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다툼에서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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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다툼에서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누가 오고 있다고?”
도승지 이경증이 와서 알리는 말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경증은 조금 전에 내게 고한 말을 고스란히 읊었다.
“영변부에서 보낸 소식에 의하면 청나라 의정대신 용골대가 전일 있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의정대신 용골대.
저들 말로는 타타라 잉굴다이.
역사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박씨전과 같은 군담소설의 영향으로 인해 그저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침공한 장수 1, 혹은 나쁜 오랑캐 1로 인식되는 이다.
하지만 그가 한 행적을 살피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누르하치 시절부터 종군하여 홍타이지에게 신임을 얻고 항상 맡은 바를 해내는 능력 있는 자.
문무겸전이라고 하듯 장수로서 유능하며 재정이나 외교도 담당하여 팔방미인이라 하기 적당한 능신.
아이신기오로가 아니나 아이신기오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자.
이렇듯 그는 청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고작 이미 끝난 일을 마무리하러 올 정도로 한가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자세히까지는 몰라도 윤곽은 어렴풋이 잡힌다.
전에 맺은 것을 변개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전에 있던 일에 비할 정도로, 혹은 그 이상인 무언가가 생겼다.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내 심중은 천천히 후자로 기울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심양에서 내게 온 연락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예친왕 도르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실상 조선을, 더 정확히는 조선왕이라는 존재를 제 편으로 삼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서 적당한 수준에서, 청나라의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내게 양보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변개하고자 하면 그 양보가 무색하니 적어도 그런 일이 있다면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심양에 있는 외조와 거기에 있는 세자에게 알려주면 그만이다.
그도 어렵다면 봉림대군을 불러서 적당히 담소 중에 일러주면 남은 건 일사천리로 조선까지 전해진다.
허나 이날 의정대신이 한양에 이르기까지 심양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물론 오는 사람이 오는 사람인 만큼 그가 조선에 들어오고자 할 때는 그 신분이 드러나 내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심양에서 소식을 보내는 것과 영변부에서 보내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
“......심양에서는, 외조나 세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느냐?”
“이 일에 대해서는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확인하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외조를 통하지 않고 직접 조선에, 조선왕에게 논하고 싶은 일이라?
그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림짐작으로 저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자니 바깥에서 내게 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제물포에서 외조 좌랑 윤휴가 장계를 올리었나이다.”
“제물포에서?”
“가져온 자의 말에 따라면 제물포에 새로이 화란이라는 곳에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화란이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듯 역사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없던 일도 일어나는데 있던 일이 당겨지는 일이야 어려울 것도 없다.
“장계를 이리 가져와라.”
명하니 바깥에서 오 내관이 장계를 들고 들어와서 내게 공손히 바쳤다.
그것을 잡아 열고 읽으니 그 내용 가운데 내 시선을 이끄는 구절이 있었다.
“.......도승지.”
“예, 전하.”
“아직은 추측이나 아무래도 명과 청이 서로 힘을 겨룰 생각으로 보이오.”
“이런 시기에 말입니까?”
이경증은 적잖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는데, 그 말에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제 북방에서는 동장군이 그 모습을 슬슬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소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으나 정황이 그리 말하고 있소. 저들이 찾아오는 일도 그와 관계한 일이겠지.”
잠시 말을 멈춘 나는 턱을 쓰다듬고 그 정황이라는 걸 알려줌이 옳다고 여기며 입을 열었다.
“화란에서 온 상인이라는 자들이 이르길, 먹을 곡식을 대량으로 찾고 있다 하였소. 그런데 들으니 저들은 우리가 먹는 것은 주식이 아니며 밀과 같은 것을 주식으로 하며 더욱이 저 멀리에서는 타락이 흔하여 그것을 매일 먹는다고 하오.”
“그것은 기이하군요.”
“기아하다라.”
기이하다 말하는 그 말에 슬며시 웃은 나는 이내에 표정을 진중하게 바꾸며 마저 말을 내었다.
