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인형
분명 언젠간 메이저 아르카나와 전투를 펼치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상대는 아마 베티르라고 생각했다.
[XI. 정의(Justice)] 아르카나를 가지고 있던 데프니는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데프니와 함께 [IV. 황제(The Emperor)]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직접 [IV. 황제(The Emperor)]와 마주해서 싸웠더라면 아디나는 분명 패배했으리라.
그렇게 탑을 올라간 아디나와 나린은 고작 한층 올라갔을 뿐인데 이번에는 아예 인간이 아닌 아주 위험한 생물이자 순수한 아이 같았던 [XII. 매달린 사람(The Hanged Man)]은 다행히도 아디나와 나린에게 부탁을 해왔다.
눈을 찾아달라는 어이없는 부탁에 죽을뻔한 위기를 넘기고 나니 이번에는 [0. 광대(The fool)]..
[0. 광대(The fool)]는 지금까지의 메이저 아르카나들과 다르다.
납치한 인간들이 저 넓은 공터에서 고문당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XII. 매달린 사람(The Hanged Man)]의 눈이라고 추정되는 구체도 가지고 있다.
어딜 봐도 악의를 갖고 행동한 움직임이다.
“ ..우릴 놔줄 생각은 없겠지? “
“ 놔줘? 누굴? 너희를? 왜?! 오랜만에 온 인간인데!! 걱정마 걱정마~! 너희에게는 악기를 연주하라고 안 하니까! 오랜만에 온 손님이니까 우리의 공연을 봐줬으면 하는데!! 너희들을 위한 평생 분의 공연이 준비되어있다구우~! 켘케케케켘!! “
아디나와 나린을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얌전히 있다간 저 공터에 잇는 사람들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싸워야지.
이겨내야지.
“ 가자..! [여섯번째 지팡이(Six of Wands) - 여섯개의 불꽃]! “
아디나는 여섯개의 불꽃을 장전해놓은 상태로 달려 [0. 광대(The fool)]에게 타오르는 검을 휘두른다.
“ 킥킥킥킥..! 기운이 넘치는 게 우리의 공연을 보고 신나게 흔들 수 있겠는데?!!! [0. 광대(The fool) - 춤춰라 원숭이]~! “
-끼끾! 끾! 끼끼끼끾!!
[0. 광대(The fool)]가 자신의 아르카나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크게 원을 그리자 그 안에서 수십 마리의 불타는 원숭이가 튀어나와 아디나를 공격한다.
“ 읏..! 뭐야..! “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던 아디나가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휘둘러 불타는 원숭이들을 쳐내기 위해 불꽃을 하나 소모한다.
하지만 같은 불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오히려 크기가 조금 커진 듯한 느낌을 받을 뿐 기세가 죽는 느낌은 없었다.
“ 아디나! 이런..! “
아디나가 화려하게 불꽃을 뿜어내며 시선을 끄는 사이에 나린이 뒤를 공격하려고 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나린이 아디나의 앞으로 끼어들어 차크람을 휘두른다.
-끼기긱..!! 케케켁!!
“ 아디나! 역할 바꿔! “
“ 알았어. “
아디나는 나린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자신의 근처를 불꽃으로 둘러 시야를 가린다.
“ 캬~ 잔(cup) 아르카나가 있다니! 이래서는 우리 아가들이 전부 얼어붙겠는데~? “
나린이 [다섯개의 잔(Five of Cups)]을 활용해 불타는 원숭이들을 하나씩 얼려버리자 [0. 광대(The fool)]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더더욱 많은 원숭이를 만들어내고 그런 나린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 키키킥!! 좋아!! 더욱더 신나게 해봐!! [0. 광대(The fool) - 춤춰라 원숭이]!! [0. 광대(The fool) - 춤춰라 원숭이]!!! [0. 광대(The fool) - 춤춰라 원숭이]!!~!~! “
“ 큿..! 날 장난감 취급하고 있어..!! “
아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원숭이들이 이제는 정면뿐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한다.
마치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며 사방에서 달려오는 원숭이들을 제거하는 나린은 빠르게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 [여섯개의 검(Six of Swords) - 충격파]! “
나린의 화려한 차크람들을 바라보며 신나게 손뼉을 치고 있던 [0. 광대(The fool)]에게 몰래 접근한 아디나가 등 뒤에서 강한 충격파를 터트리면서 검에 불을 붙인다.
“ 크학..! 아파라..!! 아프잖아!! 따끔해!! “
“ 시끄러워...!! “
-화르륵...!
그대로 아디나의 [0. 광대(The fool)]의 몸을 정확하게 반으로 베어버린다.
