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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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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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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4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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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2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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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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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글자
22쪽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6

DUMMY

*

북부재단 지그하우스 지점에서 호프만 지점장은 종이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이게 뷔독이 가져온 공증서의 일부입니다. 아실리는 위조라고 주장합니다만."

응접실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지점장이 가져온 서류뭉치들을 낚아채듯 받아선 한 탁자 앞에 앉았다. 빌의 호출에 달려온 게드 장로와 호기심 많은 몇몇 병사들이 그 주변을 에워쌌고, 지점장은 빌의 맞은 편에 자릴 잡았다.

빌은 서류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족보부터 거래명세서까지. 모두 뷔독이 아실리의 외삼촌임을 입증해주는 자료들이었다. 빌은 이 서류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그로서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숫자 전문가인 게드 장로에게 서류들을 넘긴 다음, 미리 준비한 몇 가지 질문을 꺼냈다.

"아실리가 이 문서를 위조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지?"

"없습니다."

"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공증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기관은 이미 살아있지 않으니까."

"무슨 일인지 알겠군. 죽은 자의 왕인가?"

"예. 몰살 당했습니다."

빌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 도망치기 힘든 저주 속에서 한 왕조가 몰락했다. 한낱 도시가 살아남긴 힘들다. 전례 없던 몰살. 지독한 혼란.

뷔독을 증명해줄 도시는 없다.

"위조는 흔합니다. 게다가 죽은 자의 왕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죠. 문서의 진위를 놓고 벌어지는 온갖 사건이야 사실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나도 종종 들었네. 별로 큰 관심은 안 뒀지만."

유적지를 파헤쳐 닥치는 대로 들고 올 뿐인 약탈자들이야 신경 쓰지 않는 이야기다. 지점장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 문서들을 어디다 쓰시려고 하십니까?"

"논리 보강. 어쨌든 뷔독에게 명분은 중요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30년 전에 죽은 자의 왕이 거병하면서 아실리의 외가 가족들은 전부 죽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아실리의 엄마가 죽기가 무섭게 외삼촌이란 녀석이 나타났으니, 문서로 아무리 증명한들 의심은 깨끗이 걷히기 어렵습니다."

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애라도 알 이야기다. 뷔독이 의심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그 개자식은 30년 동안 어디서 굴렀다던가?"

"망령의 영토와 생존자들의 땅을 전전하며 남은 재산을 찾으려 했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서, 산채를 짓고 단순한 약탈자로 생활했다 합니다. 그러다 그만 왕의 사도들에게 들켜버렸다더군요."

"검술학교의 배신자들에게?"

"왕의 군대에 복무하는 개척민 보병장교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사도해골을 이끌었다더군요."

"제법 생생한 이야기로군. 그래서, 어떻게 살아왔다던가?"

"중과부적이라, 실낙원기사단으로 도망쳤답니다."

잠자코 서류만 보던 게드 장로가 코웃음을 쳤다.

"실낙원기사단이라고? 이거야 원. 잘못하면 우리가 놈들과 한편이 되겠는데?"

"뷔독의 배후가 실낙원기사단이라면 그런 희극이 완성되겠군요. 하지만 가능성은 적습니다."

북부 병대와 실낙원기사단의 연합은 물과 기름이 만난 꼴이다. 병대는 죽은 자의 왕을 신봉하나, 실낙원기사단은 그를 증오한다. 이름 그대로, 그들은 낙원을 잃은 자들이기 때문에. 게다가 실낙원기사단이 도시에 개입하려 시도 중이라면 뷔독은 빌의 병대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뭐가 아쉬워서? 왕의 굳건한 권세 때문에 기사단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많은 기사와 용병을 보유했다.

"희극도 그런 희극이 따로 없겠지."

빌은 장로의 말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그런 희극이라도 벌어졌으면 좋겠네."

게드 장로는 웃음을 지웠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진짜다."

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근거는?"

"공증인의 서명. 이거 암호야."

빌은 장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로는 순순히 서류 하나를 넘겨주며 설명을 이었다.

"서명 옆에 숫자가 적혀 있어. 56이라고."

"이게 어쨌단 거지?"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공증인들이 사용하는 쓸데 없이 화려한 무늬를 기입한 서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로는 그 의미를 안다.

"행수야. 그 서류에 쓰인 글의 행수를 세서 서명 옆에 적어놓은 거야. 정확히 56행이지."

"확실한가?"

