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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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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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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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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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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35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DUMMY

135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그래서 내가 무모하다고 했잖아!”


리친스 왕국 동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숲.

숲 입구에서 다섯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머리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라나가 씩씩 화내며,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어댔다.


“아무런 계획 없이 들어가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꽁지 빠지게 도망쳐 나오는 게 작전이야?”


라나가 충분히 불만을 표할 만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 그들은 자이언트 웜의 군락에 들어갔다.

신중히 움직여야 하지 않냐는 라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들은 인공 습지 안에서 토벌 대상과 마주쳤다.

그리고 꽁무니 뺐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도망쳤다.


“하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저렇게 거대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브레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전 그들은 상대가 아무리 무서운 마물이래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쪽은 무려 최정예 모험가만 넷이다. 습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놈을 해치울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태도로 마주한 토벌 대상은, 소문이 절제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상대의 전력을 잘 못 파악한 것이, 첫 토벌 시도가 실패한 요인이었다.

섣부르게 행동한 감도 적잖이 있었다.


“저는 겨우 집채만 할 줄 알았어요.”

“나도 그리 생각했네. 한데 직접 마주친 그것은 마치 거대한 용을 본 듯하였네.”


그것과 마주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언젠가 보았던 골렘 못지않게 위압감을 주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그게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럿이다.

괜히 오기로 싸우지 않고 후퇴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라나가 흙탕물을 뒤집어썼지만···. 그 외에 피해 본 부분은 없이 무사히 숲 밖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정찰을 다녀온 뒤에 들어가자고 말했잖아!”

“으음. 그건 변명할 말이 없군.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실책일세.”


물론 꽁지 빠지게 도망칠 필요 없이, 첫 시도에 위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작전을 고민했다.


“우선 아까처럼 무작정 쳐들어가는 절대 안 돼!”


라나가 강경하게 의견을 밀어붙였다.

그녀의 의견으로 감행 돌파는 일단 보류되었다.


“하면 어떡하겠나? 저만한 수를 모조리 박멸시킬 수단이 있는가?”

“제일 좋은 방법이라면 마법이겠죠. 메테오 같은 거로 날려 버리면 좋을 텐데요.”

“캣니스여. 허무맹랑한 말을 자연스레 하는군. 그 정도의 상위 마법은 마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걸세.”

“그렇죠···. 그러면 큰일이네요. 우리는 먼 거리에서 피해를 줄 수 있는 수단이 없는데요?”


침묵.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아무 말 않지만 한 가지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쓰레기 같은 파티다. 어떻게 격투가만 넷이지?”


끝내 라나가 아픈 부분을 찔렀다.

격투가 넷에, 사제 한 명.

상단 호위 임무에도 안 넣어줄 최악의 파티 조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의 우상과 함께 활동할 걸 그랬군.”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일이 효율적이었어요. 문지기님과 릴리트를 산 쪽으로 보낸 게 맞는 판단이에요.”

“맞아 아저씨. 캣니스 말대로긴 해. 그런데 하필 보낸 게 그 두 사람이라서 신경 쓰이긴 한다.”


더 거리가 먼 곳에 두 사람을 보냈다.

시간과 능력을 고려하여 분배한 전력이었다.

이게 최선이었고 이보다 나은 방안은 없었을 것이다.


“···별일 없을 거예요. 무슨 일 있어도 릴리트가 기억을 지울 테니까요?”


뒤늦게 라나의 말을 듣고 신경 쓰이는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캣니스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흘러가듯 뱉은 말이 라나의 표정을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이미 기억을 지우는 단계에서 크게 사고 친 거 아니야?”

“아무도 기억 못 하면 사고는 없는 일이 되니까요.”


라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 이 말이 한때 용사 파티 구성원인 성직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어쨌든 그쪽은 걱정하지 말죠.”


그쪽은 자신들보다 잘할 테니, 그들 앞에 놓인 불씨부터 신경 쓰기로 했다.

이것도 맞는 말이라서 다시 머리를 모았다.


“우선, 공격의 유효성을 확인해봐야겠네요. 게르드 님, 게이로드 님. 놈을 한 대 쳤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으음~ 몰캉했지~”

“조금만 더 세게 치면 확실히 뚫었을 거야~”

“그러면 격투가의 공격도 유효하다는 거네요. 따로 무기를 조달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덩치가 크니까~”

“우리와 브레드는 몰라도, 라나 짱은 필요할 거야~”

“그러면 라나 님은 폐가에서 철붙이를 챙겨가도록 하죠.”


캣니스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해가며 세부적인 작전을 수정했다.

본인들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 유리한 지를 효율적으로 응용했다.

