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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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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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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044

작성
11.10.0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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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1

DUMMY

지하감옥은 젖은 돌과 썩은 짚의 냄새가 났다. 그 외에도 많은 냄새가 뒤섞였지만, 아실리가 눈치채고 기억하는 냄새는 그 둘뿐이었다. 아실리는 그 냄새가 싫었다. 비위생적이기 그지 없었으니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좋은 면도 있었다. 아실리는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승자의 기분을 맛보았다. 비록 방문할 때마다 빌의 언변에 밀리곤 했지만, 그의 교묘한 논리와 애매한 숙명론이 창살을 어쩌진 못했다. 그의 목과 오른쪽 팔에 채워진 구속구를 어쩌지도 못했다.

"안녕하세요. 빌."

아실리는 짚더미 위에 누워 있던 빌에게 인사를 걸었다. 빌은 정중히 답했다.

"침대 좀 줘."

아실리는 웃어버렸다. 원래 이곳은 중요한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었고, 침대가 있었다. 그러나 빌이 이 감옥에 들어올 때쯤엔 보수를 위해 침대를 빼버렸다. 아실리의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침대는 앞으로도 철창 안으로 들어갈 일이 없었다.

"어떤 간수도, 인부도 당신이 있는 창살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자물쇠를 열고 싶어하지도 않고. 당신은 한 손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테니까요."

빌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듯하군."

아실리는 입을 다물었 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빌과 자신의 심리적인 거리를 재보았다. 어딜 어떻게 칠 것인가? 빌이 먼저 시작했다.

"왜 왔냐? 바깥소식이 특별히 궁금하진 않은데."

"북부재단의 면회객이 귀띔해주니까?"

"그런 것도 있지."

"다른 이유가 있나요?"

"내 병대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이거든. 네가 별 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잡히진 않은 것 같고."

"잡을 거예요. 흑선 시다크를 고용할 생각이거든요."

아살리가 공격을 시작했다. 당장 빌의 얼굴이 굳었다. 아실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그하우스로 통하는 수로 중 한 곳에 수중폭탄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배가 다섯 척이나 날아갔죠."

"프론홈."

"네. 그가 당신을 편드는 것 같아요. 당신 부하들이 어줍잖은 흉내를 내는 건지도 모르지만."

빌은 자신의 예상을 밝히지 않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당신도 알겠죠? 저는 당신들한테 강하게, 아주 강하게 대응해야 된다는 압력을 받고 있어요. 흑선 시다크도 분쟁을 좋아하죠? 당신네 편에 붙기 전에 제가 손을 쓸 거예요. 당신과 프론홈에게 미리 손 쓰지 못한 대신."

"그놈이 어딨는지 어떻게 알고?"

"생각보다 간단한 해결법이 있더군요. 북부재단에 의뢰했죠. 당신의 부하는 그와 접촉하지 않은 듯 하더군요."

"시다크가 날 도와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북부재단은 아무 말 없이 그놈을 주선해주던가?"

"재단이 그를 모른다는 건 불합리한 일이죠."

"그렇겠군. 시다크라. 꽤 골 때리는 놈인데."

"때론 당신 이상이라더군요."

"교활하고 괴팍하기로는 그렇지. 믿지는 못할 놈이야."

빌은 계산을 시작했다. 시다크가 시론을 발견할 확률, 시론을 이길 확률, 빌의 곤경에 박수를 칠 확률. 앞의 하나는 낮지만, 뒤의 둘은 무시할 수 없다. 아실리가 북부재단을 통해 시다크를 고용하면 시론도 알아챌 것이다. 현 전력으로 시다크의 흑선과 수상전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란 사실도.

"답답하겠네요. 그 안에서 아무런 손도 못 쓴다는 건."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 손을 못 쓰는 일이란 건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었다. 돌파구가 있기도 하지만."

빌은 마법의 말을 꺼냈다.

"빠르건 늦건 결국 네 어미처럼 되지."

아실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익숙한 비아냥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불쾌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당신은 만사 다 포기하고 여기서 밥이나 축낼 건가요?"

