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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349,563
추천수 :
8,515
글자수 :
641,044

작성
11.12.0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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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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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글자
10쪽

인연살해 3부: 미친 빌과 졸업논문 - 서막

DUMMY

서 파롤의 수도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돌로 벽을 만들었다간 추위를 버틸 수 없으니까. 돌은 나무보다 3배는 더 두꺼워야 같은 난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왕궁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건축물들보다 훨씬 압도적인 크기와 세심함을 갖추어, 궁성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타향 사람들은 북부의 궁성을 보고 경외심을 갖는다.

못 하나 없이 완공된 궁성.

통째로 불 타버려도 단 몇 주만에 복원이 가능한 도시.

중부 태양궁의 신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동토의 위엄!

그 왕궁의 알현실은 작은 창문들 때문에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호화롭게 치장된 장식물들과 중무장한 근위병들, 그리고 새어들어온 햇빛들은 암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물론 그 분위기의 최소한 절반 이상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었다.

"빌은 아직도 오지 않았나?"

옥좌에 앉아있던 기드 왕이 말했다. 주변에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기드 왕은 붉은 수염과 능글 맞은 성격을 가진 호쾌한 군주였지만, 이 질문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동안 왕이 부린 짜증은 평소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곧 올 것입니다. 정 오지 않는다면 다른 인물을 보내시는 것이……."

"다시 말하지만, 빌이 아니면 안 돼."

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주변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신하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왕이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왕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광분해서는 학자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왕이 꺼내는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로회조차! 장로회의 수호자들은 거듭되는 학자들의 하소연에 직접 왕궁을 찾아왔다가, 왕이 꺼내는 질문을 듣자마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조차 질문의 답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올바르게 기억해내지 못했다.

왕은 더욱 화를 내고는 옛 선왕의 병사들을 소환했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노 에릭슨은 당황해버렸고, 침몰선주 프론홈은 침묵했으며, 흑선 시다크와 미친 빌은 대놓고 빈정거렸다. "나의 왕이여,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였습니까?"

중요한 문제였다. 적어도 귀띔 받은 왕에게는. 주변 사람들은 참다 못해 왕에게 그가 들었다는 이야기를 온전히 전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이들이 포기할 때쯤, 왕은 갑자기 한 대학생을 소환했다. 그 대학생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왕의 기행이 또 시작된 줄 알았다.

대학생은 여자였다.

전공은 법학도, 의학도, 신학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디아 대륙의 인간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파격적인 대우와 지원을. 그 중 하나가 그녀의 호위였다. 그녀는 옛 유물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관심을 갖는 유물들은 태양궁이나 저 남부에 있지 않았다. 유서 깊은 곳만 찾는 도굴꾼들이 좋아할만한 곳이 아닌, 약탈자들이 뒤지는 땅이 그녀의 목적지였다.

죽은 자의 영토, 즉 죽은 자의 왕이 지배하는 땅.

그곳을 자주 들락거리는, 수완 좋은 용병이 필요했다. 게다가 왕은 자신만이 아는 목적을 위해 가급적 선왕의 추종자들 중 인물을 고르려 했다. 신하들은 왕의 질문과 죽은 자의 영토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 짐작도 못했지만.

왕의 노 에릭슨? 안 된다. 그는 이제 정규군에 더 가깝다. 게다가 왕의 곁에 있어야 하는 중요인물이다.

침몰선주 프론홈? 안 된다. 그 치매 걸린 폭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군주도 물 속을 가는 배를 연구한다고 연락두절된 인간과 오래 있고 싶진 않을 것이다.

흑선 시다크? 안 된다. 그와 그의 동생에겐 왕이 바라는 충직함이 없었다. 왕이 바랄 만한 교활함은 있었지만.

남는 건 빌뿐이다. 왕에겐 그가 필요했다.

"지그하우스에서 좀 튕긴 것이 그렇게 섭섭했나? 대신 벤담에게 밀령을 줬잖아?"

"빌이 전하의 은혜를 실감하지 못한 듯 합니다."

한 신하가 말했다. 그렇게 급했으면 순순히 몸값을 내지 그랬냐는 비난도 섞인 말이었다. 물론 순순히, 빠르게 돈을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은 돈 문제만이 아니었지만.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팽팽해진 그때였다. 한 근위병이 알현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전하, 선왕의 정예병이었던 빌 사이커가 부름 받아 뵙기를 청합니다."

그제야 신하들 가운데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곤 약간의 웃음소리도 나왔다. 이젠 빌이 한바탕 깨질 차례다. 왕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말했다.

"허락한다."

잠시 뒤 쩔그렁거리는 사슬갑옷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노병이 나타났다. 허리엔 보검을 차고 어깨엔 검은 개가죽 망토를 걸친 모습으로. 녹색과 노란색의 줄무늬 바지와 자루까지 쇠로 만든 도끼가 그가 누군지 명백히 드러냈다.

거침 없이 알현실로 들어온 빌은 그 한가운데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의 왕이여! 당신께서 부르셨기에 이 노구, 다난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이 자리에 출두했나이다. 명하소서, 당신 원하신대로 이루어지리이다."

의역하면, 댁 때문에 고생하고 와서 성깔 좀 더러워졌다. 닥치고 용건이나 말해.

성격이 급한 왕이라면 당장 화를 냈을 것이다. 능글 맞은 왕이라면 되받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회적인 빈정거림에도 왕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빌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마찬가지인 신하들이 마른 침을 삼킬 때쯤에야 왕은 입을 열었다.

