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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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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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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4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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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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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글자
20쪽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4

DUMMY

연맹용병들은 단순한 감상을 내놓았다. 다시는 배 안 타. 비약의 힘을 빌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노선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정원 이상의 병력을 기습적으로 상륙시키기 위해 북부 병사들은 평소보다 약을 과용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3척의 군선은 날다시피 달렸고, 상륙하자마자 북부 병사들은 도시로 난입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최고속도로 광장까지 달려가는 것이었다. 길을 가득 메운 병사나 관중, 장애물을 회피하면서, 지붕을 뛰어다니거나 벽을 부수면서.

연맹용병은 비약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게드 장로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불량 재료들까지 썼지만 양이 모자랐다. 그러나 연맹용병은 개의치 않았다. 시론도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북부 병사들은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만들더라도 최대한 빨리 광장에 가야 한다. 적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빌 대장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연맹용병에게 어울리는 전투 방법은 아니다. 연맹용병은 병대가 회피한 것들을 정면으로 분쇄하는데 더 어울렸다.

"밟아라!"

용병대장의 외침과 함께 좁고 긴 대열이 행진하기 시작했다. 장창과 도끼창의 벽이 도시로 파고 들었다. 그들의 임무는 적을 분쇄하고 도시의 핵심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실리에게 모욕 당한 수호성인 엘리야 부스틱스의 이름을 다시 깨끗이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아무도 상대하지 못했다. 준비되지도 않았고, 기세까지 꺾인 이들은 그저 압살되고 참살 당했다. 질량과 칼날에. 튼튼한 갑옷과 방패, 굳건한 군기와 강맹한 의지까지 갖춘 연맹용병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거친 목소리로 그들 고유의 전투함성을 반복했다.

"성인의 가호!"

사실, 그게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

키체커의 계획은 단순했다. 높은 곳이 안 되면 낮은 곳에서 쏘지 뭐. 그래서 그는 전날 밤부터 하수구에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맨홀 뚜껑 아래에 발판을 만들고, 맨홀 뚜껑에는 벽돌을 괴어놓아 사람들이 밟아도 끄떡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벌어진 뚜껑과 바닥 사이가, 수로가 총안구가 되는 것이다. 비좁고 시야도 꽤 제한되지만 기습이란 면에선 오히려 양호했다. 유사시 키체커는 빌이나 잠입조 병사들을 이 하수구로 끌어들이는 것까지 고려했다. 자신이 여기 숨은 것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 여기까지 어떻게 유도할지가 좀 문제긴 하지만. 완벽한 계획이란 본디 없는 법 아니던가.

어쨌든 납득할만한 계획을 세워놓고 대기하던 키체커는 예상을 더 뛰어넘는 사태에 기겁했다. 감옥에서 탈출하거나 처형식날 난입하거나. 지독하게 단순할 수 밖에 없던 탈출공식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죄수가 처형식날 형틀을 부수고 집행인과 관중을 쳐죽이는 탈출극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건 그냥 공황이었다. 염소 다리뼈보다 훨씬 우월한 무기인 검을 가진 경비병들도 도망만 쳤다. 반격을 할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두 토막나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판이니 그들이 겁쟁이에 머저리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형장에서 난리가 난 사이에 빌을 구출한다는 계획이 크게 틀어지진 않았다. 다만 키체커는 몇 가지 고민을 해야 했다. 그는 시론이나 빌에게 아무런 귀띔도 받지 못했는데, 상황은 기묘하게 돌아갔다.

셀레스테는 빌에게 비약을 끼얹었다. 어쨌든 도와주는 모양이니 쏘면 안 된다.

아실리는 시다크에게 얻어 맞고 기절했다. 보이지도 않고 쏠 필요도 없다.

시다크는 아실리를 후려치는 기묘한 짓을 한 뒤엔 그저 손 찔러놓고 사태를 구경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우선 목표들은 죄다 쏠 수 없었다.

군중들의 발이 맨홀뚜껑을 차례대로 요란하게 밟는 사이에, 키체커는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발 밑에서 불꽃과 연기가 튀자 시민들이 더욱 광란에 빠졌다.


*

사실 셀레스테는 빌의 곁에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일도, 갈 곳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론은 그냥 대장을 지키고 서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았다. 제일 무난한 것은 확 현신해버린 다음 빌을 물고 도망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혼란 속에서 비약을 처먹은 빌과 싸우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형장 바닥에 남아 있는 비약에 시선이 갔다. 그러나 오물에 핏물까지 섞인 바닥을 흐르는 고약한 약물을 핥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귀신늑대에게 동일한 약효가 나올지도 장담할 수 없고.

