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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님의 서재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던전에서 하는 일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부기스
작품등록일 :
2018.06.28 21:32
최근연재일 :
2019.01.07 01:2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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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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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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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2)

DUMMY

***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2) ***


공교롭다.

박찰선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라온의 생각이었다.


‘소름 돋을 정도야···.’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공교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라온은 오돌토돌하게 솟은 닭살을 한번 쓸어내리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톱니바퀴 같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단 하나의 어긋남 없이 모두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각각의 상황은 따로 움직이지만, 상황은 모두 합쳐져 큰 그림을 완성시킨다.

라온은 상념을 이으며 오른손 약지를 조용히 매만졌다.


‘라파엘···, 너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이냐.’


최근 라온은 거대한 ‘운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운명의 고리라는 하나의 큰 흐름 속에 내던져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의 연인이 잃어버렸던 반지를 되찾은 순간부터, 라온은 이 의심을 조금씩 키워갔다.


“흐음···.”


얽히고설키다 못해 하나로 역이는 운명.

라온은 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얽매였음을 느끼며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 갔다.


‘자, 먼저. 운명이라는 놈은 지금 나를··· 블랙마켓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블랙마켓 점령 계획을 잠시 미루자마자, 박찰선을 내 앞으로 데려왔고 급한 상황까지 만들어 나를 블랙마켓으로 인도하고 있어. 그리고 다린이 준 이 ‘반지’, 내 걱정이 뭔지 안다는 듯 때맞춰 내 손에 들어왔다···. 모든 게 맞물려. 내가 블랙마켓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생각이 라온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블랙마켓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은 라온이 직접 만들어낸 의지였으니까.

하지만, 지혜의 대천사 라파엘을 생각하면 마냥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예언과 그녀가 남겨놓은 반지 ‘델피니엔’.

라온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봤다.


‘다린에게 라오스 지방의 상황을 듣고 블랙마켓 점령 계획을 뒤로 미루기로 했어. 던전이 마계에 있는 이상 던전 침략전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계획을 보류하려 했지. 던전 정비도 해야 했고 주민들의 안정화도 필요했으니, 이건 내게 잘된 일이었어. 그런데···. 때맞춰 다린이 내게 아티펙트를 하나 건넸다. 마치, 네 걱정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던전을 떠나도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공교롭게 이 반지가 내 품에 들어왔어. 이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라온은 다린이 준, 아니 다린에게 갈취한 반지를 잠시 바라봤다.

반지 ‘델피니엔’의 옆.

라온의 중지에는 푸른빛의 사파이어가 세공된 은색의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반지로 말할 것 같으면 과거 다린과의 내기에서 승리해 얻어낸 유니크 등급의 아티펙트였다.

하루에 단 한 번 착용자가 지정한 장소로 착용자의 위치를 이동시켜주는, 고위 마법 ‘메스 텔레포트(강화)’가 각인된 반지였다.

그 이름하여 ‘그리트 서모너’.

아리에스 행성 정도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라온은 반지의 뛰어난 성능을 떠올리며 계속 생각했다.


‘이로써 나는 던전을 비워도 급할 땐 언제 어디서든지 던전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행성 반대편에도 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 상황인데, 딱 박찰선이 내 앞에 나타났다. 블랙마켓 가야 한다고 울부짖는 녀석 때문에 나는 블랙마켓에 가야 하는 상태가 되었지. 이놈을 마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박찰선은 지금 당장 블랙마켓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급한 상황이었고 유니크 반지 ‘그리트 서모너’는 라온의 걱정을 해결해주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블랙마켓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


첫 번째 차원 침략에서 행성 에리아스, 그리고 도시 실리아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카리얀과 안드로스라는 두 명의 대귀족을 만났고 박찰선이라는 인간과의 인연을 맺었다.

마지막으로 약속의 반지 ‘델피니엔’을 얻기까지.

이 우연 같은 운명은 이미 라온을 블랙마켓으로 보내버렸다.


‘나 참, 안 갈 수가 없구만···.’


라온은 그제서야 표정을 풀 수 있었다.

무엇이 라온을 블랙마켓으로 인도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블랙마켓에 보내는 어떤 목적이 있겠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곳에서 얻을 게 있기 때문에 이리도 빙빙 돌려서 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후우···.”


