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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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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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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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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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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예선(7)

DUMMY

※※※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소홍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통째 청강석으로 이루어진 경기장 구조물을 지나쳐, 아래에 내려서자 처음에 올라가라고 안내해주던 무당파 무인이 있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는데 피곤이 싹 달아난 표정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무인이 이윽고 재빨리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승리 축하드립니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홍이 걸음을 옮겼다.


무대 아래, 작게 마련된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소년 소녀들이 그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청율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소홍은 뒤이어 그의 등과 머리를 후려치려 날아오는 손짓을 간신히 피해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일초지적으로 만들줄 알았는데?”

“수련이 부족하네. 수련이.”

“소홍 사형, 멋있었어!”


헛손질을 한 단휘와 무진이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고, 이결은 눈을 반짝이며 신을 내었다. 도현은 곧 치뤄야 할 경기 때문인지 긴장한 기색으로 축하를 건네었고 연청과 연비, 선아는 언제나와 같이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방금전 싸움, 알지?”


여상한 태도로 내뱉는 사제가 있었다. 소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가지. 실수했어.”


소홍 또한 스스로의 경기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두차례의 실수에 가까운 행동이 있었다. 첫 일격을 펼치고 상대가 회복할 시간을 준 것, 헌위가 펼친 각법에 뒤로 물러나고 만 것.


소홍의 답에 백연이 미소지었다.


“알면 됐어. 그리고 잘 했어.”


담백한 칭찬이었다. 그러나 소홍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제는 평범한 칭찬에 인색한 편이다. 언제나 장단을 짚으며 나아갈 길을 찾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저리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소홍이 기분좋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고마워.”

“소홍 사형은 전승하고 올라갈테니까.”

“가능한거냐?”


끼어든 무진의 말에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못할 이유가 있나.”

“아니지, 못할 수도 있지.”

“왜?”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단휘가 웃었다.


“너를 만나면 지는거잖냐. 서로 만날수도 있고.”

“아.”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첫번째 경기에서는 같은 문파의 사람을 만나지 않지만 그 뒤부터는 혹시 만날 가능성도 존재한다던가.


이어지는 대진이 무작위적으로 결정되는 예선의 특성상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안 그러길 바라지만, 사형들을 만나면 최대한 열심히 해볼게.”

“......난 너 만나면 바로 기권이다.”


단휘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에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랬다가 수련할때 감당 되겠어?”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내 인생에 기권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아.”

“아하핫.”


웃음을 흘린 백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음 대진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할 시간이었다. 앞으로 한시진 정도 뒤에 단휘와 도현의 경기때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다.


‘좋은 시작이다.’


무대 아래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기며 백연이 생각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많았다. 들어보지 않아도 무슨 말들을 하고 있을지가 뻔하게 보였다. 오가는 음성은 곤륜파나 소홍에 관한 것이겠지.


예선 경기 전체에서도 개막전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눈이 쏠리는 편. 거기에다 상대는 이름이 좀 있는 강한 상대였다. 그런 이를 소홍이 보란듯이 찍어눌렀으니, 앞으로 곤륜파의 모든 경기에는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을터.


그가 이런 대진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소홍의 시작을 이어받을 사형들의 활약.


그리고 백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장문인께서 좀 바빠지시겠네.’


백연이 생각했다.


명성에는 부가 따르기 마련. 새로운 용이 막 탄생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얼마나 빠르게 행동할까. 모르긴 몰라도 몇몇은 방금 그 경기를 본 순간 이미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장문인과 가주들을 위한 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운결. 곧 있으면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움직일 장문인을 상상하며 백연이 웃었다.



※※※



“음.”


옅은 음성이 허공을 물들였다. 주름진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린 제갈가주 와룡천견(臥龍千見)의 목소리였다. 독특하게도 창공처럼 푸른 눈을 지닌 노인이었는데, 회백색 수염과 머리칼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꼭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 했다.


“청해 곤륜파라고 했소?”


특정한 대상 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그 태도가 가벼웠는데, 상석에 모여 앉은 이들중 그의 말에 숨겨진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놀라움과 당황, 그리고 더 나아가면, 눈앞에서 펼쳐진 무공에 대한 호기심까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태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턱을 괴고 앉아 소녀처럼 발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운하검신, 그리고 아직도 이 자리가 불편한듯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남궁가주와 초췌한 안색으로 손을 모으고 자리에 앉아있는 당가주 천독.


