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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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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0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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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0

DUMMY

언제나 약자가 먼저 다친다.

성곽 밖 사람들, 현실적인 무력이 바로 옆에 없는 사람들. 이 시대의 끝자락에서는 때때로 지나치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마을이 불타버리는 사태에서 파생된 단어까지 있을 정도로. 타버린 잔해 위에 다시 기둥과 서까래를 올리는 일을 사람들은 몇 세대에 걸쳐 반복한다. 때문에 상당수의 농민들은 군세가 나타나면 재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도망치기 바쁘다. 그것이 살길임을 오랜 경험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타까운 몸부림마저 무위로 돌아갈 때가 있다.

지그하우스의 영역권 내, 어느 시골 마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털모자와 기병용 곡도, 단궁을 장비한 동부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비명소리와 칼부림이 뒤따랐다.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내팽개치고 달아나야 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어린아이까지 뒤쫓아가 죽여버렸고, 오두막 한 채 남겨놓지 않고 불을 질렀다. 탁월한 기동력과 이교도적인 잔인함의 결합은 그 자체가 재앙이었다.


*

동서고금의 어떤 문명이든, 수로는 육로보다 훨씬 우월한 수송능력을 자랑한다. 개나 소나 밟고 망가뜨리고 똥을 싸놓을 길바닥에 비하면, 수로를 이용하는데 필요한 배와 접안시설은 그 소유와 책임소재가 명확한데다 유지비용도 적다. 수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전개하지 못한다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가졌다가 밀려나길 반복할 뿐이다.

요약하면, 털기 딱 좋다.

사실 수로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방법이 깽판인 것이 문제다. 지그하우스로 가던 상인들은 자신들의 길목에 잡목과 폐선들이 잔뜩 모여 가라앉은 꼴을 봤을 때 낭패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길을 막아버리는 놈들은 대개 약탈자다. 몇몇 선박이 잽싸게 도망치거나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에야 주변에 약탈자나 병사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쉰 관료와 상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손해액을 줄이기 위해 작업에 착수했다. 노동자, 배, 밧줄, 그리고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서. 그리고 이 시점에서, 길목을 막은 불한당들은 그들이 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선물을 선사했다. 몇 통의 화약과 기름, 뇌관을 사용해 세심하게 만든 수중폭탄이라면 어떤 면에서 고려하든 충분히 화려하다.

순식간에 배 몇 척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

문제의 선박은 아실리 에소테리아가 소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그하우스 시로 가는 선박이었다. 약탈자들이 그런 사항을 미리 알 도리는 없었지만, 이들은 이 선박을 주저 없이 공격했다. 아무도 숲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군선 따위는 대비하지 못한다.

숲이 뛰었다. 농담이 아니다. 비유다. 나뭇가지를 잔뜩 꺾어 위장한 약탈자들은 선수루에 경포를 탑재했고, 정확히 어디를 겨누어야 표적의 기동력을 빼앗는지 알았다. 상선 후미의 키다. 그리고 노는 근거리에서 최고속도를 보장한다. 상선은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키가 파괴되고 포위되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무기를 꺼내드는 상인들을 보며 마누크는 코웃음을 쳤다.

"조준!"

시론의 명령과 함께, 마누크의 수총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선원과 마주했다. 공포의 질린 얼굴이 뭉개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대는 짧은 사격전 직후 갈고리를 집어던졌다. 흘수선이 낮고 상갑판이 따로 없는 그들의 군선은 필연적으로 상선보다 높이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복수심과 고픈 배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기회를 마주한 북부 병사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상선으로 뛰어올랐다.


*

"헤에."

강안 숲 속에서 셀레스테는 통나무에 앉은 채 빌의 병대가 상선을 일방적으로 털어버리는 광경을 세심하게 지켜보았다. 수상전이란 저런 거구나 하면서. 그녀에게는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상선이 덩치가 훨씬 큰데, 상대가 안 되네?"

"덩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 중부의 마녀치곤 군대에 무지하군."

옆에 앉아 있던 연맹용병대장의 대답이었다. 셀레스테는 실실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녀의 진짜 정체를 연맹의 고집불통들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일부를 제외한다면 빌의 병대 대다수도 모르고, 그들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일시적인 동맹군도 알 필요가 없다. 그녀는 질문을 대신 꺼냈다.

"심심해보이는데. 당신은 저기 안 끼어들어?"

"수상전은 우리 전문 밖이니까."