그 목적이 뭔들 어떠랴.

어차피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을.

라온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자신이 무슨 수로 운명을 거스르겠으며 굳이 운명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운명이 자신을 인도한다면 그것이 해가 되지 않는 한 그에 따를 생각이었다.

라온의 최종 목표는 어차피 튼튼한 보금자리와 안락한 삶이었기에, 운명이라는 족쇄가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흐르면 흐르는 데로, 가라면 가라는 데로 운명에 맞춰 따라갈 따름이다.

어차피 모든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

어느 길로 가든 최종 목적지는 같을 것이기에, 라온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딱 하나 걱정되는 건···. 역시 라파엘의 ‘예언’ 정도일까···?’


기억 속에서 라파엘은 말했었다.

본능에 충실하라고.


“흐음···.”


라파엘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할 때면, 라온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뜬금없이 본능에 충실하라니.

그녀의 말에는 어떤 미사여구도 존재하지 않아서 추측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도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본능과 싸우기라도 하는 걸까?


‘나 혼자 내적 갈등이라도 하려나. 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라온은 악마가 된 이후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굳이 본능을 억제하고 억압하려 하진 않았기에, 라온은 그녀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아 몰라. 이것도 블랙마켓에 가보면 알 수 있겠지. 그냥 명심하고 주의하면 돼.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라온은 그렇게 생각을 마쳤다.

그리고 곧장 옥좌에서 일어났다.

블랙마켓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맞다.

눈앞의 박찰선도 똥줄타고 있으니 출발 준비를 얼른 시작해야지.

라온은 옥좌에서 일어나며 박찰선에게 말했다.


“그럼, 나는 잠깐 던전 좀 다녀올 테니까 넌 사울한테 가서 출발할 준비 끝내놓으라고 전해. 그렇게 말하면 카리얀이 알아들을 거야.”


라온은 그 말만을 남긴 체 홀연히 던전 속으로 사라졌다.














***


“방패병 전진!”

“궁병 사격 개시!”


던전 ‘타락한 천사의 요람’.

라온이 던전에 도착했을 때는 던전의 경비대원의 전투가 한창일 때였다.

던전의 중심지로 향하는 첫 번째 저지선.

각종 함정이 설치된 그 커다란 공동에서 전투 훈련을 받은 타천사들이 검게 물든 갯과의 마수들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마수.

마인들과는 다르게 지능이 없는 마계의 생물을 모두 마수라 칭한다.

이번에 던전으로 쳐들어온 녀석들은 그 마수들이었다.

아마 바깥의 전쟁으로 인해 보금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녀석들이지 싶다.

갈 곳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도중 마계와 격리되어 있던 라온의 던전이 해방되자,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좋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라온은 저들의 전투를 잠시 지켜봤다.


“궁병-! 사격개시!”

-끼잉-! 낑낑!

“전군! 돌격하라!”

“우아아아아아!”

-끼이이잉! 낑!


스승 메돈의 교육이 훌륭했던 것일까, 아니면 경비대장 아이론의 통설력이 뛰어난 걸까.

과거의 오합지졸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처럼 체계적으로 변해있었다.

타천사 병사들의 움직임은 마수들이 제대로 공격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유연했고 각 개인의 전투력은 라온이 보기에도 흡족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차원 침략 동안, 천사의 하수인들과 치렀던 실전들이 이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듯하다.

라온은 대단히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웬만해선 뚫리지 않으리라.

하급 악마 정도는 아이론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라온이 만족하며 몸을 돌리려 할 때, 라온의 시야에 이질적인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어?”


라온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 눈을 한 번 비벼보았다.

찰나의 순간, 마수 ‘헬하운드’를 칼로 찌르던 병사에게서 뿜어져 나온 미약한 흑의 불꽃.

라온의 감각에 포착된 그 불꽃은 열화되긴 했지만 분명 공포의 불꽃이었다.

놓치려야 놓칠 수 없는 라온만의 권능이 라온의 병사에게서 잠시나마 뿜어져 나온 것이다.

공포화는 병사 주변에 잠깐 나타났다가 헬하운드를 위축시키곤 곧장 사라졌다.