"서류마다 서명 옆의 숫자가 다른데, 그 행수를 세어보면 숫자와 일치해. 이것과 비슷한 수법으로 자신이 쓴 편지의 진위를 가리는 수호자가 있었지."

빌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류에서 행수를 세기 시작했다. 지점장도 서류 하나를 집었다. 한참 뒤 둘은 차례대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56행."

"이건 73행입니다. 정확하군요. 이것 참. 이런 간단한 암호가 숨어있었다니."

지점장이 한탄처럼 말하자 게드 장로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눈치채기 어렵지."

"그가 공증한 다른 문서들도 동일한 암호를 사용한단 말이군. 좋아. 이걸로 뷔독은 진짜란 결론이 나왔어."

지점장은 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뷔독이 가져온 서류가 모두 이 공증인이 공증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공증인이 암호를 사용할 것 같지도 않고. 뷔독이 어디서 서류를 입수해 진짜 행세를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예?"

"아실리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의 진위다. 우린 이 서류가 진짜란 것만 증명하면 돼. 그 다음에는 아실리가 어떤 이의를 제기하든 쓸데 없는 흠집내기란 생각 밖에 들지 않아. 이의를 제기할수록 아실리의 말은 신뢰성이 떨어질 거다."

빌은 쓴웃음을 지었다.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가 뷔독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보다 더욱."

"악덕상인 기준으로도 상당한 억지공갈입니다. 그거."

"재단 사람에게 듣고 싶은 소리는 절대 아니로군."

상대의 주요한 주장을 뒤엎어 이후의 말도 개소리로 만든다. 빌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곤 생각에 잠겼다. 이제 아실리의 황금에 문제가 생겼다. 지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뷔독이 정당한 후견인으로 재산을 관리한다면, 아실리는 함부로 돈을 쓸 수 없겠지요."

"진작에 해치웠어야 하는 일인데, 적잖이 늦었어. 뷔독이 한심한 놈이란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군.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뷔독이 얼마나 많은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지는 고려해볼 사안이 아니다. 그건 개인의 탐욕을 기반으로 한 짧은 생각에 불과하다. 재산을 빼내는 수준이 아니다. 돈자루 위에 올라서야 한다. 아실리가 도시귀족으로서 가진 모든 동산과 부동산을 뷔독이 관리해야 아실리는 무력해진다.

이미 사태는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한 후견인의 횡포 수준이 아니다. 적의 군자금을 끊어야 아군이 사는 싸움이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걸리는 문제가 좀 있군요. 아실리의 나이가 좀 많은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보다시피 후견인이 필요 없다고 나온다면?"

"재산에 달라붙은 후견인이 뭉그적거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무시한다."

"역시 억지공갈 느낌이 좀 납니다만."

빌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적당한 때에 발을 뺀다."

"그게 언젭니까?"

지점장의 질문에 빌은 몹시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뷔독이 이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할 때. 어쨌든 고용주니까. 아실리의 생일이 언제지?"

"한여름입니다. 아직 석 달은 남았습니다."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군. 적당한 것 같은데."

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냈다.

"그럼 그때 발을 빼도록 건의하자. 아실리 쪽에도 통고하고."

"우선 뷔독부터 설득해야겠군요."

"하지 마. 그 욕심쟁이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어. 최소한 내년까진 해먹으려고 할 테니까."

지점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실리에게 알려라. 석 달 뒤엔 뷔독과 내가 도시에서 나가거나, 또는 내가 나간다. 그럼 당장 무력충돌의 가능성은 낮아지겠지."

"뷔독을 버리실 겁니까?"

"석 달간 살펴보고 결정한다. 사실 돈이 급하긴 우리 병대도 마찬가지고, 뷔독을 설득하거나 트집 잡아 도망칠 이유를 찾을 시간은 있어야지."

지점장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 말리는 석 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균형을 만들 가능성을 잡았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은 기념할만한 날이 되어도 좋다. 좀 싱거웠다는 느낌은 있지만.

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수고했다. 난 잠깐 좀 걷다 돌아갈 테니, 이제 그만 해산한다."

"호위는 필요 없겠냐?"

게드 장로의 물음에 빌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 좀 개인적인 일이다."



*

셀레스테는 키체커의 감시를 피해 여기저기로 돌아다녔다. 도시는 복잡한 다층건물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들로 만들어졌다.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인 종탑을 점거한 키체커도 셀레스테를 온전히 시야에 넣긴 힘들다. 셀레스테는 그를 약 올리듯 얼핏 모습만 보여줬다 재빨리 숨기를 반복했다.

"애먹이는군."