"빌! 야! 난 어쩌란 거야? 골 그만 깨고 주변 좀 봐!"

셀레스테는 자신이 처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빌은 자기 손에 총열이 1만 자루쯤 되는 제사총이 없는 것이 참 아쉬운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자꾸 도망치는 통에 더 많이 죽일 수 없다는 것에 광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격노를 달래기 위해 뛰쳐나온 희생물들은 그나마 먼 거리 있었던 탓에 제정신을 좀 차릴 수 있던 경비대와 민병대였다. 그들은 가까스로 군중들을 헤치고 나와, 석궁이나 활 따윌 들고 원거리 전투를 시도하려 했다. 빌은 순식간에 입장을 바꿨다.

"퇴장!"

"뭐?"

셀레스테가 얼이 나간 목소리로 반문하는 사이, 빌은 뼈다귀를 적병들에게 집어던져버렸다. 그는 셀레스테를 지나쳐 형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형장을 들어올렸다.

광전사가 보여준 대역사에 경비대는 시위를 당기는 걸 잊어버렸다. 그가 전나무를 뽑아버리는 것을 본 적 있던 셀레스테만이 평온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센스가 꽝."

위압감 느껴지는 야만전사의 모습에 전무후무한 투척물까지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형장이 포탄처럼 날았다. 크고 튼튼한 형장은 경비대를 정면에서 뭉개버리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번 아수라장을 연출한 다음, 빌은 셀레스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간다."

"뭐?"

곧 셀레스테는 팔다리를 모두 허공에 놓은 채 달리는, 귀신늑대로서는 하기 힘든 진기한 경험을 했다. 비명을 꺅꺅 질러대면서. 셀레스테는 산산이 부서진 형장, 엎어진 시체들, 생존자들, 딱딱한 돌바닥이 코 앞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기가 질려버렸다.

"대장, 엎드리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레스테가 정면을 보자 시론을 포함한 빌의 병대가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그들의 몸에선 불꽃 냄새가 진하게 났다. 빌은 셀레스테를 껴안은 채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곧 요란한 총성과 함께 다시 비명소리가 터졌다. 혼비백산한 경비대도 대응사격을 하면서 빌과 셀레스테는 사격전 한복판에 뛰어든 꼴이 되었다. 당장 셀레스테가 불평을 터뜨렸다.

"대체 어쩌잔 거야!"

"네가 아는 것 아니었냐?"

약 먹은 빌이 처음으로 내민 이성적인 질문이었다. 셀레스테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짜증을 부렸다.

"그걸 내게 말하면 어떡해?"

"시론이나 마누크가 아무 말도 없었어?"

"없었어!"

빌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셀레스테는 시론의 속셈을 대충 알아차렸다. 그가 한 말은 "대장, 엎드리세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셀레스테는 이를 박박 갈고는 빌을 일으켜세웠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뛰어!"


*

"어, 이런 젠장."

시론이 광장에서 꺼낸 첫 말이었다.

"나도 형장이 날아올 줄은 몰랐지."

사람 몇을 피떡으로 만들며 날아온 거대한 목재 구조물을 피한 다음, 병대는 느닷없이 빌과 셀레스테를 사이에 끼고 경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자칫 선수를 뺏길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론은 주저 없이 사격전을 명령했다. 비약에 의한 돌격전은 그 시점에서 이미 한계였고, 적당한 투사무기를 갖춘 놈들을 상대하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희극이 되어버렸다.

"젠장."

시론도 나름 속셈이 있었다. 셀레스테가 빌을 아실리의 손아귀에서 뺀 이상 언제 어떤 결심을 할진 모른다. 빌이 난동을 부리고 셀레스테가 현신을 주저하는 사이에 광장에 뛰어든다. 아실리를 제압하고 빌을 구출한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사격전을 벌인다. 그러데 어디서 온 불쌍한 검은 머리의 소녀는 눈먼 총알에 맞았습니다. 해피 엔딩. 셀레스테에게 빌 곁에 붙어 있으라고 한 건 그런 속셈에서 내린 조치였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닥치자, 둘의 자리가 너무 가까웠다.

시론은 당장 병사 몇을 지목해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곤 쌍권총을 빼들었다. 빌과 셀레스테는 발이 빨랐다. 그 둘은 골목길을 질주하고 계단을 올라가 벽을 부수곤 지붕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병사들은 재빨리 그 둘을 쫓았다.

