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살인사건(5)
[8]
“··· 예? 아, 다시 엘리베이터에 탄 시간이요. 엘리베이터에 다시··· 어디 보자, 배달 가서 전달하고, 그때 그 사람이 무슨 말들을 걸어서 몇 마디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타기까지 한 10분 정도 걸렸으려나···”
“예?! 선생님, 잠시만요. 선생님은 8001호에 사는 그 사람과 직접 만나서 물건을 전달하셨던 겁니까?” 무 형사가 놀라 물었다.
“당연히 만나서 직접 전달했죠, 그럼.”
“얼굴은 기억하십니까?”
“기억을 못 할 수가 없어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외국인이었거든.”
퀵 배달 기사가 기억하는 8001호 사람의 모습은 제이크 밀러의 모습과 일치하는 듯했다.
“어디서 듣고 온 건 아니겠지?” 김 형사가 무 형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무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최 형사가 남자에게 물었다.
“좀 전에 그 사람이 말을 걸었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을 하던가요?”
“벨 누르니까 나와서는, 다짜고짜 인사도 없이 ‘오늘 날씨는 어때요, 사장님?’ 이랬어요. 그래서 뭐, 오늘 날씨 좋다고 그러니까, 또 갑자기 밥은 먹었냐는 거예요. 그리고 또 힘들진 않으시냐, 몇 시까지 일하시냐, 어디 사냐, 어디 식당 가봤냐, 뭐 별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막 했어요. 말투가 어눌한 걸 느끼고 나서야 아, 외국인이니까 한국말을 잘 못 해서 한국인이랑 말하는 연습을 하려고 일부러 저런 질문을 하나보다 싶었죠.”
“그렇군요. 음··· 그런 다음에 그냥 물건을 받아서 들어갔고요? 물건은 뭐였습니까?”
“예, 바로 들어갔어요. 물건은 조그만 상자였는데요. 안에 내용물은 인감도장이라고 했어요.”
“전해준 사람은요?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연락처는요?”
“아, 직접 전달받지는 않았고요. 물품보관함에 맡겨놓은 걸 찾아서 전달한 겁니다. 금액이 괜찮았거든요. 연락처는 어디 보자··· 잠깐만요. ··· 아, 여기 있네요.”
남자가 최 형사에게 핸드폰에 남겨진 통화기록 속 전화번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 형사는 얼른 그것을 수첩에 받아적었다.
“보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이것 말곤 없는 겁니까? 퀵 비용은요? 누가 어떻게 결제했습니까?” 최 형사가 물었다.
“여기서 물건 받으신 분이 현금으로 하셨어요.”
잠시 후,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형사들에게 알려준 퀵 배달 기사가 떠나고, 형사들은 이어질 수사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에 모여 앉아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제 제이크 밀러가 집에 들어간 이후부터 사망한 채 발견되기 전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80층으로 왔다 갔다 했던 사람 중, 아직 저희가 만나지 못한 사람은 8002호 거주자들과 헬멧을 쓴 음식 배달 기사입니다. 음식 배달 기사는 아직 찾지도 못한 상태고요. 그리고, 피해자 발견 당일 오전 10시 30분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꼭대기 층인 90층으로 올라갔다가, 12시에 다시 1층 CCTV에 포착된 검정 모자를 쓴 남자도 만나봐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직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무 형사가 말했다.
“일단 8002호 사람들은 오전 8시 30분에 나갔는데, 퀵 배달 기사가 11시 30분에 제이크 밀러를 직접 봤다고 했으니까 용의 선상에서 빼도 되지 않겠습니까?” 최 형사가 팀장을 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음식 배달 기사도 내린 지 5분 만에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으니까 용의자로 볼 수 없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엘리베이터에 탈 때 음식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는 건 음식을 전달하거나 적어도 두고 왔다는 건데··· 그 뒤에 온 사람들이 음식을 보지 못한 거면, 분명 누군가 음식을 직접 받았거나 놓여있던 걸 가지고 들어간 거니까, 그때까지도 제이크 밀러가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 형사가 말했다.
“아무도 음식을 못 본 건 확실한 거야?” 팀장이 물었다.
“일단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이후 무 형사는 음식 배달 기사 이후로 8001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확인 전화를 건 뒤, 이내 돌아와 말했다.
“연락해봤는데요. 역시 노란색 유니폼 택배 기사가 8001호 앞에 갔을 때부터 집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8001호를 청소하는 분도 마찬가지로 문 앞에서 음식 같은 건 보지 못했다고 하고요.”
그러자 팀장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래? 흠··· 그럼 정말 배달음식을 가지고 올라갔을 때까지는 제이크 밀러가 살아있었다는 건가···.”
“그럼 90층에 올라갔다가 1층에서 포착된 그 검정 모자 쓴 수상한 사람도 용의 선상에서 빼야 되는 거 아닙니까?” 최 형사가 말했다.
“무 형사, 타임라인이 어떻게 된다고 했지?” 팀장이 물었다.
“퀵 배달 기사가 11시 40분에 8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고요. 그다음 90층에 갔던 검정 모자 남자가 12시에 1층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12시 20분에 헬멧 쓴 음식 배달 기사가 80층에서 내리고, 5분 뒤인 25분에 다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내려가고요. 그리고 13시에 노란색 유니폼 택배 기사가 80층에 온 겁니다.”
“90층에 올라간 검정 모자 남자가 범인이라면, 11시 40분에 퀵 기사가 물건을 주고 떠난 뒤에 제이크 밀러를 살해하고 곧바로 80층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가서 12시에 1층 CCTV에 포착됐다는 얘긴데···. 20분 만에 사람을 살해하고, 집 안을 뒤져 물건을 훔치고, 80층 계단을 내려간다? 이미 이것부터 불가능해 보입니다만···” 고 형사가 말했다.
