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존댓말, 존칭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에 대한 구분도 모호한 세상, 위계가 흐릿한 기원전 4만년으로 안내합니다.
#12
스르르, 이난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당겼다.
‘드디어 깼나?’
올간은 이난나의 기척에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더 웅크린 자세였다.
‘움직였다!’
“어이,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올간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모두 이난나에게 쏠렸다.
이난나는 숨간 움찔했다.
갑자기 들리는 말에도 깜짝 놀랐다.
‘누구지?’
이난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 사람은 말을 건네고 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웃는 것 같으면서도 말투는 자뭇 거만했다.
“너무 그런 표정이면 곤란한데~”
말을 거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말꼬리를 흐렸다.
머리는 띵하고 손목은 쓰라렸다.
녀석이 다가왔다.
움찔 뒤로 움직이려 했지만 손발이 묶였으니 몸이 뜻대로 움직일 턱이 없었다.
“어허, 가만히 있어. 네 짝이 곧 널 자유롭게 해줄테니”
녀석이 풀어준다는 말에 반갑기는 했지만, 짝이 어쩌고 저쩌고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순간 역겨움이 올라왔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속 편할텐데, 이 녀석은 분명 짝이라고 했다.
본능은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재수 없어”
이난나는 무심코 나직히 내뱉었다.
“어이쿠, 이거 첫 만남부터 완전 망했구만.”
올간도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 때문인지 마음과 입이 따로 놀았다.
다른 사람이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에흘린이나 남무는 달랐다.
“그걸 이제서야 풀어주냐? 진작 풀어줬어야지. 니가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널 좋아할 턱이 있겠냐? 짝? 웃기고 있어”
에흘린은 어설프긴 해도 이난나가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올간을 비웃었다.
“왜 이래? 나 꽤나 인기 있다고!”
“웃기시네”
에흘린은 빈정거리며 올간을 흘겨봤다.
“올간! 멈춰!”
세바히쿠도 동굴을 나오다가 올간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바히쿠의 참견에 올간은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아이를 풀어줘”
이번에는 에가의 목소리였다.
에가는 팔짱을 낀 채 모닥불을 향해 걸어나오고 있었다.
세바히쿠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에가의 눈치를 보며 반보 뒤에서 쫓아나오는 중이었다.
묘한 광경이었다.
“에가, 그건 좀···”
세바히쿠는 에가의 눈빛에 말을 먹었다.
“왜? 아직도 저 계집애한테 관심 있어?”
에가가 세바히쿠를 째려보고 있었다.
“에가, 그게 아니라···도망이라도 가면 곤란해.”
“제깟게 도망가 본 들? 이 숲을 헤쳐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원래 죽이려고 했던 애 아니야?”
세바히쿠는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남자들이란 도대체···머릿 속에 그 생각 밖에 없지?! 작은 머리 인간들쯤이야 우습다고 하지만, 온통 그 녀석들로 꽉 차 있다고, 우리 할머니 못봤어? 늬네 남자들을 죽이는 건 결국 작은머리 인간들이 될거야. 조심해!”
에가의 할머니 이리나는 이난나처럼 작은머리 인간이었다.
할머니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자 주위는 침묵에 쌓였다.
“그래서, 에가, 풀어줘서 어쩌자는 거야?”
“작은머리 애들한테 돌려줘야지!”
“난 싫은데?”
올간이 다시 끼어들었다.
“저 자식을 묶어 놔야 해! 뚤린 입이라고 제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사태의 화근을 만든 장본인이 올간이었다. 에가가 거품 물고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 누나라고 가만있자 하니까!”
“올간! 적당히 해라.”
세바히쿠가 올간을 제지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남무가 세바히쿠와 에가에게 다가갔다.
“에가, 세바히쿠, 올간은 내가 타이를께. 참아. 정 안되면 우리 씨족에서 내보내마.”
남무의 입에서 무거운 얘기가 나왔다.
상황이 나쁘면 올간을 추방하겠다고 올간의 엄마가 선언한 것이다.
올간은 그녀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그 오른팔을 잘라내겠다고 한다.
