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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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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564
추천수 :
8,515
글자수 :
641,044

작성
11.09.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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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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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글자
18쪽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7

DUMMY

장님도 알아볼 것 같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면 고르게 깎은 석환이 청동포신에서 뛰쳐나가 북부 병대의 숙소를 강타했다. 가끔 부서진 채 발사되거나, 바닥에 몇 번 튀었다가 돌진하는 석환도 있었지만 아실리에겐 별로 상관 없는 문제였다. 어쨌든 석환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인상적이네. 장애물이 너무 무력한 걸."

주변의 포술가들은 지극히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포 2문이다. 그다지 큰 편이 아님에도, 이 포들의 공격을 막으려면 굳건한 성채가 필요하다. 화약이란 그런 물건이다.

"처참하군요. 병대가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애꿎은 희생자가 나오면 어떡하죠?"

"도시 최고의 포술가들이 그런 실수를 하진 않겠지. 그나저나 빌의 표정이 정말 궁금해."

소년 시종의 걱정을 깔아뭉갠 다음, 아실리는 진심으로 기대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빌의 상상 밖이었을 것이다. 대포를 조작하는 포술가들도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성벽 위에 설치했거나 병기고에 넣어놨던 대포들을 꺼내와서, 자신들의 도시 한복판에 쏴댄다.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정말 뒤탈 없는 겁니까?"

한 포술가가 아실리에게 겁먹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아실리가 대답하기 전에, 빌의 병대가 반격을 시작했다. 작은 포성과 함께 철환 하나가 쏜 살처럼 날아왔다. 그러나 철환은 아무도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몇 번 치고는 애꿎은 건물 벽에 박혀버렸다.

아실리는 그 철환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

"막 나가는 계집애로군."

계단을 내려와 방벽까지 달려온 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마누크는 진심으로 저주했다.

"엉덩이에 불쏘시개를 꽂아 넣을 계집애! 대체 저게 뭐야? 민병대가 대포도 쏴?"

"그럴 리가 없지. 저건 도시의 포술가 조합이다. 그것 외엔 생각하기 어려워."

"지랄, 초병들은 뭘 했기에 그걸 몰라본 거야?"

"저놈들도 생각이 있다면 우리 코 앞에서 보란 듯이 대포를 조작하진 않았겠지. 여하튼 의문은 나중에 풀도록 해야겠다. 이대로 있다간 앉아서 죽을 테니."

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벽의 일부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무 파편과 찢어진 자루, 돌 조각이 마구 날아다녔다.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환이군. 포가 몇 문이지?"

"2문. 많으면 3문. 잘은 모르겠는데."

"정확도는?"

"최고 수준."

"포술가 맞군. 경포, 사격 중지! 우리 것으론 안 맞는다!"

명령에 포병들은 반격을 멈췄다. 빌의 판단이 옳았다. 병대의 경포는 신속한 이동과 사격에 적합하지만 그 위력과 사정거리가 많이 부족하다. 미리 준비한 대 보병용 산탄은 말할 것도 없고, 몇 안 되는 철환도 적의 포격에 맞서긴 역부족이다.

"모두 엎드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산발적으로 허공에다 총을 쏴대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빌은 아직 병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다음 포격이 날아왔다. 이번엔 포탄이 방벽을 살짝 스치고는 숙소에 뛰어들었다. 먼지구름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빌은 작전을 구상했다.

"2숙소 애들은 빨리 배를 확보한다. 어찌됐든 여길 탈출해야 하니까. 포격은 곧 멈춘다. 그 다음엔 시 경비대나 민병대가 달려들겠지. 전령을 보내 뷔독을 불러."

"마지막은 필요 없겠군. 벌써 왔어."

마누크의 말에 빌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뷔독과 그의 패거리 몇 명이 시론을 포함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방벽 옆 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다들 몰골이 거지꼴이었다.

"과연. 뷔독이 제일 중요한 표적이니 공격도 먼저 했겠지. 그래서, 피해는?"

시론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답했다.

"3명 사망 확인. 2명 중상으로 포기. 뷔독을 편들던 건달패나 기사들은 대부분 박살 나거나 항복. 말 그대로 간신히 살아왔는데, 여긴 아예 포격을 당하더군. 그래서 골목길로 왔어."

"오는 길에 만난 놈이나 추격자는?"

"없어."

"그럼 민병대는 측면이 아니라 정면으로 오겠군."

"포격으로 박살 난 정문 말이지."