"동부 기병들처럼 놀면?"

"기동력이 달려."

"그게 뭐야? 댁들 쓸모가 없잖아?"

주변의 다른 연맹용병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셀레스테를 노려보았다. 연맹용병대는 개머리판을 잘라내고 총열을 그만큼 늘린, 수성전에서나 어울릴 법한 화승총 몇 정 외엔 투사무기를 하나도 갖지 않았다. 그들의 둔중한 흉갑과 투구, 정강이 보호대는 기동력을 제한했다. 배도 말도 없었다. 그들의 창은 무시무시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셀레스테는 그것을 정확히 지적했다.

"중부의 마녀가 보기엔 웃겨 보일지도 모르겠군.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 단계에서는 쓸모가 없어."

용병대장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긍정했다. 용병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그와 그녀가 신경 쓰기에는 존재감이 약했다. 셀레스테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 인간도 빌 못지 않은 거물이네. 그 속을 모르는 용병대장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론은 충분히 유능하더군. 저녁에는 우리도 나선다. 배를 빌릴 테니까."

"빌려?"

용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부릴 선원들만 있으면 돼. 그들은 우릴 적당한 마을에 내려주고, 우리는 약탈하고, 다시 배를 타고 떠나는 거지. 배 3척으로 연맹용병과 빌의 병대 모두를 나를 순 없지만, 순차적으로 나른다면 24시간 내내 지그하우스 주변은 병란을 겪는다."

셀레스테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형지물을 철저히 숙지하고 시간계획을 세심하게 짜는 한 편 적의 대응방법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 활약할 곳은 도시 안이야. 투사병기를 갖춘 병대의 지원만 있다면 개활지에서 싸우는 것도 자신 있지만, 당장은 기회가 없을 것 같군."

"개활지에선 자신 있다고?"

"연맹 창병 대열은 귀신늑대도 못 뚫는다."

그저 관용구 비슷한 말이지만, 셀레스테는 피식 웃어버렸다. 부정하긴 힘들었다. 그녀는 락토에서 서 파롤의 왕이 보낸 창병들도 돌파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총병들의 지속적인 총탄 세례라는 보너스가 있었지만.

"아예 죽은 자의 왕도 못 뚫는다고 하지 그래?"

그 순간 용병대장은 입을 콱 다물어버렸다. 셀레스테는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덤덤하게 정정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맹용병도 죽은 자의 왕은 무서운가 봐?"

"우리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지키기 위해 말하자면, 죽은 자의 왕도 연맹의 석벽 앞에서는 경의를 표한다."

셀레스테도 알고 있다. 대륙 북서부의 바위산들을 통째로 요새화해버린 비범한 놈들. 죽은 자의 왕이 거병하기 전까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가 일어난 후에는 마법왕국의 제일 가는 동맹으로 죽은 자의 군대를 막았다. 태양궁의 가호와 파격적인 지원이 있긴 했지만, 왕의 군대는 단 한번도 석벽을 뚫지 못했다. 10만 해골이 들이닥쳐도 50야드가 넘는 높이의 바위벽과 기괴한 방어병기들을 극복할 순 없었다.

"그럼 죽은 자의 왕도 무서워할 필요 없는 것 아냐?"

"그건 아니지. 우리 우물들이 죄다 말라붙기도 했다. 모든 기계장치가 한꺼번에 고장난 적도 있었지. 태양궁이 사어의 저주에 파먹혔을 때는 마법의 지원마저 끊겼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영웅이 되었다."

셀레스테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용병대장의 화법은 빌과 비슷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부정할 결정타. 셀레스테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우리조차도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시체를 벽 안에 두진 못했다. 죽은 자의 왕이 그의 군대로 바위산 아래를 통째로 파내는 대역사를 보았다. 우린 지금도 시체를 벽 밖으로 던지며, 바위벽을 긁는 해골들을 본다. 우리는 북쪽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

직접 보지 않는 한, 상상이 가질 않는 장면이었다. 대학살, 대공포 이후 아무도 석벽 너머를 보진 못했다. 그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빼고. 그곳은 왕의 영역 중에서도 군대가 가장 많이 모인 땅이었다.

"아실리 에소테리아는 그걸 모른다."