라온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공포화가 어떻게···?’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병사가 라온의 권능을 사용했다.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그 병사는 자신이 어떤 힘을 사용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열심히 지시를 받아 헬하운드를 격렬하게 썰어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로는 공포화가 그에게서 발현되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발현했다···? 그게 가능해? 아니, 무의식적인 것을 떠나 악마의 권능을 일개 병사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라온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권능 공포는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라온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권능을 복사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몰라도, 권능조차 없는 일개 마인이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한 거지? 그건 분명 공포화였는데.’


샘플이 부족한 라온은 온갖 추측을 해봤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라온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실험과 관찰뿐.

라온은 병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라온님,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엘린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라온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가 다가온 것을 모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회색 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후드를 걸치고 나타난 엘린은 외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온은 이미 준비가 끝난 그녀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벌써 왔네?”

“예. 준비할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

라온이 당장 블랙마켓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인데도 던전에 들른 이유는 바로 엘린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블랙마켓에는 엘린과 함께 가야지.’


라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블랙마켓에 엘린을 데려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위험이 있든 엘린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이번 ‘마신의 은혜 마력도난 사건(?)’을 통해 엘린에게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엘린은 코롱이가 코어의 마력을 빨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라온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코롱이를 독려했다.

라온은 엘린이 코어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엘린이 워낙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보니, 라온은 그녀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라온의 착각이었다.

실제로 엘린이 지닌 지식은 보편적인 상식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시각을 자신의 상식에 대입해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 더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었더라면, 코롱이를 말렸겠지.’


엘린이 라온의 생각을 정확히 알았더라면, 던전 주민들이 굶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라온은 엘린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고의 확장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라온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녀가 알아줬으면 했다.

그래서 이번 블랙마켓 여정에 참여시킨 것이다.


“라온님···? 필요한 짐은 이 팔찌에 모두 담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여, 다른 물건이 추가로 필요하신 겁니까?”


라온의 심각한 표정을 오해했는지 엘린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다린에게서 큰 돈 주고 구매한 인벤토리 팔찌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라온은 그녀의 행동에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아니야,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엘린의 외출준비가 끝났다면 빨리 이동해야 한다.

라온은 전투를 끝내고 뒷정리를 시작한 병사를 흘끗 바라보고는 엘린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얼굴을 알아뒀으니 열화판 공포화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급하지 않았을뿐더러 어차피 던전의 모든 것은 라온의 것이기에, 블랙마켓을 다녀온 이후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라온은 엘린과 함께 식민지 게이트로 향했다.


“갈까?”


붉은 게이트 앞에 도착한 라온은 엘린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그녀는 왠지 수줍은 듯 라온의 손을 맞잡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엘린의 차가운 손의 감촉이 와 닿는다.

라온은 그녀의 촉감으로 인해 머리에 남아있던 상념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느낌.

그렇게 라온은 엘린의 차디찬 손을 정성스레 감싼 후 게이트에 몸을 맡겼다.

게이트 특유의 부유감이 두 마인의 몸을 감싼다.


“아.”


게이트를 넘어서자마자, 찬란한 햇빛이 라온과 엘린을 맞이한다.

엘린은 익숙하지 않은 빛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마저 녹일 만큼 따뜻한 빛.

그 빛은 마치 두 마인의 앞날을 밝히는 것만 같았다.












***


블랙마켓 ‘비스크리닌’.

왕도 실론스의 동쪽, 그리피스 백작령에 위치한 블랙마켓의 명칭이었다.

비스크리닌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암시장 중 하나로 케딜락 제국의 일곱 대귀족이 각 나라의 이익단체와 협력해 만든, 인간의 욕망을 분출시키기 위해 형성한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이 얽히고설킨 이 ‘비스크리닌’은 시장 안에서 인간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구분했고 지배자에겐 천국을 피지배자에겐 지옥을 겪게끔 만들어 놓았다.


“제국에서는 저지를 수 없는 모든 비인륜적인 행위를 비스크리닌에서만큼은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집단 난교부터 마약, 살인, 폭력, 심지어 노예를 산 채로 마수의 먹이로 던져넣는 것까지. 지배자의 신분이라면 피지배자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비스크리닌’입니다.”