시론의 덧붙임에 마누크가 다시 욕을 내뱉었다. 빌은 아직도 얼이 빠진 표정의 뷔독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용주 안전을 우선으로 한다. 배로 데려가."

"대장은?"

"여기서 시간을 끌겠다. 고참병과 석궁병만 남는다."

시론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내가 하지."

"안돼."

"왜?"

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셀레스테도 말했지만, 자넨 마무리가 좀 약해."

시론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고 마누크는 킬킬 웃어버렸다. 빌이 시론의 어깨를 툭 치자 시론은 더 말하기가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곤 뷔독을 붙들었다. 아수라장이 된 숙소의 모습과 그 자신의 크고 작은 부상에 뷔독은 어떤 말을 할 힘도 이유도 잃어버렸다. 시론이 그를 끌고 물소리 들릴 곳으로 달렸다. 빌은 그들의 모습을 무시하곤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포격이 멎었다.

"전 병력, 장전. 일제 사격 후 돌격한다. 석궁병들은 지원."

빌의 지시는 다소 무색했다. 전투 속에 내던져진 병사들은 이미 재장전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틸리가 지휘하는 석궁병 10명도 준비가 끝났다. 빌은 방벽 위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쇠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축제와 전투를 구분 못하는 놈들이 왔다."

빌의 말에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여럿. 빌의 생각보다 고른 소리였다. 무리 속에서 횃불이 하나 둘씩 일어서자, 민병대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이다. 빌은 코웃음을 쳤다.

50야드.

"조준."

작지만 방벽에 기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빌은 숨을 들이마신 다음, 거칠게 내뱉었다.

"발사!"

그 순간 방벽에서 연기의 장벽이 치솟았다.



*

키체커는 그의 총을 세심하게 다뤘다. 그래서 그는 총을 몽둥이처럼 쓰길 거부했다. 대신 커다란 날이 달린 나무 몽둥이를 하나 따로 마련했다.

그는 장애물을 넘어 계단을 올라오는 놈들의 머리통을 죄다 부숴놨다.

아실리는 솜씨가 말도 안 되게 좋은 사냥꾼이 높은 장소를 좋아한단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키체커는 아실리 앞 은접시를 쏴버린 후 곧바로 장소를 옮겼지만, 그의 이동은 아실리에게 간파 당하고 말았다. 아실리는 키체커가 올라갈만한 장소 모두에 날건달들을 보냈다. 요행히 굵은 나무 작대기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장애물을 준비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맞아 죽을 뻔했다.

"스승님!"

등 뒤의 제자 코마가 사부를 불렀다. 재장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총을 건네 받은 키체커는 장애물 틈을 겨누었다. 표적은 밀치는 압력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앞 열 젊은이들이었다. 키체커의 총이 불을 뿜자 두셋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총탄 대신 산탄을 장전해놨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부터 이 상황이 반복되었다. 꼼짝도 못한 채 총구를 바라보던 젊은이들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키체커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동료의 시체가 장애물에 무게를 더하자 건달들은 더 이상 돌격하지 못했다.

흥분이 식자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철판 따위가 총탄을 막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들이 아실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들이 작전을 바꾸자는 핑계로 계단 아래로 도망가버리자, 키체커는 주저 없이 종탑을 포기했다. 놈들이 머리가 조금만 더 굴러간다면 온갖 다른 수단으로 키체커를 괴롭힐 수 있다. 그 모든 수단을 방어해내더라도, 이 종탑을 지금 탈출하지 않는다면 기력이 다할 때까지 고립될 뿐이다.

"우리도 가자."

"치고 나가실 겁니까?"

"넌 내가 왜 밧줄을 준비했는지 생각도 안 해봤냐? 창 밖으로 밧줄을 늘어뜨리자. 옆 건물 지붕 위로 도망치면 계단을 내려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코마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애물은 어떻게 할까요?"

코마의 말에 키체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장애물을 가리켰다. 그 손 끝을 본 코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계단으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코마는 토끼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연기는 급조한 계획이다. 지붕으로 도망칠 길까지 막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오래 끌수록 그 도주로까지 적의 손이 미친다. 키체커와 코마는 재빨리 밧줄을 창 밖으로 던지곤 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코마는 포성이 터져나오는 강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이 벌써 당한 것은 아닐까요?"

"아직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희망은 있겠지. 일단 항구까지 뛰자. 본대에 합류를 못하더라도 조각배를 훔쳐 탄다면 둘이서 어떻게든……."

"북부 놈들이 도망친다!"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키체커의 말을 잘라 먹었다. 키체커도, 코마도 아는 목소리였다. 키체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귀신늑대!"