“기이한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생각하지. 먹는 것이 다른 이들이 쌀을 구하고자 하니 그들이 먹고자 함이 아니며, 그 구하고자 하는 양도 고작 몇십을 먹이고 끝날 일이 아니라 수천, 수만을 먹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양이라 하고 있소.”
“명나라에서 그것을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디건 그만한 양을 원할 나라는 정해져 있소. 명과 청, 그도 아니면 일본이 전부지. 왜가 준동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아주 없을 일은 아니나 그렇다면 당장 보낸 이들에게서 연락이 닿았을 것입니다.”
이경증이 아뢰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니 당장 그 양곡을 원하는 이는 명과 청 중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당당 저들 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들이니 급히 대량으로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하겠소.”
“어지러움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그도 있으나 나는 이 일을 대함에 있어서 좋은 방도를 그대를 비롯한 승정원, 아니 조정에서 논하고자 하오.”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였는지 이경증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승정원에서는 조정 대신들에게 은밀히 일을 일러 조선이 취할 방책과 나아갈 길을 생각하라 전하시오. 저들의 요청이 확실하여진 후에 그것들을 논할 것이오.”
“전하께서 이르신 뜻을 빠짐없이 전하겠습니다.”
이경증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혹시나 이 일이 도움이 될까 싶어 다시금 윤휴가 보낸 장계를 살폈다.
그렇게 수일이 지나고 의정대신 용골대가 내 앞에 서게 되었다.
***
“전에 있던 일에 대해서 다시금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단지 굴마훈의 어리석은 사욕으로 비롯한 일이나, 무터부러 친왕 요토와 그 휘하 팔기는 그 꼬임에 넘어가 어리석음을 도왔으니 실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왕 앞에 선 용골대, 타타라 잉굴다이는 곧장 이미 그 좋고 나쁨이 가려진 일을 들먹이며 이쪽 기분을 살폈다.
본디 잉굴다이는 조선에 오가며 외교하고 말을 나눔에 있어서 예의를 잃지 않았음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세가 낮으니 원하는 것이 더 있다는 생각이 들기 쉬웠고, 조선왕으로 시작하여 그 누구도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흐리는 법, 나는 그것으로 인해 청나라에 따로 악감을 품지는 않소. 그대들이 혹여 이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뒤집고자 하지 않는 한 말이오.”
‘의심이 다들 가득하군. 하긴, 당연한 일이다.’
의심이 얼굴에 머물지 않고 조선왕의 입에서 나와 형태를 갖추니 잉굴다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직감하며 입을 열었다.
“이미 정해진 일이며, 서로가 이것이 옳다고 여겨 하기로 한 일입니다. 당장 이웃과 약조한 것도 서로 면을 보아 어기지 않고 지키는데 나라 간의 일이 어찌 가볍겠습니까. 이번에 같이 내려온 이들 가운데 일부를 일차로 팔기들을 대신하여 남길 것이며, 무터부러 친왕을 대신할 분 역시 곧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소. 그대가 우리에게 공정하게 대하였음을 기억하고 내가 전일 박대한 것을 기억하니 오늘은 그 갈음을 하고자 하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사신으로 왔을 때 박대하였던 일을 꺼내며 갈음이라 하니 잉굴다이는 다행이라 여겼다.
‘괜찮은 출발이다.’
“그런 옛일은 잊었으나 그리 말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하다 하겠습니다. 허면 그 호의에 기대어 제안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대들은 상국이니 어지간한 요청은 귀히 들을 것이오.”
귀히 듣는다고 하긴 했으나 이루어줄 것이라 호언하지 않았음을 새기며 잉굴다이는 입을 열었다.
“청에서는 조선과 조선왕께 이번 일로 인해 약조함을 부디 지켜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약조함을 지켜달라?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대들이 지켜야 할 일인 거 같은데.”
“사람에 대한 것이라면 그러하나 교역에 대한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하늘이 겸손할 것을 청함인지 올해 만주 농사가 그리 소출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먹을 것을 구하기 급급해지니 겨울을 나기 위해 조선에서 양곡을 구하고자 합니다.”