셀레스테는 몽환적이기까지 한 상상에서 퍼뜩 깨어났다. 여전히 수상전을 구경하는 연맹용병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걔 엄마도 몰랐지. 그래서 왕이 부리는 검술가를 상대로 같잖은 내기나 했어. 발버둥쳐보겠노라, 나는 살아남겠다. 그러고 수십년의 망상과 도피를 겪었지. 우리와는 경우가 달라. 우리는 전쟁을 했어. 하지만 그녀는 석벽도 없었고 동료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왕의 권세와 직접 대면했다. 무수해서 인식하기조차 어려웠던 군대가 아니라. 물론 전쟁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시한부 인생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지."

"살아서 씨를 남겼으면 승리라고 보는데."

"흠. 넌 모르나 보군. 그 내기의 결말 말이야. 유명한 이야기인데."

셀레스테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귀신늑대가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용병대장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그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죽은 자의 왕이 직접 왔었지."

셀레스테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지그하우스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가 기억하기에 지그하우스는 파괴적인 질병이나 재해를 겪고 재건된 도시가 아니었다. 죽은 자의 왕이 왔다면 도시의 역사가 성립할 수 없다.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죽은 자의 왕이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그거 끔찍한데."

"끔찍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신화시대라서."

용병대장이 나지막하게 답했다. 셀레스테는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빌도 그렇고, 이놈의 용병들은 선문답이 취미인가? 그리고 신화시대는 예저녁에 끝났잖아? 다행히도 그녀는 인내심을 알았다. 그리고 몇 가지 경험상, 이런 선문답 뒤에는 해답이 따라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용병대장이 해설을 시작했다.

"30년 전에 신화시대가 부활했어."

"누가 왜 그렇게 규정하는데? 죽은 자의 왕이 나타나서?"

"기록이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익인이 날아다닌다 해서 신화시대가 다시 온 것이 아니잖아. 귀신늑대가 땅을 달리는 것이 신화시대의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지. 다리 달린 물고기도, 숲의 요정들도 마찬가지야. 잔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보다 영적으로 규정하는 신화시대는 그런 착각과 환상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군주들이 신비한 권세를 휘두르는 시대, 철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열망이 욕구를 앞서는 시대, 그리고 말 한마디가 무서운 시대다."

"말?"

"약속, 계약, 선언, 권리, 맹세, 기도……요약하면, 관계의 그 모든 것."

셀레스테는 어렴풋이 그 개념을 이해했다. 그녀는 빌에 대한 복수권을 가졌기에 여기 있다. 죽은 자의 왕은 아실리의 엄마가 왕의 검술가와 내기를 했기 때문에 지그하우스에 나타났다.

"그 속박에는 어떤 가호도 방패막이 되어줄 수 없어. 일종의 철칙이지. 그녀는 죽은 자의 왕과 내기를 했어. 그 내기의 내용 때문이라면, 죽은 자의 왕은 태양궁 한복판에도 들어올 수 있어. 설령 여왕이 신경질적으로 마법을 난사해도, 그의 현세권위에는 아무런 타격이 가지 않아. 설령 여왕이 막아내더라도, 그 대가를 크든 작든 치르게 마련이지."

신화적인 존재와의 대화. 귀신늑대와 원수를 지면 대륙 어디로 도망가든 결말은 늑대 밥이 된다. 요정과 결혼을 약속하면 영원히 요정의 세계로 사라질 수 있다. 태양궁의 여왕을 모독했다간 하늘 아래 어디에 있든 뜨거운 열선을 맞아 늘어붙은 잿더미가 된다. 남부의 황제가 개전을 선언하면 그 어떤 폭풍우가 가라앉히는 것보다 많은 병선을 말 한마디로 부르고, 북부의 왕은 등극하는 순간 신하들 중 그 누구도 배신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럼 죽은 자의 왕은?

"그 계집애는 제 어미의 사례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다. 그게 그녀와 우리의 차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수호성인 엘리야 부스틱스를 모독했어."

댁도 걔보고 사생아라 했다며? 셀레스테는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사실 사생아와 성인은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긴 하다. 연맹의 용병대장은 나지막하게, 신화시대의 공식으로 선언했다.

"연맹의 가장 거대한 벽에 맹세코, 그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셀레스테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녀는 사살 당해서 난간 밖으로 던져지는 선장을 보면서 고민했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샜을까?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그녀가 일을 해야 할 때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용병대장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녀, 이제부터 뭘 하려는 거냐?"

"응? 내 군대 소집."