키체커는 뛰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던 코마는 황급히 스승의 뒤를 따랐다. 곧 요란한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일이 꼬였다. 코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덤빌까요?"

"바보라면. 닥치고 뛰어!"

건달패에겐 키체커와 코마를 잡을 마땅한 수단이 없는지, 돌멩이가 마구 날아왔다. 다행히도 부정확하다. 어둠 속에서, 그것도 아래에서 위로 돌멩이를 던져 사람을 맞추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투석 행위는 그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쪽이야! 북부 놈들이다!"

키체커보다 훨씬 앞 쪽에서 셀레스테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키체커는 쓰러지는 것처럼 방향을 꺾었다. 그는 셀레스테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목소리만으로 그녀는 사냥꾼을 봉쇄하고 있었다. 코마도 곧 그 사실을 깨닫곤 절망했다. 귀신늑대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목소리로 사람을 낚는 수법이라면 소년도 당할 뻔했던 일이다.

키체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예?"

"만약 상대가 대장이었다면, 대장은 횃불을 던져서라도 내 길을 막았을 거야."

코마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질 못하고 스승을 바라보았다. 키체커는 추가로 준비한 밧줄을 풀며 말했다.

"결국, 저 년은 대장보단 한 수 아래란 이야기지. 두 다리만 믿자. 정면 돌파한다."



*

민병대는 북부 병대의 역공을 그대로 받아냈다. 그들은 숫자가 더 많다. 그들의 병기는 북부의 도끼보다 길다. 그러나 백전노장과 그가 지휘하는 역전의 병사들은 그런 불리함을 상쇄하고도 남는 분투를 보여줬다.

빌의 도끼가 단번에 사람을 갈랐다. 두개골부터 왼쪽 어깨까지.

"죽은 자의 왕이 가호한다! 잡아먹어주마!"

노병은 민병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을 잘 알았다.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서 대오가 흔들렸다. 이미 통렬한 총탄 세례를 받은 민병대의 대오는 난입하는 빌의 고함소리와 북부 병사들의 도끼질로 토막이 났다. 기세가 오른 쪽은 민병대가 아니다. 미친 빌의 북부 병대다.

빌은 첫 번째 시체를 뒤로 넘기고 두 번째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황한 민병들의 쇳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빌의 쇠도끼는 무지막지하게 튼튼하고, 그의 힘은 거의 괴력에 가깝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장대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도끼날이 장대를 따라 날아들자 두 번째 표적은 꼼짝도 못했다. 가슴팍이 쪼개진 민병이 동료들 사이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대여섯이 한꺼번에 밀려났다. 그들의 뒤에 버티고 선 동료들까지 계산하자면, 한 인간이 날려보낼 질량은 절대 아니다.

"부, 북부 비약이다!"

한 민병의 비명에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답한 것은 마누크였다.

"좀 옅지! 비싸거든!"

그 순간 그는 빌보다 더 무지막지한 활약을 선보였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민병 서넛이 적어도 3야드의 높이로 날아갔다.

"네놈들 목숨은 가치가 있겠지? 수지가 맞아야 하는데!"

뒤이어 들리는 소리는, 그의 전투망치가 사람 머리통을 도자기 깨듯 연달아 박살내는 소리였다. 사방에서 그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쾌한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빌과 부하들은 그들의 기행이 적군에게 공포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실리 에소테리아!"

빌이 소리쳤다.

"너는 반드시 후회한다!"

아실리는 어둠 속에서 그 소리를 명백히 들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비약의 존재를 간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격으로 빌의 병대가 혼이 빠지리라 믿었다. 실책이었다. 포격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고, 빌의 병대는 통솔력을 잃지 않았다. 실제로 대포를 쏘는 광경을 목격하지도 않았고, 대포를 쏘는 전술을 써보지도 못한 그녀의 한계 때문이었다. 빌의 병대는 그 반대다. 수많은 싸움을 거쳤고, 화약은 아주 친숙하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빌의 병대가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고 말았다.

"중부의 기사가 50명! 북부의 버러지가 100명! 동부의 제후가 200명! 남부의 태수가 300명!"

빌의 외침이 도끼질과 함께 계속되었다.

"상상해라! 난 그들 모두를 이겼다!"

경험의 차이다.

"나는 한 도시에 도전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북부병들이 다시 한번 짐승 같은 고함소리를 내지르자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다. 학살이다. 전투가 되어야 할 것이 단 한 순간에 뒤집혔다. 아실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 포술가가 아실리의 눈치를 살폈다.