단언컨대, 이곳에서만큼은 ‘지배자’를 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카리얀은 그렇게 말끝을 이으며 여전히 흐린 눈빛으로 ‘비스크리닌’에 대해 설명했다.

라온은 저택을 축소해 놓은 듯한 호화로운 마차 안에서 카리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옆에는 날개를 감춘 엘린과 심각한 표정의 박찰선이 함께 경청하고 있다.

도시 실리아에서 비스크리닌으로 향한 지 이틀째.

비스크리닌이 위치한 그리피스 백작령까지 가는 동안, 라온은 카리얀을 통해 알아두면 좋을 블랙마켓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도시 실리아에서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마차로 대략 사흘 정도로 도착하려면 이틀 정도의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라온과 그 일행은 속성으로라도 과외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라온님 그리고 일행분들, 이걸 받으십시오.”


설명하던 카리얀이 안드로스에게 눈짓하더니 화려한 무도회 가면을 꺼내 일행들에게 나눠주었다.

안드로스가 내어준 가면은 고양이처럼 동물 형상을 띈 가면도 있었고 아무 형태 없는 밋밋한 가면들도 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면마다 색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카리얀은 그 가면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구분방법은 가면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블랙마켓을 이용하는 고객이 각 나라의 상류층이다 보니, 서로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인식저해 마법’이 귀속된 이 가면을 필수로 착용시키고 있습니다. 마켓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은 지배자, 그렇지 않은 자들은 피지배자로 구분하시면 되겠습니다.”

“오호···.”

“그리고 또. 가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면의 색깔이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배자들 가운데서도 또 한 번 계층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제일 낮은 계급은 회색부터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그리고 가장 최상위인 검정이 있습니다. 지배자의 사회적 계급, 개개인의 영향력과 재력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계층마다 행할 수 있는 권한이 상이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 이게 바로 검정 가면입니다.”


카리얀은 설명을 마치며 고급스러운 케이스를 라온과 일행에게 건넸다.

그 케이스 안에는 광택이 나는 흑색의 무도회 가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가면들이다.

라온은 가장 왼쪽에 있는 표범 형상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한 번쯤은 써보고 싶은 멋진 디자인의 가면이었다.


“검정색 가면은 말 그대로 지배의 상징입니다. 비스크리닌에서 이 가면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마켓을 운영하는 일곱의 귀족과 제국의 관리들, 그리고 각 나라의 왕족에 준하는 인물들뿐입니다. 이 가면을 쓰고 비스크리닌을 돌아다닌다면 웬만해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 가면의 주인이 바로 비스크리닌의 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카리얀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마쳤는지 본래의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라온의 명령이 떨어지질 때까지 대기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라온은 그런 그를 뒤로 물린 후, 검정 가면이 들어가 있는 케이스를 다시 들어 올렸다.

카리얀의 말대로 가면 하나하나는 모두 특별 등급의 아티펙트였다.

인신 저해 마법뿐만 아니라 시력 향상의 기능, 그리고 착용에 대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겉모양도 고급스럽고 멋들어진 것이 재료와 디자인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은걸? 블랙마켓 말고 다른 곳에서 사용해도 되겠어. 마음에 든다.’


라온은 만족하며 표범 가면을 선택했다.

옆의 엘린은 고양이 형상의 가면이 마음에 드는지 고양이 가면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고 박찰선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삐질삐질 눈치를 보며 코뿔소 가면을 냅다 집어 올렸다.

라온은 그런 그들을 보며 웃음을 흘리곤 다시 카리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들을 차례다.


“그럼, 카리얀. 이제 망나니 일곱 놈들에 대해 들어볼까?”


카리얀에게 묻는 라온의 눈이 반짝 빛난다.

그건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본 아이의 눈빛과도 같았다.

이를 본 박찰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

남은 이틀이 쉽진 않을 것 같다.












***


촥! 촥! 촥!


“끄읍!”


열 살 어간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아이가 커다란 덩치의 장정이 휘두른 손에 뺨을 얻어맞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연속 세 대를 내리 얻어맞은 아이는 뺨을 타고 오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어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눈이 핑 돌 정도로 아팠지만,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어서 동생들과 언니들이 맞게 되니까.

아이는 눈물을 찔끔 참으며 고통을 이겨냈다.