양곡을 구하고자 하는 잉굴다이의 말에 진실과 거짓이 함께 깃들어있으니 진실은 양곡을 구하여 겨울을 나고자 함이되 거짓은 그 부족함이 농사가 변변치 않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웃이 어려우면 도움이 마땅한 일이나, 전에 약조한 것은 귀한 것을 그대들이 구하고자 할 때 우선하여 주고자 함이었소. 양곡은 그에서 벗어난 물품이라 확답하여 주기 어렵소이다.”
“물론 보통은 그러합니다. 하지만 양곡이라 함은 그 상황에 따라 때때로 금보다 가치가 있으니 이번에 닥칠 겨울이 그러할 것입니다. 부디 조선왕께서는 황상의 요청을 함부로 물리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잉굴다이가 다소 약하게 보일 정도로 청하니 조선왕의 입에 굳게 닫혔다.
그 모습에 잉굴다이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것은 단순히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저들이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양곡을 우리에게 내어주기 위해서 하는 구색이지.’
급한 것은 맞으나 굳이 약함을 드러낼 필요도, 진정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될 필요도 없다.
그저 청이 잠시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조선에서 못 본 척할 수가 없어 손을 빌려주었다는 형식이면 충분하였다.
잉굴다이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이들 조선을 설득하기에 가장 적당한 방식이었다.
“.......사람 목숨은 귀하나 그것을 함부로 정하기에는 조선의 사정을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소. 그대는 잠시 물러나 주시오. 대신들과 논하여 가부를 정하고자 하오.”
“작은 일이 아니니 어찌 가벼이 논하겠습니까. 부디 조선왕은 물론이고 조선 대신들께서도 이웃한 나라의 어려움을 보아 넘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저런 거짓에 굳이 어울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잉굴다이가 물러난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대제학 이식이었다.
그는 딱딱한 얼굴로 말하더니 곧장 말을 늘어놓았다.
“상께서 얼마 전에 이르신 것처럼 사방에서 곡식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급하고 크게 구하고자 하는 이가 명나라입니다. 그 큰 나라에서 곡식이 부족하다고 하여 다른 나라 상인들에게 타진하더니 이제는 그 대적인 나라에서 곡식을 구합니다. 저들은 명백하게 잠시 쉬었던 일을 다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식은 이리 말하고는 조정 신료들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 남이 싸우는 일에 나라 곳간을 털어야 합니까? 하물며 저들은 전에 우리나라를 침탈하여 궁핍하게 한 이들입니다. 상께서 돌보심이 있어 그 피해가 나날이 메워지고 나아지고 있다고 하나 당장 여유가 있다면 그것을 더욱 돌봄이 옳지, 남의 다툼에 도움을 주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조정 신료들 가운데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식의 말에 동의하였으나 그것은 그저 몇몇에 그칠 뿐이었다.
하물며 대간들이라고 그 말이 옳다고 여기진 않으니, 곧 이식과 다른 의견을 낸 이가 있었다.
“대제학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사람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다툼이라는 건 참으로 이상하여 그저 두고 봄이 상책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이웃한 나라끼리 다툼이라면 가만히 두고 봄은 중책도 아니요 하책이니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의정께서는 말이 좀 과하십니다. 어찌 다툼을 두고 보는 것이 끼어듦보다 하책이란 말입니까?”
우의정 최명길이 하는 말에 이식이 가리지 않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에 최명길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전쟁에 손을 보탬이 마땅치 않게 느껴짐은 이해하며, 군자가 나아가기에 마땅하지 않음도 압니다. 하지만 다툼이란 오묘하여 싸울 때는 그 앞에 있는 상대방이 거슬리고 미우나 끝난 후에는 이기고 지는 것과 별개로 옆에서 보고 있던 이에게 그 감정이 향합니다.”
최명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임금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하, 감히 말씀드리건대 가만히 보고만 있자면 서로 이유를 대어 우리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의정께서는 우리보고 저 청나라의 편이라도 들어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보통은 입을 잘 열지 않는 사람, 대사헌 김수현이 그 세월과 고집이 느껴지는 얼굴로 물으니 최명길은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것이 필요한 길이고 합당하다면 그리해야 합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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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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