"젠장, 대장! 엎드리세요!"

시론의 쌍권총이 차례로 불을 뿜었다. 그러나 맞지 않았다. 그 둘은 허리를 잔뜩 숙인 채 빠르게 뛰었다. 시론은 놀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좀 쏴!"

"왜 대장을 쏘는 거야?"

"대장이 아냐! 셀레스테를 쏴!"

"뭐?"

"닥치고 쏘라고!"

희극 속에서 시론이 소리를 쳤다. 뒤늦게 쫓아온 마누크는 혀를 차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

기왓장을 걷어차고 바구니를 집어던졌다. 셀레스테는 빌을 앞세운 채로 정신 없이 지붕 위를 달렸다.

"나 현신하는 꼴 보기 싫으면 뛰어!"

"왼쪽? 오른쪽?"

"왼쪽, 아니 오른쪽! 뛰어내려!"

둘은 경사를 따라 낮아지는 지붕 위에서 다시 골목길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그들을 맞은 것은 갑작스런 둘의 등장에 어찌할 줄 모르는 병사들이었다.

"어, 대장?"

뒤쫓아온 시론이 곧바로 소리쳤다.

"쏴!"

"뭐?"

당연히 즉각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빌이 명령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빌과 셀레스테는 그들을 제치고 달렸다. 뒤에서 병사들이 소리쳤다.

"대장! 대장!"

빌은 식은땀이 뒤통수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간만에 만난 고향친구 게드 장로도 복부에 주먹을 날리는 인사로 맞아야 했다. 감옥에서 기어나온 틸리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은 거리 상의 문제로 때리지 못했다.

그 모두가 셀레스테가 뒤에서 으르렁거리며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천년만년 도망다닐 거냐?"

"그럼 어떡해? 시론이 날 죽이려고 하잖아!"

"그건 나도 알겠다. 그래서, 넌 아무 생각 없는 거냐?"

"당신이 명령해! 쏘지 말라고!"

둘은 계속 달렸다. 일단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빌은 훌륭한 방패막이었다. 시론과 병대가 함부로 총을 못 쏘게 했고, 앞을 가로 막는 시 경비병들을 뭉개놓는데는.

그때 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질서정연하게 행진해오는 연맹용병대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빌은 이미 도시가 병대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도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성문 밖에 동부 기병대가 도착했다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도시 안의 누구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포위전이었다. 그리고 학살극이었다.

"맙소사. 시론이 성공시켰군. 도시 점령이라니."

"그를 요격해야 할 시다크가 그냥 손 놓았다는 게 컸지."

"간첩과 배신은 공성전의 정석이란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너 어떻게 튀겠냐?"

"명령하라니까!"

그것은 가장 간단한 해결법이었다. 그러나 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싫다."

"왜?"

셀레스테가 거의 비명처럼 질문했다. 그 답은 간단했다.

"널 죽일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셀레스테는 짜증과 분노를 포함했으나 차마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진짜 확 현신해버린다?"

"해봐라. 나와 내 병대에 용병들까지 다 상대할 자신 있으면."

"못할 것 같아? 적어도 당신을 경비대 앞에 던져주고 튈 수는 있거든?"

둘이 티격태격하던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셀레스테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도와 달리,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빌이 맨홀에 빠지면서.


*

"쓸데 없는 참견은 아니었다고 봐."

하수구를 기어나오면서 키체커가 말했다. 그의 참견은 좀 과격했다. 빌의 발목을 잡아채 하수구로 끌어들였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둘 다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그런 좁은 곳을 따라 쫓아올 방법이 없었다. 좁은 장소에선 그녀의 마지막 카드인 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뒤따라오던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만 따지면 확실히 이쪽이 높긴 했지. 셀레스테를 끝장 내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키체커는 웃어버렸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잖아. 시론의 그 엉성한 계획대로 했으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었어."

"엉성했나?"

"마무리가."

"역시 그랬군."

빌은 혀를 차면서 맨홀을 빠져나왔다. 처음의 광장이었다. 남은 것은 시체와 완전히 기력이 없어진 생존자들, 그리고 하나둘씩 모이는 병사들이었다. 땀범벅이 된 시론이 가장 마지막에야 도착했다. 빌은 짧고 간단하게 시론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시론은 한숨을 몰아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대장."

"그녀 일이라면 신경 쓰지 마라. 제법 재밌었다."

"그럼. 재밌고 말고. 미친 빌이 여자랑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라니."