셀레스테는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용병대장은 미간을 한번 좁히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어떤 군대가 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떤 형태로든 지그하우스에는 해가 될 것이다. 시론은 그녀한테는 따로 보급이나 호송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럼 부담도 없고, 그가 신경쓸 것도 아니다. 마녀의 일이다.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셀레스테가 완전히 캠프를 떠나자, 용병대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

여느 잡담이 모두 그러하듯, 연상과 실마리의 흐름 속에서 통일된 줄기 따위는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실리 에소테리아는 좀 심각했다. 그녀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 모습을 지나치게 많이 봤거나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틀린 생각이 아니다. 그녀가 '길길이 날뛰는' 행위 자체를 반복하는 것은 뷔독이 나타난 후 빈번해졌고, 미친 빌의 잔존병력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후에는 거의 매일이 그랬다. 때문에 그녀와 특정한 주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증오할 것이 너무 많아 보여서 맞장구를 쳐주기도 어려웠다.

"내가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야! 수중폭탄이라니, 그건 약탈자의 수법이 아니야! 침몰선주 프론홈의 전시 봉쇄 수법이잖아!"

몇 분 전까지 대화의 주제는 동부 기병대가 마을 몇 개를 불살라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상선대의 피해현황 문제가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실리 에소테리아는 가장 끔찍한 가설을 들이밀었다. 미친 빌과 동급의 사략수적, 침몰선주 프론홈의 참전.

"빌의 병대가 약탈을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프론홈이 끼어든단 말입니까?"

시종이 당황해서 말하는 순간, 아실리는 잉크병을 던져버렸다.

"넌 똑똑하다는 소린 다 챙겨들으면서, 왜 배의 속도는 고려 안 해! 프론홈이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왕의 노 에릭슨은 몰라도, 흑선 시다크까지 나타나도 이상할 것 없어! 게다가 이걸 봐! 이게 어딜 봐서 병대 하나의 약탈 기록이야? 십중팔구는 북부의 온갖 깡패들이 밀고 내려온 거야!"

시종은 미친 빌을 비롯한 네 제독 모두가 서 파롤의 선왕을 따랐던 몇 안 되는 현역 노병들이며, 실제의 능력이나 규모보단 그 명성을 이용해 4대 사략수적이란 우스운 칭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론홈과 미친 빌은 그 사이가 돈독하다고 알려진 것도. 물론 수중폭탄은 도시 안의 가장 유명한 기술자들도 기겁을 하는 세심한 기술이지만, 빌이 프론홈의 수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까? 모른다. 그러나 없었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시종은 프론홈의 참전보다는 빌의 병대가 신기술을 응용하는 것이 맞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아실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지그하우스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당장 보험료가 말도 못하게 펄쩍 뛰어버린 것이다. 수많은 상인들이 줄도산을 걱정했다. 빌의 병대는 소수다. 도시를 완전히 포위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적은 병력으로도 도시를 포위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여기까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문제는 그 규모가 너무 큰데다, 그 어떤 북부 도적보다도 신속하다는데 있었다.

"병력, 정보, 선례, 전술, 명장이 필요해. 예전에 빌에게 포위 당했던 도시 말이야. 그 도시는 빌에게 어떻게 대처했지?"

"그 도시는 지그하우스보다 큽니다. 태양궁에 더 가까웠고요. 비교할 처지가 못 됩니다."

"망할! 그래도 쓸모 있는 대책 몇 가지는 뽑아볼 수 있잖아!"

몇 가지는 있다. 그러나 한계도 명백했다.

정찰병과 감시초소를 늘리는 것? 그것도 예산이 드는 문제다. 게다가 정찰은 역으로 빌의 병대가 했다. 양측의 정찰대가 마주했을 때, 도시의 정찰대는 일방적으로 학살 당했다. 도시 측이 우세한 경우는 몇 없었고, 그나마도 상대는 재빨리 내빼버렸다. 적의 군사집단을 멀리서 관측하고 회피하는 것은 병대가 더 숙달되었고, 유리했다.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방어 측은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주변의 기사들을 고용하는 것? 상당수는 뷔독의 편을 들어 오히려 지그하우스의 재산을 털었다. 뷔독이 축출되었음을 강조하고 윽박질러도 약효는 그때뿐이었다. 오히려 약탈이 교묘해졌다. 화가 치민 아실리는 기사들의 성채로 토벌대를 보내는 것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견고한데다 접근이 어려운 그들의 성채를 무너뜨릴 방법 따윈 없었다. 병력이 모자랐다. 출정했다가 오히려 원정대는 물론 빈 집까지 털릴 가능성이 컸다.