빌의 말에 셀레스테는 깔깔 웃었다. 그녀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종탑을 오른손으로 가리켰다.

"사냥꾼이 답지 않게 화가 좀 났거든."

"지금의 그는 사냥꾼이라기보단 명사수인 병사지. 당장 널 쏘진 않겠지만, 조심해라. 성인군자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면 무슨 일을 할지 몰라."

"북부의 깡패가 연약한 소녀를 죽였습니다. 우리 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겠지. 차라리 도박을 하면 재미있을 텐데. 내 시체는 소녀의 모습일까? 아니면 늑대의 모습일까?"

확신하지 못하니 손댈 수가 없다. 빌은 도끼 자루로 땅바닥을 몇 차례 가볍게 치곤 독백처럼 말했다.

"하나 통고한다."

"그게 용무야?"

"그래."

"음.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 할까?"

"젠장."

"농담인데. 사냥꾼 눈 앞에서 식사하는 취미는 없어. 아깝지만."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이다. 빌은 이 귀신늑대 계집애가 도시 안에서 먹거리를 어떻게 조달하는지 궁금해졌다.

"게다가 주역이 오는 중이야. 난 이만 빠지겠어."

"뭐?"

"당신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그 여자애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셀레스테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홱 돌려 건물 틈 사이로 들어가버렸다. 빌은 화급히 그 뒤를 쫓아 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쫓아가려 해도, 갑옷까지 입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들어갈 수도 없다. 빌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라졌군."

"무슨 뜻이죠?"

아실리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금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인가? 아니다. 우연은 없다. 빌은 셀레스테가 아실리가 가는 길에 서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왜?

빌은 해를 쳐다보았다.

"좀 이르지만, 저녁 식사엔 무리가 없는 시간이군."

"네?"

"내가 사지."

"뭐라고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빌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실리 에소테리아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친 빌이 식사를 제안하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빌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헛수작도 아니다. 이 도시는 아실리의 품 안이나 마찬가지다. 빌이 조리사를 매수한다거나 식당에 암살자를 매복시킬 것이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아실리는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식당은 제가 고르죠."

아실리가 호응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자, 빌은 동의했다.

"좋을 대로."

빌은 도끼를 어깨에 멘 채 아실리의 뒤로 걸었다. 호위병들이 움찔거리자 아실리는 오른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곧, 아실리 일행이 먼저 걷고 빌이 그 뒤를 따르는 묘한 구도가 완성되었다.

빌은 아실리가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셀레스테가 꽤 아쉬워하겠군."



*

식당주인은 대부호가 자신의 저택을 두고 왜 시내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대부호가 반대편의 악명 높은 용병과 함께 왔다는 사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고, 늙은 용병이 "닭 다섯 마리."라 말했을 땐 기어이 공황에 빠졌다.

"주문이 늦는군."

"그러네요."

공황은 때론 즉각적인 행동을 유도한다. 빌과 아실리가 한마디씩 꺼내자 주방은 소란스러워졌다.

둘은 닭고기가 나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호위병들은 둘의 눈치만 살피다 아실리의 눈짓에 옆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가 올라오는 순간 아실리가 입을 열었다.

"용건이 뭐죠?"

"뭐일 것 같나?"

아실리는 빌이 시 참사회의 결정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곧 지워졌다. 빌은 가죽장갑을 벗고는 닭고기를 찢어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 지독하게 의연한 모습이다. 만약 시 참사회의 결정을 안다면, 허세로라도 이런 모습을 보이긴 어렵다.

"잘 모르겠군요."

"뷔독의 서류 이야기다."

"공증문서?"

"그래."

"의외군요. 그게 어쨌단 거죠?"

"종군장로가 알아냈지. 그 문서에 숨겨져 있는 암호를. 결론은 진짜다."

아실리는 피식 웃어버렸다. 빌은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꾸미고 있군."

빌의 지적에 아실리는 당황했다. 지나치게 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어찌 됐든 상관 없을 뿐이에요."

"무력행사인가?"

아실리는 가늘게 눈을 뜨곤 답했다.

"여러 조언자들의 충고를 들어보니, 무력의 사용도 다양한 방법이 있더군요."

빌은 눈 앞의 계집애가 단순한 무력시위를 선택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법들을 떠올렸다. 예를 들면, 뷔독의 암살이라던가. 아니면 빌의 병대에 부릴 수 있는 다른 수작들. 뷔독이 부른 다른 용병대에게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빌에게 이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검은 머리 여자."

빌이 입을 열자 아실리는 긴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빌은 진실을 밝혔다.