"네가 날 죽일 수 없단 사실을 안다. 그거면 됐지. 침대가 없단 것 빼곤 의외로 지낼 만 한데."

"왕이 올 때까지?"

"왕이 올 때까지. 기왕 이렇게 된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 재산의 상당수는 안전해. 병사는 다시 모으면 되고. 귀신늑대를 걱정할 필요도 없군."

"당신을 그냥 참수해버리자는 파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지. 네가 알아서 잘 해봐라."

"제가 당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놓을 것처럼 말하네요."

"지점장에게서 들었다."

"네?"

"내가 너한테 사생아라고 말한 것을 철회하지 않으면, 넌 날 못 죽일 거라던데."

이번엔 아실리의 얼굴이 굳었다. 미친 빌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남부에 어떤 부자가 살았다. 하루는 그가 하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을 했지. 그런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어. 죽은 자의 왕을 봤다는 거야. 그가 오늘밤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군. 하인은 부자에게 그의 명마를 빌려달라고 사정했어. 그걸 타고 하룻밤 안에 달려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태양궁으로 도망치겠다 했지. 부자는 기꺼이 말을 빌려줬어. 하인이 떠나고, 주인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죽은 자의 왕을 만났지. 부자가 물었단다. '그대는 왜 내 하인을 위협했소?' 그러자 죽은 자의 왕이 답했다."

마지막은 뜸을 들였다. 빌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들었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위협하지 않았네. 오늘 밤 태양궁에서 그를 만나기로 계획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가 이 자리에 있기에 놀랐을 뿐."

아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재미있지? 실화인지는 모르겠다. 태양궁도 자존심이 세서, 거짓말이든 아니든 그런 이야기가 나도는 걸 용납하진 않거든.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기 다 있다. 네 엄마는 헛수고 했어. 너도 그럴 거야. 나는 그리 하진 않겠다."

빌은 락토에서 만났던 죽은 자의 왕을 떠올렸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그것은 그에게 묘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아실리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당신이 착각하는 게 있네요. 나는 당신이 그 혀를 뽑아놓고 죽든 말든 상관 없어요. 그리고 지상지하의 모든 것들이 꼭 죽은 자의 왕을 만나야 죽는 건 아니죠. 잊지 마요. 어디 두고 보자고요."

아실리는 홱 돌아서서 감옥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빌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틸리는 박장대소했다.

"대장, 그 이야기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장로회. 그래서 이야기 제목이 '태양궁에서의 죽음'이지."

"태양궁의 권위를 마구 흔드는 이야기군요. 북부 숙명론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렇게 아실리를 도발해놓았다간 진짜 죽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예?"

"이 철창 밖으로 나가야 무슨 수를 쓰던가 할 테니까. 시론은 도시를 못 이겨. 젠장. 시다크까지 부르다니."

"어, 그거 큰일입니까?"

"꽤. 일단 시다크가 도시에 처박힌다면, 뷔독과 시론이 도시를 상대로 정면돌격을 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격이 달라. 격이."

"이런. 그럼 부중대장은 무슨 수를 써야 하죠?"

"계속 파괴활동만 하든가, 아니면 소수정예로 날 구출하든가. 둘 중 하나지. 전자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니까 후자를 택할 거야. 아실리도 그걸 아니까 날 처형대에 안 세우지. 예나 지금이나 죄수를 구출할 방법은 몇 가지 없어. 그 중 하나가 처형대에 난입하는 거야."

"어, 대장에게 사과 받으려는 게 아니고요?"

"그 애가 집착이 심하긴 한데, 정치적인 감각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대장을 몰래 죽이면요?"

"그 깽판을 친 범죄자를 죽인다 치자. 근데 공개처형 안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 폭동 일어난다."

"대장, 존경합니다. 설마 이걸 다 예상하신 겁니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그저 상황이 그리 흘러가는 거다."

빌은 틸리에게 핀잔을 준 다음 천장을 노려보았다.

"제일 좋은 건 탈옥이지. 그 다음은 왕이 몸값을 보내주는 거고. 그도 안 되면 왕이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여기서 썩던가. 시론이 잘 하고 있어. 하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건 문제가 있는데. 내가 아는 건 아실리도 안단 말이야."