“게다가 지금으로써는 90층 남자가 아파트를 빠져나간 이후에 온 음식 배달 기사가 전달한 음식을 제이크 밀러가 직접 받았거나 가지고 들어간 걸로 추정되기도 하고요.” 무 형사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90층에 올라갔던 그 수상한 사람도 일단은 용의 선상에서 빼놓는 게 맞겠구만. 그래도 추적하는 건 계속하고.”
그런데 그때, 형사들이 모여있는 관리사무소 회의실로 관리실 직원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 형사가 문을 열며 물었다.
“형사님, 저희가 수상한 사람을 본 적 있으면 말해달라고 안내 방송하고 나서, 90층에 올라간 사람에 대한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목격자를 찾는 방송을 몇 번 더 했었는데요. 그 방송을 듣고 주민분 두 분이 그 사람을 봤다고 진술하러 오셨어요.”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면 마스크를 끼고 검정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세대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이고 있는 걸 봤답니다.”
직원의 말에 형사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전단지요? 정말 90층에 올라간 뒤 1층에서 다시 발견된 그 사람이 맞습니까?”
“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도 일치했어요. 주민분 말씀을 들어보니, 그 옷 안에 전단지를 숨기고 있었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안내 방송 몇 번 더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다시 나가고, 이어서 팀장이 말했다.
“하- 전단지였어? 그래, 보통 맨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서 걸어 내려오면서 붙이지. 하- 참.”
“저희 아파트는 처음부터 외부인이 아파트 내부로 출입해 유인물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막았었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그런 전단지를 본 적이 없었어요. 아마 그래서 관리실 직원분들도 90층 그 사람이 유인물을 붙이러 온 사람일 거라고는 바로 생각하진 못했던 거 같습니다.” 고 형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 80층에 갔던 그 외부인 4명은 의심스러운 정황이 해소된 게 거의 확실한 거네?”
“예, 8002호, 8003호는 그 시간에 아무도 집에 있지 않았고요.” 무 형사가 말했다.
“그러면 정말 아파트 입주민인가···”
“그 사건 발생 전날 제이크 밀러와 함께 있었던 사람을 찾는 건 어떡해야 할까요? 퀵 기사가 확실히 제이크 밀러를 봤다고 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그때 싸우고 나서 죽인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김 형사가 말했다.
“저는 일단 계속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층에 있는 본인의 집으로 들어간 입주민이든, 계단으로 이동하다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거나 1층까지 걸어 내려가서 밖으로 빠져나간 외부인이든, 그렇게 싸우고 난 뒤에 이렇게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을 정도라면, 어젯밤 싸움에서 생긴 원한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8001호로 가서 피해자를 살해했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무 형사가 말했다.
“무 형사는 그럼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보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어때?”
팀장의 물음에 김 형사가 대답했다.
“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금품을 노린 강도살인이었을 거 같아요. 다들 보셨다시피, 집 안에 돈 될만한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잖아요? 벽에 붙어 있는 열리지 않는 금고 말고 다른 금고 안에 들어있던 것들은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가져갔고요. 그리고 집 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봤을 때, 아주 고가의 브랜드 옷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옷이 그 정도인데, 다른 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 그리고. 지난번에 우리 수사를 방해할 때도 그렇고, 입주민 카드를 거짓으로 작성한 것도 그렇고, 제이크 밀러 그 사람, 뭔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니까 그렇게 거짓으로 정보를 대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돈을 본인 명의 통장에 보관하거나 주식에 투자했을까요? 당연히 집에다가 꽁꽁 숨겨놨겠죠. 특히 금고에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그것들을 갈취할 목적으로 강도 짓을 벌이다 살인까지 하게 된 걸 거고요.”
“흠··· 어쨌든 일단 우리는 어젯밤에 싸웠다던 그 사람들을 빨리 찾아보긴 해야 할 것 같구만. 그 사람들이 금품을 노렸던 걸 수도 있으니까.”
이어서, 형사들은 관리실에 요청해 입주민 중 어젯밤 8001호에 방문했던 사람이 있거나, 8001호 입주민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관리실로 와서 꼭 말해달라는 내용의 안내 방송을 실시한 뒤, 보안실 직원들과 함께 다시 CCTV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 동에만 수백 세대가 사는 곳에서 약 두 시간 동안 4대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확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확인된 사람 중 의심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을 미리 골라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더욱 오래 걸렸다.
그런데 그때, 관리실 직원이 또다시 형사들을 찾아왔다.
이번에도 무 형사가 일어나 직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금고 기사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형사들은 현장에 도착하여 제이크 밀러의 집을 확인하던 중, 눈에 띄는 금고 두 개를 발견했었다. 성인 남성의 명치 높이만 한 첫 번째 금고는 완전히 개방된 채로 안이 텅 비어있었지만, 고정된 듯 벽에 딱 붙어 있는 두 번째 금고는 범인들도 손을 댈 수 없었는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이후 형사들은 사건의 수사를 위해 그 집에 있는 두 개의 금고 중 잠겨있는 나머지 한 금고를 열어야겠다 판단했고, 그것을 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대부분 희소한 모델이라 열기 어렵다고 답해왔다. 그러던 중 어렵사리 해당 모델의 금고를 열 수 있다는 금고 전문 기사를 찾아냈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렇게 연락을 받은 금고 전문 기사가 몇 시간 뒤 각종 공구를 가지고 형사들을 찾아온 것이다.
이어서 보안실에서 나온 형사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왠지 모르게 듬직한 모습의 금고 수리 기사와 함께 사건 현장인 8001호로 다시 올라갔다.
잠시 뒤, 형사들과 함께 8001호에 들어가 굳게 닫힌 금고를 발견한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방 열어드리겠습니다. 5분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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