"이름은 셀레스테. 귀신늑대다."

간단한 설명으로 빌의 말은 끝났다. 아실리는 잠깐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잠시 후, 빌의 설명이 끝났으며 그것이 진실이라는데 적잖이 놀랐다.

"지금, 도시 안에 귀신늑대가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너와 만나기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도시 밖으로 나가진 않았겠지만."

"같이? 같이라고요?"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둘 다 도시 안에서 난동을 일으키긴 어려우니까."

"지나치게 축약하지 마세요! 상상이 안 가잖아!"

아실리의 마지막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빌은 표정의 변화 없이 대화를 계속했다.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모르겠다만, 충고하겠다. 그녀에게 끌려 다니지 마라. 바보가 아니라면 귀신늑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진 않겠지."

아실리는 식사에 전혀 관심을 두지 못했다. 장사에 쓰던 머리를 재빨리 굴리기 시작한 그녀를 보고 빌은 혼자서 식사를 시작했다. 빌이 첫 조각을 다 먹어 치우자 아실리는 입을 열었다.

"혼란스럽군요. 그 귀신늑대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나 보죠?"

"그것 밖엔 답이 안 나오지. 나도 그렇다."

"그래서 그녀는 제게 접근했고?"

"그래."

어떻게 할 테냐? 빌은 전혀 꺼내지 않은 말이지만, 아실리는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귀신늑대의 뜻대로 움직인다.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멀쩡한 머리가 달렸다면 그런 일은 그 누구도 거부한다. 귀신늑대는 신화시대의 맹수다. 도시 안이 아니라 근처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

셀레스테의 목적이 단순히 빌의 제거일 뿐이라 해도, 그녀를 도와준 사실과 그 정체가 조금이라도 알려졌다간 아실리는 치명타를 입는다. 공동의 목표는 어려운 말이다. 적의 적이 모두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왜 그걸 제게 알려주시는 거죠?"

"셀레스테의 유도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놀아났지."

"네?"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셀레스테의 정체를 네게 까발리는 것뿐이다. 너라면 그 성격과 입장을 고려할 때 나와 그녀 모두를 제압하려고 할 테니까. 나 혼자 당할 순 없지."

물귀신 심리다! 아실리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빌은 설명을 계속했다.

"반대로 셀레스테는 네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간단한 이야기지. 넌 귀신늑대가 도시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는 꼴을 보기 싫으면 날 반드시 죽여야 해. 포로는 없어. 몸값도 없다. 협상은 더더욱 없다. 그런 상황이 필요해. 셀레스테는 너에게 넌지시 압력을 넣어야겠지.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건 그녀 자신보다 내 입이 더 설득력 있다. 둔갑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사실, 당신이 말해도 믿기는 힘든데요? 확실히 그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 정도가 셀레스테에겐 딱 적절하겠지. 믿지 못하겠다면, 유감이다."

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부터 말했지만 전면전을 회피하겠다면 나도 나서지 않겠다. 그럼 귀신늑대는 손 쓸 방법이 없지."

"그리고요? 뷔독이 후견인이란 명목으로 제 돈을 멋대로 쓰는 것을 지켜보라고요?"

"석 달 안에 그 망할 놈을 쫓아버릴 핑계가 있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제 생일날 선물이 거덜난 상회가 되겠죠."

"그게 말처럼 쉽다면 넌 벌써 거지꼴이 되어야 정상이다. 황금의 딸이란 별칭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겠지. 네 생일날, 뷔독에게 적당한 지원금을 쥐어주고 실낙원기사단으로 쫓아버리면 될 일이다."

아실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모두가 싸우지 않고 끝났습니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위해 그녀 자신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적지는 않다. 귀신늑대의 압력을 받아 빌과 정면충돌을 각오하느냐? 아니면 귀신늑대의 참견을 무시하고 다소의 재산을 잃은 뒤 모든 것을 곱게 끝내느냐? 저울질하기 힘든 문제다.

"답을 기다리겠다."

일방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실리는 수북한 닭고기들을 보면서 생각을 곱씹었다.

사실, 이제 와서 물러서기는 좀 늦었다.



*

방어하는 입장이란 것은 참 성가시다. 숙소로 돌아와 방어태세에 대한 보고를 받던 빌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는 거의 모든 나날을 약탈자로서 보냈다. 공격시기도, 노획물의 양도 그가 정했다. 한 번의 약탈이 실패해도 두 번의 약탈이 남는다.