*

"대오를 유지하라!"

시론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 직후 철환이 날아와 대열 오른쪽 날개에 꽂혔다. 연맹용병 대여섯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장창병, 총병. 동부 기병은 죄다 출장원정 가고 없지만 이 정도면 개활지에서 싸움하기엔 무리 없는 구성이다. 최소한 안전한 곳까지 도망치거나 버티기엔 좋다. 시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실제로 그들은 적이 나타나면 고지나 강변으로 도망치는 수법을 몇 번이나 성공시켰다.

그런데 이번엔 그 강변에서 문제가 생겼다. 커다란 흑선이 강 위에 떠 있었던 것이다. 병대를 데리러 왔던 선박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 흑선은 빌과 동급의 사략수적, 시다크의 것이었다.

"이런, 젠장! 흑선 시다크라고? 어째서 여기 온 거야?"

뷔독이 발악했다. 시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역시 이 고용주는 받들 인물이 못 된다. 실낙원 기사단이 전사와 군인으로서의 소양교육에 소홀한 것이 분명하다.

동에서 서, 남에서 북으로 신출귀몰하는 흑선이 지그하우스에 고용되었다는 소식을 전파받음에도 뷔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시다크와 만날 가능성 자체를 낮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론은 항상 최악의 사태를 걱정했다. 그리고 이번엔 그 걱정이 맞았다. 시다크가 시론의 다음 공격 장소를 예상해 매복한 것이다.

흑선은 선수루, 선미루는 물론 갑판 위에 온갖 경포를 잔뜩 얹어놓았다. 그 화력은 1척만으로 미친 빌의 무장상선대를 완벽히 압도했다. 병대는 졸지에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강변에서 포탄을 얻어맞으면서, 시다크가 마을 농민들을 규합해 만든 지상군과 맞서는.

"방패벽! 움직이지 마!"

시론이 다시 외쳤다. 시다크는 정면돌격만은 철저히 회피했다. 그의 주력 병종은 석궁수들이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믿지 못할 전력이다. 때문에 전투는 사격전으로 치달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병대와 연맹용병은 온갖 방패와 갑옷 덕에 화살들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시다크도 총탄세례를 막기 위해 각종 수레를 끌고 와 벽을 만들었다. 농민들이 움직이는 그 수레는 모래주머니와 가시나무, 창 따위를 잔뜩 실어놔 장애물이자 방벽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런 식으로 쌍방의 보병대가 유의미한 타격을 못 주는 가운데, 흑선은 일방적으로 병대를 때린다.

최악이다. 이건 필패의 방식이다.

"대오를 유지하라!"

마누크는 악을 쓰면서 수총을 서둘러 장전했다. 병대의 경포병들도 계속해서 적을 공격했다. 시론은 주공을 마차로 정했다. 흑선은 공격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론이 뷔독에게 설명한 계획은 시다크의 지상군을 돌파해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다크는 시론보다 노련했다.

"비약! 북부의 비약은 어쨌어?"

뷔독이 묻자 시론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 떨어졌습니다! 게드 장로는 재료 구하러 갔고!"

"이런, 젠장! 이러단 전멸하겠어!"

그걸 누가 모르나. 시론은 슬쩍 하늘을 보았다. 해의 위치. 시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건 도박이다. 병대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 계획을 아는 것은 오직 셀레스테뿐이다. 그게 문제다. 시론은 특별한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염소뼈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셀레스테 앞에서 몇 번이나 불었다. 그녀가 절대 잊어버리지 않도록.

시론이 호루라기를 부는 순간, 마차 뒤쪽에서 거대한 귀신늑대가 나타났다.


*

지그하우스에 한 선박이 정박했다. 경포를 잔뜩 얹은 흑선이었다. 그 배에는 부상병들이 가득했다. 백발이 드문드문 섞인, 풍성한 검은 수염을 가진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그의 판금흉갑은 구멍이 뚫렸고, 안면갑을 올려놓은 투구는 찌그러졌다. 아실리는 그가 시다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왜 배와 그의 갑옷이 이 꼴이 됐는지는 몰랐다. 그녀는 호기심과 불안감 가득한 표정으로 설명을 기다렸다.