병대에 슬쩍 다가온 벤담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는 빌을 보자 손을 들어보였다.

"오랜만이오."

"그쪽도. 시다크는 지금 뭐하고 있소?"

"도시 밖에서 전령을 기다리고 있을걸. 마지막엔 누가 이겼는지 보려고."

"약아빠진 놈."

빌의 투덜거림에 벤담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뒤 빌은 자신의 소지품 전부를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옷부터 투구, 갑옷, 검과 도끼까지. 그리고 의외의 전리품까지 얻었다. 시론조차 예상 못한.

빌은 기절한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말했소?"

"말했소."

"왜?"

"이 사업 그만 접을 예정이라. 이젠 기업비밀도 아니거든. 왕이 그러더군. 가능하면 댁을 구하라고."

"가능하면. 흠. 구체적으로 뭐라시던가?"

"빌이 살아남으면 맡길 일이 하나 있다 하시던데."

빌은 코웃음을 쳤다. 젊은 왕이 사람을 너무 막 부려먹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몸값을 내줄 것도 아니었으면서 체면 차리기는.

"답변은 내가 하겠소."

빌은 자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제야 상의가 벗겨진 죄수가 아니라 미친 빌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고는 쇠도끼를 챙겨 들었다. 그리곤 아실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도끼자루가 그녀의 볼을 툭툭 쳤다.

전투가 끝났다.


*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검은 로브를 입고 새빨갛게 녹슨 쇠사슬을 온몸에 두른, 황금가면을 쓴 남자가 교회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전투를 벌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광택 없는 철검을 들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혀 있었다. 가면 안쪽에는 새파란 안광만이 빛났다.

죽은 자의 왕.

그가 지그하우스의 교회 안까지 들어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걸린 희생물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짓은 금지시켜야겠다. 편리하기보단 번거로우니."

아실리는 그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비명을 지르면서 어머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차갑고 빼빼마른 손가락은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어머니와 떼어놓았다.

"너는 아니다."

아실리의 어머니는 거의 발광하다시피 딸을 붙들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마지막엔 대리석 바닥을 붙들었다. 손톱이 떨어지면서 빨간 자국이 남았다.

그녀를 보호하던 모든 것이 소용 없었다. 검사들은 도망쳐버렸고, 성물은 부서졌다.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버렸다. 돈도 소용 없었다. 그녀가 주는 돈보다는, 죽어 남길 돈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두컴컴한 바깥으로 끌려나간 동시에,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저절로 닫혔다.

교회에는 사람이라곤 이제 아실리만 남았다. 그리고 그녀의 수중에는 태양궁에서 보내온 편지만 한 장 남았다. 당신의 행운을 빈다. 그리고 행운은 없었다.

아실리는 겁에 질려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

아실리는 눈을 떴다. 그녀의 뺨을 툭툭 치던 차가운 금속 막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미친 빌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공기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주변을 둘러보자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오른 창의 벽이 보였다.

상황이 이해가 가는 순간, 아실리는 공포를 느꼈다.

"내가 졌어?"

"그렇게 됐군."

아실리의 눈에 연맹용병대장이 보였다. 아래에서 보는 터라 훨씬 그의 체구는 더 거대해보였다.

"빌 대장, 그녀의 신병을 우리에게 넘겼으면 좋겠소."

그의 말에 빌이 반문했다.

"찢어발기게?"

소름끼치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걸 듣자 아실리는 졸도하고 싶어졌다.

"연맹의 석벽과 성 부스틱스를 모독했으면 그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

저절로 움츠러드는 말이었다. 그녀가 연맹용병들에게 퍼부은 욕설과 저주를 생각해보면 그 처우가 어떨지는 상상이 갔다. 태양궁에서의 죽음. 아실리는 갑자기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빌은 아실리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적이 아니라 동물을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빌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동업자와 대화를 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래뵈도 고용주의 혈육이라서. 우리가 데리고 갈 거요."

"당신이?"

"이 정도로 난리를 친 여자애를 도시 안에 냅두긴 뭣해서. 버릇은 확실히 고쳐놓겠소."

"북부 병단에 여자 하나라. 언제까지 끌고 다닐 거요?"

"글쎄. 적당한 몸값을 내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 후원자 흉내 계속하려면 뷔독이 내야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그 외에는 나와 상관 없소. 혹 배상으로 필요한 게 있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용병대장은 잠시 침묵했다. 아실리는 긴장해서 그 둘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흥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연맹용병에게 아실리는 응징할 대상이지 상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로군. 볼만하겠어."