“ 으아아아.. 아..! 안돼..! 난 이대로 죽.. 진 않지만. [0. 광대(The fool) - 최고의 연기]~.... “
한순간 붉게 타오르던 눈이 색을 잃더니 [0. 광대(The fool)]의 목소리가 뭉개지며 점차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아디나의 등 뒤에서 두꺼운 손이 어깨를 짓누른다.
“ 짠~! [0. 광대(The fool) - 마리오네트] “
너무 쉽게 쓰러뜨린 기분이라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는데도 아디나가 반응하는 것이 너무 늦어버린 탓에 급하게 뒤로 도약하려고 했으나 한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아...! “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발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니..
오른쪽 어깨가 움직인다.
팔을 움직이려고 하니 발목을 움직인다.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돌리려고 하자 이번에는 머리가 옆으로 돌아간다.
“ 이.. 이게 무슨... “
“ 케케케케케! 움직이지마~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 스스로 목을 비틀어버릴라! “
[0. 광대(The fool)]는 마치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아디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이곳저곳 손가락으로 찔러보고는 신기해한다.
“ 와우~!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는 정말 오랜만에 보네!! 뜯어서 내가 쓸 수는 없나? 이거 다시 자라는 거야? 응? 응? “
“ 아디나..!! 읏...! 하아.. 하아... 저리 가..! “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0. 광대(The fool)]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아디나를 나린이 시선의 끝으로 확인했지만 도우러 갈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불타는 원숭이를 정리해냈지만, 아직 남아있는 원숭이들이 나린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불꽃으로 조금씩 나린의 체력을 갉아먹어 버리는 바람에 조금씩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 아아~ 너도 남았지 너도 남았지.. 난 항상 이렇게 방심한다니깐...! [0. 광대(The fool) - 최고의 연극을 위한 준비]! “
그 어떤 움직임도 하지 못하고 있는 아디나의 앞에서 회색빛으로 변했던 [0. 광대(The fool)]의 눈이 다시 타들어 가는듯한 진한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도 원숭이들과 싸우고 있는 나린을 향해 다가간다.
나린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듯이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차크람을 휘두르는 나린의 뒤로 살며시 접근한 [0. 광대(The fool)]는 아르카나를 꺼낸다.
“ [0. 광대(The fool) - 마리오네트]~ “
“ 아윽..!!! 하아.. 하아... 이 자식..! 무슨 짓을..! “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던 나린이 한순간 뒤집어져 넘어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 킥킥킥킥..! 움직이지 마~ 모처럼 얻은 아르카나 소유자가 스스로 목을 꺾어서 죽어버리면 너무 슬프잖아~? 케케케케!! “
그대로 [0. 광대(The fool)]의 손이 움직이자 나린의 몸이 멋대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 이게 무슨..! 읏..! “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데 멋대로 움직이는 그 이질감에 억지로 다리를 움직이려다 목과 허리가 돌아간다.
“ 킥킥킥킥..!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의 공연은 보고 난 뒤에 죽었으면 좋겠는데!! 자자! 자자! 얼른얼른 움직여! 화려한 축제가 시작될 거라고! “
-띠띠디.. 띠릭.. 띡..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도 들렸던 불쾌한 불협화음은 가까이서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 불협화음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 랄라라~ 라라라~!.. 흠... 이번 건 쫌 별로군... 지난 건 잊고! 34번째 공연에 들어가 보자구!! 케케케케켁!! “
[0. 광대(The fool)]는 정말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아디나와 나린을 앞에 앉혀둔 채로 꽤 오랜 시간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에 앉아있던 터라 슬슬 아파져 왔지만, 몸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주 조금씩 몸의 뒤바뀐 감각을 익혀나가는 와중에 어느새 나린이 살며시 손가락을 움직여 아디나의 손등을 콕콕 찌른다.
“ ..팔은 찾았어..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해볼게. “
아디나도 어느 부분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해야 팔을 움직일 수 있는지는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움직여지지는 않았는데 나린은 어느새 손가락과 팔, 손목을 움직여 원하는 행동을 하는 것까지 가능한가보다.
물론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마법 자체를 해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아디나도 최선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X.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를 통한 전투를 끊임없이 생각해내고 있었다.
‘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
아마 불가능하겠지.
지금 저렇게 자신의 공연에 심취해있는 틈을 타서 주위에 이용할 만한 건 없을까..?
“ 흐음.. 여전하시군요 [0. 광대(The fool)]. “
-띡.
한순간 음악이 멈추고 모든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신나게 연주하던 곡도, 화려한 조명도 한순간에 꺼진다.
