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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 공사판

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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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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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인연살해 2부: 미친 빌과 황금의 딸 - 9

DUMMY

감옥 속에서 빌은 부하들의 옆 감방에 갇혔다. 그래서 부하들은 빌의 목소리만 경청이 가능했다.

"저기, 대장? 자꾸 웃지 마세요. 무섭다니까요."

틸리는 조심스럽게 빌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빌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부하들은 빌이 드디어 제대로 미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았다. 대장이 저토록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틸리는 한숨을 내쉰 다음 불특정다수를 향해 질문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일단 시론도, 마누크도, 키체커도 다 달아났으니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지 않나?"

빌의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대장이 웃음을 멈추고 답변을 주자 틸리는 이를 매우 반겼다. 미친 대장이 미친 빌로 돌아왔다! 어라?

"대장, 안 미친 겁니까?"

"어떤 의미로 묻는 건지 내가 반문해도 되겠나?"

틸리는 우선 기도부터 올렸다.

"어제의 그 대장 맞군요. 신이여, 감사합니다. 일단, 대장은 반문 안 하셔도 됩니다. 답만 주세요."

"안 미쳤다."

"좋습니다. 이제 질문하죠. 어떻게 예상 하십니까?"

빌이 답변했다.

"먼저 배로 돌아간 인원과, 그 산탄 세례 속에서 달아난 녀석들까지 계산해보면 아직 우리의 전력은 온전한 편이다."

"2할이나 날아갔는데요."

"나머지로도 충분해. 게드 장로도, 키체커도, 마누크도, 시론도 다 있어. 그리고 중요한 것을 하나 말해주지. 귀신늑대는 아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셀레스테의 정체도, 첫 대결의 결말도 모르는 틸리는 빌의 말에서 온갖 정보를 걸러내야 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안 죽었어요?"

"안 죽었다."

틸리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시론은 날 배신하지 못해."

"예?"

"귀신늑대의 목표는 나다. 그녀는 만에 하나라도 병대가 나를 구출하려는 것을 막아야 하지.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귀신늑대가 여자였군요. 젠장. 어쩐지 독하더라니.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몰라."

"대장? 역시 미친 거죠?"

"시덥잖은 소리 집어치워라. 시론은 바보가 아니야. 그러니 내가 처형되든 안 되든, 그녀가 병대를 부수러 직접 오든 말든 일단 병대는 유지한다. 그게 여러모로 유리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병대가 와해되게 놔두는 것보단 말이야. 섣불리 날 포기하고 해산했다간 귀신늑대의 손 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어. 날 구출할 마음이 없다고 주장해도 귀신늑대는 안 믿을 테니까. 오히려 의심하겠지. 뿔뿔이 흩어져서 소수정예로 날 구출할 생각이라고."

틸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론이 귀신늑대의 존재를 알기에, 빌의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병대를 온전히 유지할 능력과 운이 따른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지만.

"오, 그거 말이 되는데요. 그 다음에는요?"

"이 근방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다니겠지. 부족해진 물자를 보충하고, 지그하우스를 위협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해. 내가 옛날에 한 도시를 공략했을 때처럼."

"이런, 젠장.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이 틸리가 미친 빌을 구하기 위해 지그하우스를 공략했다고 자랑할 둘도 없는 기회잖아요? 아깝다!"

틸리가 창살을 붙든 채 장난스럽게 탄식했다. 그러나 빌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말하지. 나도 예상이 안 가."

"예?"

"내 병대가 도시를 공략한다는 소문이 돌면 온갖 잡것들이 엮이겠지. 하지만 안 엮일 수도 있어. 내가 그 자리에 없으니까. 연맹 용병이 아실리에게 욕 좀 먹었다고 들었다. 그들이 우리랑 연합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안 할 수도 있어. 동부 기병도 마찬가지야. 앞일은 알 수 없어. 그들까지 영합할 수 있는지는, 결국 시론에게 달린 셈이지. 시론이 제정신이라면 그 둘과 접촉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실리도 예상하겠죠?"

"그러니 문제다. 군대는 커지는 만큼 소모가 심해. 난 시론이 300명의 연맹용병을, 그리고 탐욕스러운 동부 기병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틸리는 신음을 흘렸다.

"만약 시론 부대장이 한계에 달해서 대장을 포기한다면, 병대를 어디론가 데려가면 어떻게 합니까?"

"되도록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그랬다간 북부의 왕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온전히 살아남긴 힘들겠지. 설령 살아남아도 왕이 나 하나를 위해 협상에 나서줄까? 아니야. 지그하우스 놈들이 어떻게 믿든 간에, 겨우 나 하나와 포로 다섯에 도시를 온전히 살려둘 가치까진 없어. 내가 잘 알아. 왕을 봤으니까."