용병대장은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곧 연맹 용병들은 흩어졌다. 병대도 흩어졌다. 그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시체를 수습했다. 이제 아실리의 곁에는 빌만 남았다.

"귀신늑대는?"

"모르겠다. 알아서 도망쳤겠지."

"시다크가 배신을……."

아실리가 말을 하다 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빌은 고개를 저었다.

"배신은 아니지. 말했잖아. 용병은 배신 못 한다고."

"나도 그렇게 믿었죠. 당신이 그렇게 말해서……."

아실리는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허탈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건 사기야."

빌은 딱히 뭐라고 말해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시다크에 대한 평가를 반복했다.

"그래서 믿을 놈이 못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나도 몰랐다만."

그는 아실리의 가느다란 팔목을 붙잡아 일으켜세웠다. 아실리는 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남은 자존심을 추스리며 가까스로 말했다.

"몸값을 받을 생각이라면 정중하게 대하세요."

그녀의 예상과 달리 빌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아실리는 좀 더 높아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지그하우스를 보자 그녀의 손해가 얼마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당장 사나운 북부로 끌려가게 된 그녀의 처지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죠? 정말 몸값만 받을 건가요? 아니면 왕의 하렘에 진상하든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가능성이었다. 빌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혀 웃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아실리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빌은 문득 셀레스테가 떠올랐다. 그는 도끼를 어깨에 멘 채 아실리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두고 보면 알 게다."


작가의말

이제 2부 종막! 2부 본편이 영 안 좋아서 종막으로 역전을 노려야 할 판입니다! 엄마야!

선호작이 드디어 170을 넘겼습니다! 480이던 이전만은 못하지만 빠른 회복세에 그저 좋아할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꾸준한 추천 덕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대체 어디서 추천이 되길래 찾아오시는 분들이 늘어나는 걸까요?(...)

근황:
1. 9월쯤부터 시유를 알고 개뿜은 다음 보컬로이드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습니다. 이름과 야짤(...)만 알고 있었을 뿐인데 이젠 음악을 찾아서 듣고 있습니다. 시유랑 메구리네 루카만 믿고 갑시다. 엌.

2. 1차 대전급 세계관 영지물을 기획하면서 등장하는 기업 이름들을 패러디로 범벅시키는 중입니다. Apeeture Heavy engineering(원: Apeture science)이라던가, Pan Drive yard(원: Pan Am)라던가, Green lantern Electronic(원: Green Lantern)이라던가!

3. 방독면 소년과 마법소녀도 쓰긴 쓰는데....레알 미친 놈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 자꾸 왜 이러지.

4. 창조도시라는 곳을 기웃거리다가 막 나가는 액션게임 스토리를 짜봤습니다만.....정말 게임으로 만들 기술 따윈 제게 없군요. 응? 어떤 스토리냐고요?
스틸래빗!
35세기의 미래에서 온 전금속 '우주전사' 스틸래빗은 그의 새로운 친우이자 '야만전사' 보팔래빗과 함께 래빗문명의 마지막 무기이자 희망 '토끼발'을 이교도 바니걸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싸웁니다!
벅스버니부터 재즈잭래빗까지 위대한 선조 전사들을 탄생시킨 래빗문명은 아사히나 미쿠루와 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 같이 강대한 이교도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네. 제가 잠시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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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4 +13 11.11.19 3,257 90 20쪽
33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3 +12 11.11.12 3,278 86 16쪽
32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2 +7 11.11.05 3,333 79 17쪽
31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1 +11 11.10.09 3,407 98 19쪽
30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0 +8 11.10.01 3,477 91 26쪽
29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9 +8 11.09.25 3,576 84 19쪽
28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8 (복구 완료!) +3 11.09.25 3,368 77 12쪽
27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7 +1 11.09.25 3,331 73 18쪽
26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6 +2 11.09.25 3,518 78 22쪽
25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5 +3 11.09.25 3,448 80 16쪽
24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4 +5 11.09.25 3,616 86 12쪽
23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3 +3 11.09.25 3,882 91 27쪽
22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2 +3 11.09.25 3,728 80 10쪽
21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 +3 11.09.25 4,238 85 12쪽
20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서막 +4 11.09.25 4,104 86 5쪽
1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종막 +14 11.09.25 4,056 98 13쪽
1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7 +3 11.09.25 3,717 92 6쪽
1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3 11.09.25 4,175 79 17쪽
16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5 +7 11.09.25 3,771 100 20쪽
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9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5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3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2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3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7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2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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