“ 오.. 오호오호... 오호라!!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야~ 반가워 [I. 마법사(The Magician)]! 아니아니아니 베티르!! “
조용한 무대 위에서 혼자 지휘하고 있던 [0. 광대(The fool)]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베티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나타났다.
가만히 서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베티르와는 달리 [0. 광대(The fool)]는 계속 베티르의 주위를 돌며 신난듯이 뛰어다닌다.
“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IV. 황제(The Emperor)]가 도망쳤어요. “
“ 힉... 기분 좋았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어!! 어째서 그걸 가져오지 못한 거야!! “
베티르는 얼굴에 튄 침을 손수건을 꺼내 닦으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한다.
“ 우리가 알고 있던 [IV. 황제(The Emperor)]는 가짜였습니다. 그도 하나의 모래 병사였던 것이죠. 당신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군요. “
베티르의 말을 들은 [0. 광대(The fool)]의 눈이 자기 멋대로 돌아가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베티르는 [0. 광대(The fool)]가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아도 무시하고 할 말을 계속해낸다.
“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
“ 모르지나야! “
“ 그렇겠죠.. 당신이 알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거겠죠.. 그래서? 당신은 웬일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까? 항상 연주가 불만이라면서 손가락이나 잘라내시더니.. “
베티르의 안타까운 소식에 우울한 표정을 짓던 [0. 광대(The fool)]는 갑자기 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활짝 웃고는 양팔을 펼쳐 보인다.
“ 들어봐 들어봐! 한동안 인간 놈들이 없어서 우리 서커스단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그런데 방금 두 명이나 가입했지 뭐야!! 심지어 마이너 아르카나를 가지고 있었어!! 이런 행운이 있나! 케케케케케케!! “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겠지만, 마이너 아르카나를 붙잡았다는 말에 베티르의 표정이 살짝 뭉개지며 고개를 돌려가며 그 마이너 아르카나 소유자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앉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아디나와 나린을 발견한다.
’ 흐음... 미치겠군.. ‘
그대로 아디나와 나린에게 다가간 베티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낮춘다.
“ ...[0. 광대(The fool)]. 사실 이들은 제가 밑에서 키우던 사람들입니다만.. 이 둘을 저에게 줄 수는 없겠죠? “
“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꺼야! 내 인형이라구! 얼마 만에 들어온 내 관객들인데!! 어딜 뺏어가려고! “
참.. 난감하다.
밖에서부터 겨우겨우 구해온 인재들인데.
얼마나 힘들게 키워놓은 인재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이 두 명을 [0. 광대(The fool)]에게 뺏기다니..
심지어 이 [0. 광대(The fool)]는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람을 납치해다가 자신의 공연을 꾸미기 위함일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귀한 자원인데..
“ ..당신들은 정말 위험한 곳을 참 좋아하는군요. “
“ 우리가 가겠다는데 뭐 불만이야? 올라가길 원했으면서. “
“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할 말은 해대는 둘을 보니 참 재밌게 느껴졌다.
“ 후후후.. 저 [0. 바보(The fool)]에게 묶이고도 입은 살아있군요. 뭐. 전 그런 것도 좋아합니다. “
베티르는 [0. 광대(The fool)]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가락에 빛을 만들어 바닥에 불꽃모양을 조그맣게 새겨넣는다.
이쯤만 해두면..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볼까나..?
“ [0. 광대(The fool)]가 돌려줄 생각이 없다니 어쩔 수 없죠. 그리고 [0. 광대(The fool)]. 저는 한동안 [IV. 황제(The Emperor)]를 추적할까 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아래층을 샅샅이 뒤져볼까 합니다.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계세요. 아시겠나요? “
자신이 붙잡은 아디나와 나린을 소개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던 [0. 광대(The fool)]가 갑자기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 으으.. [IV. 황제(The Emperor)]를 죽일 거라고 해서 이제야 슬슬 움직이나 했는데 또 기다리라는 거야?! 내가 무슨 강아지인 줄 알아?! 싫어!! 올라가겠어!! 마이너 아르카나도 얻은 우리 서커스단이 전부 죽이겠어! 케케케케!! “
그리고는 다시 웃는다.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표정이 변할 수가 있을까 싶다.
“ 흐음.. 뭐 심심하면 바닥에다 그림이나 그리고 계시죠. 혹시 아시나요? 그림이 현실로 튀어나올지? “
베티르는 슬쩍 아디나와 나린에게 눈빛을 보낸 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작가의말
아르카나의 한글 명칭은 진행에 맞게 임의로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문은 타로카드명칭 그대로 적어놓았기 때문에
한글이름과 영문이름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부분이 불편하시다면..
죄.. 죄송....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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