빌은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일단 조치는 취해놨어. 이젠 앞일을 기다려봐야 한다.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는 모르니까."

물론, 세상사는 언제나 우두머리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

사소한 지시 몇 가지를 더 내리고, 주변 사람들을 물리친 채 아실리는 시내를 걸었다. 목적지가 없는 걸음이었다. 무작정 걷다 보면 셀레스테가 접근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에 검은 실이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묘한 광택을 발하는, 좁은 골목길의 입구를 가로지른 검은 머리카락. 양 끝은 허름한 건물들의 벽에서 튀어나온 못대가리에 묶였고, 그 높이는 아실리의 눈 높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실리는 그 머리카락을 잡아 뜯은 다음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녀는 아침 햇빛이 들어서는 곳까지만 들어가 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이 좋아졌네?"

"생각보다 눈에 띄는 표식이었어요."

아실리는 선선히 대답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화급히 올려다봐서 셀레스테를 기분 좋게 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3층짜리 건물의 지붕 위에 걸터앉은 셀레스테의 모습이 아실리의 눈에 들어왔다. 셀레스테는 아실리를 내려다보면서 또 다른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장난스레 흔들고 있었다.

"축하한다고 해줄까?"

"별로 반갑진 않은 인삿말이에요."

"그래? 뭐, 좋아. 난 상관 없어. 이제 협조의 대가를 받고 싶은데, 빌은 언제 줄래?"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안달이 났구나. 아실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때가 되니 말하기가 어렵다. 상대는 귀신늑대다.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를 당신에게 넘겨줄 수 있죠? 그는 감옥에 있어요."

아실리는 셀레스테가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뼈다귀 본 개와 같은 눈빛을 여전히 보낼 뿐이었다.

"그럼 너희가 죽이려고? 언제 죽이게?"

"모르죠. 일단 확보는 해놨으니까 느긋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겠죠."

"안 죽일 수도 있어?"

"그럴 확률이 적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그건 곤란한데. 그냥 나한테 넘겨."

"할 수 없어요."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셀레스테는 다리를 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살펴본 건데, 권력엔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없어. 어려운 것이 있을 뿐이지. 안 그래?"

아실리는 답변하지 않았다. 셀레스테의 말이 맞았다. 부담이 크긴 하지만, 아실리는 빌의 제거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관철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아실리는 셀레스테의 요구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내게 명령하지 마. 축생."

셀레스테는 생각 밖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내가 잘못 들었니?"

"전혀."

셀레스테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면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웃거렸다. 아실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건 시 의회와 내 문제야. 당신은 미친 빌을 제압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어. 당신에겐 빌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가 없지. 늑대라면 잘 알 것 같은데. 남의 사냥감에 침 흘려도 되는 거야?"

"빌은 내 사냥감이야."

"잡은 건 나야. 그리고 당신에게 뺏기지 않겠어. 이젠 좀 이해가 돼?"

아실리의 말에 셀레스테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잡다한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냉정한 사냥의 법칙만이 남았다.

"그럼 당신에게서 빌을 뺏어야겠네."

"그런 셈이지."

"흥. 얄궂네."

셀레스테는 홱 몸을 날려 아실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실리는 바짝 긴장했지만, 셀레스테는 목소리만 남겨두었다.

"두고 보자고."



*

3척의 배가 강변에 섰다. 다치고 지친 병사들은 뭍으로 뛰어내렸다. 시론도 그 중 하나였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강물로 뛰어든 그는 힘겹게 물을 헤치고 강변으로 나오자마자 땅바닥을 짚었다. 숨을 몰아쉰 그는 지그하우스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이젠 괜찮다. 시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에게 호평 받기 힘들었다. 큰 문제가 여기저기 있었다. 키체커와 게드 장로는 아직 합류하지 못했다. 그나마 게드 장로는 밀알그릇을 통해 일방적이나마 소식을 들을 수 있으나, 키체커는 신호탄을 몇 차례 쏜 후 완전히 연락두절 상태다. 포로가 되진 않았으리라 믿을 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들이 대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제기랄."

시론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흙 묻은 양손을 바지에 닦아냈다. 우선 병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막았다. 군선 3척은 온전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병대는 자산이다. 적어도 전투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 자산.

시론은 수풀 앞에 쓰러진 나무 위에 턱 걸터 앉았다. 이제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마누크와 몇몇 고참병이 시론에게 다가왔다. 간부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격이 높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말 없이 시론 앞에 섰다. 시론은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질문은 눈빛으로 다가왔다. 시론은 대답했다.

"우선 병대를 유지한다."

"대장이 없잖아."

즉각 나온 고참병의 반론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시론은 세상을 향해 욕을 하고 싶어졌다.

"대장을 포기하면 어떨까?"