“어따, 이년 이거 독하네잉?”


자신보다 열 배는 작아 보이는 아이를 죽어라 때려놓고도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는 거한, 멘토스는 고통을 참아내는 아이를 보며 비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그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때리길 좋아한다.

이렇게 한 명을 때려놓고 그년이 울면 다음 사람을 때리고 안 울면 안 때리는 것은 멘토스의 취미 중 하나였다.

멘토스는 끝까지 고통을 참아낸 아이에게 힘껏 손뼉을 쳐줬다.


“이야! 도칸년! 대단허다, 대단혀! 으허허!”


그러곤 아이를 발로 뻥 걷어차 노예들이 모인 곳으로 던져줬다.

아이를 향해 더듬더듬 기어가는 노예들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서로를 향해 끙끙거리며 서럽게 우는 버러지 같은 노예들.

그들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입을 서로 틀어막으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

멘토스는 그런 노예들을 보며 한껏 웃음을 터트렸다.


“으허허허허! 애벌레 같구마잉!”


그렇게 멘토스는 사흘 동안 쌓인 지루함을 달래가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멘토스의 행위를 뒤늦게 알아챈 리더 팔트로가 길길이 날뛰며 그에게 다가왔다.


“야 이 새끼야! 상품에 기스났잖아! 아오! 이거 어쩔거야!? 응? 네가 돈 낼래! 시발! 안드로스님한테 혼나고 싶어!? 죽고 싶어서 환장한 새끼랑 같이 다니는 내 꼬락서니라니! 어후야!”

“아따 성님, 앙탈은! 그거 하나 기스났다고 돈이 안 들어온 디요? 적당히 우리도 스트레스 좀 풀면서 일해야지 않것소! 안 그럽디까!? 안드로스님도 다 이해해 주실 거요! 안그냐, 아그들아!”


팔트로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당당한 멘토스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사흘에 걸쳐 노예들을 상처입히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멘토스의 얼굴을 미친 듯이 패고 싶지만, 팔트로는 안타깝게도 무력으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팔트로가 노예유통 4팀의 리더가 된 이유는 무력 때문이 아닌 상품 판별 능력과 영업능력에 있었다.

멘토스의 난동을 막을 수 없는 팔트로서는 그가 놀이를 여기서 적당히 끝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상품 망가뜨리지 마! 진짜 말 안 들으면 안드로스 님께 바로 말할 거야!”

“어휴···! 어디서 모기가 앵앵대는 갑소. 눈이 침침해서 그랑가? 잘 안 보이네잉? 여근가?”


멘토스는 팔로트를 향해 찹찹 모기 잡는 시늉을 하며 낄낄 웃었다.

그런 멘토스를 보며 팔로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드로스가 근처에 없는 지금 참아야만 했다.

능력이고 뭐고 멘토스가 달려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될 테니까.

무력이 최고인 이 세계에서는 힘이 없다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

팔트로는 한숨을 내쉬며 다른 마차로 이동하는 멘토스를 짓씹었다.


‘치질에나 걸려라, 멧돼지 녀석!’


팔트로는 떠나간 멘토스에게서 눈을 돌려 노예우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뺨이 퉁퉁 부어오는 아이를 힐끗 바라봤다.

아이의 몰골을 보자 다시 한숨을 새어 나온다.


“하아···.”


아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품이 상처 입었다.

상품들의 얼굴이 모두 퉁퉁 부어있으며 어떤 년은 실명한 건지 한쪽 눈이 하얗게 새어있었다.

팔트로는 멈추지 않는 한숨을 입 밖으로 내보내며 다시 열 살짜리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시발···. 쟤는 그래도 상품성 있는 애새낀데, 왜 하필 쟤를 때리고 지랄이야···. 하아, 시발. 물약이라도 줘야 하나?’


안 그래도 노예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데, 기스까지 났다면 가격이 반 토막 날 것이 분명했다.

최근 실적에 목을 매고 있는 안드로스를 봤을 때, 지금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길 게 안 봐도 뻔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선 상품 가치가 있는 노예를 반드시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수지타산이 안 맞긴 하지만··· 노예를 팔아야 실적이 쌓이니까. 안드로스님도 당연히 허락하실 거야.’