그것이 전부였다.


신승과 선극은 이 자리에 없었고, 그것은 악가주와 팽가주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은 우연이나 특출난 재능이라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두번, 세번은 아닙니다.”


담담히 답한것은 아미파의 장문사태 금정신니(金頂神尼)였다.


“그때부터는 그것은 문파의 저력이라 봐야겠지요.”


그리 말하며 눈으로 경기장 위를 훑는다. 직전까지 경기가 치뤄지던 자리는 이제 다음 대진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


“저력이라.”


와룡천견이 중얼거렸다.


첫번째는 암화였다. 그의 명성과 활약은 모를수가 없는 것이니.


간간히 그런 이들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압도적인 재능의 소유자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길바닥을 전전하는 낭인도, 어디 산골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던 이들 중에서도.


본래 대명의 태조(太祖)는 농부의 자식이자 어렸을 적 목동 노릇을 했다 하던가.


암화의 존재는 놀랄만한 것이나,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태산파가 그리 녹록한 상대는 아닐 터인데. 단 세 합에 승부가 결정나다니. 놀랍구려.”


청운진인(靑雲眞人)이 뇌까렸다.


방금 전.


무대 위에서 검을 흩뿌렸던 청년에 관한 이야기였다. 태산파의 무인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한 단휘.


화려한 무공이나 기교도 없었다. 단지 터벅터벅 무대에 걸어 올라와, 검을 거꾸로 어깨에 걸쳐맨 독특한 기수식을 취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고, 한번의 검광이 일었다. 그 검광 안에 세번의 검격이 깃들었다는 사실은 상석에 모여앉은 사람들의 눈에나 보인 것이었다.


개막전의 충격을 이어나가는 결과. 소홍의 변칙적인 투로도, 단휘의 압도적인 쾌검도 쉬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제는 우연이라 말할 수 없다.


“이보시오, 검신.”


퉁명스레 입을 연 것은 점창파의 장문인 초현진인(初現眞人)이었다. 그가 양손으로 턱을 받친 서일화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화산파가 곤륜파와 섬서부터 이곳까지 동행했다 들었소. 곤륜파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는 것이 없소?”

“아는 것?”


서일화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제가 아는 건 당신들이 아는 것과 다를바 없어요. 다만 제자의 개인적인 친분과, 섬서의 사건 이후로 교류를 하게 된 것이지.”

“......그게 전부요?”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네요.”

“청해는 외도(外道)의 땅이요. 혹 저들이 힘을 얻은 방법이 그릇되었다거나 하는 낌새를......”

“초현진인.”


서일화의 음성이 가볍게 울렸다. 옅은 경고를 담은채였다.


“방금 전 저 아이가 펼친 무공을 보지 못했나요? 바람을 휘감은 기파. 형태는 다르나 정명한 도문의 내공심법으로 쌓은 기운입니다.”

“눈속임은 많지 않소? 곤륜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초현진인의 행태에 서일화의 표정이 굳어드는 순간이었다. 나직한 음성이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가.”


여태껏 아무말 없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아있던 천독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그 자체로 사람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한 무게감이 있었다.


“인정했다.”


뜬금없는 언행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금정신니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인정이라니......”

“암화를 봤다. 내 일수(一手)를 막더군.”

“암화한테 출수를 했단 말입니까?”


금정신니의 음성에 경악이 깃들었다. 그러나 입을 닫은 천독은 무심하게 시선을 경기장으로 던질 뿐이었다.


뒤이어 서일화가 입을 열었다.


“곤륜은 뿌리가 깊은 문파에요. 과거 하늘에 용을 그려내는 무인들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언제 다시 일어서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을련지.”

“검신께선 곤륜파에 호의적이시구려.”

“맞아요.”

“그리 말하니 더욱 관심이 가는구려. 이 노부도 한번 지켜봐야겠소.”


와룡천견이 몸을 살풋 숙였다. 그의 푸른 눈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눈에 휘감기는 안법 기파가 강대했다.


뒤이어 올라오는 무인이 있었다. 직전 경기를 펼치고 내려간 곤륜파의 무인과 똑같은 복식의 청년. 연홍빛 무복 위에 걸친 백청색 장포 아래로 손이 살풋 떨리고 있는 것이 퍽 긴장한 듯 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와룡천견이 중얼거렸다.


“곤륜파라는 이름이, 어디까지 가는지.”



※※※



“후하.”


