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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커 서재

양판소 작가 죽이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베르커
작품등록일 :
2014.06.01 14:24
최근연재일 :
2014.06.08 17:38
연재수 :
12 회
조회수 :
61,646
추천수 :
1,998
글자수 :
28,136

작성
14.06.03 15:06
조회
4,279
추천
136
글자
7쪽

6화

DUMMY

우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도망쳤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계속 도망쳤다.

다음날 대낮이 됐을 때 발걸음을 멈췄다.

산속이었다.

“도와주세요!”

흙길 한복판에 평범한 복장을 한 10대 후반의 아름다운 여성이 앉아 있었다.

“거기 두 분, 제발 저 좀 업어주세요! 발목을 뼈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나는 앞머리를 쓱 넘기며 여성을 우회해서 쓱 지나갔다.

그대로 직진했다.

여성이 욕을 해댔다.

그래도 귓구멍을 후비적대며 계속 전진했다.

“저 용사님?”

뒤를 졸졸 따라오며 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용사씩이나 돼서 곤경에 빠진 여성을 정말 이대로 모른 체 하실 건가요?”

“장, 갑자기 나타난 저 미인이 너는 평범한 엑스트라로 보여?”

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아! 이제 보니 저 여자는 마녀군요! 예쁘장하니 변장하고 용사님이 기꺼이 업어주면 방심한 용사님에게 저주를 걸려는 속셈이었어요!”

“장, 너는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서 탈이야.”

“제 생각이 틀렸나요?”

“완벽히 틀렸지. 저 여자는 공주야.”

“공주요?”

“그래,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 얼굴에 도도한 기색이 흐르고, 대충 봐도 8등신의 몸매잖아. 명심해. 양판소에서 저렇게 생긴 여자는 100% 공주다. 물론 모든 공주가 저렇게 생기진 않았지만 저렇게 생긴 여자는 무조건 공주란 말이다. 그러니 산속이든 빈민가든 화산섬이든 세렝게티 평원이든, 저런 외모의 여자를 발견하면, 언제든 자신감을 갖고 소리쳐도 좋아.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라고.”

“괴, 굉장해!”

장은 비록 감탄했지만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음, 하지만 용사님, 여기는 왕성과 멀리 떨어진 산속이잖아요. 호위 기사 한 명 없이 홀로 나타난 여자가 공주일 리 없어요!”

“장, 이럴 때는 상상력을 발휘해도 좋아. ‘옛날 옛날에 대단히 호기심이 많고 말괄량이인 공주가 하나 살았는데, 왕성 밖을 구경하고 싶어서 화물 마차의 빈 나무통에 몸을 숨겨서 성을 탈출했는데 마차에서 내리면서 발목을 삐고 보니 이 숲 속이었어요.’라든가. 이유야 대충 갖다 붙이면 장땡이지. 아, 물론 양판소니까 하늘에서 똑 떨어졌을 수도 있고.”

장은 여전히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님, 저 여자가 정말 공주라면 왜 당장에 도와주지 않으시는 거죠? 어서 뒤돌아가서 저 공주님에게 호의를 베푸세요. 그럼 저 공주님은 분명히 용사님께 첫눈에 반할 거예요! 그럼 히로인 하나 거저 획득이요!”

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엉덩이를 내밀고 강아지 꼬리질 치듯 들썩들썩 엉덩춤을 추었다.

“후후, 장, 나는 절대 저 공주를 도와주지 않아.”

장은 엉덩이춤을 멈추고 따졌다.

“아, 왜요!”

“나는 아직 이 빌어먹을 양판소 작가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장이 놀라 펄쩍 뛰었다.

“용사님, 그 말씀은?”

“흠, 어제 청주를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이 작품 속 인물이고, 작가는 나를 비롯해 이 세계를 창조한 놈팡이야. 그러니 내가 녀석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일은 불가능해. 하지만 간접적으론 죽일 수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죠?”

“그건 바로 주인공인 내가 녀석의 의도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장은 고개를 갸웃댔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요.”

“허허, 장, 한번 생각해 봐라. 주인공이 작가가 구상해 놓은 스토리를 따라가긴 따라가는데 중요한 분기에서 제멋대로 행동해. 그럼 작가는 울화가 치밀겠지? 주인공이 계속 그짓을 한다면 울화도 계속 쌓일 거야. 그러면 결국에는? 작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겠지.”

“잘하면 한방에 보낼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거야! 그러므로 난 저 공주를 구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매번 이런 짓을 할 거다. 작가 놈의 혈압이 높아지고 또 높아지고 계속 높아지는 그날까지!”

“납득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를 버리고 계속 걸었다.

이제는 욕을 하다 말고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가 좀 불쌍하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정말 중요한 인물이면 단독으로 트롤 1,000마리한테 포위돼도 결국 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이면 길가다 새똥을 맞고도 두개골이 함몰돼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두고 가도 돼.

어느덧 산골 마을이 나타났다.

나는 주민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어디로 가야 산적 소굴이 나옵니까?”

산촌이 있으면 산적이 있고, 어촌이 있으면 해적이 있다.

그러니 다짜고짜 물어본 것이다.

그리고 주민은 산적 소굴로 가는 길을 친절히 알려줬다.

“가자, 장. 산적들을 박살내러.”

“저, 용사님? 먼저 마을 촌장부터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하지 않나요? 보통 그게 정석이잖아요?”

“내가 뭣하러? 만나 봤자 산적들이 50년 동안 평화 유지 명목으로 매달 일정하게 갈취하던 1,000골드를 하필이면 오늘 1,000배로 올리고 내일까지 전부 납세하지 않으면 마을을 초토화하겠다고, ‘오오, 용사님, 용사님밖에 없습니다. 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을 부디 구원해주십시오,’ 촌장과 촌장 딸이 눈물로 호소하는 신파극밖에 더 보겠냐?”

“보면 안 돼요?”

“야야, 나는 작가 놈의 분량 늘리기에 일조해줄 생각이 쥐며느리 발톱의 때만큼도 없어. 늘리는 내용조차 심지어 허무맹랑한 개소리잖아? 아까 말했듯이 나는 앞으로 철두철미하게 작가를 엿 먹일 거야. 분량 따위는 개나 주라지.”

“그러면 용사님, 차라리 산적들과 손을 잡고 마을을 박살내버리시죠? 이거야말로 작가가 게거품 물고 쓰러질 일 아닌가요?”

“그건 안 돼, 장.”

“왜죠?”

“난 용사야. 용사는 양민을 괴롭혀선 안 되지.”

“엥? 공주도 버리고 지나갔으면서 이제 와서 정도(正道)를 주장하는 부분입니까?”

“명분이라든지 그딴 시시한 건 전혀 아니야.”

“그럼요?”

“양민을 괴롭히면 독자들이 등을 돌린다. 그러니 안 하는 거다. 장, 등장인물들은 작가는 적으로 돌려도 되지만 독자만큼은 적으로 돌려선 안 돼. 이 말을 뼛속 깊이 새기도록.”

“피, 용사님은 바보예요. 독자가 줄어들면 작가의 심신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고요. 이거야말로 확실히 작가를 죽이는 지름길인데 이걸 모르시다니요!”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 이상 줄어들 독자가 없는 작품이다.”

“바, 반박할 수가 없어!”

“자자, 잔말 말고 따라와.”

“넵!”

우리는 산적 소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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