씨족에서 세바히크와 함께 발언권이 가장 강한 사람 중 한 명이 남무였고, 에가였다.
남무는 에가의 이모이기도 했다.
세바히크에게 무력이 있다면 남무에게는 정치력이 있었다.
정치력은 일정부분 무력이 받쳐줘야 했다.
남무 본인의 실력도 있었지만 죽은 남편이 큰 몫을 했고, 남편이 죽은 이후로는 올간이 그 공백을 메웠다.
올간은 씨족 안에서 굉장히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올간을 안하무인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또래와 달리 씨족 안에서 무력과 정치력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할머니한테 전수받은 지식까지.
올간은 씨족 안에서 나이에 비해선 넘사벽에 가까웠다.
그간 올간이 제 멋대로 굴어도 아무도 제지를 못했다.
사실 남무가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엄마 말이 맞네, 쟤 하나 데려왔다고 난리가 나는구만. 뭘 추방까지 한다고 그래, 그냥 내 발로 나가줄께, 이쁜이! 살아있어라, 나중에 보자!”
올간은 이난나에게 윙크를 하곤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무는 잠시 놀라는 눈치였으나 올 것이 왔구나라고 이내 마음을 접었다.
한숨이 나왔다. 엄마보다는 할머니를 더 따르던 아이다.
할머니가 사라져서일까? 제 아빠가 죽어서일까?
그 후부터 비뚤어진 행동이 부쩍 늘었다.
제가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가가 나서서 이난나를 묶고 있던 나머지 밧줄들을 모두 풀었다.
모두가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난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자기들끼리 소란이 일더니 밧줄을 풀어주러 왔던 재수없는 녀석은 휑하니 사라졌다.
주위를 다 둘러봐도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큰 머리 사람들이 분명했다.
얼굴은 대체로 희었다.
에가는 그들 중에서 비교적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조금은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 남무를 바라봤다.
그 옆에 서 있는 에흘린도 다른 사람들과 미묘하게 달랐다.
남무는 묘한 기시감마저 드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우리말을 할 수 있지?
두려움은 밧줄이 풀리며 서서히 사라진 반면 궁금증은 쌓여갔다.
“이름이 뭐니?”
“응? 우리말을 어떻게 할 줄 알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
뭔가 가시돋힌 말이었다.
행동과 말이 서로 어긋났다.
큰 머리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인가 싶었다.
“이난나”
“에가, 난 에가야. 여기 널 죽여야 한다는 사람,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람, 방금 전에 그 미친 놈은 널 제 짝으로 만들겠다고 우겼고, 네게 흑심을 품은 남자들 등이 있어. 난 널 돌려보내려는 쪽이고.”
떠듬떠듬이지만 이난나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이난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상대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아니 내가 뭘 할 수 있지?”
에가는 꽤 어리게 보이는 이난나가 당돌하게 대답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네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네 상태를 알려주는 것뿐이야. 너무 두려워 말라고 하는 말이야.”
“고마워.”
그 말 외에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13
이난나는 사슴을 잊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머리를 굴려도 딱히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막 깨어났을 때 봤던 사슴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슴, 사슴은 어떻게 됐어? 아기 사슴이 있었는데?”
- 작가의말
네안데르탈인 주요 등장인물
(네 : 네안데르탈인, 사 : 호모 사피엔스)
올간 : 주인공, 네 75%, 사 25%, 남성, 만 14세
남무 : 올간의 엄마, 네 50%, 사 50%, 여성, 만 35세
세바히쿠 : 에가의 남편, 네 100%, 남성, 만 26세
무치 : 올간의 친구, 네 100%, 남성, 만 14세
에흘린 : 올간의 친누나, 네 75%, 사 25%, 여성, 만 19세
에가 : 알라하의 딸, 올간의 사촌누나, 네 75%, 사 25%, 여성, 만 22세
하오마 : 알라하의 딸, 올간의 사촌누나, 네 75%, 사 25%, 여성, 만 17세
호모 사피엔스 주요등장 인물
이난나 : 주인공, 호모사피엔스 100%, 여성, 만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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