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강호-운남편[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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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약향(藥香)에 눈을 떴다. 낯선 곳이었다. 온몸이 따뜻했다. 어린 천강은 커다란 약탕에 들어가 있었다. 팔을 들고 나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불안도 기대도 없었다.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만 지켜볼 뿐이다. 기절은 잠에 속하지 않는 듯했다.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던 것과는 상관없이 심한 피곤이 몰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누군가 자신의 뺨을 톡톡 치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의 몸은 여전히 약탕 속에 있었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천강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재를 탕기(湯器) 안에 더 풀어놓고는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허약해진 몸에 깃든 독소는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며칠을 약탕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정상적인 운신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중년인은 천강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천강은 지금까지 겪은 일을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집에서 고용인으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숙식이 해결된다는데 마다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천강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지 양이라는 성만 알려주었다. 천강은 그 집에 있는 동안 중년인을 양대인이라고 칭했다. 양대인에게는 천강과 동갑인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녕이라고 했다. 궁벽한 산촌에 부녀 둘만 기거하던 터라 또래의 말상대가 들어왔다는 것이 기뻤으리라. 그녀는 무공을 익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천강과 붙어 있었다. 천 강도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계속 자신과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본 벌레며, 샘 옆에 핀 꽃이며, 실상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릴 일들을 그녀는 즐겁게 재잘거렸다.
어렴풋하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덮인 날이 있었다. 천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를 들고 약제실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전 그가 구조된 첫날 약탕에 빠져 있던 그 방이었다. 그때의 약탕은 아직도 짙은 향내를 풍기며 은근한 불길에 점점 졸아들고 있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가 한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보아 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비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 옆에 나란히 앉고는 손을 올려 어깨에 대었다. 울지 말라는 표시였다. 그녀는 그것에 자극받아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난감해진 천강은 어찌할 줄을 몰라 계속 처다만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천강을 올려보던 그녀가 갑자기 그에게 입을 맞춰왔다. 깜짝 놀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다시 얼굴을 감싼 채 무릎에 파묻었다. 어깨는 전보다 더 심하게 들썩였다. 천강은 그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양대인이 그녀를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가슴 한쪽이 시린 느낌을 받으면서도 천강은 축하를 해 주었다. 그녀는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고 천강을 밀쳐냈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무공을 익혔다. 그는 거의 날아가다시피 하여 약장에 처박혔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애써 외면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진하달지 멍청하달지.”
“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마!”
취금의 비아냥에 조금 울컥했다.
“휴우, 대형은 참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여자 대하는 방법이 별로 달라진 게 없네요. 아니 그때부터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효기가 거들고 나왔다. 그녀 자신도 천강에게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다.
“하하아……. 듣고 싶어한 건 너희이잖아. 이십 년도 더 된 일을 지금 와서 어쩌라구.”
두 여인은 큭큭 거리면서 ‘계속’이라고 외쳤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다음 날, 양대인은 출타하고 둘만 남았다. 그녀는 천강이 일을 하는 옆으로 와 정혼자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부모들끼리의 정략결혼. 예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나이는 그녀보다 대여섯 살이 많았다. 하지만, 잘난 체하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오만함이 그녀의 마음을 닫게 하였다. 그의 태도는 그녀를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듯했다고 한다. 천강은 그래도 어른들이 정한 일인데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양녕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곤란했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양대인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고지식하다 할 수 있었지만 이럴 때는 양대인을 대변하는 게 맞는 선택 같았다.
양녕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했다. 열두어 살의 아이에게 정혼이란 것은 너무나 큰 압박이었다. 그것도 상대에 심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면, 압박의 정도는 더욱 심해질 터였다. 만약 그녀의 모친이 살아 있었다면 얘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현실의 양대인은 자상하기는 했지만, 여인의 섬세함을 갖출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정혼자의 손길을 피해 멀리 도망쳐 한 마을에 정착하자. 자신은 살림을 하고 천강은 밖에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겠다는 꿈같은 얘기를 계속했다. 문득 천강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조용히 손을 들어 양녕의 뺨에 손을 대었다. 눈물은 채 마르지 않고 있었다. 계속 흐르고 있었던 탓이다.