꽤 능숙하게 파티를 이끄는 모습에 라나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왕국에서 부른 토벌대를 모조리 몰살시킨 만큼 방심은 안 되겠죠. 아마도 서넛이라고 보기보다는 수십까지도 있으리라고 경계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처음 막무가내로 돌격하기로 한 아이치고는 생각이 깊다.

상대의 전력과 본인들의 기량 차이. 공격의 유효와 지형적 특성까지 모두 생각한다.

나이가 있는 연장자로서 계획에 끼어들려고 하지만. 계획에는 빈틈이 없고 딱히 흠잡을 구석도 없었다.

지금껏 그저 파티에 묻혀가는 사제직인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토벌을 이끄는 건 캣니스였다.


“놀라운가?”

“예?”

“생각보다 모험가다워서 놀랐는지 물었네.”

“네··· 뭐···.”


라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저 아이는 생각 이상으로 실전에 능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과거의 본인과 겹쳐 보인다. 제 실력을 맹신하여 잘못된 선택을 택한 자신과 확실히 달랐다.

오히려 리더로써의 자질이 자신보다 더 뛰어났다.


“라나 님?”

“어?”


잠깐 한눈판 사이에 캣니스의 볼이 볼록해졌다.

눈빛은 한눈판 라나를 향하고 있었다.


“집중해주세요, 라나 님. 솔직히 이번에는 무리한 싸움이 될 거라고요.”

“어. 어. 그럴게. 미안해. 집중할 테니 다시 말해줘.”

“알겠어요. 이번엔 제대로 들으세요. 먼저 습지에 들어가면···”


브레드는 미소 지었다.

캣니스에게 절절매는 라나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리더의 나이가 어려도 배울 점은 많다.

라나가 몰래 원정을 쫓아오면서까지 바라던 경험을 오늘 쌓는 것이다.


“브레드 님. 제가 무슨 말 했는지 들었어요?”

“미안하네. 위치 선정에 대한 부분까지 들었네.”

“그 정도면 다 들은 거예요. 그래서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데요···.”


작전 시간은 끝. 이제 실전이다.

어두운 숲을 가로질러서 도착한 습지에는 보이지 않는 악몽이 꿈틀거렸다.


“홀리 라이트.”


캣니스의 품에서 작은 빛이 떠올랐다.

곧 습지 한가운데로 날아들더니 한순간에 팽창했다.

마치 태양이 드는 것 같은 밝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자이언트 웜들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자. 여러분. 제가 뭐라고 했죠?”

“죽을 거 같으면 손은 잘라 주고 죽으라고 했네.”


세 격투가의 몸에 푸른 마나가 피어올랐다. 라나는 동물 다리도 거뜬히 자를 거대한 마체테를 들었다.

캣니스는 빛의 구체를 온 숲을 다 뒤덮을 정도로 키웠다.


“잊지 마세요. 죽음을 겁먹지 마세요. 그렇게만 하면 저는 여러분을 죽지 않게 두겠어요.”


캣니스의 푸른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 말을 셀레브리디 님의 이름 아래 맹세할게요.”



*****



리친스 왕국의 왕성.

맨 꼭대기 층에 왕을 위해 마련된 사적인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왕은 휴식을 취하고, 밤손님을 맞이하며, 비밀스러운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이날도 리친스의 왕 리처드는 긴 밤의 휴식을 끝냈다.

잠자리가 흉흉한 요즘 같지 않게 오랜만에 편안한 밤을 보냈다.

이 일을 표현하기를. 반갑고도 상쾌하지만 낯선 기분.

리처드가 묘한 감상으로 아침을 맞이하던 그때였다.


“···옷 좀 입으시죠. 아니면 저도 공적인 집무실로 출근하게 하든지요.”

“아. 왔구나? 올리비아. 잘됐다.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왕궁의 수석 서기. 서기관 올리비아 메일.

그녀는 리처드가 왕에 오르기 전부터 함께하던 아카데미 동창이다.


“거절합니다. 시종들에게 백작가의 미혼 자녀가 벌거벗은 왕과 함께 있었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건 사절입니다.”

“에이. 누가 나랑 올리비아를 그렇게 엮는다고 그래? 헉. 아니면 혹시 나한테 마음 있어?”


올리비아 메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리처드는 오히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웃었다.


“···나원. 아침 일찍 오라 해놓고 잠이나 자고 있다니. 한 왕국을 이끌 통치자 실격입니다.”

“에이. 왕이니까 이럴 수 있는 거지. 올리비아도 내 자리만큼 올라오면 알 수 있을 거야.”


서기관인 올리비아의 표정이 더욱 썩었다.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안 뱉은 게 용할 정도였다.