팔트로는 그렇게 고민을 마치고 아이를 위해 최하급 치료 물약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물약을 꺼내 아이에게 다가가갔다.


“우아아앙!”


그때,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멘토스가 없는 것을 보고 안심했는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아이를 시작으로 주변의 노예들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팔트로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래서 팔로트는 곧장 노예가 모여있는 곳으로 뛰쳐나가 크게 소리쳤다.


“울지마, 이 시발년들아!”


그 순간, 노예들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팔트로가 계속 입을 열었다.


“내가 만만해? 이 개 같은 년들이 노예 주제에 날 무시해!? 지금부터 소리 하나라도 내봐! 다 죽여버릴 거니까!”


팔트로는 그렇게 소리치곤 조용해진 노예우리를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품에 대한 걱정을 하지 노예에 대한 연민을 가지진 않는다.

그 정도로 인간성이 좋은 인간이었다면, 노예 거래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팔트로의 인성은 그의 직책만 봐도 답이 나온다.

팔트로는 조용해진 노예우리의 아이에게 다가가 팅팅 부어오른 뺨을 향해 물약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남은 물약을 아이의 입에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끼잉···.”


아이가 회복의 고통을 참고 있는지 낑낑거리는 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들려왔다.

안 그래도 지출이 커서 기분이 나쁜데 애새끼의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더 나빠진다.

팔트로는 한숨을 다시 내쉰 후 다른 년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닥쳐, 시발.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우니깐.”


팔트로는 상품성 있는 아이를 때리지 않고 상품성이 없는 년을 후려갈겼다.

그랬는데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짜릿해진다.

멘토스가 느끼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팔트로는 기분이 꿀꿀할 때, 또 때리러 와야겠다며 다시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곤 곧장 자신의 마차로 이동했다.

때마침, 기수가 팔트로에게 알려온다.


“리더! 비스크리닌이 보인다!”


드디어 성지에 도착했다.

불법 상인들의 성지, 비스크리닌.

빨리 성지에 도착해 이년들을 다 팔고 안드로스에게 칭찬받아야지.

팔트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찌르르 울리는 손맛을 천천히 만끽했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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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2) +1 18.11.29 240 4 25쪽
45 블랙마켓과 7인의 망나니(1) 18.11.22 224 5 24쪽
44 약속의 반지 ‘델피니엔’(2) +1 18.11.19 253 4 24쪽
43 약속의 반지, 델피니엔(1) +2 18.11.11 248 5 16쪽
42 식민지(3) +1 18.11.06 271 5 19쪽
41 식민지(2) +2 18.10.29 269 8 12쪽
40 식민지(1) +1 18.10.22 268 6 14쪽
39 꿩 먹고 알 먹고(3) +1 18.10.21 268 7 18쪽
38 꿩 먹고 알 먹고(2) +1 18.08.21 379 6 19쪽
37 꿩 먹고 알 먹고(1) +1 18.08.14 403 10 21쪽
36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5) 18.08.11 412 10 18쪽
35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4) +4 18.08.08 445 9 24쪽
34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3) +2 18.08.06 422 9 21쪽
33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2) 18.08.03 436 8 16쪽
32 악마가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방법(1) +5 18.07.29 481 11 17쪽
31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2) 18.07.26 476 11 14쪽
30 라온의 차원 침략 데뷔전(1) +4 18.07.24 468 10 21쪽
29 차원 게이트(2) +2 18.07.22 483 11 13쪽
28 차원 게이트(1) 18.07.21 503 13 17쪽
27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3) +2 18.07.20 463 13 15쪽
26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2) +3 18.07.19 472 12 11쪽
25 ‘충동’의 악마와 첫 번째 날개(1) 18.07.17 449 12 19쪽
24 중급 악마 vs 하급 악마(2) +2 18.07.16 477 12 15쪽
23 중급 악마 vs 하급 악마(1) +2 18.07.15 479 10 13쪽
22 다린과 선물 보따리(2) +1 18.07.14 480 11 13쪽
21 다린과 선물 보따리(1) 18.07.13 459 11 14쪽
20 라온과 라오스의 하급 악마들(3) +2 18.07.12 478 15 16쪽
19 라온과 라오스의 하급 악마들(2) +3 18.07.12 526 1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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