도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손끝이 차가운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중이었다.


“진정하자, 진정.”


되뇌이듯 스스로에게 속삭인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무대 위였다.


사방을 원형으로 둘러싼 객석들이 저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곁의 무대에는 제각기 무인들이 올라와 태연히 경기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볼때는 몰랐는데, 이곳에 올라오자 모든 소리가 큼직하게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고함 소리. 심지어는 바람 소리나 그의 심장 소리마저도.


‘그냥 크게 뛰고 있는건가?’


문득 생각한 도현이 긴장섞인 웃음을 뱉었다.


그의 경기는 단휘의 바로 다음이었다. 직전 벌어진 압도적인 공방을 눈에 담은 직후라 그런지 더욱 부담감이 심했다. 다들 편하게 하고 오라고 했지만 기분이 그렇지 못했다.


“왜 하필 소홍이랑 단휘 다음이어서.”


무진과 더불어 가장 강한 백자 배 아이들 세명이다. 백연이야 규격을 넘어선 예외니 그렇다고 치지만, 나머지의 사이에서는 은근한 자존심 싸움이 없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무공을 익힌 젊은 또래 소년 소녀들끼리 모였는데 어찌 비교하지 않을까. 그것은 재미이자 또 서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는 막대한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삼초지적이 뭐냐 삼초지적이.”


세합만에 박살난 태산파 무인이 살짝 원망스러워질 것 같기도 했다. 사방에서 그를 응시하는 객석의 시선들 때문이었다. 소홍의 경기를 보고 놀란 눈빛은 단휘에 이르러 감탄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감정이 선명히 느껴진다. 곤륜파라는 이름은 첫 두경기만에 이목을 끄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허나 그런것 보다도 도현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본선, 가고싶다.’


처음에는 비무제전에 오는 것을 목표로 수련했다. 하루 종일 흙바닥을 구르면서도 미친듯이 내달렸다.


욕심, 열망.


도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앞서나가는 무진과 단휘, 소홍에 대한 미미한 질투심조차도 장작으로 삼았다. 그렇게 이곳에 도착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욕심이 커졌다.


비무제전 예선. 그 안에서 두번만 이기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욕심이 안날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항상 그랬다. 그랬기에 도현은 다른 사람들이 신기했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단휘와 연청 그리고 청율, 무표정이지만 누구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한 소홍, 자신감 빼면 시체인 무진이나 활달한 선아와 연비, 겁이 없는 이결과 당당히 뇌룡한테 도전하고 싶다면서 하루종일 백연에게 두들겨 맞으며 수련하는 설향까지.


제각기 무언가에 대한 확신과 목표가 있다. 하지만 도현은 자기 자신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고 여겼다. 강해지는 것에 대한 욕심은 가득하나,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욕심만 많아서.’


더욱 강해지면 이 불안감이 해소가 될까. 알기 어려웠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 도현이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회백색 무복을 걸친 무인이 있었다. 설산파의 양홍이라고 했다. 청율의 말로는 칠십이수설산검법(七十二手雪山劍法)이 절기라고.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머릿속에 고민이 깃들었다. 상대방의 절초나 위력적인 공격, 검로, 보법 형세. 전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대신 도현은 다른것을 머릿속에 새겼다.


-사형은 그냥 사형의 검에만 집중해. 잡생각이 왜 그렇게 많아. 너무 상대방을 의식하지 말라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들. 전부 비슷한 내용이었다. 백연은 아이들 각각에게 다른 조언을 해준다. 허나 도현에게는 언제나 일관적인 말만을 꺼내었다.


-묵직하게.


도현이 중단세를 취했다.


[시작하시오.]


가벼운 신호였다. 즉시 상대방이 보법 기파를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앞선 두 경기에서 소홍과 단휘가 선공을 가져가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일까. 곤륜파의 검이 쾌검을 이용한 기선제압 위주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기세를 뺏기지 않기 위한 선공. 짓쳐오는 모습이 화려했다. 동시에 극히 쾌속했다.


촤라락.


허공을 가르는 검광에 희끗한 기파가 엿보였다. 점점에 흩어지는 것이 흡사 눈발을 흩뿌리는 겨울 바람을 보는 듯 했다.


그 형상이 완벽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검로를 놓쳤......!’


찰나지간 당황이 머리를 스쳤다. 직후 우상단에서 번뜩이며 예리하게 들어오는 검격이 눈에 띄었다. 보고 반응하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한순간 도현이 패배를 직감하고 이를 악물 정도로.