태양궁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늘을 찢어발기고 땅을 갈아엎는 마법사들의 위력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뷔독이 실낙원기사단을 통해 태양궁에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태양궁은 직접적인 지원 대신 미적지근한 답변을 보냈다. 이로써 두 가지가 입증되었다. 그가 진짜 실낙원기사단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시론이 보통 유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빌은 마법사들이 끼어든 분쟁에서도 전술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경험이 여럿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가 얼간이처럼 마법사에게 박살날 부하들을 길렀을까?

북부재단을 상대로 공갈 협박하는 것? 지그하우스 지부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순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었다. 지그하우스 지부는 볼멘 항변을 내놨다. "우리가 미친 빌의 거래 대상이지, 상관입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빌은 지금 당신이 가뒀잖습니까?" 답이 없다. 게다가 비협조적이기까지 했다. 북부재단 전체에 아실리의 의지가 전파되기나 했는지, 그것부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지부에서 돌아온 답변은 "북부재단은 너무 큽니다"였다. 다른 지부가 독자적으로 놀란 법은 없으니까. 정보망을 이용해 귀띔 들은 바로는, 병대가 유령회사를 통해 물품을 공급 받거나 회계를 조작하는 등 치졸하지만 적발하기 어려운 방식을 동원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악! 이걸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초반에 기세를 올렸다간 곧 병대가 약탈할 마을이나 배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약탈보다 파괴와 방화를 저지르고 있으니까요. 놈들이 단기전을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당연하겠지! 장기전이 되었다간 분노한 농민들이 도시로 쳐들어오거나, 굶주린 도시민들이 우릴 끝장낼 테니까!"

적절한 비꼬기였다. 시종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 옆으로 돌아갔다. 시 참사회가 건네준 탄원서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차라리 빌을 죽여버리잔 내용이 제일 윗장에 적혀 있었다. 빌이 죽으면, 적어도 구출하겠단 명분은 사라지니까. 그리고 구심점도 사라질 테니까. 시종이 기억하기에, 그 뒷장은 그냥 빌을 풀어주자는 탄원서였다. 어느 쪽이든 아실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시 참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빌을 그냥 풀어줬다간 그에게 작살난 사람들이 항의할 것이다. 처형하면? 북부의 왕이 쳐들어올 때 내밀 카드가 사라진다. 그 실제 가치야 어쨌든 간에.

최선의 시나리오는 병대 격멸이었다.

"예상 밖이야."

머리를 싸맨 아실리가 중얼거렸다.

"빌만 잡으면 대충 다 해결되는 것 아니었어? 그놈들이 빌의 명성과 지혜 없이도 이런 싸움이 가능하단 말이야?"

"빌만 머리가 좋은 게 아니잖습니까. 애초에 빌만의 싸움도 아니었고……."

아실리는 고개를 들어 시종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아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동안 아실리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둔해졌다. 헌데 그 덕택에 오히려 침착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구겼던 표정을 펴고 등을 뒤로 젖혔 기지개를 폈다.

"좋아. 침착, 침착하자고. 젠장. 우리에게 중요한 건 뭐지?"

"병력입니다."

"그리고 전술이지. 젠장, 우리 시 경비대는 최소한 30년 동안 이런 사태를 대비해본 경험이 없어. 죽은 자의 왕에겐 대항할 엄두도 못 냈고, 가장 가까운 전쟁 우려라곤 북부의 왕에 의한 포위전이었으니까."

"네."

한참을 끙끙 앓던 아실리는 문득 적과 닮아야 적을 안다는 격언을 떠올렸다. 북부 해적은 북부 해적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예 흑선 시다크를 고용할까?"

미친 빌과 상극으로 유명한 사략수적. 미친 빌과 그는 공통점이 많았다. 서 파롤의 선왕을 따른 노병이었고, 비슷한 연배에, 현역 동업자. 신출귀몰한데다 무용이 뛰어나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예상 외로 대범하다는 평을 받는 빌과 달리 끝까지 치졸하며 욕심이 많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성격차이일 것이다.

"서 파롤의 왕이 그걸 가만 두고 볼까요?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 두 수적끼리 싸우는데?"

"왕은 지금쯤이면 빌에 대해 소식을 들었을 거야. 근데 반응이 있어?"