"아가씨?"

"식었죠?"

주어가 생략된 아실리의 말에 포술가 조합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쏘세요."

불안이 현실로 강림하자 포술가들은 혼비백산했다.

"다 날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주어가 생략된 대답이었다. 아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아요."

뭐가 많다는 것인지 금방 이해했다. 포술가들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실리는 단호했다.

"제가 해결하죠. 깡그리."

피 칠갑된 석조포도를 갈아엎고 유족들의 목구멍에 금화를 쏟아 붓는 일. 포술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황금의 딸.

"이건 도시를 구하기 위한 전투입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요."

아실리가 최소한의 설득을 곁들여줬다. 포술가들은 별 수 없이 화승을 집어 들었다. 조합원들의 우두머리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저 계집애가 아주 막무가내는 아닌 것 같아. 최소한의 변명은 주거든.

화승이 다시 한번 대포의 꽁무니에 달라붙었다. 오늘의 작품은, 피바다다.



*

포성에 시론은 사색이 되었다. 한 번 그쳤던 포성이다. 다시 들린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다. 그 미친 계집애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쏜다.

빌 대장이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은 적병의 대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적은 오합지졸이니, 기세를 제압하고 비약의 힘을 빌린다면 쉽게 쓰러질 일은 없다. 그렇게 적과 아군이 뒤엉킨다면 더 이상 포격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빌 대장은 방벽의 뒤에 숨었다가 일격에 최대한의 총탄을 퍼붓고는 백병전에 돌입했다.

"저렇게 막 나가는 계집애는 또 처음 보는군."

"대장이 저것도 계산에 넣었을까?"

한 병사가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숙소 쪽을 바라보았다. 시론은 애매한 뜻의 신음소리로 답했다.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론은 우선 그의 임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 대장이 오지 못해도, 그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건질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장비를 도시 밖으로 탈출시키지 못한다면 후일은 없다. 최악의 경우 병대를 해산하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선다 해도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시론은 이를 악문 채 뱃전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선미루로 올라서며 외쳤다.

"출항 준비! 서둘러!"



*

"손해 볼 것 없다! 밀어붙여!"

살점과 피가 튀는 와중에 빌이 소리쳤다. 민병대의 숫자가 아직 더 많다. 게다가 그들은 길을 걸어 숙소 정면으로 오느라 깊고 좁은 종심대열을 이루었다. 그리고 민병대는 포구 바로 앞에 있다. 확률상 빌의 병대가 다칠 가능성은 적다.

예상보다 이른 포격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감수할 만하다. 오히려 이상적이다. 대포가 과열되든, 포탄이 떨어지든,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든. 빌의 병대가 빈약해진 민병대를 뚫고 포대까지 박살낼 확률은 높다.

사실은, 빌도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들어 맸다.

굉음과 함께 석환이 날아들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진다. 길고 좁은 대오를 따라 날아온 석환은 빌의 병대까지 파편과 핏덩이를 날릴 수 있다. 포성, 그리고 포탄이 날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위축된다. 죽은 자의 왕을 그리는 화가들은 숱한 해골더미는 물론 총과 대포도 함께 그린다.

이길 수 있는가? 확률이 낮다고 포탄이 안 맞는 것은 아니지 않나? 피가 튀었어! 내 피인가?

"아실리 에소테리아!"

빌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소리쳤다. 그 순간, 시야가 열렸다. 달아나고 쓰러지고 무너진 대오 너머 대포가 보였다. 마차로 위장한 포가 위에, 지붕으로 위장한 천 아래. 그리고 2문의 대포 옆에는 아실리 에소테리아가 서 있었다.

"빌 대장. 경의를 표하죠."

빌과 부하들은 아실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화급히 산탄을 장전하는 포술가들에 집중되었다. 틸리와 그 동료들이 괴성을 지르며 석궁을 겨눴다. 화살이 밤하늘을 가르는 순간 빌과 부하들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실리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명령했다.

"쏘세요."

어처구니 없는 하룻밤이 끝났다.


작가의말

흠. 아실리가 포술가들을 동원한 게 혁신적인 전술이냐고요? 글쎄요. 전쟁영웅 김영옥 옹의 이야기를 보면, 놀고 있는 군단 포병대에 포격지원요청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했다지요. 세계전사에 종종 보이는, 대공포를 지상포격에 쓴다는 발상도 사실 아무나 금방 떠올린 건 아니었단 이야기도 있고.

뭐, 그냥 그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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