시다크는 흉폭한 남자였다. 그의 오른쪽 뺨부터 콧등까지 새겨진 흉터만큼, 아실리의 기대만큼 충분히.

"이 씹할 계집애야!"

시다크가 입을 열자마자 시종은 졸도할 뻔했다.

"이 동네에 괴물늑대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려줘야 할 것 아냐! 시론을 거의 다 잡을 뻔했는데!"

아실리는 그 괴물늑대가 실은 귀신늑대라는 것을, 그리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는 척을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시론과 싸우고 오신 건가요? 그리고 괴물늑대라니, 무슨 소리죠?"

"오는 길에 정신 사나운 놈들 중 하나는 잡으려고 했지. 이거저거 고려했는데 시론이라는 대박이 터진 거야. 그 녀석만 잡으면 병대는 와해되니까. 근데, 괴물늑대가 내 뒤통수를 치더라고! 대체 뭐야, 그거?"

"저도 모르겠네요. 괴물늑대가 최근에 나타난 적은 없어서요. 근데 왜 당신을 공격했을까요?"

"내가 아냐?"

"저도 몰라요. 제 책임도 아니고. 저한테 따져봤자 무의미하실 것 같네요. 흠. 빌이 그 녀석에게 은혜라도 베풀었나 보죠."

"빌이 괴물늑대에게? 미친 소리. 그 자식이 괴물늑대를 잡아죽였단 이야긴 들은 적 있지만."

"흠. 당신은 이길 수 없었나요? 그와 달리?"

아실리는 시험 삼아 시다크의 자존심을 긁어보았다. 반응은 훌륭했다.

"누가? 누구보다 못해? 이 니미 씹할 계집애가! 다시는 내 앞에서 빌과 나를 비교하지 마! 그 짓거리 두 번 하고도 내 앞에서 살아남은 연놈은 없다! 죽은 자의 왕께 맹세코! 나는 그 괴물늑대에게 물려가고도 살아왔어!"

마지막은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실리는 그제야 그가 다리를 저는 이유, 갑옷이 뚫리고 찌그러진 이유를 이해했다. 셀레스테에게 물렸던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 속에서 그 금수의 주둥이를 찢고 부하 늑대들을 피해 사흘만에 내 부하들과 합류했다. 내가 어딜 봐서 빌보다 못하냐?"

"네, 대단하네요. 시론과 괴물늑대 모두를 상대하고도 살아나왔단 말이죠?"

"심각한 타격을 입혔지."

"충분한 무용이에요. 사과하죠."

시다크는 사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아실리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완벽했다. 그녀가 원하던 전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배 하나로 시론의 배 셋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대포를 돈 있는대로 샀고. 그 덕을 봤어."

"그런 것 같네요. 흠. 이대로 계속 시론을 추격해도 되겠는데요?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드리죠."

시다크는 턱으로 자신의 군선을 가리켰다.

"술이랑 여자 갖고 와. 쟤들은 그거면 다 나아. 없으면 너라도 와라."

"간단해서 좋네요. 그것들은 충분하니까 제가 갈 일은 없어요. 아, 하나 확인해두겠는데."

"뭐냐?"

아실리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내가 당신의 성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들을 듣고도 목 매달아버리지 않는 건 당신과 당신의 실력에 대한 존경이라는 점을 알아두세요."

시다크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곧 표정을 수습하곤 혼잣말처럼 말했다.

"터무니 없는 계집애가 다 있군."

"상단의 주인을 우습게 보면 안 되죠."

"그런가 보다. 그러고보니 네가 빌을 잡았다지?"

"네."

"안내해."

"네?"

"빌에게 안내하라고."

아실리는 피식 웃었다. 경쟁자의 곤경은 즐거운 구경거리일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제치고 그것부터 보겠다는 그 심리를 아실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빙글 돌아서며 말했다.

"자, 이쪽으로."


*

키체커는 아실리가 시다크를 맞이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의 대화도 다 들었다.