없었다. 시종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민했다. 확실히 없었다. 그렇지만 찝찝한 일이다. 시다크는 아실리의 재물로 쥐고 흔들 수 있을 속물이지만, 반대로 속물이기에 음험한 수단을 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약탈자로서는 일류지만 용병으로선 삼류다. 미친 빌과 달리, 고용주를 배신해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최후수단으로 아끼고 싶습니다. 게다가 흑선 시다크의 배는 한 척뿐입니다. 빌의 배보다 훨씬 크다지만, 큰 도움이 안 돼요. 한 척으로 어떻게 빌의 군선 세 척과 연맹용병, 동부 기병 모두를 상대합니까? 그걸 극복하려면 시 전체의 병권을 쥐어줘야 할 텐데, 위험합니다."

아실리는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고민을 거듭했다. 이 수법, 저 수법. 그 고민 끝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빌의 병대가 설치는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넓은 땅, 부족한 방어병력. 결론은 이 두 가지만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단 고용하자."

"네?"

"일단 고용해서, 빌의 병대를 추격하게 시키는 거야."

"병권은요?"

"안 줄 거야. 필요해지기 전까지는. 배 하나라 해도 병대의 활동에 제약은 줄 수 있겠지. 상선들을 무장시키고 다른 지방까지 용병과 도시가 요구하는 물건을 사와. 장기전이라, 좋지. 네 말대로 놈들을 굶겨죽이자고. 기왕 이렇게 된 것, 내 보급품이 먼저 떨어질지, 그놈들 보금품이 먼저 떨어질지 견주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도시 주변을 싹 정리해버려."

"네?"

"싹 비워버려."

청야전술. 시종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북부재단보다야 못하지만 아실리의 재력은 만만치 않다. 그녀의 별명은 황금의 딸이다. 물량전에서는 병대가 어쩔 수 없는 절대우위를 가졌다.

"그러면 애초의 계획보다 피해가 커집니다."

"계속 방치해서 피해가 커지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충당을 못할 것도 없어. 도시에 들어오는 물자가 적어졌다는 건, 그 물자의 가격이 펄쩍 뛴다는 뜻이니까. 꽤 이득을 볼 것 같지 않아?"

"악랄하네요."

"흥. 아무렇게나 말하네. 이젠. 상관 없어. 시 참사회에 배급제를 건의해야겠어."

"배급제라. 저 태어나서 처음 보네요."

"응. 마지막 배급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끝났으니까. 죽은 자의 왕이 일으킨 혼란 때문에 시작했고. 설마 하니 그때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훨씬 국지적이고 덜 파괴적이긴 하지만요."

"그러네."

아실리는 조금 정리된 머릿속을 가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옷을 챙기는 그녀를 보고 시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실리는 입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빌 만나러."

"네?"

"뭐니 뭐니 해도 말이야, 제일 빠른 해결책은……."

아실리는 은회색 다람쥐 모피로 만든 옷을 마지막으로 걸치면서 중얼거렸다.

"……그 남자를 내 발 아래 굴복시키는 거야."


작가의말

약탈 장면은 뭔가 거하게 써보려고 했다가....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축소.

근데 1만 1천 7백자가 나왔네요. 엄마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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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인연살해 3부: 미친 빌과 졸업논문 - 서막 +12 11.12.03 3,262 84 10쪽
35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종막 +17 11.11.26 3,325 94 7쪽
34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4 +13 11.11.19 3,256 90 20쪽
33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3 +12 11.11.12 3,278 86 16쪽
32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2 +7 11.11.05 3,333 79 17쪽
31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1 +11 11.10.09 3,407 98 19쪽
»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0 +8 11.10.01 3,477 91 26쪽
29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9 +8 11.09.25 3,576 84 19쪽
28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8 (복구 완료!) +3 11.09.25 3,368 77 12쪽
27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7 +1 11.09.25 3,330 73 18쪽
26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6 +2 11.09.25 3,518 78 22쪽
25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5 +3 11.09.25 3,448 80 16쪽
24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4 +5 11.09.25 3,616 86 12쪽
23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3 +3 11.09.25 3,881 91 27쪽
22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2 +3 11.09.25 3,728 80 10쪽
21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 +3 11.09.25 4,237 85 12쪽
20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서막 +4 11.09.25 4,103 86 5쪽
1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종막 +14 11.09.25 4,056 98 13쪽
1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7 +3 11.09.25 3,716 92 6쪽
1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3 11.09.25 4,175 79 17쪽
16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5 +7 11.09.25 3,770 100 20쪽
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8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5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2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2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1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6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1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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