냉소와 함께 문짝이 부서져 나갔다.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다. 아직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전신의 탄탄한 체격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기세는 능히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했다. 양녕의 정혼자였다. 그녀를 보러 이 산중까지 걸음을 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사려 한 나름의 배려였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원래의 영준한 모습이 전부 사라졌다. 한걸음에 달려와 천강을 낚아채 일격을 날렸다.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양녕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이 정혼자의 화를 더 부채질했다. 손이 올라갔다. 막 영녕을 내려치는 찰라 작은 채반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별 위력은 없었다. 천강이 급한 김에 손에 잡히는 채반을 잡아 날린 것이다. 안에 있던 말린 약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어이없는 웃음 지었다. 천강은 다리를 절면서도 양녕의 앞에 섰다. 정혼자는 그 모습을 가소롭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점점 살기가 짙어졌다. 순간 천강의 눈앞에 붉은빛이 퍼졌다. 달아나라는 양녕의 외침이 들렸다. 천강은 뒤로 물러서며 앞을 바라보았다. 양녕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 단도에서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피의 주인공은 정혼자였다. 그 증거로 그의 미간 사이로 긴 생채기가 났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 고함을 지르며 양팔을 휘둘렀다. 주위의 집기가 모두 쓰러졌다. 약탕이 있던 곳에서 불길이 솟았다. 삽시간에 약제실은 짙은 연기로 가득 찼다. 양녕은 정혼자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그의 등 뒤로 팔을 돌려 깍지를 끼었다. 입으로는 계속 달아나라고 소리쳤다. 천강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양녕의 외침과 정혼자의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찬 고함이 천강의 귓전을 때렸다. 공포로 금세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마당으로 나왔을 때에는 이미 불길이 지붕까지 번져 있었다. 바짝 마른 나무는 화마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겁이 났다. 모든 게 자기 잘못으로 느껴졌다. 양대인이 이 모습을 본다면 자신을 패 죽일 것이다. 무엇보다 정혼자가 당장에라도 튀어나와 무시무시한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안에 있는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구하려 들어가고 싶었으나 불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강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에 섞인 숯검정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는 몸을 돌려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가능한 이곳과 멀리 떨어지려 안간힘을 썼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두 사람 죽었나요?”
“아마도.”
천강은 고개를 숙였다. 새삼 죄책감이 들었다. 취금이 입을 움직이려다 멈췄다. 눈동자가 떨리며 갈등의 모습을 보이다 곧 평정을 되찾았다. 천강은 계속 땅만 보고 있었고, 효기는 안타까움에 그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취금이 따져 물었다.
“아마 내 스스로 기억을 덮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정말 얼마 전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니까.”
세 사람 다 입맛이 썼다. 들춰서는 안 될 일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효기가 분위기를 바꿨다. 마가두에게서 얻은 차에 신선한 수유(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섞어 만든 수유차를 내왔다. 함께 나온 돼지고기는 간이 잘 배어 고소한 수유차와 잘 어울렸다. 따뜻한 차가 몸속으로 들어가지 굳어진 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조금은 녹여 주었다.
“근데 대형은 말야…….”
“응?”
“그렇게 산속을 뛰어다니는 게 팔자인가 봐.”
“그러게나 말이다. 휴우.”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단리가 합세했다. 효기는 수유차 한잔을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화제는 예비 새신랑으로 옮겨갔다. 이렇게나마 찜찜한 기분을 무마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새신랑의 들뜬 분위기를 전혀 엿볼 수 없는 단리의 담담한 답변이 두 여인의 교소(嬌笑)속에서 이어졌다.
마방은 별 탈 없이 곤명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소금을 차로 바꾸고 하루를 쉰 후 바로 대리를 향해 출발했다. 이전까지의 여정과 달라진 것이라곤 차 맛이 조금 더 좋아진 것과 말 한 마리가 다리에 상처를 입어 치료를 했다는 것 정도였다.
효기와 원숭이는 친해질 대로 친해져 마방의 선두를 끄는 말의 머리를 떠나 그녀의 어깨에서 망을 볼 정도로 친해졌다. 스무날 남짓의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네 사람과 마가두는 이해(洱海: 대리 북서쪽의 큰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천강을 호위하기 위해 마바리꾼이 되었던 부하들은 다시 은밀하게 대리의 군중 속으로 스며든지 오래였다.
단리는 이해로 방향을 잡았다. 호수에는 수많은 고깃배가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잠시 호반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일각 정도가 흘렀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내공을 실은 그 휘파람은 멀리까지 퍼졌다. 잠시 후 배 한 척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주위로는 배를 호위하듯 가마우지 떼가 도열해 있었다.
배에 탄 자는 여인이었다. 큰 키에 곧은 체형은 흡사 남자를 연상케 했다. 그렇다고 선이 거칠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인 특유의 자태도 진하게 배어 나왔다.
“아리(阿理), 넌 오지 말았어야 했다.”
“역시 그랬던 거군.”
단리와 이 여인의 뜻 모를 대화에 다른 세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여인은 다시 배를 저어 호심으로 향했다. 가마우지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 작가의말
한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마무리를 해야할 때지만 별다를게 없네요.;;;;
다가오는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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