온갖 수단으로 변장한 그는 강변의 거지 꼴로 모래를 긁어대는 척하면서 도시를 거니는 중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사냥총은 모두 숨겼고, 조수는 아예 따로 움직였다. 그는 아직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실리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부재단의 협력 속에 숨어있을 뿐이다.

총을 쏘면 안 된다. 들켜서 죽는다.

총을 갖고 다녀도 안 된다. 들켜서 죽는다.

조수랑 같이 다녀도 안 된다. 들켜서 죽는다.

'지금은 참자. 참는 건 익숙하다.'

시다크. 빌의 동료, 경쟁자.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다. 지금은 쏴버릴 수 없다. 아실리와 시다크 모두.

키체커는 생각했다. 북부재단을 통해 시론과 연락할 수는 있었다. 비전문가인 그들과 달리 군사적인 정찰을 수행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다른 역할은 필요 없다. 그래서 그는 시론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다. 때가 올 때까지 무조건 침묵할 것. 때는 이쪽에서 통보하겠음.

그리고 귀신늑대를 경계할 것.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


*

시론은 낄낄거렸다. 그들의 캠프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병사들이 가득했다. 왜 귀신늑대가 그들을 도와줬을까? 왜 시다크를 물고 갔을까? 아무도 몰랐다. 시론 빼고는.

"진짜 이러면 돼?"

시론의 텐트로 몰래 기어들어온 셀레스테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돼. 시다크에게 정말 멋지게 한 방 먹였어. 그 자식은 자기가 날 유인했다고 생각했지만, 오, 셀레스테, 너 축복 받아라!"

"이 인간이 또 왜 이래?"

"즐거워서 그래. 내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아실리도 몰라! 시다크도 몰랐지! 키체커도 모를 거야! 재단이 전해준 빌의 지시 들었어? 무난한 방법도 좋지만 한계가 명확하니 아실리와 협상할 방법을 찾아보래! 빌 대장도 모르는 거야!"

"응. 너 잘났어. 아예 빌 아래에서 독립하지 그래?"

"아니, 그건 안 되지."

시론이 정색을 하자 셀레스테는 웃음을 터뜨렸다. 시론은 화제를 돌렸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났어. 북부재단 덕이고, 네 덕이다. 게드 장로가 도착하면, 그리고 때가 되면 반격을 개시한다. 깜짝 선물을 안겨줘야지."

"흥. 내가 빌에게 보내는 선물이야?"

"그거 좋네. 가슴만 더 크면 완벽하겠는데. 그건 둔갑 안 되니?"

"죽인다?"

"그러든가."

시론은 다시 쓰러져 웃었다. 셀레스테는 잔뜩 들뜬 시론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악동."


작가의말

자, 슬슬 끝내야지. 생각한만큼 고퀄이 안 나오고 감옥 대담도 큰 의미부여가 힘드네요. 원래는 여기다 주력하려고 했는데.
"태양궁에서의 죽음"은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고 해서, 무대가 페르시아(현 이란)죠.
음. 시론과 셀레스테의 장난질에서 만족하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우지끈 시밤쾅!
3부 준비해야지. 어째 퀄리티가 자꾸 떨어지는 느낌인데 여튼 성실한 주간연재로 인연살해를 빨리 완결지을 생각입니다. 다음 작품들이 절실하거든요!

근데 아는 동생에게서 "미친 소설 그만 쓰세요."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어떤 구상을 했냐고요? 세상이 대충 망한 뒤 개런드를 든 방독면 소년이 마법소녀를 사냥하다 되려 사냥 당하....그만해.

물론 얌전한 것도 구상 중입니다. '생선가게' 점원이었다가 핏줄 때문에 덜컥 '신대륙의 200년 된 소국'의 왕으로 갑자기 즉위하게 되는 주인공 소년의 영지물 비슷한 스토리라던가...

여튼 인연살해나 쓰고 써야죠. 슬슬 3부에서 세계관을 풀어나가야 되는데.

ps: 그저 댓글과 추천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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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종막 +14 11.09.25 4,056 98 13쪽
1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7 +3 11.09.25 3,716 92 6쪽
1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3 11.09.25 4,175 79 17쪽
16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5 +7 11.09.25 3,770 100 20쪽
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8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5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2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1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1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6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1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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