"빌 빼고 모두 나가 있도록. 근위병은 귀머거리만 남도록 하라."

왕의 명령대로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 왕은 그전보다 훨씬 성량이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선왕의 충직한 신하이자,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 돌아온 노병이여. 그대에게 임무를 맡기고자 하네."

"제가 들은 대로, 신대륙의 대학생을 수행하는 일이 맞습니까?"

"그렇소."

빌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오라가라 하다니, 하면서.

"행선지를 말해주십시오. 제가 그것만은 듣지 못했습니다."

왕은 간단히 답해주었다.

"연옥 입구."

빌은 눈을 껌뻑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대륙 북쪽 끝의 그 연옥 입구가 맞습니까?"

"맞소."

빌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성한 수염 밑에서도 그 표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나의 왕이여, 신화시대가 종언을 고한 이래 아무도 그 밑바닥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왕이여, 걸러 들으소서. 그 양년이 죽자고 환장한 것은 아닙니까?"

그제야 왕은 웃음을 내보였다.

"오직 학문을 위하여 호수 하나, 강 한 줄기를 찾고자 사막과 밀림을 거쳐가는 사람들이 있잖소.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탐험가라고 부르지. 그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오.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한."

"제게 모험심은 있을지 모르나, 얼굴도 못 본 양년과 같이 자살할 만한 연심은 없습니다."

"밑에 같이 내려가줄 필요는 없소. 그저 연옥입구까지 오가는 동안 지켜주기만 하시오. 그녀 홀로 보냈다간 해골 병사부터 실낙원기사단까지 온갖 놈들이 덤빌 테니."

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학구적인 신대륙 연놈들은 어떤 위험부담을 무릅쓰더라도 상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영토는 다르다. 그곳만은 그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했다. 죽은 자의 왕이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허락을 받고도 죽어나가는 자가 드물지 않은 곳이다.

"그것만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만, 혹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있소. 전에 그대에게 한 질문 그대로요."

"나의 왕이여, 이 노물은 도통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해할 필요 없소. 대답만 하시오. 당신은 기억하는 거요?"

빌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아무도 그걸 기억 못하는 거요? 선왕의 가장 가까운 군신들은 물론이고 북부의 장로들조차!"

"그걸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궁색하지만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장로는 왕의 질문에 대해 30년 전의 꿈을 묻는 것과 비슷하다며 난색을 드러냈다 한다. 꿈을 기억하는 것은 손으로 물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억해내기도 어렵다. 간혹 단면이나마 오래 기억에 남는 꿈도 있지만, 왕의 질문은 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한참 동안 옥좌를 맴돌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중얼거렸다. 대여섯바퀴를 돈 다음 그는 다시 빌에게 말했다.

"혹, 본다면 기억해낼 수 있소?"

빌은 다시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야, 기억해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럼 됐소. 가시오. 대학생과 그 일행은 곧 그쪽 숙소로 보내겠소."

혼란스러워진 빌은 당장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다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왕은 다시 옥좌에 앉았다. 지쳐보이는 표정이었다.

"가시오. 가면 알게 될 거요."


작가의말

1부에서 딱 한번 언급된 연옥 입구가 이제야 공개되는군요. 으엌.
3부부터는 이제 세계관의 보다 세심한 설명과 그 비밀들, 그리고 언급만 되던 요소들이 죄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연옥 입구는 물론이고 태양궁부터 죽은 자의 왕까지.
여하튼 몇몇 분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곳, 죽은 자의 영토가 개봉박두!
....뭐 별 거 없습니다.
간혹 "모든 시체가 일어선다면 도살은 어떻게 하나요?" 라고 묻는 분들 계시던데, 대답은 간단합니다. 다리 묶어놓고 도살한 다음 해체까지 순식간에 해치우고, 왕이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요.(...) 다음화부터 그런 걸 살짝 언급할 예정입니다. 음.
연재한담에서 설정이 세심하고 배경지식이 깊은 소설 추천해주세요 랬더니. 댓글이 "인연살해...추천하려 했는데 작가님이시구나." 엄마야.ㄱ-
노트북 샀음요. 올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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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종막 +17 11.11.26 3,325 94 7쪽
34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4 +13 11.11.19 3,256 90 20쪽
33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3 +12 11.11.12 3,278 86 16쪽
32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2 +7 11.11.05 3,333 79 17쪽
31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1 +11 11.10.09 3,407 98 19쪽
30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0 +8 11.10.01 3,477 91 26쪽
29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9 +8 11.09.25 3,576 84 19쪽
28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8 (복구 완료!) +3 11.09.25 3,368 77 12쪽
27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7 +1 11.09.25 3,330 73 18쪽
26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6 +2 11.09.25 3,518 78 22쪽
25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5 +3 11.09.25 3,448 80 16쪽
24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4 +5 11.09.25 3,616 86 12쪽
23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3 +3 11.09.25 3,882 91 27쪽
22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2 +3 11.09.25 3,728 80 10쪽
21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 +3 11.09.25 4,238 85 12쪽
20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서막 +4 11.09.25 4,104 86 5쪽
1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종막 +14 11.09.25 4,056 98 13쪽
1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7 +3 11.09.25 3,717 92 6쪽
1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3 11.09.25 4,175 79 17쪽
16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5 +7 11.09.25 3,771 100 20쪽
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9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5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2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2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3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7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2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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