"개소리!"

다른 고참병이 말을 꺼내자마자 시론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붙잡아 패대기쳤다. 고참병이 얼이 빠진 채 시론을 올려다보자, 그는 쓸개를 뱉어내는 심정으로 말했다.

"멍청한 소리 하지도 마. 탈영병이 나올 테니까. 너희들이 잊은 것 같은데, 북부재단과 우리 거래처의 모든 장부와 계좌는 대장 명의로 되어 있어. 우린 대장의 돈과 신용 없이는 1주일도 못 버틴다고."

시론은 일부러 '이 병대'가 아니라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효과가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론은 분위기에 만족하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 우리에겐 적이 너무 많아. 이대로 대장을 포기하거나 해산했다간 오만 깡패들이 우릴 죽이려고 달려들 거야. 우리가 이제껏 떨친 악명이 역으로 목을 조르게 됐다고. 차라리 빌의 명성을 빌려 지그하우스랑 대립각을 세우는 게 이상적이야."

"하지만 졌잖아? 게다가 우린 1주일도 못 버틴다며?"

"대장은 현명해. 뷔독부터 빼돌렸으니까. 명분은 있어. 뷔독의 복권과 대장의 구출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지그하우스에도 북부재단은 있어. 우리가 대장을 구출하기로 결정하면, 대장은 북부재단을 통해 온갖 서명을 해줄 거야. 약탈도 있지. 그래, 그때처럼."

"병력은?"

"연맹용병과 동부 기병. 그리고 심심해 죽으려 드는 북부의 모든 깡패들."

"빌이 없는데 놈들이 모일까?"

"뭐든 해봐야 알아. 말은 무사하지?"

"각 배에 1필 정도."

"좋아. 정찰병을 보내고 초병을 세워. 나도 생각 좀 해볼 테니까, 다시 명령할 때까진 다들 좀 쉬고 있어. 애들 단속 잘 하고."

마누크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뭔가 더 말해보려던 고참병들은 마누크가 먼저 움직이자 침묵했다. 분위기는 시론이 주도했고, 마누크가 이끌었다. 여기서 거스르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그들이 흩어지자 시론은 슬쩍 웃었다. 마누크는 얕보이는 걸 싫어한다. 셀레스테와의 술 대결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만큼.

"이제 숨 좀 쉬어도 돼."

시론이 말하자마자 숲 속 그늘 아래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소녀의 새된 숨소리였다. 조금 전까지는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시론 외엔 아무도 못 들었을.

"숨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셀레스테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시론이 등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옷은 전부 어깨에 올려둔 전라의 상태였다.

"일단 옷부터 좀 입지?"

"당신이랑 이야기 좀 하고."

"나도 꽤 이성적인 사람이지. 우릴 작살내려던 여자가 무력한 모습으로 접근할 정도의 이야기라면, 도끼부터 들이대지 않아."

"그래? 그럼 나도 인간의 예의를 좀 챙겨주지."

셀레스테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론은 이대로 덤벼서 셀레스테의 머리통에 쇳덩이를 박는 망상을 뿌리치진 못했다.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도 드물테니까. 그러나 셀레스테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공격하는 건 지나치게 성급한 행동이다. 그녀가 옷을 다 입자 시론은 도끼자루 잡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뛰어왔나 보군."

"응. 당신들 따라잡으려고. 하룻밤 사이에 멀리도 왔네."

"안 죽으려고 열심히 노를 저었거든. 그래서, 용무는 뭐냐?"

"결론부터 말해도 돼?"

"해."

셀레스테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실리가 빌을 나한테 안 준대."

시론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냐?"

"응?"

"그건 나도 예상했거든. 그 황금의 딸이 왜 너한테 빌을 양보하겠냐? 어젯밤 죽고 다친 건 순전히 아실리네 사람들인데?"

"사냥에서 얼마나 공헌했든 사냥감은 모두가 먹어."

"빌은 죽지도 않았고, 분해하지도 않아. 너, 바보냐?"

"쳇."

셀레스테는 혀를 차고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늑대의 사냥도 맛난 부위는 모조리 우두머리 차지다. 거기다, 이번 싸움에서 셀레스테의 비중은 분명 한 없이 작았다. 도시 안에서 펼쳐진 일이라 둔갑을 삼가한 탓이었다. 그녀의 토라진 모습에 시론은 웃어버릴 뻔했다.

"그래서, 나한테 뭘 기대하고 온 거냐?"

"그냥. 알려주려고."

"그게 다야?"

"아실리가 빌을 내게 넘기지 않거나 죽이질 않는다면, 댁들이 빌을 구출해야 내가 어떻게든 할 거 아냐. 그래서 댁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 하나를 전해준 것뿐이야."