하지만 이번엔 정 반대다. 이번엔 그가 방어적인 입장에 섰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의 목숨이 사라진다. 두 번째는 없다. 하지만 적에겐 기회가 있다. 셀레스테는 황금의 딸이 빌을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깨가 뻐끈하다. 갑옷은 지나치게 무겁다. 투구는 거추장스럽다. 이런 걸 항상 갖추고 다니는 것도 고역이다. 평시라면, 그는 다소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숙소에서 쉴 여유를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셀레스테가 끼어들면 그런 여유는 순식간에 날아가버린다.

황금의 딸. 도시 하나와 민병대를 움직일 수 있는 소녀.

셀레스테는 무대 뒤에 섰다. 그녀를 직접 공격해봤자 소득이 없다. 셀레스테가 죽어서도 소녀의 모습을 한다면, 되려 지그하우스 시에서 단단히 악당으로 찍혀 전면전이 터질 가능성만 높아진다. 결론 하나. 즉흥극의 주역은 황금의 딸이며, 그녀의 선택 하나로 빌의 미래가 결정된다. 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보다 더 처절한 방어자의 입장은 겪어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과했습니까?"

지점장의 질문이었다. 빌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사생아는 사생아다. 새삼스럽게 뭐가 문제인가?"

"아실리는 그 문제엔 유독 뒤끝이 심해서요."

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0명의 미망인과 20명의 사생아를 남긴 중부의 대주교 이야기 따윈 흔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고민이 깊을 테니 내버려둬도 되겠지."

"그렇다면 좋겠습니다만."

"해 진다. 그만 가서 쉬도록."

빌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음을 알아챈 지점장은 곱게 물러섰다.

"예. 혹시 지점에 더 부탁하실 것이라도?"

"병사."

"좀 어렵습니다만."

게드 장로의 모병활동도 별 성과는 없는 듯했다. 오늘 점심 때쯤 도시 밖으로 말을 타고 달려간 그의 밀알그릇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빌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가봐. 나도 이만 쉬겠다."

지점장은 쓴웃음을 짓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빌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독방에서 빌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아들의 소식은 찾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도시에선 희미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역시나 녀석은 북부재단을 따라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부의 왕을 따라야 하니까. 셀레스테는 여전히 시건방졌다. 그녀에게 통고할 말은 의미가 없어졌다. 어쩌면 셀레스테는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빌은 문득 셀레스테의 정체를 까발리고 뷔독과 아실리가 힘을 합쳐 그녀를 박살낸다는 망상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빌은 웃어버렸다. 북부의 왕이 즉위할 것이다. 조만간 소집될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그걸 핑계로 이 망할 도시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뷔독을 설득해서, 왕의 봉신이 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잠자리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온갖 생각을 하던 빌은 지친 몸의 유혹에 따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죽은 자의 왕이여!

빌은 눈을 떴다. 잠을 자다 깬다는 불쾌한 경험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장로가 아니더라도 벌컥 화를 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빌은 화를 내지 못했다. 귀가 멍멍했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의 방 한쪽이 사라져버렸다.

"포격이다!"

한 병사의 비명이 빌의 고막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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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살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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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인연살해 3부: 미친 빌과 졸업논문 - 서막 +12 11.12.03 3,262 84 10쪽
35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종막 +17 11.11.26 3,325 94 7쪽
34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4 +13 11.11.19 3,256 90 20쪽
33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3 +12 11.11.12 3,277 86 16쪽
32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2 +7 11.11.05 3,333 79 17쪽
31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1 +11 11.10.09 3,406 98 19쪽
30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0 +8 11.10.01 3,476 91 26쪽
29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9 +8 11.09.25 3,576 84 19쪽
28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8 (복구 완료!) +3 11.09.25 3,368 77 12쪽
27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7 +1 11.09.25 3,330 73 18쪽
»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6 +2 11.09.25 3,518 78 22쪽
25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5 +3 11.09.25 3,447 80 16쪽
24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4 +5 11.09.25 3,615 86 12쪽
23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3 +3 11.09.25 3,881 91 27쪽
22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2 +3 11.09.25 3,728 80 10쪽
21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1 +3 11.09.25 4,237 85 12쪽
20 인연살해: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서막 +4 11.09.25 4,103 86 5쪽
1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종막 +14 11.09.25 4,055 98 13쪽
1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7 +3 11.09.25 3,716 92 6쪽
1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3 11.09.25 4,175 79 17쪽
16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5 +7 11.09.25 3,770 100 20쪽
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8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4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2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1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1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6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1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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