알 먹고(3) +1 18.10.21 267 7 18쪽
38 꿩 먹고 알 먹고(2) +1 18.08.21 378 6 19쪽
37 꿩 먹고 알 먹고(1) +1 18.08.14 402 10 21쪽
36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5) 18.08.11 412 10 18쪽
35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4) +4 18.08.08 444 9 24쪽
34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3) +2 18.08.06 420 9 21쪽
33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2) 18.08.03 436 8 16쪽
32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1) +5 18.07.29 481 11 17쪽
31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2) 18.07.26 474 11 14쪽
»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1) +4 18.07.24 468 10 21쪽
29 차원 게이트(2) +2 18.07.22 483 11 13쪽
28 차원 게이트(1) 18.07.21 502 13 17쪽
27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3) +2 18.07.20 462 13 15쪽
26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2) +3 18.07.19 470 12 11쪽
25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1) 18.07.17 448 12 19쪽
24 중급 악마 vs 하급 악마(2) +2 18.07.16 477 12 15쪽
23 중급 악마 vs 하급 악마(1) +2 18.07.15 478 10 13쪽
22 다린과 선물 보따리(2) +1 18.07.14 478 11 13쪽
21 다린과 선물 보따리(1) 18.07.13 458 11 14쪽
20 라온과 라오스의 하급 악마들(3) +2 18.07.12 478 15 16쪽
19 라온과 라오스의 하급 악마들(2) +3 18.07.12 526 1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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