“자자. 그러지 말고. 이리 들어와서 앉아.”


리처드가 바지와 가운을 걸치고 움직였다.

발이 움직인 끝에는 앙증맞은 티 테이블이 있었다.


“안 올 거야? 이미 왕이 자는 얼굴도 봤으면서 뭘 더 신경 써?”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왕이 바라는 대로 문을 닫고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한 요구대로 순순히 많이 이른 아침 티타임에 응했다.


“고민이 뭡니까?”

“응? 그렇게 티가 나?”

“무슨 일 생길 때마다 저를 부르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요.”


매일 왕의 침실로 출근하긴 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에 부르는 날은 특별한 경우다.

왕이 모종의 일로 머리를 감싸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경우였다.


“맞아. 역시 올리비아네. 내 마음을 잘 알아~”


리처드는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이에 올리비아는 눈엘 샐쭉하게 찢은 채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생겼다.

서로의 눈을 깊이 마주 보았다.

한참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던 그때였다.


“하아···.”


서기관에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안경 너머에서 왕을 질책하는 시선이 있었다.


“정말. 아가도 이런 아가가 어디 없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리처드.”


얼어붙은 듯했던 시간 안에서 먼저 움직인 건 올리비아였다.

단단히 잠가두었던 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풀고는. 다 식어버린 찻잔 앞에 올라가 앉았다.


“내가 네 엄마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렇게 응석 부릴래?”


극적인 태도 변화에 리처드는 웃었다.

그는 익숙한 듯 보였다.

티 테이블 위에 앉은 올리비아를 본인의 허벅지까지 끌어당겼다.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자신의 것을 포갰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더 나이가 많지만~”

“그렇게 어리광만 부려서는 내가 언제까지고 엄마고 언니잖아. 리처드.”

“나보다 빨리 아카데미 졸업했다고 연장자 노릇을 하는 거야? 여동생이 엄마가 되다니 신기한 세상이야.”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정말 구제 불능이라는 거야. 제발 내가 네 엄마 노릇 좀 그만하게 해줘.”


두 사람은 입 모양새를 바꿨다.

비뚜름하게 미소 지은 행동에 비해 또 한 번 입술을 포갰다.

눈앞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서로 가슴을 밀착하여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성녀를 납치했어.”


한참 장난만 치던 리처드가 본론을 말했다.

키스 후, 그의 가슴에 기대있던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풀렸다.

리처드는 한 번 열린 입에서 갖은 근심을 전부 토해냈다.


“보호 명목하에 성녀를 납치했어. 셀레브리디 교단의 날개들이어야만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으니까.”

“응. 어제도 네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어.”

“그런데 어제 성녀가 만찬장에서 제안하더라. 그리 결정해 놓고서도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자신과 손을 잡지 않겠느냐고 말이야.”

“손을 잡아? 어떻게?”

“본인이 해결해준대. 자신은 당장 금전도 명성도 필요 없으니 왕국에서 해결한 걸로 하래.”

“더 잘됐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너도 알잖아. 한 기사단 중대와 모험가들도 실패한 일이야. 그런데 성녀의 호위라지만 결국 인간들인데 그 괴물을 해치울 수 있겠어?”


대화 중에 올리비아가 몸을 뗐다.

등받이와 팔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잠깐만. 다른 수단이 아니라 성녀의 호위가 이번 일을 해결한다고?”

“그래. 그래서 나는 불안해. 어쩌면 이 일에 어떠한 노림수가 있지 않을까 하고.”


리처드는 대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은 며칠 지나지도 않은 밤. 소리 없이 찾아온 악마가 남기고 간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무엇도 바라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더욱 무서운 법이야.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득을 쥐도 새도 모르게 취하고 있으니까.”


이번 일이 그랬다.

악마는 성녀의 입성 소식을 대가로 황금을 실은 마차 세 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엔 성녀의 발목을 잡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겉으로는 선심 쓴 듯 보이지만 그 뒤에 수많은 악의가 담겨 있던 것이다.

만약 성녀의 호위가 토벌에 실패하고, 성녀 또한 왕국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게 되면. 겉잡을 수없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리처드. 쉽게 말하자면 네 영역 밖의 일이 무섭다는 거네. 의도가 확실치 못한 상대와의 거래가 불안하니까.”

“맞아. 그래서 이번 일은 상당히 위험해. 성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 나라를 나락으로 보내는 건 순식간이야.”

“네가 염려하는 일은 ‘성녀를 구하고 싶다면 마물을 처리하라! 성기사들아!’ 이거지? 하지만 리처드. 이건 삼류 소설의 악당도 하지 않을 말 아니야?”