"세심하기도 하셔라. 너, 그런 식으로 사람들 조종하려고 했다간 혼난다. 아니, 이미 골탕 좀 먹었나? 아실리에게 축출 당했으니."

"비꼬지 마."

셀레스테는 발걸음을 뗐다. 그녀가 가버리려는 것을 깨달은 시론은 잔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보낼까? 아니, 그래선 안 되지. 이렇게 되면 셀레스테는 적의 적이잖아?

저것도 나름 전력인데.

"잠깐만."

시론이 불러 세우자 셀레스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시론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셀레스테가 미간을 좁히고 인상을 쓰자 그제야 시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친 퀸의 체스라는 걸 아나?"

"뭐니, 그거."

"생긴지 오래 안 된 체스 규칙이지. 퀸이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대각선으로도 움직여. 그것도 체스판의 끝까지."

"체스엔 관심 없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왜?"

"난 체스를 제대로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 규칙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규칙으로 놀아보고 싶군."

셀레스테는 뜬금없고 생소한 정보 속에서 해괴한 논리를 이끌어냈다.

"당신이 미쳤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시론은 웃음을 터뜨렸다. 셀레스테의 표정이 더욱 불편해졌다. 비웃는 자가 계산한 웃음이기 때문이었다. 시론은 한참을 웃은 다음에 셀레스테를 놀렸다.

"너 귀신늑대 맞냐? 비유도 못 알아 먹으니까 넌 대장에게 맨날 지는 거야."

"듣도 보도 못한 걸로 비유하면 어떤 귀신늑대도 못 알아먹어."

셀레스테의 항변에도 시론은 여전히 웃었다. 동시에, 그는 안도의 의미가 다분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흥미가 동했다. 시론은 다시 말했다. 직설적으로.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

셀레스테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직설적으로 답했다.

"당신 정말 미쳤지?"

"냉정하게 생각해봐. 아실리와 지그하우스는 이대로 대장을 계속 억류하려고 들 거야. 그건 빌에게도, 병대에게도, 너에게도 좋은 현상이 아니야."

빌의 포로 신세는 처형이 확정되든 말든 그 자신에게도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다. 빌을 잃은 병대는 오래 가지 못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감옥에 갇힌 빌은 셀레스테가 손댈 수 없다. 빌이 죽든 살든, 각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면 우선 도시에서 빌을 빼내야 한다. 셀레스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협력하자고? 뭔가 이상한데? 난 빌이 죽기만 해도 되는데?"

"허세 부리지 마라. 넌 이미 아실리에게 축출 당했어. 익인과 협력할 때와는 경우가 다르지. 이제 와서 아실리가 빌을 처형해봤자 그건 네 복수가 아니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셀레스테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녀는 시론에게 등을 보인 채 한참 끙끙 앓았다. 그러나 대답은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론을 돌아보았다.

"내가 뭘하면 되는데?"

시론은 큰 소리로 빌의 이름을 외치고 싶어졌다. 대장, 내가 해냈어! 그는 환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대신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그 표정에 셀레스테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얘 대체 왜 이래? 당황하는 그녀를 보고 시론은 쾌감까지 느꼈다. 내가 귀신늑대를 놀려 먹고 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시론은 첫번째 요구를 말했다.

"첫번째. 잠깐만 기다려."

셀레스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배 안, 배 밖에 멋대로 널부러진 패잔병들은 시론이 걸어오자 시선만 돌렸다. 축 늘어진 그들 가운데로 걸어간 시론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주목!"

고막을 때린 외침에, 시론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병사들까지 반응했다. 마침내 병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시론은 다시 한번 외쳤다.

"주목!"

부상자의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론은 만족했다. 그는 자신이 결정한 바를 모두에게 선포했다.

"얕잡아 보여놓고 가만 있으면 북부 놈이 아니다! 도끼를 들어! 일어나! 일어나라고! 대장을 구출한다!"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시론은 거의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받아 처먹은 게 있다면, 일어나라, 이 잡것들아!"


작가의말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놓고 투닥투닥 싸웁니다.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딱 사랑싸움 같긴 한데.

옛날엔 체스 규칙이 달랐답니다. 미친 퀸이라니 중세인들도 센스 개쩌는 듯.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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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5 11.09.25 4,638 79 17쪽
14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3 +4 11.09.25 4,064 84 17쪽
13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6 11.09.25 5,103 96 15쪽
12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6 11.09.25 4,264 106 12쪽
11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0 +8 11.09.25 4,442 99 11쪽
10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9 +5 11.09.25 4,491 102 22쪽
9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8 +6 11.09.25 4,571 116 13쪽
8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4 11.09.25 5,046 113 23쪽
7 인연살해: 미친 빌과 귀신늑대 - 6 +8 11.09.20 5,041 1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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