그러나.


쩌엉!


‘......어?’


도현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검이 맞닿는 청명한 소리였다. 어느 순간 뻗어나간 그의 검이 허공에서 상대의 검격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도 잠시.


스르륵.


자연스레 검이 원을 그렸다. 우상단 일격을 막은 그대로 상대방의 검을 얽어 끌어내리는 동작. 직후 놀란 얼굴로 재빠르게 검을 비틀어 회수한 양홍이 연격을 내쳤다. 직전과 마찬가지로 보고 반응할 수 없었다.


허나 그 일격이 도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카각!


검이 멈춰섰다. 받아치는 도현의 검끝에서 묵직한 수기(水氣)가 대기를 덧칠하듯 새어나왔다.


“흐읍!”


기합성을 내지른 양홍이 검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파를 끌어올린 그의 검끝이 재빠르게 휘몰아쳤다.


쩌엉! 쩡! 쩌정!


연격, 또 연격이었다. 이어지는 쾌검식이 눈보라와 같았다. 칠십이수라고 하더니, 제각기 다른 형(形)의 초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눈발처럼. 지독하게 빠르고 매섭다.


반면 그것을 막아내는 도현의 검격은 느릿했다. 허공을 덧칠하듯 그어내는 검은 멀리서 보아도 무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여러차례 짓쳐오는 파도처럼.


그럼에도 결코 그것이 꿰뚫리는 일은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카가가각!


원을 그리는 방어초가 공세를 막아낸다. 물 흐르듯 움직인 도현의 검은 우상단에 머무르며 이연격을 끊어냈다가, 다시 떨어져 중단세 횡격을 부드럽게 쳐내었다. 뒤이어 짓쳐오는 강력한 종격은 걷어내듯 원을 그린 검에 막혔고, 보법을 밟으며 사선에서 내지른 검격은 그대로 검면에 닿으며 옆으로 비껴나갔다.


그 속에서, 도현은 문득 자신의 심장이 전처럼 빨리 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검로를 하나하나 미리 읽으며 방어하는 것도, 재빠르게 반응해서 막아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간 끊임없이 반복해온 검로를 습관처럼 내치고 있을 뿐.


몸이 생각에 앞섰다.


상대의 검은 분명 빨랐으나 백연과 유성의 것 만큼은 아니었다. 쏟아지는 검격 속에서 상대가 어디로 짓쳐올지만 파악하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는 도현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이 넘쳤다.


‘우상, 우중간, 다시 좌하로. 보인다.’


공세가 짓쳐온다. 막힌다. 다시 휘어진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현은 자신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쇳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그렇게 방어초를 펼치며 공세를 막아내길 한참.


문득 도현은 음악소리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시에, 그 속도와 방향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쩌엉!


일정하게 이어지던 검격의 소리가 처음으로 비틀렸다. 꾸준히 제 자리에서 방어초를 펼치던 도현이 한걸음 앞으로 전진한 까닭이었다.


“젠장!”


눈앞의 양홍이 내뱉는 욕지거리가 귓가에 스쳤다. 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확연히 느려진 상대의 검격을 비틀고 전진한다. 창명류수검은 더 이상 방패가 아니었다. 상대를 휩쓰는 파도.


카가각!


검격이 거칠게 휘어져 꽂히고.


쾅!


“크윽......”


원형을 그리며 내리꽂힌 종격이 양홍의 걸음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종격에서 다시 사선으로 그어내는 검격. 지금까지 펼친 방어초와 공격초가 별반 다르지 않다.


똑같은 구도와 형태를 유지하며 상대를 짓누르는 검법.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양홍이 점점 뒤로 밀리고. 마침내 그가 경기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때.


쩌어어엉!


수직으로 그어진 종격이 굉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양홍이 힘겹게 받아낸 일검이었다. 도현의 검이 지그시 양홍을 내리눌렀다.


“......그만!”


이윽고 양홍이 잇새로 신음을 터트렸다. 직후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크게 일었다.


[설산파의 양홍 대 곤륜파의 도현의 대전은, 도현의 승리임을 알리겠소. 양 무인은 이만 검을 거두고......]


“......아?”


그제서야 도현은 손아귀에서 힘을 뺏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정신이 화악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도현의 눈이 커졌다. 그가 검을 늘어뜨린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겼......다.”


곤륜파의 세번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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