“문제는 그 삼류 악당이라는 작자와 우리의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는 거지.”


답변하는 얼굴에 어둠이 깔렸다.

왕국의 안위를 도박판 위에 올리고. 겨우 할 수 있는 일이 딜러의 기분을 맞추는 일밖에 없다.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뭔가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수단밖에 생각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런 도박수가 아니라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궁리했다.

그런 자책감의 굴레에 빠진 리처드를 위해서, 올리비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처드.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그럴까? 그렇게 되면 좋겠어.”

“그럼. 잘 되지. 언제 네가 실패한 적 있어?”


리처드는 올비이아의 신의에 픽 웃음을 흘렸다.


“올리비아. 내가 실패한 적은 많아.”

“하지만 결국 이곳에 있는 건 너잖아.”

“나는 네가 있어서 여기에 남을 수 있는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나도 여기에 없었을 거고.”


두 사람은 한 번 더 서로를 바라본 채 말을 멈췄다. 서로 말이라도 맞춘 모양새처럼 동시에 껴안았다.


“올리비아. 너를 놓치지 않은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리처드는 올리비아의 존재를 체온으로 확인했다.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을 것처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올리비아가 물러났다.


“자. 이제 기운 차렸지?”


어느덧 창밖이 파랗다.

잠깐 대화를 나눈 사이에 아침이 밝았다.

올리비아는 리처드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말끔히 정돈했다.

붉은 자국을 가리기 위해 셔츠의 단추를 잠근 뒤,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올리비아. 그래도 이번 일이 실패하면···”

“없을 거야. 네 결단과 운을 믿어봐.”


국왕이 여전히 우는소리를 하자, 올리비아는 잠깐 무표정을 해제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왕을 앞에 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째깍째깍.

그러다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하고, 잠겨있던 침실 문을 열었다.


“기다렸나? 전하는 일어나셨으니 준비를···”


이렇게 아침에 오는 날은 흔치 않지만. 이 또한 일상이다.

올리비아가 언제나처럼 되풀이해온 일을 행했다. 문밖에 기다리고 있을 시녀를 찾던 그때였다.


“아니. 네가 왜 여기에 있냐?”

“급히 보고 하러 올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철벽같던 올리비아의 얼굴에 금이 갔다.

평소처럼 문밖에 대기해 있어야 할 시녀가 아닌, 제 서기 후임을 바라보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저, 저, 정말로 급한 일입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어린 서기는 변명했다.

올리비아는 착잡한 얼굴로 문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어떡하겠습니까? 전하.”

“크흠. 무얼 말이지?”

“지금 들을 건지, 준비한 이후에 말을 들을 건지를 묻는 겁니다.”


그 질문에, 여전히 가운차림인 리처드가 허리끈을 동여맸다.

잠시 올리비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갯짓했다.


“들어봐야지. 급한 일이 있어서 이곳을 찾아온 걸 테니까.”


그리 말하며 찾아온 부하에게 상냥한 미소 지었다.

이에 햇병아리 서기는 그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어린 서기의 머릿속이 여러모로 복잡한 게 타인의 시선으로도 훤히 보였다.

올리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 말해봐라. 무슨 용건으로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지?”

“그, 그게 실은 성녀님께서-”


햇병아리 서기는 찾아온 용건을 전부 이야기했다.

성녀가 전하라던 이야기와 찾아온 손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전했다.

곧, 이야기를 전해 들은 리처드와 올리비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항상 느긋하게 아침을 준비하던 그들이 서둘러 시종과 시녀를 불렀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이번 주는 휴재입니다. 화목한 설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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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151화 사막의 나라 24.04.13 6 0 15쪽
183 150화 사막의 나라 24.04.10 6 0 17쪽
182 149화 사막의 나라 24.04.08 5 0 16쪽
181 148화 사막의 나라 24.04.05 5 0 21쪽
180 147화 사막의 나라 24.04.03 7 0 12쪽
179 외전 다섯 번째 용사 終 24.04.01 8 0 31쪽
178 외전 다섯 번째 용사9 24.03.29 6 0 13쪽
177 외전 다섯 번째 용사8 24.03.27 6 0 16쪽
176 외전 다섯 번째 용사7 24.03.25 5 0 28쪽
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5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5 0 20쪽
173 외전 다섯 번째 용사4 24.03.15 9 0 19쪽
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6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6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6 0 13쪽
169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4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6 0 17쪽
167 144화 십강 사무엘 24.03.01 8 0 20쪽
166 143화 십강 사무엘 24.02.28 10 0 12쪽
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9 1 14쪽
164 141화 십강[十强] 24.02.23 7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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